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감미롭고 포근한 클래식 음악. 단연 타이스(Thaïs)의 명상곡이다. 멜로디를 들으면 천상의 세계, 평온의 세계에서 스르르 잠들 것만 같다. 이 곡은 쥘 마스네(Jules Massenet)의 걸작이다. 19세기말 프랑스 오페라계를 풍미한 마스네. 그는 이 곡 외에 마농, 베르테르 같은 굵직한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곡은 타이스 2막의 ‘명상곡’이다. 각종 광고와 김연아 선수의 갈라쇼를 환상적으로 수놓은 배경음악, 그게 바로 이 곡이다. 타이스. 이집트의 창녀다. 아나톨 프랑스가 쓴 소설을 루이 갈레가 각색했고 마스네가 오페라로 만들었다. “수도사 아타나엘은 유명한 창녀 타이스를 개종시키려 갖은 노력을 다한다. 타이스는 마침내 크리스천이 되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 칩거한다. 그러나 아타나엘은 자신이 집착해 왔던 건 관능미 넘치는 타이스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타이스는 속죄의 기쁨 속에서 죽음을 맞고 아타나엘은 신심을 잃은 채 절망한다.” 인간의 위험하고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다. 인간본능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19세기 대중은 이를 무척 불편해 했다. 타이스가 첨에 흥행에 실패한 이유다. 시대의 선봉장 마스네. 그는 분명 천부
'노랑예수'. 폴 고갱(Paul Gauguin)의 그림이다. 퐁타벤(Pont-Aven) 트레말로 성당의 나무 예수상을 보고 그렸다. 2년에 걸쳐 완성된 '노랑예수'. 19세기 프랑스 북부에서 펼쳐진 예수의 수난과 그 곁을 지키며 기도하는 브르타뉴 여인들의 모습이다. 예수의 강한 윤곽선과 평면적 구성, 여인들의 독특한 음영. 인상파와 결별한 새로운 풍이다. 노랑, 주황, 녹색의 가을 팔레트는 예수의 형상을 압도하는 노랑의 메아리로 울림이 크다. 프랑스 브르타뉴지방의 퐁타벤. 볼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밀감익기에 좋은 온화한 햇빛, 저렴한 생계비, 풍부한 현지소재. 가난한 예술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든 이유다. 고갱이 퐁타벤을 처음 방문한 건 1886년. 그 후 다시 찾아와 4년간 머물렀다. 야생의 마을이자 원시적인 곳. 고갱은 이런 퐁타벤을 무척 좋아했다. “화강암 위를 걷는 내 장화 소리를 들을 때, 난 그림에서 찾고자하는 은은하지만 강력하고 불투명한 소리를 듣는다”라고 표현했다. 그만의 스타일을 찾아 세계를 헤매던 고갱. 퐁타벤에서 급기야 그 꿈을 이룬다. 갑갑한 도회지생활을 벗어던지고 순수성과 고결성을 찾아 이곳에 왔다. 신선한 공기, 이국적 방언, 전통적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한국말 번역은 “불쌍한 사람들”, “가엾은 사람들”이다. 19세기 중반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쓴 대역작이다. 주인공 장 발장(Jean Valjean). 그는 어느 일요일 밤 모베르 이자보 빵집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쳤다. 그 일로 5년간 갤리선에서 노역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탈옥수로 잡혀 19년의 형을 살게 된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청춘이 산산조각 났다. 마흔 살이 되어 출소한 발장.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읽고 쓰고 셈하는 법을 열심히 배웠다. 영리해지는 길이 증오심을 기르는 일이라는 일념에서다. 발장을 통해 위고는 가난한 사람을 궁지로 모는 프랑스의 사회상과 인간군상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가난한 사람을 유독 옹호했던 위고. 그는 최후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걱정했고, 그들의 곁에 묻히길 희망했다. 그리곤 그들을 위해 5만 프랑의 유산을 남겼다. 너무도 인간적이었던 위고. 그는 작가이자 시인, 그리고 레지스탕스 운동의 수장이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나폴레옹 3세를 프랑스의 반역자라 비판했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위고.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파리를 1851년 떠나야 했다. 그에게 파
프랑스 고전음악의 대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그는 어릴 적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바다를 선율에 담으려는 큰 야망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 일본화가 호쿠사이의 '거대한 파도'를 봤다. 이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드뷔시가 '바다(La Mer)'를 작곡하기 시작한 건 욘(Yonne).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와는 거리가 먼 육지였다. 이곳에 드뷔시가 첫발을 디딘 건 아내 릴리와 함께. 욘의 비쉔(Bichain) 마을 오두막집을 얻어 드뷔시는 대작 '바다'에 몰두했다. 이때 친구 뒤랑(Durand)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바다'를 작곡하고 있네. 만약 신의 가호가 있다면 일이 잘 진척될 걸세.” 해변의 3막은 이렇게 간절하게 부르고뉴 포도밭 비탈길에서 시작됐다. 드뷔시는 비쉔의 고요함과 자연에 반했다. 부르고뉴와 일드프랑스 접경지역인 비쉔. 이곳 들판에서 만난 선량한 마을사람들에게 드뷔시는 그만 매료됐다. 여름이면 이곳에 와 순진한 시골 사람들과 비쉔을 둘러싼 다양한 나무들을 바라봤다. '바다'의 작곡은 파리로 돌아 와 계속됐고 노르망디, 제리, 푸르빌로 이동하면서도 계속됐다. 완성된 건 3년 만인
