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사는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역사와 함께한다. 한국전쟁 이후 국가 재건 토목사업부터 고도 성장기의 각종 SOC 국책사업에서 건설사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국내 기업들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선봉이었고, 개발도상국 시절 외화를 벌어들이는 주요 창구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표 주거 형태이자 각 가정의 주된 자산인 아파트 역시 건설사를 빼놓고는 논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에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잦은 인명사고로 지탄을 받기도 하고,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한다. 또 현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지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에 <경기신문>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명암을 고스란히 반영한 건설사들의 성장 과정과 문제점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 기업 역사에서 해방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1위 회사를 꼽으라면 중장년층 이상은 단연 현대건설이다. 1990년대 이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LG전자 등이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대한민국 1등 기업의 원조는 현대건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건설의 성공으로 창업주 고(故) 정주영 초대회장의 현대그룹은 재계 1위 기업으로 장기간 군림했다.
현대건설의 성공이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의 성공을 넘어 현대중공업, HDC현대산업개발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성장을 견인했다. 범위를 크게 넓힌다면 SK하이닉스의 전신도 현대전자일 정도다.
대성공을 일군 건설사지만 창업주인 정주영 초대회장 시기 이후 상당기간 표류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상 범현대가의 모태 기업인 만큼 승계 구도를 두고 갈등이 증폭됐던 이른바 '왕자의 난' 당시 가장 많이 언급된 기업이기도 하다. 잘 나가던 현대건설은 정주영 초대회장의 5남 고(故)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 쪽으로 건너갔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1년 워크아웃(기업회생절차)에 돌입했다. 1990년 걸프전 여파가 지속되던 가운데 이라크 건설 공사 미수금 1조 원이 결정적이었다.
현대건설은 2006년이 되어서야 워크아웃을 졸업했고, 2010년 9월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이 기간동안 현대그룹은 정몽헌 회장이 비극적으로 유명을 달리했고, 그의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그룹의 모태 격인 현대건설을 되찾기 위해 현정은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선 가운데, 정주영 초대회장의 2남이자 현대차그룹을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고(故) 정몽구 명예회장이 인수의향을 밝혔다.
창업주의 둘째 아들이지만 장남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해 온 정몽구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의 적통을 되찾아 오겠다는 행동에 나선 것으로 풀이됐다. 현대건설, 현대증권 등 그룹의 상징적 회사들을 5남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던 그룹 승계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자동차 계열사만을 들고 분리한 정몽구 명예회장의 경영능력 검증과 자존심 회복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일련의 과정 끝에 현대건설은 결국 정몽구 명예회장의 현대차그룹으로 편입됐다. 일반에는 정주영 초대회장의 현대그룹이라는 인식이 강렬했고, 정주영 초대회장의 공식적인 후계자 선언에도 불구하고 자금난에 시달리던 현대그룹보다 현대차그룹이 옛 현대그룹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던 터라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졌다. 이후 현대건설은 현재까지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 정주영 초대회장의 '현대토건'...K-건설의 시작, 중동신화를 일구다
정주영 초대회장의 시작은 잘 알려졌다시피 쌀가게 점원이다. '현대'라는 이름의 첫 회사는 그가 1946년 설립한 현대자동차공업사다. 제조사와는 거리가 먼, 정비와 수리를 주업으로 하던 회사는 해방 이후 크게 성장하지만 아직 현대그룹의 단초가 되기엔 일렀다. 그는 1947년 5월, 자동차공업사 건물 안에 '현대토건' 간판을 추가로 걸고 건설업에 뛰어든다.
