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운수의 길에 올랐다. 뭔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선사들의 전기를 보면 운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이미 깨달은 선사들이 교화와 보림의 수단으로 운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온 운수는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이 운수를 좋아한다. 구름처럼 바람부는 대로 떠다니고, 물처럼 흘러다닌다고 해서 운수(雲水)다.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나, 조정에서 일이 뜻대로 안되거나 하면 곧잘 전국 유람을 떠난다. 스님 말고도 화담 서경덕이라던가 토정 이지함 같은 사람들도 운수를 퍽 즐겼다.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의식을 전환해보기 위한 것이다. 앞서의 혜봉이 엿장사로 전국을 떠돌아다닌 것도 운수다. 그러면서 그도 그가 가야할 길을 찾아냈다. 이렇게 경봉도 전국을 떠다니며 사람 사는 모습도 구경하고 각종 물산도 구경했다. 의식을 벼리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어떤 결실을 가져오는지 바로 연결된다. 서른다섯살이 되던 해에 통도사 극락암에서 열린 화엄산림이 경봉에게 맡겨졌다. 강설을 시작한 지 나흘째 되던…
화재·불협화음 불씨 끄고… 성남중앙시장 ‘36년 名品시장’ 재활 시동 지하철 분당선 태평역사와 성남시청을 연결하는 수정로를 따라 가다보면 태평역사와 시청 가운데쯤에 위치한 성남중앙시장을 만날 수 있다. 수정구 태평3동 3681 일반상업지구에 자리한 재래시장인 성남중앙시장은 전통 가옥이 빽빽히 들어선 주거밀집지에다 수정대로와 인접한 지하철 역사가 위치해 시장으로써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시민들은 중앙시장을 구시가지 천혜의 시장으로 일컫는다. 구시가지 마을 입구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자리한데다 시선이 모아지는 움집형태를 지녔기 때문이다. 또 3천316㎡의 넓은 부지에 180여 점포에서 잡화, 야채, 귀금속, 한복 등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 제작·판매되고 있어 인근 주민은 물론 분당신도시, 서울 송파 등 비교적 먼 곳에서도 즐겨 이용하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 발행한 성남사랑 상품권 등이 인기를 끌며 시장을 찾는 이들이 늘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남중앙시장은 개설된 지 36년이 된 깊은 역사와 여건이 여타 재래시장과 달라 늘 세인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시장 부지 전체가 시유지로 돼 있고 부
금강산 여여원에서 모든 대중이 좌정에 들어있을 때의 일이었다. 침묵이 계속되던 중 효봉이 갑자기 돌아앉았다. 평소에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선 중에는 자세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좌중의 선정을 방해하면서까지 돌아앉은 것이다. 까닭이 있었다. 그때 효봉의 눈에 얼핏 비친 문밖 풍경 때문이었다. 문 밖에 효봉의 친아들이 아내와 함께 절구경을 하고 있는 게 얼핏 눈에 띄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 자식이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 선가에서만은 냉정하기 엄동의 쇳바람같아야만 한다고들 말한다. 효봉이 입적에 들기 전에 법정(法頂)이 물었다. 송광사의 법정 스님인 것 같다. “스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안 하십니까?” “나는 그런 소리 안할란다. 지금까지 한 말이 다 그런 소리인데.” 그러고 나서 임종게를 읊었다. 내가 말한 모든 법은 / 모두 다 군더더기 / 오늘 일을 묻는다면 / 월인(月印)이 천(千) 강(江)에 비치리라. 1966년 10월 15일 새벽 세 시였다. “나, 오늘 갈란다.” / “언제쯤 가시렵니까?” “오전에 가지 뭐.” / 효봉은 호도알 단주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무(無)라, 무라...” 오
