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한 사건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1월 중순 이전까지만 해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거나 발발하더라도 러시아의 최대 행동반경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스위프트(SWIFT) 퇴출 등 거론되는 서방의 강력한 경제금융제재가 러시아의 행동을 제약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월 20일 전후 유럽에서 스위프트 제재에 대한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푸틴은 전면적 침공을 단행하였다. 서방은 즉시 강력한 제재를 실행하였으나, 정작 스위프트 제재는 2월 26일에야 결정되었다. 푸틴은 이에 반발하여 자국의 핵 운용 부대에 경계 태세 돌입 명령을 내리는 강수를 두었다. 핵 위협으로 대응할 정도로 강력한 스위프트 제재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국제자금결제 메시징 서비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진 스위프트(SWIFT)의 본사는 벨기에에 있다. 스위프트 제재를 결정하는 주체는 EU(벨기에)이다. EU는 ‘공동 외교 안보’에 관한 정책 결정으로 벨기에를 포함한 27개 회원국에 제재 의무를 부과하고, 벨기에는 스위프트에 제재를 이행해야 하는
나는 마을활동가다. 일터가 아닌 삶터에서 마을활동은 감사(感謝)와 인정(人情)의 노동이다. 대도시가 허락하지 않을 듯한 그런 삶을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서울살이 20년, 삶의 가치와 의미를 나는 마을에서 발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아닌 연대와 협동으로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느슨하고 느리고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만나도 그저 멀뚱멀뚱하던 이웃들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지고 공공의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발휘되는 집단지성은 또 얼마나 짜릿한가. 마을은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인생 가장 푸르른 날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 출산과 육아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감격이었지만 내 삶은 어디론가 자꾸 흘러서 멀리 가버리는 듯했다. “사회로” 나가려 무던히 애썼으나 한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몸은 가정에 묶였다. 마흔두 살에 셋째를 낳자 내 인생 모든 게 끝난 기분이었다. 사회생활은 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 셋을 데리고서라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러자 ‘낙후된 마을과 떠나는 이웃’이 보였다. 한국사회 변혁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살고 있
불행한 정신적 고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끝없는 변화 때문에 영원한 소유(관계)를 허락하지 않는 사물(인간)에 대한 우리의 집착 탓이다. 오직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에 순수한 기쁨을 준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신은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신을 본디 사랑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신을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은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뿐이다. 나는 신이 인격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신을 사랑할 수가 없지만, 나 자신이 인격체이기 때문에 역시 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사랑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야 말로 최상의 행복이다. 그러한 사랑은 어떠한 존재도 예외 없이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비록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는 신에 대한 사랑과 사랑의 행복을 잃게 될 것
이른바 ‘역대급’으로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낙선자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이번 선거 역시 저급한 비방, 흑색선전, 이합집산 등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것 역시 민주주의의 한 모습이다. 어쨌거나 당선자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였다. 코로나19, 경제, 주택, 빈부격차, 저출산 고령화, 지역갈등, 사회양극화, 남북관계, 청년일자리, 노후대책, 미세먼지 등 환경문제, 남녀갈등, 이념갈등...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이다. 이번 선거 기간 중에도 후보자들의 공약을 통해 대부분 언급된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이슈가 되지 않은 내용이 있다. ‘기초단체장,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 공약이 안보였다. 그나마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지난 1월 “연줄 없는 인재들의 진입을 가로막는 기초단체장,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 공천제 폐지를 제안”했지만 윤석열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를 사퇴했다. 2005년 기초자치단제장 정당공천제, 3기 연임제한, 후원회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이른바 ‘6·30 공선법’이 개정되고 지난 2006년 지방선거 때부터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전면 도입됐다.
