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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농업전문경영인] 여주채소공동육묘장 안병주 대표

일괄파종시스템 도입 등 아낌없는 투자
낮엔 육묘 돌보고 밤엔 품종 육성 열공
끊임없는 연구로 파종 노력비 65% 절감
총 매출 15억원… 완전 자립 꿈 이루기도

주야장천 육묘 열정 국내업계 대부 우뚝

우리 선조들은 예전 품앗이로 이집 저집을 돌면서 일을하는 협업의 개념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업에도 현대화 바람이 불면서 분업화가 이뤄졌다. 특히 육묘산업이 가장 두드러졌다. 육묘는 ‘묘 농사가 반농사’라는 옛말처럼 한해 농사를 좌우하기 때문에 농민들이 가장 많은 신경을 기울이는 부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농민들의 고민을 덜어주고자 탄생한 것이 육묘장이다.

쉽게 도전할 수도, 성공 여부도 확신할 수 없는 이 길에 겁 없이 뛰어들어 끝없는 노력과 투자로 육묘계의 대부로 불리우는 농업인이 있다. 바로 경기도농업전문경영인 여주채소공동육묘장 안병주(49) 대표. 육묘계에 발을 들인 뒤 ‘최고의 모종만이 농민을 살린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기술 접목에 온 힘을 기울인 안 대표는 현재 ‘접목묘(다른 채소와 접분이는 기술)’ 분야에서는 국내 육묘업계에서 최고의 반열에 올라있다. 또 가지와 고추, 오이 등 도내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류의 20%가 그가 키운 모종으로 재배·생산되고 있다.


 

육묘인생의 시작과 성공

전형적인 농업가정에서 태어난 안 대표는 처음 축산과 채소농사를 병행하며 부농의 꿈을 키웠다. 고교 졸업 후 젖소 3두로 시작했던 낙동도 10여년만인 1992년 착유우 25두의 중견 낙농인으로 성장하는 등 성공의 길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 대표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목표에 뛰어 들었다. 우리나라에 육묘에 대한 메커니즘이 정착되기 전인 1993년 육묘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든 것.

당시 시설채소단지를 운영하던 안 대표는 1993년 정부보조사업의 일환인 채소공정육묘장 대상자로 선정, 농림부의 지원속에 지역 5개 농가와 함께 여주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한 뒤 5천㎡(1천500평) 규모의 유리온실을 신축해 플러그육묘의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문 받은 모종을 잘못 키워 보상을 해주는 등 초기 사업은 실패 투성이었다. 게다가 자금 압박 등으로 인한 경영진 간의 갈등이 지속되며 영농조합법인을 탈퇴하는 농가들이 속출했다.

결국 안 대표는 1996년 자신의 목장과 젖소를 팔아 영농조합법인의 지분을 100% 흡수한 뒤 기술력 확보에 주력했다. 경기도농업기술원과 지역 농업기술센터의 문을 두드려 선진농업기술을 전수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괄파종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경영개선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또 낮에는 육묘를 돌보는 보모 역할을 하면서 밤에는 더 좋은 품목을 육성하기 위해 공부로 열정을 불태웠다.

이러한 노력의 끝에 안 대표는 파종노력비 절감 및 발아율 증가의 효과를 얻었고, 결주(실패율)를 최소화 하면서 1998년 7천500주의 채소 모종을 생산해 7억여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당시 손익분기 생산규모인 7천주를 돌파한 것으로 미래 종묘산업의 기틀이 됐다. 이후 매출을 꾸준히 끌어올린 안 대표는 4년 뒤인 2002년 총 매출 15억원, 순수익 3억원을 넘어서며 완전자립에 성공, 2007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욕묘인으로 거듭났다.

소득사업의 확대와 과감한 투자

여주채소공동육묘장은 과감한 투자와 개척의지가 배어 있다. 안 대표는 사업 시작 이후 쏟아 붇는 듯한 영농비용에다 기술력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996년 2천만원을 들여 일괄 파종기 시스템을 도입해 파종노력비의 65%를 절감하는데 성공했다. 시설과 작물관리를 종업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관리함으로써 발아율을 높이고, 결주를 최소화 해 나갔다. 이어 그는 1999년에는 6천여만원을 들여 보일러 난방시스템을 보수해 겨울철 난방비를 34%를 절감했고, 2001년에는 4천500만원을 투입해 비효율적인 벤치시설을 교체했다. 또 2002년에는 1억2천만원을 투자해 온습도 조절용 스크린을 포함한 접목·활착실을 보수하는 등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안 대표는 생산성 향상 뿐만 아니라 고정적인 소득 증대 사업에 대해서도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년간 고정적으로 투자되는 고정비를 줄임은 물론 육묘장 시설의 이용률를 높이고, 비수기 시설 이용을 통해 소득사업 증가시키는 방법에도 몰두했다. 특히 기계이앙육묘 농가가 기상이변 및 관리 부실 등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점에 착안, 1999년부터는 기계이앙상자 생산에 들어갔다. 초기 매출 4천만원, 소득 1천400만원에 불과하던 이 사업은 이듬해 2배 규모로 성장했고, 4년 뒤인 2003년에는 21배 규모로 확대되며 전국 최대 벼육묘공장으로 발전했다. 또 2006년에는 충북 음성에 제2육묘장을 새로 조성하는 등 지속적인 연구와 과감한 투자로 성공적인 육묘 사업의 모델이 됐으며 현재 육묘교육계의 ‘교육의 장’으로도 발전했다. 실제 여주육묘장은 전국 실업계고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교육현장 및 농촌진흥청 한국농업전문대학생들의 실습 영농현장으로 지정됐다.