금발의 어여쁜 두 소녀가 피아노 앞에 있다. 한 소녀는 악보를 응시하고 다른 소녀는 건반을 두드리고 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Jeune filles au piano)'.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대표작이다. 파리에서 모델 살 돈이 없어 시골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르누아르. 마흔아홉에 행운을 잡았다. 프랑스정부가 룩셈부르크 뮤지엄에 전시하기 위해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산 것이다. 큰돈을 번 르누아르. 난생처음 파리에 집을 사고 에소이(Essoyes)에 아틀리에도 열었다. 늦게 인생이 활짝 피었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무지하게 고생한 흙수저였다. 재봉사인 아버지와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그. 부모님은 가난을 탈출하고자 세 살배기 르누아르를 업고 파리로 이사했다. 하지만 도회지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열세 살의 어린 르누아르는 결국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도자기공장에 취직해 문양을 넣고 부채를 그리고 장롱에 문장을 넣었다. 이때 8년간 야간학교에 다니며 장식예술과 데생을 공부했다. 그 덕일까. 르누아르는 스물한 살 때 프랑스 최고의 미술학교, 파리 에꼴 데 보자르에 합격했다. 여기서 모네를 만나 친구가 됐다
“거긴 가지 말아요! 그 나쁜 놈들은 빵을 만드는데 악마가 발명한 수증기를 사용한단 말이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의 숨결인 북풍과 동풍을 이용해 일을 하고 있소.”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풍차방앗간의 편지(Les Lettres de mon moulin)』다. 어두운 파리와 빛나는 프로방스를 대비시킨 이 단편은 도데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이 소설의 무대는 프랑스 남쪽 끝 퐁비에이유(Fontvieille).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무대인 아를(Arles)과 길쌈의 마을 파라도(Paradou) 사이에 있다. 옛날에 이곳엔 풍차방앗간이 많았다. 프로방스 사람들이 밀방아를 찧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파리에서 온 사람들이 기계방앗간을 세우면서 풍차방앗간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웬일인가. 언덕 위의 코르니유(Cornille) 영감님 풍차방앗간은 돌아갔다. 이 영감님은 빈 방아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밀을 안 마을사람들은 모든 밀을 코르니유 영감님께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 후 이 영감님은 절대로 일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골사람들의 인정과 의리가 산업화와 기계문명의 거대한 회오리를 막아낸 감동의 대서사시다. 프랑스
“바스크의 촉망받던 군인 돈 호세. 자신에게 꽃을 던져준 집시여인에게 영혼을 빼앗겼다. 착하고 얌전한 고향처녀 미카엘라와 결혼하려고 맘을 돌려 보지만 그 집시여인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비극의 오페라 카르멘(Carmen). 이 곡의 작곡자는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다. 그 역시 너무나 천재적 이어서였을까. 서른여섯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 않던가. 카르멘을 두고 한 말 같다. 비제는 파리에서 가발을 만들고 이발사를 하다 가곡 선생이 된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였을까. 피아노에 소질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건 어머니다. 비제는 어려서 피아노와 작곡 경연대회를 모두 휩쓸었다. 오페라를 작곡한 건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아름다운 ‘진주조개잡이(Pêcheurs de Perles)’는 스물다섯에 만들었다. 하지만 비제는 아직 성공한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에게 찬스가 온 건 파리 오페라 코미크가 카르멘을 주문했을 때. 비제는 야심찬 꿈을 갖고 부기발(Bougival)로 거처를 옮겼다. 센 강 둔치의 한적한 곳에서 카르멘을 쓰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그가 쓴 원고
