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브레(Combray) 역에 도착한 꼬마 푸르스트. 마중 나온 고모 부부를 따라 꽃향기 그윽한 산사나무와 오래된 장미나무가 찬란한 예쁜 정원의 오베핀(Aubépines)호텔로 갔다. 목가적인 전원 속에서 꼬마 푸르스트는 하룻밤을 자고 조개 모양의 마들렌느 빵을 먹었다. 거장 마르셀 푸르스트의 유년의 추억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한 콩브레 마을. 파리 남서쪽 90킬로 지점에 있는 외르-에-르아르(Eure-et-Loir) 지방의 일리에(Illiers) 시가 모태다. 이곳은 푸르스트의 보물 창고이자 뮤즈였다. 푸르스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의 소실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시간 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이 해답을 찾고자 그는 시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은 곳은 일리에. 그리곤 1913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을 발행했다. 그의 처녀작이었다. 푸르스트는 이 책으로 프랑스의 셰익스피어란 찬사를 받았고, 스탕달에 버금가는 스타로 등극했다. 한 오스트리아 공작부인은 푸르스트에게 결혼을 신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푸르스트는 독신으로 지냈고 스스로를 벼룩으로 자신의 저술을 소화 불가능한 누가(nougat)
2022년 1월 10일 15시. 파리 8구 마들렌느 대성당. 프랑스 전 장관 뤽 페리(Luc Ferry), 작가 라파엘 앙토방(Raphaël Enthoven), 방송인 시릴 아누나(Cyril Hanouna) 등 프랑스의 유명인들과 유고슬라비아 엘렌느 공주 부부 등 해외인사, 그리고 익명의 프랑스인 1000여 명이 모였다. 보그다노프(Bogdanoff) 형제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방송인 보그다노프 이고르(Igor)와 보그다노프 그리슈카(Grichka). 이들은 일란성쌍둥이다. 바늘과 실처럼 항상 붙어 다녔던 그들. 영혼의 반쪽이었을까. 그리슈카가 코로나 19로 세상을 떠나자 이고르도 6일 만에 같은 길을 걸었다. 데칼코마니를 보는 듯한 그들의 형상. 할리우드 배우 뺨치게 핸섬했었다. 그런 그들이 우주복을 입고 나타나 미래로 시간여행을 하고 천체의 신비와 빅뱅, 외계인 등을 '땅 익스(Temps X)'에서 거침없이 보여주면 시청자들은 홀딱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인기는 이 프로를 10년간 장수케 했다. 그 덕에 과학과 공상과학(Science fiction)이라는 딱딱한 주제가 대중과 아주 친밀해졌다. 물론 이고르와 그리슈카는
상반신의 여인 모나리자. 그녀의 살짝 머금은 미소는 백만 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그 미소를 찾아 파리 루브르 박물관으로 모여드는 세계인은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다. 500살이 넘는 그녀. 하지만 여전히 젊고 찬란하다. 이 신비의 여인을 탄생시킨 장본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éonard De Vinci). 다 빈치는 프랑세스코 델 지오콩도(Francesco del Giocondo)의 부인 플로랑틴 리자 게라르디니(Florentine Lisa Gherardini)를 보고 이 유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불어 이름은 모나리자가 아니고 조콩드(Joconde)다. 이 조콩드를 프랑수아 1세는 매우 사랑했다. 예술의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스카우트된 다빈치.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 뚜렌느(Touraine)로 왔다. 그는 여기서 말년을 보내며 왕의 수석 화가이자 기술자·건축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의 직업은 이 밖에도 과학자, 발명가, 해부학자, 조각가, 도시계획가, 식물학자, 음악가, 시인, 철학자, 작가 등 어마어마하다. 인간이라기보다 신에 가까웠던 다 빈치. 그의 수많은 예술작품과 발명품은 혁명 그 자체였다. 그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는 물론 지금까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마치 꽃들이 동 트는 새벽의 입맞춤에 피어나듯! 하지만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여, 더 잘 내 눈물을 말리기 위해, 그대 음성을 더 들려주세요! 영원히 데릴라의 곁으로 돌아온다고 말해 주세요! 너무도 애절한 아리아다. 용맹한 이스라엘 장군 삼손. 그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필리시테인 여인 델릴라. 백성을 배반하고 한 여인을 택하는 나약한 남자의 비극.