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은 넷플릭스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연상호의 신작 영화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연상호가 왜 이렇게 ‘정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상력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냈을까,가 하나이고(원작 웹툰은 연상호와 최규석의 공동저작이다. 아마도 연상호가 스토리를, 최규석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 하나는 도대체 멕시코의 대표적인 감독 알폰소 쿠아론(‘그래비티’, ‘로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 수상했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영화의 기획에 참여했을까 라는 점이다. 뒤의 것은 특히 연상호가 인터뷰를 통해 직접 밝히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는 내용이다.(공식 인터뷰는 24일 있을 예정으로 이 글은 그 전에 작성된 것이다.) 영화 ‘계시록’은 연상호의 유명 드라마인 ‘지옥’ 시리즈나 ‘방법’같은 작품과는 다른 선상에 있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지옥의 사자가 나오고 ‘방법’에서는 죽은 자들이 살아나 살인을 저지른다. 극단의 상상력의 캐릭터를 앞세운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이번 ‘계시록’은 그보다는 현실 세계에 좀더 발을 붙이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대중들에게 다소 외면받았던, 연상호의 저주받은 걸작에 해당하는, ‘염력’이란 영화에 더 가깝게 서 있는 작품이다. ‘염력’은 이른바 용산사태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 같은 내용이었다. 무자비한 철거 전쟁에서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다면 차라리 염력을 쓰는 남자가 있었어야 한다는, 연상호 특유의 사회적 상상력과 인간적 고민이 개입된 작품이었다. 이번 영화 ‘계시록’도 같은 선상에 있다. 폭력성이 내면화 될 대로 내면화 돼 있어서 어떻게 손 쓸 재간이 없을 만큼 망가져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연상호는 그 나름대로의 치유책, 치료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사회의식을 한층 더 개입시키고 발전시킨 작품이다. 지옥의 사자나 좀비 같은 캐릭터의 도발성을 없앴지만 사회의식 면에서는 자신이 더욱 도발적인 면을 지니게 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시록은 요한 묵시록의 다른 이름이다. 성경의 마지막 권이며 총 22장 22절로 돼있다. 사도 요한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규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믿음을 저버리면 7년 환난 등이 도래할 것이라는, 다소 무섭고 위협적인 내용으로 돼있다. 흔히들 성경의 종말론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교파, 특히 이단들은 이를 예수 재림의 근거로 삼으며 기행과 비행을 일삼는 ‘말씀’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화 ‘계시록’은 제목만으로도 한국 교회’들’의 비이성적 상황을 설정으로 삼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요 인물은 세 명이다. 경기도 무산이라는 곳(가상의 공간이다.)에서 개척교회를 일구고 있는 목사 성민찬(류준열)이 있다. 여기에다, 여자나 여아를 유괴납치해 학대를 일삼는 이상성격의 범죄자 권양래(신민재)가 성민찬과 얽힌다. 형사 이연희(신현빈)는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 이연주(한지현)를 권양래에게 잃었다. 이연주는, 권양래에게서 간신히 탈출했지만 법원이 그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외눈박이 귀신’에게서 정신을 지배받고 있다는 정신과 의사(김도영)의 법정 진술에 따라 가벼운 형을 언도하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언니 이연희 경위는 복수심에 강력반에 지원을 한다. 그녀는 권양래의 뒤를 좇고, 캐고 있는 중이다. 사건의 발단은 교회에서 벌어진다. 권양래는 범죄 욕구가 다시 도진다. 그는 중학생인 신아영(김보민)의 뒤를 좇아 오다가 교회까지 오게 되고 목사 성민찬의 눈에 띄게 된다. 성민찬은 그가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성민찬의 아내는 목사 부인임에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성민찬도 그걸 알고 있다. 성민찬은 무산시에 들어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직을 노리고 있어서 아내의 간음 행위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내는 여느 때처럼 동창 모임이 있다며 불륜남을 만나러 나가고 그날 저녁 아이가 사라진다. 성민찬은 그것이 권양래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추적하다가 천일산 여우고개라는 길목에서 그를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 영화의 드라마는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성민찬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경사 이연희는 권양래를 체포해 없어진 중학생 아이 아영의 행방을 찾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환각 속에 나타나는 죽은 동생 연주의 명령대로 가차없이 그를 죽이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린다. 이 둘과 맞닥뜨리게 되는 권양래는 스스럼없이 둘 다를 향해 자신보다 더 미친 인간이라고 소리지른다. 권양래가 외눈박이 괴물에 시달리는 것과 목사 성민찬이 모든 것을 하늘의 계시라고 부르짖는 것, 형사 이연희가 환각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은 모두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다.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성격의 이상질환이다. 그 모든 것은 개개인 스스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핑계나 해법을 위해 창조해 낸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잘못된 확신이며 유괴범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목사가 하느님을 내세워 혹세무민 하려는 것, 형사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모두가 같은 소행이다. 연상호의 영화 ‘계시록’이 보여주려는 주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연상호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갖가지 이상 징후에 시달리고 있고 그 원인은 개개인 모두 스스로의 환각과 광적인 확신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가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스토리가 다소 극단적으로 포장돼 있지만 연상호가 내리는 진단의 요체는 꽤나 명징한 셈이다. 연상호의 기독교 비판은 일관적이다. 그건 ‘지옥’같은 드라마에서도 두텁게 제기됐던 부분이다. 연상호는 기독교가 사람들을 광적으로 만들고, 잘못된 확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타락의 최극단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순전히 사업상의 이익을 위해 신도들을 모으고 결국 대형화의 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여전하다. 이번 ‘계시록’ 또한 그 같은 자신의 기독교관을 여지 없이, 과감하게 개진하고 있다. 교회는 위선적이고 타락했다. 연상호가 그려내는 공간 또한 늘, 한국사회만큼 불안하고 불길하기 그지 없다는 것 역시 특징 중 하나이다. 비가 자주 내리고 음습한 산길의 구부러진 길이 종종 부감 쇼트로 보여진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그것이 마치 하늘 위에서 누가 내려다 보는 것 같은 시점 쇼트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폐건물, 남루한 골목길, 영세민의 집안 풍경 등 연상호가 그리는 한국 사람들의 일상은 비루하기 이를 데가 없다. 영화 ‘계시록’이 묵시록이자 종말론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인 양 지금의 우리사회가 매우 어두운 지경과 그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려 애쓴다. 무섭고 끔찍하며 잔혹한 이미지와 서사를 즐겨 사용함으로써 호러 장르 감독의 카테고리에서 거의 벗어난 적이 없는 연상호는 이번 ‘계시록’에서만큼은 그다지 무섭지 않게 그려낸다. 물리적 폭력이 즐비하게 표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안의 내면은, 과할 만큼 불길하다.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극단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지, 또 얼마나 쉽게 그런 생각이나 이념, 종교에 사로잡히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상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번 ‘계시록’은 그 어떤 작품보다 한국사회에 대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의미성 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 때문에 영화가 다소 재미가 없어졌거나 연상호 특유의 감각이 떨어졌다거나, 기이한 ‘글로벌 표준율’같은 작품이 됐다거나 하는 지적은 있을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지옥’의 연상호보다 이번 ‘계시록’의 연상호를 더 지지하게 된다. 넷플릭스에 지난 3월21일 공개됐다. 아직 글로벌 순위에서는 그리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다. 호불호가 크게 엇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조 샐다나)에 빛나는 ‘에밀리아 페레즈’는 트랜스 젠더에 대한 얘기이다. 이런 소재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낯설고 기괴한 이야기일 수 있다. 게다가 배경은 멕시코이다. 이국적이다. 