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진은영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인생의 물살은 변화무쌍하게도 흐름의 변화가 심하다. 하지만 그렇게 거칠지 않은 물살에 쓸려 정체성까지 놓아버리고 여유롭게 흘러가버린다면 그 시간은 오히려 자신을 돌이켜 내고 삶을 조금이나마 여유 있게 엮어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내 몸에 구멍이 났다, 내 안에 자리
연꽃, 피다 /정령 쇼윈도우 마네킨 같이 연지곤지 찍고 백옥 같이 하얀 드레스 걸친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 안에 붉은 꽃들이 핀다. 푸른 연잎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진흙탕 속 내밀한 사정이 가려질까? 까맣게 타들어간 연밥 속 서리서리 타고 들어가 본들 여물지 못하고 구멍 숭숭 뚫린 채 연근, 혼탁한 방 안 밤꽃 향기 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새빨간 루즈 바르던, 동생들 학비 벌려고 애쓰던, 첫사랑 버림받고 눈물 흘리던, 호된 날에 신물이 난, 그녀들. 그 곳을 빠져나오고 있다. -시집 <연꽃홍수>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은 여성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일구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올림픽에서의 여성 체육인의 금메달은 둘째치더라도 대한민국 어머니의 인내심과 희생을 거론하면 이를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드러내지 않는 뜨거운 피가 온몸을 치돌면서 거기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대한민국 발전과 모든 남성들의 에너지로 쓰이고도 남았을 법하다. 그러나 자신의 가슴은 숭숭 뚫린 구멍으로 가득할 뿐이다. /장종권 시인
피어버린 꽃에는 안 보이는 떨림이 /이봉환 청소 시간 비질에 열심이던 다영이가 또록이 묻는다. 선생님, 누군가를 좋아하면 진짜 가슴이 두근거려요? 왜? 너도 요새 누군가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냐? 아니요, 책에서는 그러던데 진짜도 그러나 궁금해서요. 피어버린 꽃에는 안 보이는 떨림이 그 애 얼굴에 어린다. 시는 역시 말에서 나온 것이고 그 말은 사람이 나누는 것이라는 진리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시이다. 시 속의 화자와 시인과의 이야기가 조근조근 읽는 이에게 까지 아기자기 들려온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다. 비밀도 없고 배려도 부족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으면, 아니 알 듯 모를 듯 피어버린 꽃에는 안 보이는 떨림으로 가득했으면. /조길성 시인
내 무어라 말하리 /남윤성 타관물 먹으며 떠돈지 어언 사십년 그리움이라면 내 무어라 말하리 버들개지 물 오르고 꽃불 현란턴 봄 동산 찢어질듯 파아랗던 하늘 한 자락 姦淫하듯 늘 마음으로만 훔치러 가고 四月 여린 江물에 수십 수백 띄워 보낸 종이 鶴 어느 꽃가지에 무슨 혼령되어 다시 피어나는지..... 바람이 되어 새털 구름되어 무시로 남녘 하늘 넘나들며는 떠나고 버린 것들의 어린 날개들이 밭고랑 아지랑이로 아롱아롱 피어올라 하늘 높이 높이 울어 예는 작고 어여쁜 새의 혼령으로 떠돌고 있네. 꽃불 저 언덕 너머로 역마살 낀 비루먹은 말 한 마리 멀리 새털구름 한번 쳐다보고 코 한번 컹컹대고 어디론가 더 먼 낯선 마을로 떠나고 있는지 그리움이라면 내 무어라 말하리 마른 가랑잎 소리 버석대는 겨울 빈 들녘을 지나 한 줌 햇살 꽃 꿈 깨우는 저 먼 陽地녘 돌담 샅 어느 모퉁이길 찾아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노래가 들린다. 해를 넘길수록 더 자주 떠오르는 고향, 어머니와 고향, 이 두 가지는 우리네 인생살이에 있어 영원한 안식이요 삶의 자양이며 우리의 꿈이 머무는, 지울 수 없는 聖所(성소)가 아닐까? /박병두(시인·수원문인협회
한 잔의 커피 /조우성 커피는 과거보다 새까맣다 새까맣다 못해 흑갈색이다 그러나 설탕은 미래보다 하얗다 하얗다 못해 서푸르다 나는 한잔의 커피에 두 숟갈의 설탕을 넣는다 이러지 않고는 모든 게 흐트러진다 그러므로 블랙 커피를 마시려면 혀의 위선이 필요하다 때에 따라서 또 블랙 커피도 필요하다 이제 나는 그것을 안다 알고 있지만, 나는 한 잔의 커피에는 어쩔 수 없이 두 숟갈의 설탕을 넣는다 사람은 그렇게 산다고 믿고 산다. 詩는 사랑의 산물, 평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詩가 무엇을 노래한들 상관 있겠냐만 詩가 무엇의 도구나 사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커피의 종류에 호불을 갖지 않듯, 詩역시 호불이 있을 수 없다. 시가 언어예술로서 존재할 때, 詩는 詩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詩는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 찾을 수 있는 안온함 같은 것을 잔잔히 던져 주리란 생각이다. /박병두 (시인·수원문인협회장)