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는 이 이야기를 '삼손과 델릴라(Samson et Dalila)'에 담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오페라곡은 탄생 당시 공연 금지명령을 받았다. 성경과 달리 묘사된 삼손이 프랑스 교회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결국 국경을 건너 독일로 갔다. 리스트는 생상스를 도와 바이마르 대공 오페라하우스에서 삼손과 델릴라를 연주하게 해 줬다. 고진감래라던가.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관객들의 찬란한 박수가 쏟아졌다. '동물의 사육제'로 더 유명한 생상스. 그는 파리 자르디네(Jardinet) 3번지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작곡을 시작했고, 열 살 때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가 됐다. 천재란 말을 다시 한번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상스의 음악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거대한 대기가 내 책을 폈다가 다시 접는다. 가루 같은 물결이 바위에서 솟아난다! 날아가거라 정말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희열하는 물로 부숴라. 삼각돛들이 모이를 쫓고 있는 이 지붕을. 계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거대한 바람, 치솟는 파도, 부서진 포말. 시원하고 거침없는 한나절의 해안가 파노라마다. 해변의 묘지(Le Cimetière marin). 20세기 최대의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대표작이다. 이 시를 발레리는 그의 고향 세트(Sète) 언덕에 있는 한 공동묘지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 스산한 공동묘지. 그 묵중함을 경쾌한 미로 승화시키는 이 마법. 거장 발레리가 아니면 누가 감히 이 기교를 부릴 수 있겠는가. 이 마법은 발레리의 고향 세트로부터 나왔다. 발레리의 정신적 동반자였던 세트. 그의 시의 원천이자 사고(思考)의 모태였다. “항구 근처의 비탈길과 골목길, 박물관, 고등학교, 방파제 근처의 원형교차로, 공동묘지, 등대.” 세트의 경치를 노래하기 위해 발레리가 자주 동원한 단어들이다. 자기 고향을 너무도 사랑했고 예찬했던 천재 시인. 그는 어느 날 예술가 친구
11월의 어느 날. 프랑스 북부 해안가 아치형 절벽 밑에서 한 남자가 그만 화폭을 접는다. 그리곤 곧장 연인에게 편지를 쓴다. “이곳은 지금이 제일 좋아요. 이 모든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 무능함에 화가 납니다.” 끌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이야기다. 이 남자를 절망시킨 곳. 그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에트르타(Etretat). 파리 북서쪽 200킬로 지점에 있는 알바트르(Albâtre) 해안가의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희한하고 아름다운 석회암 절벽들이 있다. 이 절벽들 위로 미끄러지듯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광선은 신비 그 자체다. 코끼리 형상의 절벽 끝에 나 있는 성문의 실루엣은 어떠한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닮았다. 여기에 풍요로운 전원, 울퉁불퉁한 절벽에 출렁이는 바다, 해안에 좌초된 배까지. 이 보다 더 완벽한 그림 구도는 없다. 에트르타 마법. 이 마법에 걸린 모네는 50여 점이 넘는 그림을 여기서 남겼다. 사실 모네 하면 아름다운 수련(Nymphéas)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수련 연작은 모든 걸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모네는 자연 속에 빠져 풍경을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그중 하나가 에트르타
딴 따다다 다 따다다 다~ 딴딴 따다다 다~~ 드럼이 조심스럽게 장단을 쳐 들어간다. 플루트가 마법의 소리를 내며 합류한다. 환상적 듀엣의 하모니는 반복적으로 계속된다. 첼로와 바순, 클라리넷은 혹여나 지루할까 끼어든다. 드럼은 첫 동작을 한 치의 흐트럼 없이 반복하고 플루트는 톤을 높여 재등장한다. 하프, 기타, 바이올린, 트럼펫, 피콜로, 트롬본, 심벌즈... 이 세상의 온갖 악기가 하나씩 합세하며 오케스트라는 절정에 도달한다. 지극히 단순한 템포와 리듬.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리드미컬하고 몽환적이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기발하다. 볼레로(Boléro). 독창적인 이 곡은 기존 음악의 틀을 완전히 깼다. 라벨은 이 곡을 당대 최고의 러시아 무용수 이다 루빈시테인(Ida Rubinstein)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이 곡은 라벨이 스페인 안달루시아 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라벨과 스페인.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 라벨은 1875년 피레네-아틀란티크 주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759킬로 떨어진 서남단의 작은 마을 시부르. 이곳은 프랑스의 끝 지점이고 스페인의 시작 지점이다. 우뚝 선 피레네산맥과 푸른 대서양