해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국내에서는 어떨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두 가지 점에서 그 ‘전이(trans)’의 욕망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성 전환을 넘어서 트랜스 휴먼, 곧 인간 변이까지를 꿈꾼다는 점이다. 주인공 델 몬테(칼라 소피아 가스콘 1인2역)는 멕시코에서 가장 잔혹한 마약 카르텔의 두목이다.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 해도 사람들은 심장이 떨려 혼비백산할 정도이다. 그는 애초에 얼굴이 알려져 있지도 않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를 부른다. 리타는 악덕 로펌에서 일하며 먹고 살기 위해 정의에 눈감고 돈이 되는 사건만을 좇아 살아가는, 자신의 현재적 삶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는 참이다. 얼마 전에도 아내를 때려서 살해한 한 부호 남자의 변호를 맡았으며 증인을 검시관을 매수해 사건을 뒤집기까지 했다. 그런 리타를 델 몬테 부하들이 두겁을 뒤집어 씌워 납치한다. 리타는 그간 델 몬테의 돈 세탁 같은 ‘잡일’을 도왔으나 이번만큼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다. 리타는 곧 델 몬테의 완벽한 신분 세탁, 곧 여성으로 성 전환을 한 이후에 발생할 모든 법적 사회적 문제를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당연히 막대한 돈을 받는다. 그녀는 다니던 로펌을 때려 치우고 델 몬테가 스위스에서 수술 후 오랜 치료를 받는 동안 자신 역시 런던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으려 한다. 인간이 성을 바꾸면 본질도 바뀌게 되는가. 외형이 바뀌면 성정이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자신 안에 갖고 있던 여성성이 수술까지 결심하게 한 것일까. 그 앞 뒤 전후의 요인은 과연 어떤 것이 정답인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리고 놀랍게도, 사람들을 가차 없이 잔혹하게 살해해 온 델 몬테가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여성성이 있음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또 언제부턴가 그 모든 ‘악마의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라이벌 세력이나 경찰의 눈을 피하는, 도피와 은둔을 목적으로 성전환 수술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특히 남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제거하는 수술까지 감행하지는 못한다. 남자에게 있어 ‘거세 공포증’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델 몬테는 에밀리아 페레즈(카를로 소피아 가스콘)로 거듭난 후 작정한 듯 자신을 완벽하게 변이시키는 데 성공한다. 델 몬테는 이제 돈이 많은, 풍만하고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신한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가 주력하는 또 다른 전이의 욕망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것이다. 서사가 지닌 흐름만으로 짐작하기에 이 영화의 장르는 갱스터 무비이다. 물론 델 몬테가 나오는 장면은 그렇다. 그러나 또 한번 놀랍게도 영화는 뮤지컬이다. 노래 장면으로 전편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주요 장면 모두가 출연 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으로 주인공 에밀리아 페레즈가 자신이 몰래 버린(수술을 하느라) 아내 제시(셀레나 고메즈)와 두 아이들을 되찾아 가정을 복원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가족영화이기도 하다. 페레즈는 중간에 자신이 ‘묻어 버린(살해를 지시한)’ 라이벌 갱단 조직원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육체 관계까지 맺는다. 둘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영화는 러브 스토리로까지 나아 간다. 갱스터 영화에서 뮤지컬 영화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다소 무리하다 싶을 만큼 이야기의 중심을 향해 횡단과 종단을 오간다. 영화를 연출한 프랑스의 유명감독 자크 오디아르(‘러스트 앤 본’ “예언자’ ‘파리, 13구역’ 등)의 목표는 모든 장르를 뒤섞어, 인공적으로 완전히 다른 장르를 만든 후(마치 성전환 수술을 하듯) 매우 새로운 느낌의 영화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모든 뮤지컬 영화가 그렇듯이 ‘에밀리아 페레즈’도 놀라우리 만큼 인공적이다. 당연히 작위적이다. 사람이 대화를 하다 말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춤을 춘다. 전통적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색해 할 만 하다. 그런 장면들을 이어 가다 보니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촬영과 조명에 막대한 공을 들였다. 장면 하나하나가 뮤지컬 무대에서 잘 연습된, 배우들의 군무를 보는 느낌을 준다. 배우들이 춤을 추는 모습은 마치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보는 느낌마저 준다. 그렇다면 자크 오디아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영화적 전환을 넘어 변이까지도 이루어 냈는가. 일부는 그렇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왜 이 영화가 뮤지컬적인 요소까지 결합했는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오디아르의 영화적 실험이 꽤나 놀랍고 신선하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오디아르는 적어도, 영화가 계속 새로운 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그 진보성을 입증해 내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숀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가 너무 강세였고, 결국 주연상은 26살의 신예 마이키 매드슨에게 돌아갔다.) 사실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충분히 주연상을 탈만 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가스콘은 이 영화에 나오기 전 카를로스 가스콘에서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으로, 그러니까 남성에서 여성이 됐다. 한번 여성이 된 사람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도 자신에게 잔재처럼 남아 있는 남성성을 제거하려 애쓴다. 그러나 가스콘은 이번 영화에 나오면서 턱 수염과 얼굴 근육의 특수 분장을 통해 다시 델 몬테라는 남자로 변신한다. 사전 정보가 충분치 않다면 이 둘을 같은 여자, 혹은 같은 남자였던 사람으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다. 충분히 주연상 감이었지만 SNS에 올린 인종 및 민족 차별적 발언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사람들은 가스콘이 성소수자인 만큼 그녀의 차별 의식에 반기를 들었고 그게 그녀로 하여금 수상권에서 멀어지게 했다. 자크 오디아르가 이루려 했던 영화의 전이, 세상의 전이를 불가능하게 한 요소는 한 개인의 그릇된 판단에서 나왔다. 아이러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인공적이고 그래서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지만 재미있고 격렬하며 섹시한 영화이다. 감독상을 수상한 숀 베이커의 말처럼 ‘극장에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영화’이며 TV 수상기가 아무리 크게 나온다 한들 이건 극장에서 봐야 할, 전통적 극장주의의 작품이다. 조연상을 받은 조 샐다나의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는 드라마 연기에서 노래와 춤 연기까지 영화를 온통 휘젓고 다닌다. 배우란 이런 것이다라는 점을 보여 준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고매한 성취를 보여 준다. 적어도 이제 우리에게 트랜스 젠더의 존재는 더 이상 부자연스럽지 않게 느끼게 한다. 그게 정말 어디인가.
감독 김대현이 만들고 송귀철 주연(아역 송정빈)의 영화 ‘정돌이’는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이다. 정돌이는 고려대 정경대 건물, 정경관에서 10대 시절을 노숙하며 보냈던 송귀철씨의 별칭이었다. 정경대 아이라는 것이다. 그는 14살 때 집을 나왔는데 그건 어머니가 그에게 500원을 쥐어 주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어린 나이에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이 아이는 집을 나와 청량리를 배회하다가 행정학과 3학년에 다니던 서정만을 만나게 되고 그의 손에 이끌려 고려대 안으로 들어 오게 된다. 서정만은 시위 주동자로 몰려 도피 생활중이었다. 그는 청량리 만화방을 전전하던 중이었다. 정돌이가 정돌이가 된 것은 이 만남이 계기가 됐다. 정돌이는 87년 형 누나들에게 농악을 배워 1992년 필봉농악을 배우기 위해 전라도의 한 지역으로 옮기기까지 5년간 고대 캠퍼스 안에서 풍찬노숙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 정돌이를 놓고 정경대와 사범대가 양육권 다툼이 벌어진다는 농담이 오갔을 만큼 이 아이는 고대 운동권의 마스코트가 됐다. 한때 정돌이였던 송귀철은 현재 ‘사물놀이 미르’ 대표이다. 영화 ‘정돌이’는 저항과 연대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영화는 정돌이라는 극적인 인물의 생애를 담는 척 사실은 84년 학번을 중심으로 한창의 고대운동권이 형성된 1987년 전후의 학생민주화 시위의 역사를 추적한다. 광주에서 저지른 전두환 학살 사건이 어떻게 광주민중항쟁으로 승화되고 서울대 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한국의 사회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자기희생을 감행해 나갔는지가 펼쳐진다. 다 아는 얘기지만 새삼 새롭다. 그 사이사이 전개됐던 소위 5.3인천 사태, 건대 사태, 전두환의 호헌 철폐를 위해 벌어졌던 6.10 항쟁 등 실로 뜨거웠던 역사의 기록들을 이어 나간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이른바 386 세대들조차 "우리에게 과연 저런 일들이 있었는가"라는 기시감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과연 한때나마 사회민주화를 위한 가열차고 영웅의 시대가 있었는가를 다소 참담하고 자괴스런 느낌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정돌이, 송귀철 씨가 현재의 삶을 이루게 된 데는 정경관에 머물고 숙식을 하면서 그 건너편 학생회관에 있었던 탈사랑우리회, 고대 농악대와 접촉하게 되면서이다. 