탱자나무 /김주애 촘촘하게 가시를 품고 지나가는 바람도 걸러낼 것처럼 빈틈도 없어 보이는 탱자나무 속 참새 떼가 날아든다 그렇게 독하게 들이밀던 가시는 다 어디가고 저 느슨함이라니 제 집인 듯 폴랑거리며 날아다니는 저 날개 좀 봐 짹짹거리는 소리 가시 끝에 매달고 감히 손도 뻗지 못하게 감싸안는다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독을 품은 벽인가 했더니 저렇게 쉴 곳 많은 빈곳 투성이라니 -김주애 시집 『납작한 풍경』 (시와에세이, 2014) 지식인의 시대에 다소 허술한 시인의 시대가 교차되는 풍경이다. 사람들이 아는 만큼을 가시로 돋는 것은 어쩌면 마음 속에 나약함을 감추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날카로움은 어쩌면 무딘 감성의 가면(假面)은 아니었을까 돌아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내 삶의 가시를 피해 내 품으로 들어올 새가 있는지, 노래가 있는지 탱자나무에 앉은 참새를 보며 헤아리게 된다. 시인은 탱자나무의 가시를 연민과 포용의 여유로 노래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돋은 가시가 노래를 담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라고. /김윤환 시인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시(詩) 한 편’이 ‘쌀이 두 말’이 되고, ‘시집 한권’이 ‘국밥 한 그릇’이 되고, ‘시집 한 권’의 인세가 ‘굵은 소금 한 됫박’이 되는 이 놀라운 발상의 전환 혹은 긍정의 힘을 보라. 그러나 그 긍정의 힘이 있기까지 흘렸을 눈물도 생각해보라. /김선태(시인·목포대 교수)
등 /문정영 거울에 비친 등은 쓸쓸하다. 죽은 날벌레 같은 뾰루지 몇 개 달고 있다. 원형이 사라진 엉덩이와 뼈대가 보이는 척추를 따라 머리칼은 오래된 이력처럼 적을 것이 없다. 내내 앞의 눈치에 뒤를 열어 두지 못한 사내의 모습이 거기 있다. 사랑은 앞에서 오는 것이라고, 뒤태를 소홀하게 대하더니 어느 하나 비추지 못한다. 10월의 귓속말처럼 등은 소소한 일을 처리하면서 많은 굴욕을 겪었다.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중심이 생겼다. 쉽게 붉히는 얼굴을 가진 앞은 결핍성을 감추고 있다. 등은 스스로를 비추는 줄 모르고 비춘다. 등은 뒤돌아서도 등이다. - 문정영 시집 『그만큼』(시산맥사, 2014년) 거울 앞 남자의 뒷모습에서 원형이 사라지고 있다. 탄력적인 엉덩이의 근육도 사라지고 머리칼은 하루가 다르게 빠져나가고 “오래된 이력처럼 적을 것이 없다” 나의 앞을 보고 있는 내 등도 피차 쓸쓸하다. 사랑은 앞에서만 다가오는 것인가. 스스로를 비추는 줄 모르고 비추고 있는 등 뒤를 보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있는 오래된 사랑이 가만히 당신의 등을 껴안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당신이 그 사랑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김명은 시인
우화등선(羽化登仙) /손진은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존재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야 사랑은 꼭 그렇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전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여행같은 것, 가령 덜 깬 잠의 갈피마다 찬물 쏟아붓듯 오뎅이며 두부를 사라고 외치는 아줌마 시간은 산비탈 깎아 집을 세우고 아줌마 횐 고무신을 운동화로 바꾸었지만 머리카락은 새것으로 돌리지 못하지 수십년 바람 햇빛까지도 촘촘히 다져 어느 사진기도 잡을 수 없는 주름 낀 얼굴로 가끔씩 뒤돌아보며 구겨진 세월의 필름 꺼내보는 그녀는 젖줄, 사람 사는 거리의 남루를 싸고 흐르는 시냇물, 꼬불길 오선지인듯 악보 그리며 가는 음표, 거기서 사랑이 끝나는 게 아니야 가벼워지며 그는 걸을 것이야 끊임없이 시간 속으로, 사랑으로 충만한 황혼 속으로, 왔던 길 돌아 안쪽으로 들어가는 여행, 마침내 아주머니, 누에처럼 틀고 앉아 실을 뽑을 것이야, 뚫고 나올 것이야 우화등선, 하늘나라에서도 손수레 끌고 다닐 것이야, 그렇게 사랑에 도달할 것이야 사랑은 전생에 걸쳐 지속되는 여행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아침 한때 실로폰처럼 튕기는 봄 햇살 받으며 뒷산 능선과도 같은 어깨를 하고 그녀가 지나간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코끝에 스미기 시작한다.…
오랜 동거 /김주대 눈이 너의 따스한 피부를 만진다 눈을 통해 너의 까슬까슬한 슬픔과 아득한 넓이를 감각한다 너를 본 감각들은 고스란히 몸에 쌓여 몸이 움직일 때마다 달그락거리기도 하고 출렁거리기도 한다 너를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길을 걸을 때 몸 안의 네가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는 것이다 너는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들어와 갈데 없이 내가 된 감각 습관화된 나다 이것은 집착이 아니라 몸이 이룩한 사실이다 너는 사라질 수도 떠날 수도 없다 -김주대 시집 『그리움의 넓이』 중에서 눈은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감각도 느낀다. 눈을 통해 마음도 읽는다. 눈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동시에 반응을 시작한다. 눈은 순식간에 우리들의 입이 되기도 하고, 귀가 되기도 하고, 코가 되기도 하고, 피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번 들어온 것은 쉽게 나가지 못한다. /장종권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