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나까지 삼켜버리겠다구 네 몸은 벌써 퉁퉁하게 불었잖니 금세 저 마당 끝에서 다른 곳으로 가던 나를 미끈하게 한입에 잡수시지 않았니 자꾸만 눈꺼풀 걷어내던 여자의 종아리 베어 먹지 않았니 치맛자락 거머잡고 허공 속 질퍽거리던 그녀 네가 요기하지 않았니 내 그림자로는 네 배가 차지 않는다구 그럼 어디 한번 잡수어 보시지 몇 천 년 갈증에 시달리는 내 목구멍이 출렁거리는 네 위장을 단번에 마셔버릴 테니 - 이태선 시집 ‘눈사람이 눈사람이 되는 동안’ /서정시학 여름 장맛비는 거의 한달 이상 쉬지 않고 내린다. 사랑방 낮은 문턱에 걸터앉아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리듬을 들으며 책을 읽는다. 축축하고 끈적한 날들이 지루할 때쯤 어머니가 내온 뽀얀분이 덮인 찐감자를 후후 불며 먹는다. 물 먹은 산천초목은 더욱 푸르러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은 물 첨벙 동네를 쏘다닌다. 아버지가 우산을 쓰고 물에 잠기는 벼논의 물꼬를 터주러 삽을 들고 나가신다. 잡아먹을 듯 무섭게 불어난 개울물에 아랫마을 누가 휩쓸려 떠내려갔다는 소식과 누군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는 소식을 갖고 들어오신다. 그래도 비는 쉬지 않고 무섭게 불어난 물은 넘쳐 가재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 안도현 시집 ‘북항’/2012년/문학동네 안도현 시인이 출간한 시집 <북항>에 실린 시 <일기>는 지난 2011년 최고의 시로 신정된 바 있다. 도서출판 작가가 120명의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에게 지난해 가장 좋은 시를 추천받은 결과, 이 시가 선정된 것이다. <일기> 속에 나와 있는 내용들, ‘국화 꽃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든지,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냈다, 어떤 의원이 감나무를 고쳐주러 왔는데 그늘의 수리를 부탁했다’에는 고단한 현실을 시로 승화해 보려는 시인의 정신이 엿보인다. 이번 시집은 한 편 한 편의 시가 저마다 시론으로 읽히기도 하거니와 더욱 깊어져서 안도현 시인의 새로운 시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안도현 시
T-33제트기 인수식 1957년 오늘, 수원 공군기지에서 우리 나라와 미국의 고위급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T-33제트기 인수식이 열렸다. 우리 공군은 미국으로부터 T-33 9대를 넘겨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사의 뜻으로 미 공군 장성에게 표창장을 주고 우리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게 군기도 수여했다. 박찬호 메이저리그 올스타 선정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발됐다. 2001년 오늘,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공식 발표한 11명의 내셔널리그 올스타 투수진 명단에 박찬호 선수의 이름이 올랐다. 당시 박찬호 선수는 다승부문 11위와 평균자책 5위, 그리고 탈삼진과 피안타율 부문에서 각각 4위와 2위를 기록해 각 부분에서 고르게 상위에 올라있었다. 이로써 199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8시즌 만에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는 영예를 안았다. 알제리 독립 1962년 오늘, 아프리카 북서부 나라 알제리가 독립했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지 132년 만의 일이다. 1954년 11월 4일 발족한 민족해방전선(FLN)이 8년 동안 벌인 독립운동이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알제리의 무장…
검은 구두 뒤축으로 달그림자 밟고 와선 지고 온 내 허물을 자정 넘어 벗는다 무량히 쌓이는 비늘 그 하루가 곤하다 빗금으로 솔질하며 지난 흔적지우다가 토사가 씻겨 내리는 어느 계곡 물소리 구두를 닦는 아침에 환청으로 듣는다 무수한 발걸음이 역사가 되기 위해 오로지 그 무게를 지탱해 준 검은 구두 한 줄기 햇빛을 받는 행사장이 더 환하다 - 김삼환시인 , 계간 ‘시와 문화’ / 2012년 / 여름호 “토사가 씻겨 내리는 어느 계곡 물소리”에 구두를 내어놓는다면 곤한 어제가, 때로는 모르는 척 타협했던 순간들이 말끔하게 흘러갈까? 갑자기 구두를 닦는 손이 제의(祭儀)처럼 느껴진다. 어제의 시간에서 내일의 시간으로 건너가는 세례의식 같은 것? 구두만큼 제 주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옷은 세탁을 해서 일그러진 모양을 다시 잡아줄 수도 있고 리폼을 통해 거듭날 수도 있지만 구두는 그럴 수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주인의 발을 그대로 현상해 낼 뿐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구두는 그야말로 한 개인 역사의 상징물이다. 얼마나 어떻게 걸어왔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놓는 시간의 산물이다. 새 구두를 원하면서도 현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 브레히트 시집 ‘살아남의 자의 슬픔’ /한마당 평생 독일국민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살다간 브레히트였다. 너무도 큰 심장을 가진 시인이었으며 극작가였던 그가 어머니 무덤 앞에서 쓴 시이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말줄임표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들어있는지 거장의 슬픔이 전해 오는 듯하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께 전해 드리고 싶은 시이다. /조길성 시인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 문학과 지성사 흙냄새 물씬 풍기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장에 간 엄마의 부재가 쓸쓸하다. “금 간 창 틈”이 암시하는 가계의 균열. “고요히 들리는 빗소리”가 주는 정막감. ‘방’이라는 공간에서 시인이 겪는 유년의 외로움, 쓸쓸함, 기다림의 정서는 다름 아닌 ‘가난’이라는 근원적 공포였다. 내적, 개인적 상처를 절제로 노래하고 있는 시 속의 엄마가열무 삼십 단을 다 팔고서야 집으로 돌아 오는 모습이 선하다. 지친 모습으로 비에 젖은 옷을 입은 '엄마'가 여백으로 남는 계절. 이제 곧 우기다.…