그는 여기서 장구를 배웠고 지금은 장구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송귀철이란 사람의 인생유전은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영화 ‘정돌이’는 민주화 투쟁과 정돌이의 성장 과정을 오가며 당시의 시대가 만들었던 역사적 정당성, 그 진심을 알리려 애쓴다. 정돌이는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으로 솟아올랐던 전국 시위에 형 누나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다. 한 인간의 정치의식이란 것이 사실은 (거대한 철학 이론에서가 아니라) 얼마나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산증인 같은 사례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화 ‘정돌이’는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건 어쩌면 고대 운동권 학생들만의 얘기일 수 있고, 때문에 너무 특수한 얘기라는 취약성을 지니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봐서는 고려대가 아닌 다른 전국 대학의 운동권 출신들이 이 영화에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으며 그 차원을 넘어서서 1980년대의 한국 역사를 고려대라는 캠퍼스에만 가둬 놓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대현의 연출은 그 같은 약점을 잘 간파했던 듯이 보인다. 특수가 보편을 만들고 보편이 특수를 만든다는 변증 이론이 영화 곳곳에서 전개된다. 정돌이란 인물에서 당시 학생운동가들에 대한 인터뷰가 빈번하게 교차편집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돌이, 곧 송귀철은 자신의 기억으로 80년대를 증언하고 서정만, 김영남, 이윤경, 손병휘, 안태용, 양창욱, 노충관, 임혜숙, 이준영, 강신 등등 다양한 인터뷰어들은 각자 자신이 경험했던 당시 시대에 대한 ‘사회적’ 진술을 이어 나간다. 이들의 증언은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지점으로까지 확대된다. 정돌이는 사회의식화가 된 인물로 성장했으며(스스로도 중간에는 자신이 투사가 됐었다고 말한다) 운동권 학생들은 어느덧 늙고 평범한 중년들로 사회에 녹아들었다. 특수에서 보편으로 보편에서 특수로, 그럼으로써 영화는 그 시대에 대한 총체성을 이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연출의 고뇌는 충분히 평가할 가치가 높다. 미국의 1960년~1970년대도 뜨겁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학생운동가 톰 헤이든은 격렬한 청춘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제도권 변호사로 안착했으며 제리 루빈이나 에비 호프먼 같은 사회주의적 운동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삶도 이후에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변질됐다. 할리우드는 그 얘기들을 숱한 극영화로 만들어 왔다. 아론 소킨의 ‘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7’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고대 학생 운동권의 이야기, 나아가 한국의 학생운동가들의 이야기, 더 나아가 한국의 민주화 투쟁의 이야기는 풍부한 드라마, 극영화로 선뜻 만들어 나가기가 힘이 든다. 사실과 진실의 규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도 많으며 여전히 그에 대한 반동적이고 반민주적 행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정돌이’는 시의적절한 시기에 개봉이 됐다. 소수이긴 하지만 비교적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계엄령 소동 이후 서부지법을 침탈한 난동세력의 젊은이들 모습을 보면서 1980년대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때를 진실되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는 언제든 환영받고, 공유되며 그럼으로써 새롭고 역사적인 ‘의식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정돌이’는 정돌이란 인물을 찾아서 긴 여정을 탐색하다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되짚어 가고, 지금과 같은 왜곡의 시대에 그때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프로퍼간다(선전선동)' 영화인 듯 보이지만 흔한 프로퍼간다 작품들과는 달리 인간미와 함께, 시대에 대한 진정성이 녹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영화 ‘정돌이’에는 고인이 된 인물들에 대한 기억과 회고가 많이 이어진다.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故 김두황의 경우 강제징집, 곧 강제로 군에 입대한 후 사망을 했고 군에서는 자살로 처리했지만 수많은 의혹이 규명되지 않아 여전히 의문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영화 ‘정돌이’는 수많은 죽음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할애하고 있다. 미국의 노동운동가이자 기자였던 존 리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후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르포르타쥬를 썼고 1920년 내전에 휩싸인 혼란의 소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얘기를 다룬 워렌 비티의 영화 ‘레드’는 오프닝에서 8,90대의 늙은 노인들, 부부들을 인터뷰 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실제로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존 리드와 함께 미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 “우리에게 그런 날들이 있었나? 그런 날들이 있었다고들 말들은 해? 우린 이제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영화 ‘정돌이’를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 영화 ‘레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에게 80년대가 있었던가.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희생됐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 그 시절이 몽땅 부정되고 있는 듯한 지금의 시대에 영화 ‘정돌이’는 우회적으로 그 정치적 망각을 질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의 2,30대 젊은이들이 봐야 할 절실한 작품이지만 그것도 한편의 생각일 뿐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결코 안녕치 않은 것은 그때문이다. 지난 2월12일에 개봉됐으며 전국의 작은 극장을 순회하며 상영중이다.
얼마 전 타계한 전설의 감독 데이빗 린치(LA 산불이 원인이었다)의, 역시 전설적인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3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더라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사람들의 지력도 높아져서 영화의 내용 중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비현실인지를 구분할 수는 있을 정도가 된다. 영화가 얘기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실제로 벌어졌고 어떤 것이 벌어지지 않은 일인가. 그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구분이 정말 필요하냐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곧 멀홀랜드 도로는 할리우드 블로바드(대로) 혹은 선셋 블로바드 같은 LA의 주요 거점에서 휴양지인 산타 모니카로 넘어 가는 능선 도로 길이다. 비교적 위험한 산길 도로이고 그 아래 가파른 비탈에는 영어로 할리우드 알파벳 입간판이 크게 설치돼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으며 그곳에서 LA 도시 전경과 그 너머의 태평양 바다를 볼 수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전망대에서 보는 LA의 야경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필름 누아르(film noir)나 미스터리 영화에서 많이 쓰인다. 추적 씬, 비밀스러운 만남, 돈 거래, 정부와의 밀회 등등이 다 이곳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찍힌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이야기, 서사의 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일단 캐나다 온타리오 딥 리버에서 온 배우 지망생 베티(나오미 왓츠)가 LA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베티는 고모이자 할리우드 배우인 루스의 비벌리 힐스 집에 머물 예정이다. 당연히 베티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녀는 중간에 누군가에게 끌려가 대형 세트장에서 진행되는 오디션 현장을 구경하게 된다. 거기서 나오는 노래가 린다 스콧이 부르는 ‘내가 모든 별들에게 얘기했지(I’ve told every star)’일 정도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비 스타가 되거나 연기파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티는 고모 집으로 온 첫 날부터 이상한 일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이 리타라고 하는 여자(로라 엘레나 해링)가 샤워를 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리타라고 하는 이름도 여자가 벽에 걸려 있는 리타 헤이워드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문득 생각한 것이어서 진짜는 아니다.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한다는 리타의 지갑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 있다. 돈에는 피가 묻어 있다. 