“진실은 땅 속에 묻히면 점점 자라며 숨이 막혀서, 결국 그것이 터지는 날에는 모든 것을 날려버릴 만한 폭발력을 얻게 된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 에밀 졸라(Emile Zola)의 고발문이다. 진실의 은폐로 간첩이 된 드레퓌스(Alfred Dreyfus) 대위. 유대인이었기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이에 분노한 정의의 기자 졸라.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자뀌즈(J'accuse: 나는 고발한다)!” 이는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고, 마침내 지식인들의 선언문을 이끌어 냈다. 재판은 뒤집혔고 드레퓌스는 누명을 벗었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두 동강 나게 한 “드레퓌스 사건.” 이를 종식시킨 졸라. 프랑스 양심의 표상이 됐다. 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존경은 하늘을 찔렀다. 오죽했으면 사후 6년 만에 프랑스 위인들의 성전인 팡테옹에 그를 모셨을까. 하지만 졸라의 인생초년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모자라는 듯 말을 더듬고 국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타지에서 온 학생이 이처럼 꺼벙하니 프로방스 학생들은 그를 괴롭혔다. 이때 세잔이 나타나 구해줬고 그 둘의 우정은 시작됐다. 졸라는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도 연거푸 낙방했다. 대학을 결국 포기했고
투박한 남프랑스 사투리에 겁 많고 소심했던 폴 세잔(Paul Cézanne). 놀랍게도 큐비즘(입체파)의 거장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됐다. 이런 세잔의 그림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예쁜 사과였다. 왜 그랬을까. 세잔에게 사과는 우정과 아량, 인간애의 징표였다. '사과바구니'와 '7개 사과의 정물'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세잔의 사과가 이처럼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다. 19세기 중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의 부르봉(Bourbon) 중학교. “파리에서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그 학생은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이를 본 한 학생이 그 전학생을 도와줬다. 그 전학생은 어느 날 사과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바구니를 선물 받은 학생은 그 후로 계속 사과가 있는 정물만 그렸다.” 사과를 준 학생은 훗날 프랑스 대문호가 된 에밀 졸라(Emile Zola)이고 사과를 받은 학생은 세잔이다. 이 둘이 주고받은 학창시절의 우정. 이 추억이 세잔 그림의 주요 모티브였다. 세잔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생트-빅트아르(Sainte-Victoire) 산이다. 이 산은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대장주다. 하늘까지
레퀴엠(Requiem).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그래서일까. 무섭고 장중하고 근엄하다. 하지만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의 레퀴엠은 전혀 다르다. 지옥불처럼 요동을 치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아주 상냥하고 평화롭다. 죽음은 결코 황망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 이것이 포레의 철학이다. 그의 파반느(Pavane) 역시 너무도 아름답다. 피아노 선율과 트럼펫 소리는 우리의 심연을 오묘하게 파고들어 흔든다. 독일풍이 아닌 프랑스풍을 구가했던 포레. 키는 작았지만 뚝심의 사나이였다. 그의 고집은 프랑스 음악을 바그너 음악으로부터 탈피시켰다. 그가 격찬 받는 이유 중 하나다. 포레는 베를리오즈 시대가 가고 드뷔시의 시대가 오기 전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 하지만 그가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은 건 아니다.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유명하게 되자 비평가들은 흔들어댔다. 그러나 포레를 괴롭힌 건 혹평이 아니라 신체적 장애였다. 귀머거리 작곡가하면 베토벤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포레 역시 그러했다. 선율을 들을 수 없다면 작곡가의 인생은 끝난 게 아닌가. 하지만 역경 속에서 더 찬란했던 사람들이 있다. 포레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청각을 잃으면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