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대학생 때까지 고향을 떠나본 적 없던 청년이 서울을 거쳐 연고도 없는 인천에 정착한 것은 우연이었다. 교사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교단에 서는 것을 꿈꾸며 대학에 입학한 1994년. 최루탄 냄새 가득한 학교생활은 생각지도 못한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직접 학생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그때의 시간은 교사에서 노무사로 진로를 바꾸게 된 계기가 됐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 신림동으로 올라온 것도 노무사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처음 본 시험에서는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심기일전하고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이미 퇴직하신 부모님에게 학원비 등으로 손을 벌리기에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무렵 우연히 인천으로 선거운동 알바를 가게 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총선에 출마했던 이강일 나사렛의료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그 인연으로 나사렛한방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노무사 시험을 위해 돈을 벌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며 생활정치를 배우게 됐고,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 힘’ 인천사무국장을 맡으며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그렇게 13년. 나사렛한방병원과 나사렛국제병원에서 원무과장으로 일하며 인천에
백낙인 안성시체육회장은 신뢰, 소통, 통합을 바탕으로 안성시민을 위한 체육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또 변화와 혁신으로 안성체육을 반드시 재도약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경기신문은 백낙인 안성시체육회장과 인터뷰를 통해 앞으로 체육회의 운영 방안과 비전을 들어봤다. -민선 2기 체육회 회장 당선 소회는 먼저 안성시체육회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시민들과 체육인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아울러 민선 2기 체육회장이라는 자리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민선 체육회는 정치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고 출발한 것이다. 지금은 관선 체제 시대의 체육회가 민선 체제로의 체육회로 거듭나는 과정에 있어 과도기적인 체제에서의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많은 과제들이 난무한 상황이다. 안성시 체육인들은 좀 더 변화되고 발전된 안성시 체육회를 기대하고 있다. 그 열망하는 마음이 함께해 이루어진 자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막중한 책임감을 더욱 느낀다. 안성 시민들과 체육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안성시체육회 발전과 개혁에 앞장서겠다. -민선체육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계획은 민선 체육회는 오래된 관선 체제의 습관에서…
한민수 인천시의원(국힘, 남동 만수1‧6‧장수서창‧서창2동)은 지역과 지역의 정치문화 발전을 위해 젊은이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시의회에는 김대영(민주‧비례‧32), 이단비(국힘‧부평3‧36), 문세종(민주‧계양4‧39) 3명의 30대 의원이 있다. 한 의원은 “전문직이나 사회운동을 하던 젊은 세대가 기초나 광역의회 등 제도권에 진출해야 지역정치도 젊은 층의 관심을 이끌 수 있다”며 “그들을 위한 정책사업 개발에도 지방의회가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한 의원은 시의회 운영위원장 직을 놓고 자당 이단비 의원과 경선을 치르기도 했다. 여야 화합을 꾀하고 의회의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운영위원장은 사실상 의장 다음 가는 자리다. 이에 대해 한 의원은 “경선을 치른 덕분에 운영위원장 직에 더 큰 정당성이 생겼다”며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의원처럼 당당함과 패기, 섬세함을 갖춘 젊은 정치인이 지방의회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고 말했다. 1959년 남동구 장수동에서도 작은 마을인 수현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민수 의원은 만수초를 나왔으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동구 대헌중와 경기도 부천시의 부천고를 졸업했다. 그는 “어렸을
