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시인소개: 본명은 영종(泳鍾). 1946년경부터 계성중학교·이화여고 교사, 서울대·연세대·홍익대에서 강의. 한국문필가협회 상임위원,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1962년 한양대 교수로 취임해 1976년 문리대학 학장을 지냄.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象)〉 펴냄.
하이힐을 신고 꽃피지 않는 마음을 걷는다 또각또각 울음이 찍힌다 그 길로 자전거와 트럭이 지나고 빨간 승용차가 굉음을 내뿜으며 질주한다 신열의 먼지가 피어오르는 사이 바람이 입 안 가득 모래를 물고 칼 맞은 짐승처럼 휘적거린다 짓무른 꿈속으로 어둠은 또 언제 스밀지 시인소개: 1962년 강원도 양양 출생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1993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안개 詩>, <슬픔의 속도>,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아저씨가 수면총을 쏩니다. 목표는 꽃사슴, 한 마리가 쓰러집니다. 우리에서 끌려나온 짐승의 눈을 수건으로 가립니다. 뿔을 자릅니다. 잘 생긴 저 뿔을 자르다니(얘 야, 더 강하고 아름다운 뿔을 위해 지금 이 뿔은 잘라줘 야 하는 거란다) 불쌍한 사슴! 방울방울 고이는 사발에 다 아저씨는 활명수를 흘려 넣습니다. 따뜻한 피, 사슴 의 체온이 알코올기와 함께 산을 넘어 갑니다. 산수유 꽃 노랗게 폭발하는 봄. 시인소개 ; 1952년 서울 출생.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졸업, 1993년 <문예사조>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깊은 잠에 빠진 방의 열쇠> <시간의 반란> <언어로 만든 집 한 채> <금빛해를 마중할 때> 등 다수, 천상병 시상, 한국 기 독교문학상, 서울문예상 등 수상
정애정 햇살 한 줌 주세요 새순도 몇 잎 넣어주세요 바람 잔잔한 오후 한 큰 술에 산목련 향은 두 방울만 새들의 합창을 실은 아기병아리 걸음은 열 걸음이 좋겠어요 수줍은 아랫마을 순이 생각을 듬뿍 넣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주세요 시인소개: 故 박남수 시인, 1918년 5월 3일 평안남도 평양 출생, 1939년 시 ‘마을’로 데뷔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회 위원장, 한양대학교 강사 한국시인협회 창립회원 역임 공초문학상,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
언제 우레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던 강물. 시인소개 ;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1968년 현대문학 ‘잠 깨는 추상’ 등단. 시집 <반란하는 빛>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무명 연시>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다수.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서울대교수 역임.
삐걱 문이 열렸다 태양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수정되지 못한 안쪽을 기웃거리거나 나무가 있는 먼 곳의 그늘 속을 꿈인 듯 들여다본다 지난 가을 종적을 감췄던 외딴집 뒤꼍 고요 속에 들러선 핑글 현기증도 느끼며 졸음보다 낮은 속도로 봄의 안쪽을 서성인다 꽃은 외로운 날의 지도다 겨우내 잊혔던 침묵이 겨우내 끊어졌던 외출이 성급히 꽃의 지형도를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햇살이 옮겨 앉는 자리마다 입덧에 걸려든 나무 이 층 산부인과를 넘겨다보며 오후의 나른함을 몇 줌의 수액으로 푸르게 흘려 넣기도 한다 태양이 햇살을 내딛기 시작했다 지하도 입구 김빠진 사이다 같은 미식한 어둠 앞에서 발길을 돌려 신호등이 막 바뀌고 있는 한적한 모퉁이 낡고 허름해진 현수막을 읽다가 공사가 덜 끝난 다리의 난간 속으로 햇살을 밀어 넣기도 한다 태양이 거대한 형틀임을 바람은 알까 나무의 찢긴 상처마다 밀려나오는 새순과 뼈만 남은 가지에서 터지는 꽃의 비명을, 초경을 막 시작한 소녀의 당혹감처럼 꽃은 태양의 낯선 지형이다 시인소개: 1961년 충북 청주출생. 방통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평택문인협회, 시원문학 동인.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안견문학상…
어른들이 라면 자주 먹지말라고 그러지만 추운 날 바람 불고 솔솔 눈 오는 날 한번만 먹어보자. 야무지게 스프 뜯고 면발 넣어 양 180마리만 세면 따뜻한 연기가 내 안경을 채우고 부엌도 채운다. 김치 얹어 따뜻한 정 한입 계란 얹어 편안한 정 한입 남은 국물 밥에 둘둘 말아 먹으면 꺼진 배 꽉 채운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한입 드려 먹지 말라는 말 막는다. 시인소개: 1998년 12월 5일 경기 안성 출생.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6학년 때까지 써 온 것 모아 시집. <라스트 유치>라는 조 군 시집(종려나무刊) 속 수록
시작은 늘 노랑이다. 물 오른 산수유나무 가지를 보라. 겨울잠 자는 세상을 깨우고 싶어 노랑별 쏟아낸다. 말하고 싶어 노랑이다. 천개의 입을 가진 개나리가 봄이 왔다고 재잘재잘, 봄날 병아리 떼 마냥 종알종알, 유치원 아이들 마냥 조잘조잘, 노랑은 노랑으로 끝나니 노랑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잠든 아이를 내려놓듯이 노랑꽃들을 내려놓는다. 노랑을 받아든 흙덩이는 그제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초록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노랑이 저를 죽여 초록 세상을 만드는 것. 시인소개: 1961년 광주 출생. 1985년 창작과비평사 <16인 신작시집>에 ‘내 울타리 안에서’ 외 7편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지리산 갈대꽃’,‘붉은산 검은피(상,하)’, ‘나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겨레말큰사전 남측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인소개: 1942년 1월 22일 광주광역시 출생, 195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바람’ 당선으로 데뷔, 광주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국문학 학사 수상경력 : 2007 제1회 가천환경문학상 시부문, 2001 대산문학상, 1977 한국문학작가상, 1969 현대문학상
자, 2월이 왔는데 생각에 잠긴 이마 위로 다시 봄날의 햇살은 내려왔는데 귓불 에워싸던 겨울 바람소리 떨치고 일어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저 지평선 끝자락까지 파도치는 초록색을 위해 창고 속에 숨어있는 수줍은 씨앗 주머니 몇 개 찾아낼 것인가 녹슨 삽과 괭이와 낫을 손질할 것인가 지구 밖으로 흘러내리는 개울물 퍼내어 어두워지는 눈을 씻을 것인가 세상 소문에 때묻은 귓바퀴를 두어 번 헹궈낼 것인가 상처뿐인 손을 씻을 것인가 저 광막한 들판으로 나아가 가장 외로운 투사가 될 것인가 바보가 될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시인소개:1945년 11월 3일 서울 출생,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문화정책위원, 한국녹색시인회 회장, 1965년 시문학 시 ‘나의 깃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