“어려움은 또 다른 가능성 현실에 안주말고 뛰어라” 회사를 설립하자마자 경험해야 했던 부도위기는 지금도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 어려움이 나에게 채찍질로 다가와 남들보다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나에게 어려움은 단지 극복 가능한 가능성일 뿐이다. IMF때 창업 신천지 도전 열정으로 우뚝선 고무박사 “힘들다고 주저앉아버리면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아 뛰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지 이제 막 10년을 맞이한 제일산업(화성시 봉담읍 소재)은 10년을 한결같이 산업용 특수고무부품에 매진한 결과 매년 25%~30%의 매출 성장을 거듭하며 이 분야의 전문업체로서 한단계 한단계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업의 10년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였다. 첫 발을 내딛자 마자 터져버린 IMF경제위기와 재정문제, 영업을 하는데 있어 여전히 적용되는 학연과 지연에 대한 끈 등 넘어야만 하는 벽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제일산업의 정재홍 대표는 이러한 어려움이 모두 제일산업이 성장하는데 있어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장마철이면 서당에 들러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 시집가는 색시의 농짝을 밤새 져다주기도 하는 등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일하며 목숨이나 붙였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가, 무슨 일을 했는가, 이 모든 걸 다 잊고 싶었다. 그래도 마음이 허전했다. 그래서 그는 엿장수가 되어 전국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참회의 고행이었다. 그러기를 3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효봉은 평생 동안 참회의 길을 걸으리라 결심했지만, 무작정 쏘다닌다고 참회를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고는 업장을 풀어내고 죄를 더 깊이 참회하기 위해 불문(佛門)에 귀의하기로 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일 무렵이었다. 석두(石頭)를 은사로 득도한 그는 늦게 출가한 만큼 남보다 배로 정진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고, 손에서 불경을 놓지 않고 가부좌한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굳도록 참선에 열중했다. 입산한 지 여섯 해가 되던 해에 그는 일생 최대의 용단을 내렸다. 늦은 출가에다가 나이만 불어나게 되자 효봉도 큰 결심을 해야만 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작용했던 것이다. 독립 투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보다 더 큰 일이었다. 판사직을 내던지고 가출했던 일보다 더 중요한 일
멈추지 않는 혁신 명품교육 1번지로 수원북중학교는 다르다. ‘공부하는 학교, 예절바른 학교, 폭력 없는 학교, 깨끗한 학교를 만들자’는 방침이 교육 전반에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우선 북중학교는 자기만의 교육특색이 갖춰져 있는 학교다. 생활지도 상·벌점제, 상담실 운영을 통한 바른 인성 키우기,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푸른학교 만들기, 자기주도적 아침교육활동 등은 특히 수원북중만의 차별화 된 교육이다. 멈추지 않는 변화로 선진하고 있는 북중학교를 찾았다. 수원의 명문으로 불리고 있는 북중학교의 ‘명품교육 프로그램’은 이 학교의 교육 명물 중에서도 명물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학습, 교사들은 맞춤형 학생지도, 지역주민과 함께 숨쉬는 학교’가 북중학교 명품교육을 대표하는 3대 요소다. 북중은 상·벌점제, 자구노력을 통한 예산절감 방안, 정보통신 윤리교육을 통한 인터넷 중독예방, 윤독도서 시간을 통한 논술 사고력 키우기, 자기주도적 아침교육활동, 학부모와 함께하는 맞춤형 진학지도 등의 프로그램으로 명품교육을 실현시키고 있다. 먼저 북중학교 학생들은 스스
그때 청담은 다음과 같은 조사를 지었다. 아이고! 아이고! 큰 법당이 무너졌구나 어두운 밤에 횃불이 꺼졌구나 어린 아이들만 남겨 두시고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구나 동산이 물 위에 떠다니니 일월(日月)이 빛이 없도다 봄바람이 무르익어 꽃이 피고 새가 운다 1890년 격동의 조선 말기에 태어난 동산은 일제와 육이오와 군부 정치라는 역사적 혼돈기를 살았음에도 한 점 흔들림없이 수행에 전념하다가 1965년에 입적했다. 세수 76세, 법랍 53세였다.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선객이 쏟아져 나와 우리나라 현대 선맥을 중흥시켰으니, 성철, 광덕, 지유, 고산, 무진장 등이 다 그의 제자다. 