그녀는 차 사고가 났다고 한다. 다음 날 베티는 리타를 데리고 패스트 푸드 점인 윙키스(Wimkie’s)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리타는 웨이트리스의 이름표를 보다가 자신의 본명이 다이안 셀윈이라는 걸 기억해 낸다. 두 여자는 전화번호부에서 다이안 셀윈의 주소를 알아내고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지만 놀랍게도 부패되고 있는 한 여인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리타인지 다이안인지, 미스터리 여인은 시체를 본 후 머리를 자른다. 그녀는 가발을 쓰고 금발 행세를 한다. 베티는 그런 그녀와 섹스를 한다. 베티와 자던 리타는 잠꼬대를 하는데, 계속 ‘실렌시오’ ‘노 아이 반다’라고 중얼거린다. ‘노 아이 반다’는 ‘밴드는 없다’라는 뜻이다. 이야기의 또 한 축은 아담 캐셔라고 부르는 영화 속 영화감독(저스틴 셔룩스)이 겪는 일이다. 그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갱단인 카스틸리아네 형제에게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담 캐셔는 또 제작자와 매니저로부터 캐스팅 압력을 받고 있는데 본인이 그다지 마땅지 않게 여기는 여배우 카멜라 로즈를 기용해야 할 참이다. 그는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후 집으로 간다. 집에는 아내가 수영장 관리를 하는 남자와 동침을 하고 있다. 아담은 아내의 남자에게 두들겨 맞고 집을 나온다. 한편 베티는 할리우드의 한 제작사에 들러 오디션을 보고 만족해서 나오지만 다른 여배우에게 이끌려 한 촬영 현장에 가게 되는데 그게 바로 아담 캐셔 감독이 촬영하는 곳이다. 거기서 베티는 카멜라 로즈라는 여배우를 보게 된다. 총 러닝 타임 140여 분, 그러니까 2시간 20여 분 중 2시간째에 이르면 모든 인물이 뒤죽박죽이 된다. 베티는 어느 덧 다이안으로 불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베티가 정작 다이안이라 불렀던 미스터리 여인은 카밀라가 돼 있다. 베티는 리타가 됐다가 다이안으로 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누구인가. 이것은 한명의 얘기인가 두명의 얘기인가. 이쯤되면 영화의 처음을 떠올려야 한다.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 전 영화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지르박을 추며 신나게 노는 장면을 보여 준다. 장면은 상당히 키치적이다. 유치한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 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컷으로 바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라는 타이틀이 뜨고 곧 이 도로를 달려 가는 자동차를 보여 준다. 자동차 안에는 리타 혹은 다이안, 나중에는 카밀라라 불렸던 여인이 타고 있다. 여자가 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운전석의 남자가 돌아 보며 총을 겨눈다. 남자가 뒷 좌석 문을 열고 총을 쏘려는 순간 좀 전에 지르박을 추던 아이들이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과속으로 달리다 여자가 타고 있는 차와 충돌한다. 차는 거의 반파가 되는데 차에서 간신히 기어 나온 여자는 혼이 나간 모습으로 산 아래로 내려 와 어떤 집에 숨어 들어 가는데 그게 베티의 집, 베티 고모의 집이다. 이야기가 도무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모든 것을 정리해 준다. 물론 한번에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지만 누가 무슨 짓을 벌였고 누가 현재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게 해 준다. 이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 죽어가는 찰라의 순간에 떠 오른 파노라마의 기억이자 환상이다. 영화는 그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에서 실렌시오 클럽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 실렌시오는 리타=다이안이 베티와 자면서 잠꼬대로 중얼거린 말이다. 두 여자는 실렌시오 클럽에서 마술쇼와 스탠딩 코미디를 본다. 무대 진행자는 계속 떠든다. 노 아이 반다, 노 아이 반다. 밴드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녹음된 것입니다. 저는 불지 않는 트럼본 소리를 좋아 합니다. 그러면 트럼본 주자가 나와 녹음된 음악에 맞춰 립씽크로 연주를 한다. 유명 여가수 레베가 델 리오가 나와 졸란도(Llorando), 곧 크라잉(Crying)을 부르다 졸도를 하기도 한다. 실렌시오 클럽은 일종의 이 영화 자체를 암시하는 메타포이다. 모든 것은 녹음돼 있다. 모든 것은 연출된 것이다. 모든 것은 다 환상이다 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모든 것은 환상이다. 데이빗 린치의 초현실주의적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의 스토리 텔링이 지니는 무한한 확장성, 그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 준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고 거짓을 진짜처럼 꾸밀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때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것과 다름 아님을 보여 준다. 안젤라 바달라멘티의 음악은, 그의 음악이 린치 영화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 가, 영화와 영화음악의 조합이 갖는 최고치를 보여 준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린치의 죽음을 추모하며 현재 국내에서 특별 상영중이다. [ 경기신문 = 우경오 기자 ]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쓰려는 영화 ‘쇼잉 업’은 지난 1월 8일에 개봉해 2주를 못 버티고 전국에서 단 7,949명을 모은 채 종영됐다. 모두 1월 말 개봉을 위해 전쟁을 벌인 국내 영화들 때문이다. ‘검은 수녀들’ ‘히트맨2’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전국 스크린을 장악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정곡을 찌를 말이 없어서 하는 얘긴데, 다들 쓰레기들이다. 이런 독설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돈 벌려고 만든 영화들이니 만큼 저열한 평가를 받은 들 그리 신경 쓸 것까지는 없겠다. 자 어쨌든 그러하니, 이 영화 ‘쇼잉 업’은 이제 볼 수가 없다.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가 됐다. 한국의 극장가 현실은 영화를 읽게’만’ 만든다. 근데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영화 ‘쇼잉 업’에 대한 스포일러를 잔뜩 뿌려 놓을 것이다. 잘 안다. 스포일러에 과민한 사람일수록 영화를 오히려 더 안보는 사람이라는 걸. 이 글 ‘쇼잉 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 OTT나 케이블TV에서 영화의 제목을 봤을 때는 이미 그 내용을 다 잊어 버렸을 것이기 때이기 때문이다. ‘쇼잉 업’을 두고 많은 기사들, 리뷰들은, 한 공방에서 조각가인 주인공이 일상을 보내는 얘기 정도로 정리한다. 잘못된 얘기이다. 이 영화에는 많은 에피소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찾고, 어떻게 느끼며, 그것을 어떻게 자신과 동일화 시키는가가 중요하다. 영화 ‘쇼잉 업’은 그런 영화이다. 주인공은 리지(미셸 윌리엄스) 혼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리지와 리치이다. 리치는 리지가 키우는 고양이이다. 이 리치가 어느 날 비둘기를 해치려 했고 죽어 가던 비둘기를 옆집 사는 친구 조(홍 차우)가 구해낸다. 조는 주인공 리지에게 붕대를 감아 준 비둘기를 맡기며 아예 돌봐 달라고 한다. 친구 조는 당장 내일이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리지는 조의 쉐어 하우스에 월세를 내고 살고 있다. 조는 핸디우먼이다. 뭐든 잘 고친다. 리지는 조에게 매일같이 샤워기를 고쳐 달라고 한다. 더운 물이 안나오기 때문이다. 리지는 며칠 째 샤워를 하지 못했다. 리지는 조소가이고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을 작은 형상으로 조각하는 일을 한다. 그녀의 전시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리지는 조각하는 사람의 모티프를 자신이 일하는 교수 연구실 앞 마당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서 얻는다. 그들이 추는 춤의 주제는 ‘생각하는 몸’이다. 리지가 일하는 연구실의 교수는 실은 그녀의 엄마 진(마리안 플러킷)이다. 그녀의 남편이자 리지의 아버지 빌(주드 허쉬)은 한때 도예가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늙은 히피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리지의 오빠 션(존 마가로)은 천재적인 영감을 가진 작가였지만 지금은 그냥 미친 은둔자이다. 리지는 아빠 빌과 오빠 션의 현재를 걱정하며 엄마인 진에게 종종 의논을 하지만 엄마는 늘 그냥저냥한다. 너는 그냥 여기 있어. 엄마가 션에게 갔다 올께, 하고는 그녀를 끼지 못하게 한다. 리지는 곧 있을 전시에 온통 신경이 바짝 서 있고, 연구실에서 해야 할 잡일도 해야 하는데(그중 하나가 말린 헤이맨이라는 유리공예가의 전시 팜플렛을 디자인하는 일인데 이 여류 작가는 최근 유명 미학잡지인 ‘스컬프’지 표지에 나왔다.) 온수 샤워기 꼭지를 고치는 일로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조와 거의 싸우기 일보 직전이 된다. 날개를 다친 비둘기도 그녀의 걱정 맨 앞 줄에 놓여 있다. 켈리 라이카트라는 이름의, 결코 같이 한 이불 덮고 같이 살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여자 감독의 작품 ‘쇼잉 업’은 밖에서는 트럼프 같은 ‘정신 나간’ 인간이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라는 변방의 나라에서는 계엄령이 터지든 나는 그림이나 그리고, 조각이나 하며, 유리공예나 하겠다는 사람의 얘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얘기를 거꾸로 하면 이렇다. 트럼프 같은 ‘미친’ 인간이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 정치적 혼란기에 빠지든 말든 일상은 일상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인생은 인생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정치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들 광장에서 시위만으로 날을 지새울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는 농사를 짓고, 누구는 음식점을 해서 대중들에게 쉴 곳을 만들어 줘야 하며, 누구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 입에서 ‘와우’ 혹은 ‘원더풀’ 소리가 나오게 해야 한다. 