천재는 요절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이야기다. 1960년 1월 4일 새해 벽두, 에트랑제(이방인)의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46세 카뮈의 갑작스런 죽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지 겨우 3년째 되었을 때였다. 카뮈는 이날 루르마랭(Lourmarin)에서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 갈리마르 사장 부부와 함께 파리행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신의 장난인가. 그가 탄 자동차는 목적지에 거의 도달해 가로수를 들이받고 산산조각 났다. 얄궂은 신의 질투였다. 카뮈가 마지막 자동차를 탔던 보클뤼즈(Vaucluse) 루르마랭. 그는 여기서 수많은 소설을 잉태했다. 카뮈는 이곳에 살기를 오랫동안 염원했다. 그가 처음 이곳을 방문한 건 서른 살 때. 시인 친구 앙리 보스코(Henri Bosco)를 만나러 갔다. 둘은 그날 전갈(scorpions)이 가득한 루르마랭 성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그 후 카뮈는 이곳에 둥지를 틀고자 꿈을 더욱 키웠다. 꿈꾸는 자 꿈을 닮는다고 했던가. 카뮈의 경우가 그랬다. 1957년 10월 스톡홀름은 그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줬다. 노벨문학상으로 받은 거액의 상금. 수상 소감을 마치고 연단을 빠져나오는 카뮈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카뮈 씨
한 남자가 거울 앞에 앉아 있다. 손에는 가위를 들고 있다. 그 남자는 그만 자기의 귓불을 싹둑 자르고 만다. 이 잔인한 남자는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였다.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 일요일, 온종일 비가 내렸다. 마을은 인적이 끊겼다. 창녀촌과 우체국만은 예외였다. 이 시절 우체부는 일요일도 근무했다.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고흐는 환청과 환각으로 몸부림쳤다. 그때 우체부가 동생 테오의 편지를 들고 왔다. 프랑스 남부 아를(Arles)에 있는 고흐의 노란집이었다. 비극! 하지만 아를은 고흐에게 영혼의 문이었다. 고흐가 아를에 정착한 것은 순전한 우연. 2년간의 파리생활을 접고 고흐는 남쪽으로 햇빛을 찾아 떠났다. 번잡한 도시생활과 북쪽지방의 살벌한 날씨에 짓눌려 따뜻한 태양이 그리웠다. 무엇보다 새로운 화법을 완성하기 위해 프로방스의 빛과 색깔들이 필요했다. 따라서 마르세유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사고 아닌 사고가 났다. 아를에 반하고 말았다. 결국 마르세유를 배신해야 했다. 아를의 농촌은 고흐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줄 것만 같았다. 고흐가 도착한 건 2월. 엄동설한이었다. 그러나 곧 포근한 봄이 왔다. 고흐는 온통 헤집고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피아노곡은 단연 짐노페디(Gymnopédies)다. 이곡은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의 대표작이다. 짐노페디란 무엇일까. 프랑스어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어다. 문학을 즐겼던 사티는 플로베르의 소설 살람보(Salammbô)와 고대 그리스춤에서 영감을 얻어 ‘짐노페디’를 만들었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추는 춤.” 사티는 몽마르트르를 오가며 말라르메, 베를렌느, 꼭도, 피카소 등을 만나 우정을 쌓고,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이는 그의 음악에 큰 영향을 줬다. 주옥같은 그노시엔느(Gnossiennes)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어 ‘크노소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인생은 아이러닌가. 피아노에 소질이 없다는 평가를 받던 사티가 피아노의 대가가 됐으니 말이다. 사티는 노르망디 옹플뢰르(Honfleur)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파리로 오지만 갑자기 어머니를 잃고 형과 함께 다시 옹플뢰르 할머니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다시 파리로 아버지를 찾아오게 된다. 열 살 연상의 피아노 선생과 재혼한 아버지. 그 여인이 사티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것이다. 사티는 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