임춘원 인천시의원(국힘, 구월1·4동·남촌도림동)은 학창시절 모범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운동과 공부 모두 잘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도맡았고, 전교학생회장에도 뽑혔다. 전교 5등으로 중학교를 입학해 첫 번째 중간고사에선 1000여 명의 학생 중 1등을 했다. 조회시간 단상 위에 올라 대표로 상을 받았다. 이날 임 의원의 존재를 전교생에게 각인시켰다 지금도 중학교 친구들은 그를 공부 잘하는 친구로 기억한다. 그는 인하대학교 법학과를 지원하면서 인천시 공무원 시험을 함께 치렀다. 대입 일주일 뒤가 시험이었다. 입시와 함께 준비할 수 있던 다른 과목과 달리 전산학개론은 처음이었다. 짧은 기간 준비하기엔 ‘무리가 있다’ 판단하고 이론에만 집중했다. 결국 공무원 시험에도 합겼했으나,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임 의원은 인천 남동구 토박이로, 윤태진 전 남동구청장의 2012년 국회의원 선거를 도우면서 정치와 연을 맺었다. 남동갑 당협 사무국장을 맡으며 초석을 다졌다. 그동안의 경험을 밑천으로 출마를 결심하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남동구의원에 당선된다. 4년간 호흡을 맞추며, 소소한 민원부터 큰 민원까지 자신의 지역구를 살뜰히 살폈다. 8년
“원도심 균형발전을 견인하면서 집행부의 정책에 검증·협력 하는 인천시의회가 되겠습니다.” 제9대 인천시의회 출범 후 9개월여가 지난 가운데 허식(국힘·동구) 의장이 경기신문과 인터뷰에서 이같은 포부를 밝혔다. 인천의 대표적인 원도심 동구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한 그는 제9대 시의회에서 의장을 맡으며 원도심의 발전 방향과 인천의 항만 개발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특히 최근 논란이 일었던 창영초등학교 이전과 과거 수차례 얘기가 나온 제물포고 이전 등을 옆에서 지켜보며 원도심 교육을 위한 근본적인 고민도 이어왔다. 허 의장은 “원도심의 학교 이전 문제는 과거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원도심의 균형발전과 함께 공립학교 교육의 질적 특화가 필요하다. ‘1인 1악기’, ‘1인 1운동’ 등 차별화된 교육 정책으로 학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공립과 사립학교의 교육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집행부에서 추진하는 제물포르네상스와 뉴홍콩시티 프로젝트에 더해 청라국제도시역~동인천역~국제여객터미널역을 연결하는 ‘인천3호선’ 등 교통정책이 충실히 수립돼야 원도심과 신도심의 균형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해양
스스로 끊임없이 배우고 발전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유승영 평택시의회 의장’. 제9대 전반기 평택시의회를 견인하고 있는 유 의장은 정치인이기 전 ‘시민운동가’로 활약을 했었다. 당시 평택 모산골 공원을 아파트 개발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발로 뛰어다닌 1년 6개월이란 시간은 유 의장에게 ‘사람과 환경’의 중요성을 더 깊이 가슴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생각은 유승영 의원이 평택시의회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꺼낸 화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푸른 평택, 맑은 평택, 걷고 싶은 평택, 새로운 평택’을 통해 시민들이 살기 좋은 평택시를 만들어나가겠다는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이런 의지는 유승영 의장이 평소에도 “시민들에게 평택의 맑은 자연을 선물하고 싶다”며 “단순히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일상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푸른 녹지 공간과 맑은 물 그리고 깨끗한 공기가 있는 평택을 만들고 싶다”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제8대 평택시의회에서 운영위원회 위원장과 자치행정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맡아 오면서 동료 의원과 공무원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균형과 안정감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온 유승영 의