1973년 오늘, 포항제철이 준공됐다. 착공한 지 3년 3개월 만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인 1천200억원을 들여 만들었다. 제선, 제강공장 등 10개 단위 공장과 12개의 부대시설을 거느렸다. 단일 사업체로서는 우리 나라 최대규모였다. 포항제철은 3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3대 목표 가운데 하나인 중화학공업 건설의 중추역할을 떠맡게 됐다. 이에 따라 포항제철은 73년 1기 설비 준공 이후 생산설비 확장을 계속 추진해 나간다. 1976년 5월 2기 설비, 78년 12월 3기 설비, 83년 5월 4기 2차 설비 준공으로 910만톤의 조강 능력을 확보한다. 포항제철이 1987년 준공한 광양제철소는 1천180만톤 규모의 조강능력을 지녔다. 포항제철은 조강 능력 기준으로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하고 2000년에는 민영화됐다.
1972년 오늘,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정상이 ‘심라 평화협정’에 조인했다고 발표한다. 인디라 간디 총리와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부토 대통령(Zulfiqar Bhutto)은 인도 북서부의 휴양지 심라(Shimla)에서 전날 밤 늦게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이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조인식을 서둘러 시작하느라 식장의 커튼을 뜯어내려 테이블보로 쓰고 간디 총리는 바로 옆에서 취재하던 기자에게 펜을 빌려 서명했다. 이로써 25년 동안 끌어 온 두 나라의 적대관계가 해소된다. 1년 전인 1971년 3월 동파키스탄의 벵골인 독립주의자들이 방글라데시공화국 독립을 선포한 데 대해 파키스탄군이 유혈진압에 나서자 인도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지하며 내전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두 나라의 전쟁은 같은 해인 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의 항복에 이어 다음 날 휴전에 들어갔다. 두 나라는 이듬해 오늘 발표한 ‘심라 평화협정’에서 서로 주권을 존중하고 내정간섭하지 않으며 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로 약속했다.
1962년 오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서독 총리가 프랑스를 공식 방문한다. 아데나워 총리는 파리의 개선문에 있는 프랑스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하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아데나워 서독총리의 프랑스 방문을 놓고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두 번에 걸쳐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과거사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총리의 프랑스 방문을 전후해 프랑스와 서독 두 나라는 EC, 즉 유럽공동체 창설을 주도하게 된다.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1944년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돼 게슈타포에게 체포됐다가 살아남아 1949년 국회의원 당선에 이어 서독 정부의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 아데나워는 1963년 10월 총리직에서 물러나기까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국수 면발에도 마디가 있다 밤새 울어 퉁퉁 불은 눈언저리가 있다 후르르 삼키며 컹컹 목이 메는 곡절이 있다 이집 저집 상들이 네발 달려 걸어왔을 것이다 키가 작아도 빛나도 귀퉁이 깨어져도 한마당에 머리와 다리를 접붙여 앉히고 국수 말아 먹을 슬픔이 출렁 바다를 이룬 - 이민호 시집 ‘피의 고현학’ /2011년 / 애지 국수 면발에도 마디가 있다니! 시인이 국수를 말아 먹고 있는 곳은 잔칫집 같은 상갓집이다. 어느 작은 읍(邑)에 모여, 공손하게 읍(揖)하고 함께 국수를 말아 먹는 슬픔. 국수의 마디마다 퉁퉁 불은, 컹컹 목이 메는 곡절들을 따라가 본다. 그 곡절들 속에 작은 읍(邑), 더 나아가 민족공동체의 운명이 맺혀있다. 상갓집 마당에다 이집 저집에서 들려나온 상을 펼쳐 놓고 슬픔을 함께 말아먹는 사람들. 슬픔을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오랜만에 모인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잔칫집과 상갓집을 오가며 우리의 생이 익어가고 있다. 국수의 마디에서 슬픔과 기쁨을 함께 발견할 때,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아. 국수 마디에 맺힌 슬픔을 나도 공손하게 읍(揖)하고 말아먹어야겠다. /이설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