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정상하 초목의 밑둥들을 촉촉이 돌아 낮은 마을 앞 제각기 아름다운 산모퉁이를 돌아 저마다 몸에 맞는 생식을 하는 세상 속 뜰을 지나 어느 오전 추룩추룩 비로 일어서 떠나온 산맥으로 돌아가 몸을 부수어 몸을 묻어 산 넘치도록 나무를 키워 또다시 뿌리 아래로 돌아나와 갈래갈래 깊숙이 제 몸 안으로 잠기는 강 -정상하 시집 <비가 오면 입구가 생긴다/ 시와시학사> 강이 흐르는 모습은 평온한 듯하다. 주변의 풍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조용히 흘러간다. 긴 여정 끝에 얻는 깨달음처럼 숙연하다. 강이라는 삶을 거슬러오르는 시인의 상상, 우리가 비와 다르게 인식하는 것들, 이를테면 그늘이나 습기 바람 같은 것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비가 된다. 오래 전에 떠나온 어느 산맥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하강, 나무를 키우고 나무의 뿌리까지 돌아나와 제 몸 갈래갈래 흩어진 후에야 자신의 내부로 돌아가는 삶의 여정!/이미산 시인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 부 -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정현종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세계사 한동안 분노와 좌절이 땅을 치고 있습니다. 억울함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 도처에 낭자합니다. 슬픔을 제대로 슬퍼하지 않으면 그것에 사로잡혀 기쁨을 행복을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요. 그래요 우리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지요. 슬픔을 슬픔답게 슬퍼하고 아픔을 아픔답게 아파하고 분노를 분노답게 분노하고 우리 사랑해요. 톨스토이가 소설에 이렇게 썼지요. “사실은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외롭고 우울하고 화난 당신에게 예쁜 꽃 한 송이 드려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할 시간이 사실은 이렇듯 많지 않거든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유현아 시인
자화상-만삭의 아내를 보며 /배재경 내가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간다는 것 참 희한하다 “어머, 얘가 하루 사이에 이만큼 컸네” 축구공처럼 탄력을 더해 가는 아내의 배를 물끄러미 치어다본다 도대체 저 안에 있는 놈은?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일까? 나를 닮어? ? 아니야, 안돼! 아니라고, 난 안돼! -배재경 시집 『그는 그 방에서 천년을 살았다』 /작가마을 시인은 ‘축구공처럼 탄력을 더해가는 아내 배를’ 보면서 본인 닮은 아기를 상상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이 나를 닮아 태어난다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태어난 아기는 어디 얼굴뿐이겠는가? 성장할수록 말투와 표정 뒷모습 걸음걸이 뒤통수까지 닮는 걸 보면 유전자의 기억은 놀라울 뿐이다.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건 내 몸짓을 연습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어짜피 내 아기는 나를 닮을 수밖에 없을 것인데 시인은 본인 닮는 것을 왜 극구 꺼려하는 것일까? 예쁜 아내 닮기를 바라서일까? 아님 짐짓 엉큼한 속내를 감추는 것일까? 그럼에도 태어난 아기는 나를 꼭 닮은 나의 ‘자화상’이어서 입은 귀에 걸릴 것이다. /성향숙 시인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임동확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틀림없는 분수 오직 그 자체의 동력만으로 다함없이, 조정자 없이 두 팔을 한껏 벌린 채 연초록 물줄기를 사방천지로 마구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단 한 방울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분수 그때 꽃이란 순결한 물의 진액으로 짜 엮은 꽃다발, 그때 열매란 순수한 물의 결정이 탄생시킨 보석들 세상의 나무가 어떤 형태로 서 있거나 흔들리고 있는 끊이질 않은 물의 응결, 물의 연금술로 찬란하다 가까이서 보면 낱낱이 외로운 물방울의 육화인, 그러나 멀리서보면 연봉(連峰)의 파도로 출렁이는 미처 그늘을 알지 못하는 절정의 어린 이파리들이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서로를 닮지 않은 채 오직 하나의 존재였을 뿐인 지상의 나무들이, 저마다의 수압(水壓)으로 굵고 가는 분수의 가지마다 가장 소중한 순도의 색채를 마구 쏟아내는 봄날엔 -출처: 계간 『시산맥』 2014년 봄호 발표 나무는 걸을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수동적인 사물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것이다. 나무는 불에 탄다. 나무를 깎아서는 가구나 의자를 만든다. 하나 거대한 범선을 만든다. 수동적인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목공이 한다. 그 작업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나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까 오후가 말한다: “난 그늘에의 목마름” 달이 말한다 : “난 샛별에의 목마름” 수정빛 샘이 입술을 요구하고 이윽고 한숨 쉬는 바람. 나는 향기에의, 미소에의 목마름 새로운 노래를 향한 목마름 달도 없고 붓꽃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랑조차 없이. 하략 - 『사랑의 시체』 / 솔 1995 함께 있거나 혼자 있거나 침묵이거나 소리일 때도 언제나 눈알을 빙글빙글 돌린다. 질문은 시인의 몫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은 오래전 가르시아 로르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열하는 태양의 오후는 그늘을 갈구하고 달은 샛별을 갈구하고 고요한 샘은 출렁이는 입술이 그리운 것이다. 여기 있으면 저곳이 그립고, 나에게 없는 다른 것이 돋보인다. 그래서 나는 뜨거운 여름 하필 뜨거운 태양과 투우의 스페인 시인 로르까의 시를 읽는 중인가? 이 또한 새로운 시를 향한 질문이고 목마름의 몸짓이다. /박홍점 시인