꾸준한 기술 연구 및 건실한 육묘 생산

육묘사업 분야에 최고가 되기 위해 안 대표는 농업기술센터를 비롯해 도농업기술원과 농진청에서 주최하는 가종교육을 기회가 닿는 대로 참석해 이수했다. 특히 육묘기법 개발을 위해 홍농종묘를 비롯해 10개소의 육묘공장을 벤치마칭, 타 육묘장과의 차별을 이뤘다. 또 2003년에는 여주쌀 최고화와 쌀산업부문 전문인력 육성을 위해 여주군농업기술센테에서 운영중인 베스트 라이스(Best Rice) 농업인대학을 수료해 여주쌀 명성을 되찾는 데 앞장서고 있다.

안 대표는 건강한 육묘를 생산하기 위해 2가지 기준을 원칙을 하고 있다.

첫째는 주위 환경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육묘장에는 온습도 자동환경제어 장치를 설치, 묘가 원하는 환경속에 육묘되고 있어 병충해가 발생되지 않는다. 둘째는 육묘에 대한 애착과 관심다. 안 대표는 육묘를 하는 데 있어 이론에 치우친 관리가 아닌 주인의 행동과 관심을 통해 식물이 자란다고 믿고 있다. 이 때문에 안 대표는 육묘 하나하나에 365일 관심을 쏟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안 대표가 생산한 육묘는 소질이 좋아 농민들로부터 수확량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고 육묘단지 일궈 농업발전 기여하고파

“열매든 뭐든 뿌리가 강해야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습니다.”
여주채소공동육묘장 안병주(49) 대표는 농업의 길은 쉽게 도전하기도, 성공하기도 힘든 길이지만 지속적인 자기개발과 노력, 투자가 뒷받침 된다면 결코 어려운 길 만은 아니다”라며 “육묘의 길은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는 이어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내세울 것도 없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육묘단지를 일궈 농업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다음은 안병주 대표와의 일문일답.

 

   
▲ 안병주 대표
-육묘업에 발을 내디딘 계기는.
▲1993년 지역 농가들과 함께 채소공정육묘장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육묘 농사에 발을 내딛었다. 사업 초기부터 부족한 기술력 확보를 위해 매진했다. 도농업기술원과 농업기술센터, 농진청을 수시로 드나들며 선진 농업기술을 전수 받았다. 특히 지난 1996년은 기회의 해였다. 신기술 도입을 위해 일본 나고야 일대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연작장애 차단용으로 접목묘를 생산하고 있는 현지 농가를 보고 이를 도입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여주군 흥천면의 대다수 가지농가들은 연작장애로 고충을 겪고 있던 때였다. 일본 농가의 기술은 적중했다. 접목기술 도입을 통해 가지접목묘 1만5천주를 생산하는데 성공, 지금의 발판을 구축하게 됐다.

-육묘업을 이끌어 오면서 힘들었던 점은.
▲육묘계를 떠난 농삿꾼 대부분이 생산물에 대한 가격을 제대로 받지 못해 힘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채소값이 폭락할 때 가장 가슴이 아프다. 또 천재지변으로 1년 농사를 망친 농부의 사연 등을 접할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사업 초기는 육묘 농사에 대한 재배 기술 부족으로 실패를 거듭, 암담한 실정이었다. 게다가 운영자금 압박으로 어려움이 가중됐고, 벤치마킹할 장소 조차 부족했다. 결국 논과 밭, 목장과 젖소를 팔아 끝까지 밀고 가기로 마음먹고 잠도 잊었다. 그러나 거듭된 실패와 꾸준한 자기개발, 재배기술 확보 등으로 노하우가 쌓이며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겨 어려움을 극복할 수 수 있었다. 또 사업초기 육묘장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불구 수시로 견학오는 이들이 많았던 점도 사업을 이끌어 나가는 데 큰 힘이 됐다.

-앞으로의 계획은.
▲힘든 농사지만 의지만 있다면 도시민 그 누구 못지않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또한 보람을 동시에 일궈 낼 수 있는 매력 있다. 씨를 뿌리고, 삽목을 통해 자라난 묘들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하고, 삶의 의미도 되새기게 된다. 육묘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축소판과 같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내세울 것도 없지만 한국 최고의 육묘단지를 일궈 농업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또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을 알리는 쉼터 테마파크 조성도 꿈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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