동산은 그의 법호이고 법명은 혜일(慧日)이다 효봉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하필이면 혼돈이 극치를 이루던 구한말에 하필이면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명성왕후가 집안 싸움으로 나라 망치던 그 무렵에 태어났으니 말이다. 철이 들자 나라의 주인은 일제로 바뀌어 있었다. 그저 세상이 원래 그런 줄 알고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고 곧 평양의 고등법원으로 발령받아 판사로 일했다. 처음에는 절도니 폭행이니 하는 작은 사건이나 맡아서 그가 일제의 판사라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 팔달문(八達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長安門)의 화성을 생각하면 수원이 생각납니다. 파리의 에펠탑처럼 어떤 도시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상징물이나, 기준점이 되는 건물을 우리는 랜드마크(Land-Mark)’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도심 표지판 역할을 하는 시각적인 랜드마크도 있지만 감성적· 서정적 랜드마크도 있습니다. 본지는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다운시프트(Downshifts)족’의 등장과 관광과 문화 등 무형의 경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관광 소비자층인 ‘노블레스 노마드(Noblesse Nomad)’ 를 경기도로 끌어 들이기 위해 ‘경기도 新 랜드마크’를 설정, 기획 취재했습니다. 여행전문가로 알려진 이용환 소설가, 이재웅 시인의 맛깔나는 글, 취재기자의 현장탐방, 그리고 뉴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앵글의 사진으로 ‘경기도 新 랜드마크’ 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1. 평화ㆍ통일의 전초기지 ‘도라산역’ 2. 안성 바우덕이축제 (무형 랜드마크) 3. 수원 화성 (세계 유산 역사…
바야흐로 관광산업의 시대다. 이미 세계관광시장은 2000년 관광객 7억명, 관광수입 6천억달러로 그 규모가 커졌고 오는 2010년에는 10억명, 그로 인한 관광수입은 7천600억달러로 예측되고 있다. 이처럼 커져가는 관광시장의 추세에 따라 우리나라도 외래관광객 1천만 시대를 맞았다. 이에 발맞춰 도는 관광시장 개척을 위해 지난 2005년 국내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최초로 관광공기업을 설립하고 급변하는 관광시장의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경기관광공사가 올해 설립 5주년을 맞았다. 경기관광을 바라보는 안팎의 기대도 점차 커지고 있다. 임병수 경기관광공사 사장은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경기도는 타 시·도에 비해 관광영역 확대에 유리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며 “경기관광이 우리나라 관광의 어머니품 같은 역할을 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경기관광공사가 국내 최초의 관광 공기업으로서 선도적인 경영모델을 제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도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공사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경기관광은
이듬해 1936년에는 해인사 조실이 되었고, 이어 조계종 종정이 되었다. 이 해, 즉 1936년에는 그의 스승 용성이 동산을 불러 법인(法印)을 내어주고 전법게를 읊었다. 이제 해동 초조의 법인을 / 계율의 맥과 정법안장으로써 / 동산에게 전하여 맡기니 / 잘 지켜 끊어짐이 없도록 하라 동산의 선기를 엿볼 수 있는 선문답이 있다. 태국 승정 일행이 찾아와 동산은 함께 불국사에 갔다. 그때 동산이 다보탑에 조각된 사자상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말했다. “저 사자를 좀 보시오.” / “예.” “저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립니까?” / “…” “내가 태국에 갔을 때 대접을 후하게 받았는데 오늘 답례로 이 사자의 울음소리를 선사합니다.” 동산은 이때 일흔 셋이었다. 다보탑 돌사자의 포효에 태국의 승정과 그를 수행한 고승들의 입이 막혔다. 법석에서 누군가 동산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북송의 연수(延壽) 선사는 만일 심장과 간을 도려내도 목석 같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말했다는데,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