현대토건 초기에는 미국 시설관계 공사를 수주해 소소한 공사를 진행하는 정도였다. 정주영 초대회장은 1950년 1월 두 회사를 합병했다. 드디어 현대건설 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현대건설은 설립 직후 6.25를 맞는다. 이때부터가 현대건설의 급성장기다. 정주영 초대회장은 주한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하던 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미군 발주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1952년 미국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열흘만에 운현궁에 화장실을 설치했던 일이나, 한겨울 부산 광안리 UN군 묘지에 잔디를 심어달라는 요청에 보리싹을 심었다. 이듬해 봄 잔디로 갈아 심은 사건은 건설업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다. 이같은 정주영 초대회장의 수완은 미군의 발주공사를 독점 수준으로 따내는 원동력이 됐고, 현대건설의 든든한 토대가 됐다.
전쟁이 끝나자 현대건설은 전후 복구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경북 상현교, 동해 철도의 월천교, 흥만교, 논산대교, 성북교, 광상리수원지, 고령교 공사 등 폐허가 된 국토엔 언제나 현대건설이 있었다.
전후 복구가 어느정도 마무리 된 1960년대부터는 토목 분야를 중심으로 전기, 플랜트 등 건축 전 분야에 진출한다. 소양감 댐 건설을 비롯해 1972년부터 건설이 시작된 울산 조선소도 현대건설의 작품이다. 울산 조선소 건립 당시 부지만 있고 공장도, 자본도, 기술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유럽을 돌며 차관을 끌어와 도크와 배를 동시에 만든 사건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최초의 건설사 해외진출 역시 현대건설이다. 현대건설은 1965년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며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해외 진출의 교두보를 놨다. 1973년에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고속도로 공사를 맡았고, 이는 훗날 바탐공항, 발리공항 등 교통 인프라와 발전소, 항만, 정유공장 등 인도네시아의 산업 인프라까지 수주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중동 붐도 현대건설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특히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건설은 규모만 9억 6000만 달러로 국내 중동건설 붐을 절정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금액은 당시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25%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1975년 1월 현대건설은 이란 지점을 개설하며 중동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같은해 8월, 현대건설은 이란 반다르 압바스 동원훈련조선소를 수주하는 성과를 냈고, 한 달 뒤에는 바레인의 아랍수리조선소 공사까지 따낸다. 이후에는 수주 풍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규모의 계약을 잇따라 체결하게 되고, 현대그룹도 전성기를 맞는다.
◇ 현대차그룹 편입 그 이후
중동 사업은 현대건설에게 아픈 기억도 남겼다. 현대건설은 미국의 이라크 경제제재 이전인 1980~1985년 간 고속도로, 발전소, 주택, 병원 등 공공시설 공사를 대거 수행했다. 하지만 1992년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이 대금을 받지 못했고, 급기야 2000년에는 2조 9800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다. 이라크의 장기 미회수 공사대금 1조 703억 원이 국내 1위 건설사를 부도까지 몰고간 것이다.
이 시기 '왕자의 난'까지 겪으며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 소속이 된 현대건설은 파산위기를 맞아 결국 2001년 워크아웃에 돌입해 2006년 졸업한다. 이후 2010년 다시 시장에 매물로 나온 현대건설은 서로 적통을 주장하는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과 정몽구 명예회장의 현대차그룹이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결국 현대차그룹 품에 안긴다.
현대건설을 품은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을 글로벌 종합엔지니어링 기업으로 육성한다는 전략 하에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에 나선다. 이에 자동차, 철강, 건설을 3대 핵심 성장축으로 설정하며 현대차와 시너지 극대화를 꾀했다. 실제로 현대건설의 해외 수주 현장에 현대제철의 철강이 투입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충분했다.
현대차의 검증되고 체계적인 관리를 받으며 현대건설은 조금씩 예전의 위상을 되찾아 간다. 리스크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부채를 꾸준히 청산한 결과다.
현대건설에 영욕의 시간을 모두 안겨준 중동은 지난 6월 다시 한 번 낭보를 전한다. 50억 달러 규모의 사우디 최대 석유화학단지 건설사업 수주에 성공하면서다. 특히 설계·구매·건설 등 공사의 전 과정을 일괄 수행하는 턴키(Turn Key) 방식으로 수주해 경쟁력을 확인했다.
