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가 ‘2022년 상반기 경기형 예비사회적기업 지정사업’에 참여할 도내 법인과 단체를 모집하고 있다. 사회적기업은 취약계층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으로써 비영리조직과 영리기업의 중간 형태라고 보면 되겠다. 사회적기업육성법 제2조 제1호는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해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판매 등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이라고 설명한다. 영리기업이 주주나 소유자를 위한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면, 사회적기업은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고 취약계층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사회적 목적을 주된 목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많이 알려진 국내 사회적기업은 ‘아름다운가게’(재활용품 수거·판매), ‘컴윈’(컴퓨터 재활용 기업), ‘위캔’(지적장애인을 고용 우리밀 과자 생산), 함께 일하는 세상(친환경 건물청소업체) 등이 있다. 해외에는 ‘빅이슈’(노숙자의 재활을 지원하기 위한 잡지 출판·판매) ‘그라민-다농 컴퍼니’(요구르트 회사) 등 유명한 사회적기업이 있다. 사회적기업으로 지정받기 위한 조건이 있다.…
겨울의 끝자락이다. 마지막 추위가 매섭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페티카, 그는 함경도에서 태어난 노비의 아들이었다. 아홉 살 나던 해 가족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주한 그는 러시아 초등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고려인이었다. 온 가족이 나무를 캐내고 돌을 주워내며 밭을 일구었지만, 세끼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그가 가출한 것은 열한 살 때였다.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던 그는 무작정 연해주 최남단의 항구도시 포시에트로 갔다. 하지만 어린 그를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굶주린 채 지쳐 쓰러진 그를 구해준 사람은 러시아인 선장 표트르 세묘뇨비치였다. 페티카는 표트르 세묘뇨비치 선장을 따라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상의 흐름과 물정을 익혔다. 표트르 세묘뇨비치의 부인은 배에서 내린 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주었다. 러시아 정교회에 입교한 그는 표트르 세묘뇨비치 부부의 양자가 되어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러시아에 귀화한 그의 정식 이름은 초이 표트르 세묘뇨비치였다. 19세기 말 연해주에 이주한 조선인 중에 최초로, 유일하게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사업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맹지’란 지적도상 도로와 접하고 있지 않은 땅을 말한다. 개발 가치가 작아서 매우 저렴하다. 지도를 보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육로가 막힌 맹지이다. 다행히 3면이 바다인 덕분에 해상교통로는 뚫려 있다. 지난 70여 년 동안 우리는 이 해상교통로를 활용하여 외부 세계와 교류함으로써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오늘날 이 땅의 가치는 세계 10대 경제 강국 안에 들어갈 정도로 커졌다. 언젠가부터 한반도가 중심이 된 지도를 거꾸로 걸어놓고 새로운 시각을 강조하는 것이 유행이다. 넓은 대양으로 뻗어나가는 시각적 이미지는 북쪽으로 막혀있는 지리적 답답함에서 벗어나 웅비의 나래를 펴는 즐거움을 준다. 요즈음 거꾸로 지도를 다시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불안하다. 오른편은 중국에 막혀있다. 위와 왼편은 일본 열도에 막혀있다. 시원하게 뚫린 넓은 바다는 어디로 가고 갑자기 꽉 막힌 ‘맹해’만 보이는가. 중국은 사드 배치 이후 한한령을 풀지 않고 있고, 일본과는 과거사 재판 문제로 외교적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에 대한 현 정부의 외교가 너무 저자세라고 비판한다. 일본과의 문제는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인류가 진보하는 것은 바로 종교적 신앙이 진보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진보한다는 것은 새로운 종교적 진리를 발견하거나, 인간의 세계와 신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탐구하는(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이해와 결부된 모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는 일이다. 새로운 종교적 진리라는 것은 없다. 유사 이래 모든 현자의 세계 및 신에 대한 관계는, 오늘날의 것과 완전히 같다. 종교가 진보하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미 발견되고 표현된 것을 정화하는 데 있다. 신앙이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선각자들에 의해 도달된, 인생에 대한 가장 높은 이해의 지표이며, 그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도 언젠가 틀림없이 불가항력으로 그것에 접근해가게 된다. 진정한 진보, 즉 종교적 진보와 기술적, 과학적, 예술적 진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기술적, 과학적, 예술적 업적은 현대에서 볼 수 있듯 종교적 퇴보 속에서도 매우 위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을 탐구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온갖 미신과의 싸움과 종교적 의식의 해명,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진보의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권력의…
설마설마하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푸틴이 전쟁을 결정하자말자 우크라이나 전역이 미사일공격으로 불타올랐고 러시아의 기갑부대는 국경을 돌파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전쟁마저 게임이나 영화처럼 접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뉴스는 폭발하는 화염과 번쩍이는 섬광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바쁘다. 전황은 그래픽까지 동원해 스포츠방송처럼 중계된다. 그러나 현실의 전쟁은 지하철에 피신한채 두려움에 떨고있는 시민들과 거리를 가득메운 피난차량 행렬에서 보이듯이 참혹한 실사판 지옥이다. 나는 이런 우크라이나전쟁 뉴스를 보면서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나는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젤렌스키, 또 다른 사람은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윤석열이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킨 푸틴보다 젤렌스키를 떠올린 이유는 분명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또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침공을 결정한 푸틴과 러시아가 비난받음은 지당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러시아가 한사코 반대하던 나토의 동진에 우크라이나가 디딤돌을 놓아주려할 때, 자국의 안보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 푸틴에 반해 코메디언 출신 젤렌스키의 정치는 실패한 것이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