누구는 그런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 2시간 가까이 세상의 다른 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영화 ‘쇼잉 업’은 그만큼 중요한 영화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예술가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만큼 영화는 내추럴 그 자체이다. 인공조명이 거의 없고 배우들도 분장을 하지 않는 거의 맨 얼굴이다.(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의상도 저런 스타일이라면 제작비가 들 리가 없겠다 싶을 정도이다. 이런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켈리 라이카트는 영화 속에 나오는 많은 미술작가들 만큼 ‘또라이’이다. 근데 그런 류의 사람들만이 이런 독창적인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 아마도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대체로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도무지 이 영화에 스토리라는 게 있기는 해?” 미친 천재 여성 켈리 라이카트 감독만큼 이렇게 돈도 안될 것 같은 영화에 제작비를 대고 투자배급비를 댄 ‘누군가’들도 대단한 인물들이다. 세상은, 적어도 영화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 망하지 않고 간신히 버텨가고 있는 셈이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세상을 불과 물로 망하게 하려고 할 때 너희들 중 열명의 의인을 찾으면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걸 현실로 바꾸면 많은 예술가들이 세상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하는 주체들일 것이다. 영화 ‘쇼잉 업’을 보면 바로 그 점이 느껴진다. 영화의 마지막 20분은 주인공 리지의 전시회 장면이다. 영화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같이 모여서 나오는 장면이다. 리지의 작품들은 영화임에도, 진짜 좋다. 전시를 보러 온 아버지 빌이 작품을 보는 눈빛에서 그게 드러난다. 빌은 영화를 통해 전시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빌의 입에서는 줄곧 ‘예~(Ye)’ 소리가 흘러 나온다. 정말 작품이 좋다. 좋은 작품들은 작가들의 마음 속 폭풍우가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영화 끝에서야 알게 된다. 리지가 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친구 조와 말다툼을 벌이고 아빠 빌, 오빠 션 때문에 마음 졸이고, 고양이 리치한테 화를 내고, 비둘기에게 온통 신경을 쓴 끝에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저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세상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것 역시 저 만큼의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영화 ‘쇼잉업’의 끝에 무릎을 치며 통각(痛覺)하게 되는 건 바로 그 부분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기 전에 오프닝 씬만 30초 이상 느릿느릿하게 나오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매우 늦고 더디다. 그 호흡을 답답해 하지 말라. 이 영화는 그 느림에서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영화 ‘쇼잉 업’을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영화 속 비둘기도 잘 염두에 두기 바란다. 끝에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캐릭터이다.
24년 전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만든 영화 ‘밀레니엄 맘보’를 다시 보는 것은 진실로 ‘천국보다 낯선’ 일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현재 치매 투병을 위해 은퇴를 했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전설이 됐다. ‘밀레니엄 맘보’는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이고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세기인 뉴 밀레니엄 시기의 기이한 희망, 일상의 불안, 흔들리는 세대에 대한 얘기이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모두들 환호했다. 다들 허우 샤오시엔의 걸작이 나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을까. 영화도 시대가 변하면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다르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오래전 이 영화가 각광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라곤 비키라는 젊은 여자(서기), 그의 오래된 연인 하오하오(단균호) 그리고 새로운 남자 잭(고첩)이 맺어 가는 얽히고설킨 관계뿐이다. 얽히고설킬 것도 없다. 하오하오는 비키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하고 잭은 잭대로 더 이상할 만큼, 남자에게 시달리는 여자에게 늘 친절하게 잘 대해 준다. 잭은 비키의 은신처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하오하오란 남자는 룸펜이다. 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훔쳐서 유흥비로 흥청망청 살아가는 대책 없는 젊은이이다. 시계는 당시의 대만 돈으로 8만 달러(260만원)이다. 비키는 하오하오가 가진 50만 대만 달러(2천2백만원)를 다 쓰면 바로 그를 떠날 거라고 매번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한다. 그녀는 힘들 때는 잭에게 왔다가 다시 하오하오에게 끌려가곤 한다.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이런 관계의 반복을 보여 준다. 어쩌면 당시의 삶, 24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도 뭐 대단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거대 담론에 앞장서고 정치와 경제 역사를 얘기하는 척, 24년 전 대만의 젊은이들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부유(浮游)하고 흔들리는 삶을 지속하고 있을지 모른다. 비키와 하오하오는 늘 같이 텍 사운드 클럽(테크노 클럽)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고 약을 하며 지루한 섹스를 교환한다. 일상은 대단할 게 없고 그때의 젊은이나 지금의 젊은 층이나 모두들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어쩌면 젊은 세대가 지니는 역설의, 기이한 특권일 수 있다. 그들은 방황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기약 없는 방황을 통해, 그 통과의례를 거쳐 뉴 밀레니엄, 곧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그런 그들의 고독과 고통, 혼란을 지켜보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젊은이들은 역사적 서사를 만들 나이가 아니다. 개인적인 서사를 꾸려 가기에도 부족한 세대이다. 그러나 새로운 100년은 분명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주인공이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가 하려는 얘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다르지만 같은 영화가 영국 마이클 윈터바텀의 ‘나인 송스’(2011)이다. 극중 남녀의 실제 섹스 장면이 들어 있어 일부에게서는 포르노그래피로 오인받고 있지만 이 영화 역시 극도의 방황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남녀가 하는 일이라곤 술을 먹고 약을 같이 하면서 섹스를 하고 록 콘서트에 가서 실컷 몸을 흔들다 돌아오는 것뿐이다. 그리고 또 약을 하고 술을 하며 섹스를 한다. 반복의 일상이다. 이들이 이러는 것은 그것을 너무나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1년이나 2011년이나 2025년 현재나, 젊은이들은 늘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기성세대는 일정 부분 목표를 찾았고, 쟁취했으며, 나름 누리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 상실감과 소외감이 전 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을 휘어잡기 마련이다. ‘밀레니엄 맘보’나 ‘나인 송스’나 다 같은 맥락을 지닌 작품이다. 극 후반 비키는 잭의 집에 찾아와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흐느낀다. 그건 매우 관념적인 사치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잭은 그런 비키를 말없이 받아 준다. 잭은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어머니 집은 홋카이도이며 외할머니는 유바리에서 선술집과 여관을 운영한다. 비키는 잭을 따라 유바리에서 눈을 구경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런 잭이 홀연히 사라진다. 잭은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무슨 사고가 났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는 일본 야쿠자 조직의 일원으로 보인다. 그녀는 잭을 찾아 도쿄 신주쿠의 한 여관으로 가지만 그를 만나지 못한다. 비키는 잭이 남긴 핸드폰만을 가지고 일본을 떠돈다. 그녀의 독백이 이어진다. 거리에는 노동자들과 학생, 주부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비키는 마치 그들 중 하나인 척 행동한다. 젊음의 치기를 벗고 기성세대로 편입된 잭을 통해 비키는 드디어 그들 중 한 명으로 변신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긴 터널을 지나 왔으며 잭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아채게 된 것처럼 자신이 이제 기성의 세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이제 그 문턱에 도달해 있음을 깨닫는다. 