“어르신들이 행복한 남동구, 어르신들이 살기 편한 인천시를 위해 발로 뛰겠습니다.” 복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문화복지위원회 소속 이선옥(국힘·남동2) 인천시의원의 포부다. 경상남도 거창군 출신인 그는 밑으로 동생만 넷인 집안의 큰 딸이다.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는데, 웃어른과 함께 지낸 경험이 노인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이 의원은 23살이 되던 해 결혼을 하며 처음 상경했다. 88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쯤 남편의 사업이 인천에 자리잡으며 그 역시 인천과 연을 맺게 됐다. 딸 둘에 아들 하나, 자식만 셋을 둔 덕에 학교 세 곳에서 학부모 활동을 수년간 이어갔고, 인천에 연고는 없어도 자연스럽게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지역 정치인들과 학부모회 간담회를 할 때면 아이들 교육에 대한 건의사항을 앞장서 전달했다. 학부모 활동을 이어와 리더십도 자연스럽게 생겼다. 당시 남동구를 지역구로 둔 이윤성 전 국회 부의장이 이런 모습을 좋게 보고 그에게 선거운동을 함께 해달라 권유했다. 열성적인 학부모 활동이 정당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후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학부모 활동에서 멀어졌다. 그동안 넓힌
“경기도의 혁신 성장을 이끄는 엑셀러레이터가 돼야 한다는 목표로 현장 중심, 성과기반, 전문성 강화, 소통과 참여를 핵심가치로 조직 전반에 대한 혁신을 적극 추진하겠습니다.” 강성천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장은 경기신문과의 취임 인터뷰에서 경과원의 기관 목표에 대해 이같이 밝히며, ‘업무 방식’, ‘조직’, ‘인력’ 등 세 가지 분야의 혁신을 그 방향으로 소개했다. 지난 33년 간 공직생활을 경험한 것을 토대로 ‘혁신을 통한 미래’에 방점을 두고 경기도의 정책을 선도적으로 구현하는 기관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강 원장은 업무 방식 혁신에 대해 “부서 및 사업 간 협업을 통해 패키지 형식의 지원을 강화하고, 경기도형 혁신성장 모델을 발굴하고 확산함으로써 지원 성과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또 조직 혁신에 대해 “현재 사업 중심으로 이뤄져 있는 조직을 중소벤처기업과 스타트업 등의 수요자 중심으로 과감하게 개편하겠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인력 혁신에 대해 “전문인력 확충, 임직원 교육훈련 확대, 성과·능력 중심의 혁신적 인사방안 등을 통해 경과원의 전문성을 대대적으로 강화하겠다”고 덧붙였다. 특히 인력 혁신의 경우 노조에서 이를 강하게 원하고 있는 만큼 “구
“재난취약계층 주택용 소방시설 확충하고 밀착 지원에 앞장서겠다” 지난해 10월 경기도소방재난본부 21대 본부장에 조선호 본부장이 취임했다. 그는 1995년 소방간부후보 8기로 소방에 입문한 이래 소방청 화재예방과장, 충남소방본부장 등을 역임하며 화재 등 각종 재난 대응에 힘써왔다. 조 본부장은 도소방재난본부장에 취임한 후 재난취약계층의 화재사고 피해를 낮추기 위한 각종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도소방재난본부는 도내 재난취약계층 약 33만 4000가구를 대상으로 주택용 화재경보기와 소화기 등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까지 재난취약계층 가구 약 92%에 소방설비 설치를 완료했으며, 올해 안에 100%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독거노인과 장애인, 맞벌이가구 특성에 맞춰 무거운 3.3㎏소화기 대신 비교적 가벼운 스프레이식 간이소화용구나 2.5㎏ 소화기를 보급하고 있다. 119안전복지 서비스를 발굴하는 등 도민 최접점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해나갈 방침이다. 취약계층의 생활안정비 지원을 위한 기부사업인 ‘따뜻한 동행 경기119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사전 등록된 환자의 질병 등 정보를 미리 알고 출동하는 ‘119안심콜’ 서비스를 올해 2
박판순 인천시의원(국힘·비례)는 38년 동안 공직에 몸담은 베테랑 행정가다. 그는 공무원 출신이니 정치인으로서 시민들에게 획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부족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은 큰 오산이라고 자부한다. 박 의원은 1981년 9급 보건직 공채로 들어와 인천시 보건국장, 중구·동구 보건소장까지 지냈다. 박 의원의 직장 생활은 공무원이 시작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설야구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하다보니 적성에 안 맞았던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고 한다. 그렇게 보건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단번에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중구 보건소, 차례차례 급수가 올라가 20년 뒤 그가 중구보건소장이 됐을 땐 감회가 새로웠다고 한다. 그는 공무원이 어떤 직업인지도 모르고 시작했고 이렇게 중요하고 많은 일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저 열심히 묵묵히 일을 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은 여행도 제대로 다닌 적 없고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이상 연차도 내지 않았다. 순탄한 공무원 생활을 하던 그에게 특별한 경험이 찾아왔다. 인천대학교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