부모 중 한쪽이 외국 출신인 학령기(7~18세) 다문화 청소년 중 교내 차별 등으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이 한 해에 5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충격이다. 정책당국이 다문화 정책을 전근대적 ‘동화주의’ 기조에 묶어놓고 일반 학생들의 ‘다문화 감수성’을 키우는데 소홀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인구 절벽 공포 속으로 몰려가고 있는 형편에 이는 심각한 문제다. ‘경쟁력 있는 다문화 국가’를 이룩하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마저 암담해질 수 있다는 문제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이주 배경 학생은 지난해 기준 16만56명으로 전체 학생의 3%를 차지한다. 15년 전과 비교하면 무려 16배나 증가한 수치다. 국내 거주 외국인 비율이 4%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다문화·다인종 국가(5% 이상) 진입을 눈앞에 두면서 학생들도 늘어난 것이다. 지난 2016~2020년 5년 동안 학업을 중단한 다문화 청소년은 5705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1692명(29.7%)이 ‘학교 부적응’을 이유로 학교를 그만뒀다. 연도별로는 2016년 283명(32.3%)에서 재작년 344명(34.9%)으로 규모와 비중 양면에서 증
샤갈전을 보고 왔다. 샤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색체의 마술사’라 불리는 그의 그림 속 화려한 색들이 아프다고 말한다. 1, 2차 대전을 살아낸 유태인의 삶, 부인과의 사별, 병마 등 어두웠던 삶은 꿈과 환상 속으로도 피하게 만들었고 이를 화폭에서 살아나게 했다. 전시회 벽에 쓰인 ‘나는 초현실주의자라는 말이 싫다. 나는 나의 현실만을 그린 것이다’라는 샤갈의 말 역시 그래서 아프다. 샤갈의 말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Frieda Kahlo/1907-1954)를 떠오르게 했다. 샤갈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녀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고통도 무게 잴 수 있다면 샤갈은 프리다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지 않을까. 평생, 흘린 피를 찍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정도로 고통의 극지를 오체투지 했던 프리다. 1907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프리다는 말도 배우기 전 어머니를 잃었고 6살에는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다리를 절었다. 10대 때 대형 버스 사고로 중상( 강철봉이 여린 배를 뚫고 관통하고 다리, 골반, 쇄골 등이 부러지는 등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을 입어 30회 넘게 수술했지만 장애와 불임의 몸이 된다. 20살에 21살 많은 남자,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으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노동만큼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사람은 노동하지 않고는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겉치장에 그토록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꾸미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땀 흘려 일하며 자신이 먹을 빵을 제 손으로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진정한 종교적 이해와 순수한 도덕성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존 러스킨) 지극히 확실하고 순수한 기쁨의 하나는 노동 뒤의 휴식이다. (칸트) 가장 탁월한 재능도 무위도식하면 사장된다. (몽테뉴) 공정함이란 자신이 남에게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남에게서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노동과 자신이 이용하는 남의 노동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스스로 일할 능력을 잃고 남의 노동력을 가로채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되도록 공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 평소에 자기가 취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남에게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중, 대중하지만 대중은 고상한 이상에 통일되지 않는 한 우중(愚衆)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
투박한 남프랑스 사투리에 겁 많고 소심했던 폴 세잔(Paul Cézanne). 놀랍게도 큐비즘(입체파)의 거장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됐다. 이런 세잔의 그림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예쁜 사과였다. 왜 그랬을까. 세잔에게 사과는 우정과 아량, 인간애의 징표였다. '사과바구니'와 '7개 사과의 정물'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세잔의 사과가 이처럼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다. 19세기 중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의 부르봉(Bourbon) 중학교. “파리에서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그 학생은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이를 본 한 학생이 그 전학생을 도와줬다. 그 전학생은 어느 날 사과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바구니를 선물 받은 학생은 그 후로 계속 사과가 있는 정물만 그렸다.” 사과를 준 학생은 훗날 프랑스 대문호가 된 에밀 졸라(Emile Zola)이고 사과를 받은 학생은 세잔이다. 이 둘이 주고받은 학창시절의 우정. 이 추억이 세잔 그림의 주요 모티브였다. 세잔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생트-빅트아르(Sainte-Victoire) 산이다. 이 산은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대장주다. 하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