숨쉬는 무덤 /박정만 무덤이 무덤을 불러서 무덤끼리 도란도란 숨어 사는 곳, 기쁨은 다 남의 것이 되고 슬픔만이 나의 차지, 꽃송이는 다 남의 것이 되고 떨어진 꽃잎만이 나의 차지, 낙화 속에 숨어 사는 한 올의 향내만이 나의 차지, 너 있는 곳을 찾아 헤매어도 실實은 너는 없고, 입 맞추며 입 맞추며 숨쉬는 무덤. - 박정만 시집 〈잠자는 돌/고려원〉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에 고초를 겪다가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이 세상 모든 슬픔은 나의 차지라고, 세상은 숨 쉬는 무덤이니 기쁨은 다 남에게 주고 떠나겠다며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다. 향기 진동하는 떨어진 꽃잎들의 무덤은 하루살이의 삶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소중한 순간이라고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시의 행간에서 꽃향기가 묻어 나온다. /조길성 시인
홍시 /김정인 ‘우리 어메, 껍질 벗겨질까봐 겁나네’ 백발의 아들이 임종 앞둔 어미 홍시 껍질처럼 얇아진 손 쓰다듬는다 애비야……. 더 이상 매달릴 시간도 없는 숨, 가는 길 밝히는지 붉다 - 김정인 시집 〈누군가 잡았지 옷깃〉에서 임종을 앞두고 깡마른 어머니가 홍시처럼 탐스러울 수 있다니 대단하다. 비록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허드렛일이나 하시다가 닳아빠진 손 거죽이지만 마지막 떠나시는 어머니의 손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워 보였을까.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간절한 사랑이 돋보인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혈육 간 피의 울림은 분리된 육신을 얼마든지 넘나든다. 그리하여 그 피의 흐름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장종권 시인
비의 한쪽 /이화숙 지구의 수많은 지붕 위를 건너온, 비의 소리를 듣는다 그의, 온전하지 못한 뼈를 생각한다 유리 목발처럼 아슬아슬한 그의, 혀를 길게 당겨본다 직선의 아픔이 혀에 닿을 수 있도록 길게, 아주 길게 아, 차갑게 춤추는 비와 미친 말과, 거미 같은 혀는 쉽게 부러지거나 단절되거나, 고립되지 않을 거야 빗속에 갇혀버린, 절실한 말들이 촉촉하게 입술 위로 젖어들 수 있도록 난, 꿈처럼 온전한 뼈를 그리워한다. ― 동인시집 〈하루, 다 간다〉 (심지, 2012)에서 언제부터인지 우리의 삶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 한 구석이 다 무너진 듯 아픕니다. 비의 한쪽도 그러한가봅니다. 아마 그 아픈 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온전하지 못한 삶을 거쳐 왔기 때문인가 봅니다. 시인은 빗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쉽게 부러지거나, 단절되거나, 고립되’었던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함께 체감하고 있습니다. 왜 시인은 우리의 신산한 현실을 ‘직선의 아픔’이라 했을까요. 물론 비와 견주었기에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한눈팔 겨를이 없습니다. 착한 사람들은 한 곳만 보고 달려갑니다.…
단단한 습관 /장상관 인간은 소젖을 먹고도 소를 어미라 부르지 않는다 살 베어 먹으면서도 질기다 기름이다 말도 많다 수많은 생명에 기대어 사육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모두 사육하기를 원한다 2 가랑비에도 하굿둑이 허물어질 수 있다 3 실수도 쓸모가 있다 반복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는 몸도 기억력이 있다 - 장상관 시집 『결』/시산맥사 습관은 하루 이틀 만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반복하고 반복해서 몸에 붙은 행동양식이다. 원치 않는 그 습관으로 해서 시지프스처럼 고통을 겪기도 하는데 쉽게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습관은 단단하다.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습관의 패턴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내기도 한다. ‘반복하지 않으려 고 온 신경을 집중하는 몸의 기억력’, 실수는 프로이드에 의하면 무의식의 의식화 작용이다. 나쁜 습관을 고치려는 행동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망함과 창피함을 주는 그 실수도 쓸모가 있다. /성향숙 시인
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 /두보 爲人性癖耽佳句(위인성벽탐가구) 나 같은 위인은 버릇이 아름다운 구절을 탐하는 것 語不驚人死不休(어불경인사불휴) 시어가 남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 老去詩篇渾漫興(노거시편혼만여) 늙을수록 시 짓는 일을 함부로 하여 春來花鳥莫深愁(춘래화조막심수) 봄이 와서 꽃이 피고 새가 울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구나 新添水檻供垂釣(신첨수함공수조) 물가에 난간을 덧대어 낚싯대 드리우고 故著浮사替入舟(고착부사체입주) 일부러 뗏목을 붙여 배 삼아 바꿔 탄다 焉得思如陶謝手(언득사여도사수) 어찌하면 도연명 사령운의 솜씨를 얻어 令渠述作與同遊(영거술작여동유) 그로 하여금 글을 지으며 더불어 놀아볼꼬 - 출처 두시언해 〈고은번역/민음사〉 악양루에 올라 〈안영옥편/태학당〉 두보의 삶과 문학 〈이영주/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두보-시와 삶 〈이병주/민음사〉 등 참고 ‘死不休’, 이 말은 자신이 지은 시가 읽는 이를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두지 않고 계속 고치겠다는 말이다. 두보의 시가 수천 년 한시사漢詩史에서 최고봉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이유를 알게 한다. 이처럼 치열한 창작 혼이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