본 칼럼은 어제(9일) 오전 9시까지 보내야하는 글이다. 당연히 대선 투표결과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칼럼은 오늘(10일) 실린다. 어떻게 써야 엉뚱한 글이 되지않을까?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껏 대선을 염두에 두고 칼럼을 실어왔는데 딴소리할 수도 없고 틀리건 맞건 내가 생각한데로 적을 수밖에.. 어젯밤 늦게까지 동영상 중계로 후보들의 마지막유세를 봤다. 한사람은 여전히, 아니 더욱 격한 어조로 상대후보를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중엔 심지어 허위사실 논란이 일었던 여배우까지 무대에 세우며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다른 한 사람은 비난보다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청계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니 홍대 앞 마지막 유세에서는 사람들과 즉문즉답을 주고받으며 마무리를 했다. 덧보태 상대후보에게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선거에 임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선거결과에 따라 판이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나는 감히 예상하건데 이재명후보가 상당한 차이로 이길 것이라 본다. 왜냐? 대한민국 국민들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인간은 누구나, 특히 그리스도교는 더더욱,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든 재물을 통해서든 언론을 통해서든, 전쟁과 그 준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전쟁과 그리스도교는 양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이는 것이고, 그리스도교는 내가 진정 살기 위해서는 너 또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헌정) 무장된 국가와 전쟁, 이 두 가지가 언젠가는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통치자들이나 이 세상의 권력자들에 의해서는 아닐 것이다. 전쟁은 그들에게 너무나 큰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은 자신들에게 달려 있음을 깨닫고, 자신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자, 자신들을 병사로 만들려고 하는 자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그만 둘 때,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하르두엔) 만약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서로 손을 잡고 평화를 지킨다면 우리는 권력자들에게 그들의 병사들이 가져다주는 이익보다 훨씬 많은 이익들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사람들이 온갖 번뇌로부터의 벗어나기 위한 사색과 수련까지 배운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인류의 복지를 위해 일하게 된다. 우리는 권력자의 행복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선거는 끝났다. 그런데 선거보도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칼럼은 물론 스트레이트 보도조차 진영 논리로 춤을 췄다. 칼럼은 특정 캠프의 감독 명령으로 둔갑하고, 스트레이트 기사는 다른 언론이 검증하는 사안을 물타기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동아일보 김순덕 대기자의 ‘윤석열은 안철수를 보쌈이라도 해오라’는 칼럼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학생이나 초년병 기자의 저널리즘 강의에 쓰면 더없이 좋을 사례가 됐다. 강의제목은 ‘버릴 관행’ 정도면 적절해 보인다. 보쌈이란 용어는 품격 있는 언론인이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이다. 그가 쓴 보쌈은 ‘삶은 돼지고기 편육을 절인 김치에 싸서 먹는다’는 뜻으로 쓰인 게 아니다. 투표용지 인쇄 마감일인 2월 28일을 혼인이 가능한 마지막 날로 보고, ‘혼기를 놓친 윤석열은 과부인 안철수를 납치해서 강간하고 같이 살라’는 교시였다. 후보나 선거 캠프의 일방적인 발언을 검증 없이 전달하는 관행도 여전해, 네거티브 선거전의 불쏘시개가 됐다. 클릭수를 높이는 데 혈안이 된 언론의 생리를 잘 아는 선거 진영에서는 더 자극적인 말들을 쏟아 냈다. 언론은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 써 확성기 노릇을 자처했다. 유시민 작가는 3월 3일 MBC ‘100
“진실은 땅 속에 묻히면 점점 자라며 숨이 막혀서, 결국 그것이 터지는 날에는 모든 것을 날려버릴 만한 폭발력을 얻게 된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 에밀 졸라(Emile Zola)의 고발문이다. 진실의 은폐로 간첩이 된 드레퓌스(Alfred Dreyfus) 대위. 유대인이었기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이에 분노한 정의의 기자 졸라.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자뀌즈(J'accuse: 나는 고발한다)!” 이는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고, 마침내 지식인들의 선언문을 이끌어 냈다. 재판은 뒤집혔고 드레퓌스는 누명을 벗었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두 동강 나게 한 “드레퓌스 사건.” 이를 종식시킨 졸라. 프랑스 양심의 표상이 됐다. 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존경은 하늘을 찔렀다. 오죽했으면 사후 6년 만에 프랑스 위인들의 성전인 팡테옹에 그를 모셨을까. 하지만 졸라의 인생초년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모자라는 듯 말을 더듬고 국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타지에서 온 학생이 이처럼 꺼벙하니 프로방스 학생들은 그를 괴롭혔다. 이때 세잔이 나타나 구해줬고 그 둘의 우정은 시작됐다. 졸라는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도 연거푸 낙방했다. 대학을 결국 포기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