비키가 잭의 코트에서 나는 애프터 셰이브와 담배 냄새를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비키는 지긋지긋했던 하오하오와의 섹스도 추억한다. 그녀는 그를 눈사람으로 기억한다. 눈사람은 해가 뜨면 사라지듯이 그와의 섹스가 서글펐다고 말한다. 비키는 이제 더 이상 하오하오를 생각하며 화를 내지 않는다. 사라지기 전 잭은 그녀에게 일본으로 혼자서 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비키는 그게 꼭 잭, 자신에게 오라는 얘기인 것을 알게 된다. 그 둘이 만나게 될지 그렇지 못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기성의 세대는 젊은이들이 꼭 자신의 세계로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성의 질서와 새로운 가치가 꼭 합치되리라는 법은 없다. 현재는 과거에서 배우고 과거는 현재를 통해 그 존재감을 구현해 낼 것이다. 그럴 때가 있고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가 예전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기억의 회로 하나를 더 열고, 켜는 것뿐이다. 이 영화가 나왔던 2001년보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진화하고 진보했는가. 우리의 일상은 보다 행복해졌는가. 그때 고민했던 20대들은 지금 50대가 가까워졌고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바꿔 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세월의 흔적과 더께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약간 서글퍼진다. 우리 모두는 눈사람일 뿐이다. 해가 뜨면 녹아서 사라지는 눈사람. 영화 ‘밀레니엄 맘보’는 그런 상징의 눈사람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는 영화이다. 이 ‘밀레니엄 맘보’가 비상계엄과 쿠데타와 탄핵의 고통의 길을 가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어떤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어떤 해법과 혜안을 주게 될까. 젊고 새로운 관객들의 반응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킹스맨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알고 보니 크리스마스이브에 LA공항에서 보안검색 요원으로 일하다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영화 ‘킹스맨’으로 스타덤에 올랐던 테런 에저트의 최신작으로 넷플릭스 공개작인 ‘캐리 온’의 얘기이다. 제목인 캐리 온은 일종의 비행 용어로 수하물이라는 뜻이다. 이번 주 이 영화 ‘캐리 온’을 소개하는 이유는 순전히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이고 세상도 어지러운 바, 위기를 이겨 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그게 꼭 왜 남자여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를 그려 나간, 추적 스릴러 한 편쯤이 괜찮지 않아서일까 하는 판단 때문이다. ‘캐리 온’은 연말에 집 안에서 즐길 만한 팝콘 용 액션 영화로 적당한 작품이다. 주인공 이선 코펙(테런 에저트)은 막 임신한 아내 노라(소피아 카슨)와 함께 여느 날처럼 LA 공항으로 새벽 여명 길에 출근을 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수십만 명의 여행객, 비행기 이용객들이 몰리는 날이다. 지각하면 안 되지만 오늘도 몇 분 늦었다. 노라도 공항 직원이다. 최근에 매니저급으로 승진했다. 아내는 자신의 남자 이선이 공항 보안 요원 일에 그다지 큰 열의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원래 경찰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찰 시험에 다시 응모하라고 말한다. 이선은 한번 떨어진 적이 있다. 어쨌든 이선은 아내의 그런 마음에 부응하고자 출근 후 상관에게 오늘만큼은 좀 더 책임 있는 일을 시켜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검색대 모니터 체크 요원으로 앉게 된다. 공항 검색 요원들은 나름 내부적으로 등급과 체계가 있는 모양으로 사람들의 몸을 직접 점검, 수색하는 일보다 검색대 모니터를 체크하고 수상한 수하물을 잡아 내는 업무가 보다 높은 자리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직책을 맡아야 승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선은 중요 업무 첫날부터 된통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보내온 스마트 이어 폰을 귀에 꽂은 순간 아내인 노라를 저격하겠다며 아내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특정 남자의 수하물을 열어 보게 하지 말고 검색대를 그냥 통과시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받게 된다. 수하물의 정체는 ‘노비촉’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제 신경화학물질이다. 닿기만 해도 치사율 백 퍼센트의 가장 악질적인 생화학 가스이다. 이선에게 ‘오더’를 보내는 누군가는 공항 안 여행객(제이슨 베이트먼)으로 위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범인은 공항 밖 누군가, 혹은 어떤 조직으로부터 백업을 받고 있고 그들은 모든 CCTV를 해킹해서 이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중이다. 이 수하물이 비행기에 탑재되는 순간 뉴욕행(나중에는 그게 워싱턴 DC행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비행기 승객 250명은 바로 죽은 목숨이 된다. 이 범죄조직이 노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선은 살인 가스 수하물도 막고 자신의 아내의 목숨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적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이번 영화 ‘캐리 온’을 만든 자우메 코예트세라(자움 콜렛 세라) 감독은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으로 ‘논스톱’과 ‘언더 워터’ 등 폐쇄 공간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액션, 좁은 공간과 공간 사이를 오가는 추격전을 그리는데 능한 연출력을 보이는 감독이다. ‘논스톱’은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로 비행기 내부에서 벌어지는 폭탄 테러범과의 색출과 사투의 얘기를 그린다. ‘언더 워터’는 작은 암초에 고립된 채 식인 상어와 싸우는 한 의대생 여성의 이야기이다.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나왔던 영화다. 이번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항은 코예트세라가 그려 왔던 폐쇄 공간 중 가장 큰 것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의 장기가 작은 공간에서의 추격전인 만큼 이번 영화에서는 수하물들이 옮겨지는 공항 뒤편 수하물 컨베이어벨트에서의 액션 장면에서 그 같은 자신의 특기를 잘 살려 내고 있다. 감각적인 액션 연출은 그 밖에도 이런저런 장면에서 돋보인다. LA 경찰인 엘레나(다니엘레 데드 와일러)가 앨콧이라는 이름의 국토 안보부 수사관이라는 남자와 110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겠다며 격렬하게 치고받는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살짝 혀를 내두르게 만들 만큼 잘 찍어 냈다. 앞뒤로 차가 받히고, 옆에서 들이받고, 하는 장면을 리얼 백 퍼센트의 느낌으로 찍어 냈다. 이 영화의 백미이다. 영화 ‘케리 온’의 핵심 내용은 극중 그레이스 터너라는 하원 의원이 발의한 민주주의 방어법(Defence for Threatened Democracies ACT), 곧 DTD 법안이다. 반국가 세력의 위협을 막기 위해 각종 군사시설, 무기, 방어 체계를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인데 막대한 예산 문제로 인해 의회에서 통과가 저지돼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산복합체, 무기 판매상들은 이 법안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영화는 이들이 법안 통과를 관철시키기 위해 테러 행위를 유발, 국가 위기 상황을 연출하려는 목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 정작 터너 의원이 자신의 갓난 아이와 함께 해당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들은 누구일까. 혹시 터너의 반대 세력일까. 영화는 미국에서조차 반국가 세력이 진짜 존재하는가. 그건 혹시 내부의 적이거나 누군가의 과도한 망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존재가 아닌가,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것은 아닌가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고백한다.. 할리우드의 다소 사소한, 엔터테인먼트용 액션 스릴러 영화에서조차 지금 한국의 상황이 떠올려진다. 주인공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 내는지, 할리우드 영화는 이 ‘역공작의 역공작’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반면교사를 통해 가르쳐 준다. 지금 우리의 위기와 그 해법도 어쩌면 이 영화 ‘캐리 온’에 담겨 있을 수 있다. 과연 누가 나라와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자이고 세력인가. 이번 영화에서 답을 구해 보시기를 바란다. 주인공 이선을 앞세워 비행기에 살인 가스 수하물을 실으려 했던 범인 역으로 제이슨 베이트먼이 나오는 것이 이색적이다. 제이슨 베이트먼은 인기 미드 ‘오자크’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주로 코미디 영화에서 ‘착하고 댄디한 얼굴의 웃긴 남자’ 역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윌 스미스 주연의 ‘핸 콕’에서 슈퍼우먼 샤를리즈 테론의 어진 남편 역으로 나왔었다. 이번 영화 ‘캐리 온’에서는 평소 이미지를 180도 바꿔서 나오는 셈이다. 주연인 테런 에저트만큼 비중이 높은 배우이다. 영화 ‘캐리 온’은 사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2003년 영화 ‘폰 부스’의 설정과 많은 부분 비슷한 감이 있다. ‘폰 부스’도 공중전화박스에 갇혀 누군가가 전화로 내리는 오더를 실행할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전화박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캐리 온’의 주인공 역시 처음에는 검색 모니터와 검색대에서 발이 묶인다. 하늘 아래 새로운 영화는 없다. 과거 영화가 현재 영화를 가르쳐 준다. 과거가 현재를 살린다. 그건 영화 쪽에서도 진리이다.