◇ 아파트에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담다
국내 건설사 이야기에서 아파트는 빠질 수 없는 소재다. 이는 현대건설도 마찬가지다. 현대건설 최초의 아파트는 1964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일대의 마포아파트다. 국내 5개 업체가 참여한 6층 규모의 아파트로,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였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많은 부분을 상징한다. 1970년대 고속 성장기를 맞아 도심 주택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대규모 아파트들이 지어졌다. 현대건설의 첫 독자 아파트는 서빙고 현대아파트로, 이 아파트의 성공이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이어진다. 1987년 건설된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87년 총 14차, 6000세대 이상의 규모로 12년에 걸쳐 지어졌으며, 15층 이상의 고층으로 구현됐다. 강남의 상징이자 부촌의 상징처럼 된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현재도 최고가 아파트의 위용을 유지하고 있으며, 재건축 논의가 한창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대는 본격적인 브랜드 아파트 전성시대의 시작이다. 현대건설은 2007년 7월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현대홈타운' 브랜드를 런칭한다. 이어 2009년 5월에는 첫 '힐스테이트' 브랜드 아파트인 서울숲 힐스테이트를 선보이며 고급화 된 브랜드 아파트 경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현재 현대건설의 하이엔드 브랜드 '디에이치(THE H)'가 처음 알려진 것은 2015년 4월이다. 'H 엠블럼'을 계승한 디에이치는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 경쟁에서 차별화를 위한 네이밍이다.
◇ 현대건설의 사건·사고
대형 건설사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제가 사건, 사고다. 특히 사망사고나 부실시공 관련 이슈는 대중적 관심도가 높고, 정부의 제재도 가능하다. 현대건설 역시 사건, 사고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현대건설 작업현장에서 2011년부터 2021년 8월까지 약 10년간 발생한 사망사고는 51건에 달한다.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이후부터 지난 10월까지 약 22개월만도 현대건설 현장에서 6명이 숨졌다.
잇따르는 사망사고에 현대건설 뿐만 아니라 다수의 대형 건설사들이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은 미흡하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부실시공도 항상 건설사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2019년 하반기부터 2021년 상반기까지 시공능력 10위 이내의 건설사 중 2년치 벌점 부과 가장 많은 곳은 현대건설로 나타났다. 벌점 횟수는 14회에 달했다. 시공능력평가 2위의 현대건설로는 불명예 기록이다.
◇ 품질·안전 경영 강화로 '재도약' 노린다
현대건설은 활발한 해외 사업 추진과 함께 경영 목표를 '중대 품질 하자 제로(ZERO)'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2022년 말 품질경영 조직체계를 개편하고, 품질전략실 산하 3개 팀을 운영한다. 또 AI(인공지능) 기반의 CCTV 분석 시스템을 180여개 국내 전 사업장에 적용해 현장의 안전 확보에 나설 계획이다. AI가 실시간으로 현장의 위험요소를 감지하거나 예측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기술 개발을 통한 안정성 및 수익성 강화에도 나선다. 콘크리트 품질을 높여 고품질과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이밖에도 현대건설은 ESG경영과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해 지속가능경영 4대 추진체계(▲번영(Prosperity) ▲지구(Planet) ▲사람(People) ▲원칙(Principle))와 ESG 부문별 8대 추진 전략을 설정했다. 이를 토대로 ▲안전 ▲품질 ▲기후변화 등 12개의 중대 이슈에 집중한다.
품질 조직을 전략기획사업부 산하로 정비하는 한편, 외부 품질 진단 전문 업체를 활용한 제3자 시공품질평가(Q-TPI) 제도를 도입하는 등 품질 경영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전년 대비 안전보건 투자를 23% 확대하고, 전 현장 대상의 안전점검 횟수를 2500여 회에서 4735회(84% 증가)로 확대·시행해 안전 경영에도 나선다.
올해로 창립 76주년을 맞은 현대건설. 범 현대가의 모태이자 저력의 현대건설의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경기신문 = 오다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