개봉 전, 이미 ‘올 한 해 가장 미친 영화’라는 입소문과 마케팅 문구가 나올 만큼 화제를 모았던 ‘서브스턴스’는 의도적으로 매우 역겨운 장면들을 다수 배치한 작품이다. 기본적으로는 고어(gore 유혈이 낭자) 한 작품이다. 극 후반부에 가면 화면 자체가 피바다이다. 마치 그 옛날 브라이언 드 팔마가 만든 영화 ‘캐리’(1978)에서처럼 극중 방청객들에게 엄청난 피를 뿌려 댄다. 모두들 피범벅이 된다. 스크린 밖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자신들이 마치 ‘바케쓰’로 피를 뒤집어쓰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주인공은 괴물로 변하고 보기에도 끔찍한 설정의 장면들을 이어 간다. 어떤 관객들은 이런 등등의 장면들로 구토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영화 ‘서브스턴스’는 매우 호오가 엇갈릴 만한 작품이다. 프랑스의 신예급 감독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프랑스가 여전히 영화적 상상력에서 가장 많이 앞서 나가는 ‘아방가르드’함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코랄리 파르자는 전작으로 ‘리벤지’를 만들었다. 자신을 윤간한 남자 셋을 차례로 죽이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물리적 복수를 꿈꾸는 다분히 강성 페미니즘을 보여 준 작품이다. 이번 영화 ‘서브스턴스’도 다분히 여성적 시선을 지니고 있다. 여성 자신들이 지닌 욕망의 문제를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야기는 외모와 젊음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한때 정상의 자리에 올랐던(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을 만큼) 인물이지만 이제 나이를 먹고 현업에서 밀려날 처지이다. 그녀는 모닝 쇼 피트니스 방송을 하고 있지만 방송국 책임자인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그녀를 해고하고 젊은 여성을 뽑으려고 한다. 분노로 치를 떨던 어느 날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의 남자 간호사에게서 서브스턴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이 물질, 혹은 약을 주입하면 급격한 세포 분열을 일으켜 또 다른 몸이 분리돼 나오되 젊고 신선한 육체가 생긴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젊은 여성으로 분리되고 그 여성이 대신 방송국에서 ‘수’라는 이름으로(마가렛 퀄리) 피트니스 모닝 쇼를 맡게 된다. 이 서브스턴스의 ‘발칙한’ 효과는 단서 조항, 철칙이 하나 있다. 자아는 하나이며 분리 효과는 일주일 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약물을 투입해 가며 일주일은 ‘수’로 살아갈 수 있지만 이 ‘수’ 역시 일주일 후에는 엘리자베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간격에는 예외가 없다. 분리된 육체는 서로 일주일 씩만 사용이 가능하다. 그건 마치 신데렐라가 정해진 시간에는 호박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여성들이 지닌 외모 강박증, 혹은 노화에 대한 공포증을 신데렐라 동화에 결합시키되 그것을 공포와 서스펜스의 분위기로 바꾼 셈이다. 또 다른 나 이자 젊은 여자인 ‘수’는 바깥세상이 만들어 주는 유혹(점점 유명해지면서 일이 많아지는 것, 예컨대 보그지 커버 촬영 같은 것, 그리고 남자와의 섹스 등등)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일주일의 시한을 지키지 않게 된다. 그 결과는 또 다른 나인 엘리자베스의 육신이 급격하게 노화된다는 것이며 점점 괴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대로 ‘젊어진 나’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 변이 과정’의 ‘종료’를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이 여인 둘, 결국 이 여인 한 명의 욕망은 파국을 맞는다. 작금의 프랑스 영화는 ‘트랜스 휴먼’이란 지향점을 향해 ‘냅다’ 달리는 분위기이다. 21세기 프랑스 영화인들은 이제 트랜스’젠더’ 정도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트랜스 ‘휴먼’, 그러니까 사람이 기계와 결합한다든지(쥘리아 뒤쿠르노의 2021년 영화 ‘티탄’) 이번처럼 내가 또 다른 나와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는 얘기를 꿈꾼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자아의 복제를 꿈꾼다는 얘기이다. 영화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실험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변화를 상상력의 기초에서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미(美)에 대한 비틀린 욕망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그 이면에 깔린 광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광기가 어떻게 인간을 좀먹게 하는가를 점층법적으로 보여 준다. 그 과정을 의도적으로 매우 거칠고 역겹게 보여 준다. 광기라고 하는 것은 한번 빠지면 제어할 수 없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이 생리적이거나 본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꽤나 사회적인 측면이 있음을 고찰한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밀어내는 건, 그녀가 젊어지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에 앞서 젊은 몸매와 미모만을 요구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속물주의 때문이다. 올해 칸 영화제 각본상을 탔지만 시나리오보다 프로덕션 디자인, (특수)분장과 촬영, 연기 부문에 더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엘리자베스의 하우스 공간, 그녀가 일하는 방송국의 복도 등등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는, 매우 드라이하면서도 극히 인공적인 느낌으로 짜여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몸이 분리되는 욕실은 사면이 흰 색인, 마치 산부인과 분만실의 강한 조명 아래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괴물로 변한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끔찍하며 극 후반 15분은 차라리 저 부분은 편집으로 드러냈으면 어땠을까 할 만큼 처참하고 폭력적이다. 데미 무어는 할리우드 여배우 중 가장 많은 외과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어쩌면 데미 무어 자신의 얘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과감하게 이 작품을 선택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투혼의 연기를 펼쳤다. 여우주연상 감이다. 젊은 엘리자베스, 수를 연기한 마거릿 퀄리는 앤디 맥도웰의 딸이다. 데미 무어, 마거릿 퀄리 모두 올 누드의 파격적인 연기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올 한 해 최고 걸작의 영화는 아니지만 올 한 해 최고의 도발적인 영화이다. 그건 맞는 얘기이다.
제목의 느낌이 심상치 않은 영화 ‘미망’의 단어 미망은 한자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다 달라지는 개념이다. 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는 뜻이고 미망(未妄)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미망(彌望)은 잘 안 쓰는 말이긴 한데 '멀리 넓게 본다'는 뜻이다. 영화 ‘미망’은 이 세 가지 뜻을 각각의 한 단락으로 구성해 이야기를 꾸몄으며 맨 마지막 단어는 장기하의 엔딩 타이틀곡 ‘그때 그 노래’가 나오는 부분에도 반복해 쓰이면서. 단어 미망(彌望)이야말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추구하는 내용과 방향임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영화 ‘미망’의 서사는 첫 번째가 ‘迷妄’이고 그다음이 ‘未妄’인데 이 앞 두 얘기는 다소 인트로(introduction) 성격이 강해서인지 그만큼 다소 습작의 느낌, 아마추어 느낌이 난다. 하지만 사실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진짜 에피소드는 3부에 해당하고(러닝타임 90분에서 45분이 할애된다.) 영화 제목에 해당하는 ‘彌望’이며 이 옴니버스 형 영화를 만든 감독 김태양의 본심이 담겨 있는 부분이다. 시간은 12시에서 다시 12시로 늘 쳇바퀴 돌 듯이 같은 위치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같은 점이라도 위의 원을 조금씩 크게 그리면 같은 꼭짓점이더라도 매번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건 1부 ‘迷妄’에서 주인공 남자(하성국)가 여자(이명하)에게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하는 얘기인데 1부의 그 어리숙한 대사를 3부에서 같은 인물들의 변한 모습들을 통해 실제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 ‘점층의 서술’이 돋보인다. 반면에 그 얘기는 또 반대로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있어야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변증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그 두 측면, 인생의 변수와 상수를 늘 ‘멀리 넓게 봐야 한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바로 한자어 미망(彌望)을 타이틀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 ‘미망’이다. 영원한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때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서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리얼한 느낌으로 다가서는데 3부에 걸쳐 만나고 헤어졌다가 남이 돼서 다시 만나는 두 남녀의 얘기는 안 그런 척 우리가 늘 주변에서, 스스로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뻔한 방식으로 처음에 만나서, 서로를 탐색하고, 그렇게 다 알고 나면 시들해지고 그러다 싸우지도 않은 채 실망해서 헤어지고, 또 그러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만나게 되면 서로에게 좋은 점들을 기억하고 대화하는 관계를 회복하는 식이다. 다들 ‘12시에서 12시로 돌아온 사이들’이지만 그래도 ‘멀리 넓게 바라보는’ 관계로 성숙해진 것이다. 주인공들이 주로 가는 곳은 서울 종로 1가와 종로 3가 그리고 광화문이다. 1,2부에서 종로 3가에 있는 서울극장은 여자 주인공이 영화 모더레이터를 하는 곳으로 나온다. 이 실재했던 극장이 지금은 폐관되고 철거된 것처럼 영화도 3부에서는 그 점에 대해 얘기한다. 주인공들과 이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의 배우와 감독들은 영화 속 시간과 실제의 시간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으며 그래서 영화 안팎 모두 다른 시간 대의 다른 사람들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과 있음을 드러낸다. ‘12시에서 다른 12시로 돌아 오고’ ‘늘 같은 장소에 있는 것도 있는’ 존재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극중 인물들이 반복해서 하는 얘기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칼을 쥐고 있는 손이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라는 것이다. 그건 장군이 실제로 왼손잡이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왼손을 쓰는 걸 금기시했기 때문에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얘기한다. 남자는 1부에서 우연히 만난 또 다른 여자(정수지)에게도 이순신 동상 얘기를 하며 여자는 2부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것 같은 팀장이라는 남자(박봉준)와 이순신 장군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 의도된 반복은 ‘12시가 같은 12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전체의 서사는 비교적 단순하고 일목요연해 보인다. 이것을 시간대가 달라지면서 끊어진 이야기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은 연결돼 있다. 연상연하 커플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1부에서 남자는 시종일관 존대어를 쓰며, 3부에서도 여자는 선배 혹은 누나 대우를 받는다.)는 2부에서는 이미 헤어진 것으로 보이고 여자는 아이가 있는 미혼남과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참이어서 다소 불안해한다. 3부에서 주인공 남자와 여자는 택시 기사인 후배(백승진)와 주인공 여자의 친구이자 주인공 남자의 선배의 삼우제(삼오제라고도 함. 발인 후 3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를 위해 한 사찰에 모인다. 여자는 2부의 애 딸린 팀장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깊이 사귀고 있으며 남자는 견습 화가가 돼서 그룹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주인공 여자와 남자는 1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울 광화문으로 와서 광화문 김치찌개 집이 있는 뒷골목 카페 소우(실제로 있는 식당과 카페이다.)에서 얘기를 나누다 헤어진다. 이 모든 것(같은 공간을 다니는 반복 행위)은 어쩌면 저예산 공법을 숨기기 위한 필요 전략인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촬영과 조명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을 보면 그게 꼭 돈=제작비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감독 김태양의 의도였으며 공간의 반복과 중복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된 미학임을 보여 준다. 주인공들은 같은 카페를 배경으로 프레임 우측에서 좌측으로 걸어 사라지다가 또 그다음엔 좌측에서 나와 우측으로 나간다. 같은 골목에 들어와서 담배를 피우며 그게 왜 꼭 같은 골목인지는 설명하지는 않더라도 문득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끔 연출하고 있다. 결국 둘 모두 그곳을 잊지 못하는 것이며 거기서 무언가를 기억하고 과거의 관계를 떠올리지만 그게 꼭 처연하거나 가슴이 시리거나 할 것까지는 아니다. 버스 안, 작은 카페 안은 자연조명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인공조명을 사용하는데 그 채색의 콘트라스트가 이 영화의 제작이 결코 만만한 세공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세련되고 깔끔하며, 도시적이면서도 젊고 쿨(cool) 한 정서를 지니고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화 ‘미망’은 마치 홍상수가 일상의 언어를 통해 통찰의 인생관을 피력하려 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등장인물들의 비루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 사람을 공박하려는 느낌 같은 것을 주지는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는 종종 사람을 비참한 진실에 마주하게 만든다. ‘미망’은 그러한 작품이 아니다. 세대가 바뀌었고, 세대의 언어가 바뀌었음을 확연하게 보여 준다. 젊은 세대의 감각은 공격적이라기 보다 수세적이며 나서고 떠들기보다는 관망하면서 스스로의 언어를 내면화하는 쪽이다. 영화 ‘미망’이 사람들의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조용한 통찰’이 주는 울림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잊으려 해도 잊지를 못해(未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다(迷妄). 삶과 세상, 관계를 멀리 넓게 바라보느냐(彌望) 여부는 결국 자신 스스로에게 달려있는 문제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가. 영화 ‘미망’은 그것을 넌지시 묻고 있는 작품이다. 또 한편의 수작이 발견됐다. 한국 영화의 상업영화는 죽었다. 오직 독립영화만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미망’이 그런 작품이다
미국 캐나다 산 영화 ‘롱 레그스’는 요령부득의 영화이다. 이 영화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를 잠깐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영화가 시작된 지 57분이나 지나서이다. 주인공 리 하커(마이카 먼로)의 상관인 카터(블레어 언더우드)가 요약을 해 준다. 둘은 FBI 요원이고 리 하커는 신참이다. 마치 과거 조너던 드미 감독이 만든 ‘양들의 침묵’(1991)에서 팀장인 잭 크로포드(스콧 글렌)와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의 관계와 같다. ‘양들의 침묵’에서 둘은 버펄로 빌이라는 연쇄 살인범의 뒤를 쫓는다. 이번 영화 ‘롱 레그스’에서 리 하커는 카터와 함께 가족들만 골라 연쇄적으로 죽이고 다니는 일명 롱 레그스라는 이름의 살인범을 추적한다. ‘롱 레그스’는 기본적으로 ‘양들의 침묵’의 저예산 버전이고 여성 수사관의 캐릭터를 상당 부분 가져오되, 다소 비틀어서 가져온 작품이다. 그만큼 서로 같은 척, 사실은 상당 부분 다른 모습과 느낌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롱 레그스’는 그런 의미에서 ‘양들의 침묵’보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유전’(2018)을 더 닮아 있다. 일종의 사탄 숭배(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영화, 사탄(학) 영화이다. 이런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이 나오고 익숙하지 않은 계시록의 성경 구절이 나오기 마련이며, 색깔과 소리로 오컬트(심령)의 느낌을 만들어 내곤 하는데 이게 사실상 상당히 서구적이고 기독교적이어서 작품을 내재적(內在的)으로 파악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건 마치 우리의 무당 굿, 빙의(憑依)에 대한 이야기, 풍수지리, 사주 역술의 갖가지 문양 등등을 뒤섞어 놓으면 서구 기독교인들이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팀장 카터는 신참인 리 하퍼가 사건의 미스터리를 척척 풀어 오는 걸 약간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렇게 정리한다. “자, 자, 그러니까 1974년 1월 13일에 일가족을 죽인 롱 레그스란 인간이 20년 만에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살인극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이지? 그런 거라는 거지?” 영화는 오컬트의 환상과 미스터리, 실제 벌어졌음직한 살인극의 이야기를 오버랩 시키면서 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 속에 롱 레그스는 실재하는 인물로 나온다. 이 역할은 놀랍게도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았으며 그는 요즘 비교적 개성이 강한 작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연기 투혼을 다시 불사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2022년작 ‘피그’는 발군의 작품이었다. 케이지는 이후 24년까지 2년간 ‘올드웨이 : 분노의 추적자’ ‘렌필드’ 등 무려 10편의 독립영화에 출연했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 행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영화에서 케이지는 얼굴과 헤어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서인지 전혀 그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실제 사탄이 있다면 저런 스타일, 마치 하드 록커의 흉내를 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의 모습으로 나온다. 영화는 오프닝과 클로징 앞뒤로 록밴드 T-rex의 ‘집스터(Jeepster)’와 ‘겟 잇 온(Get it on)’을 사운드트랙 음악으로 사용한다. 일부의 사람에게 로큰롤은 악마의 음악으로 들렸다. 살인범 롱 레그스가 극 중에서 출현하는 방법은 마치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뛰어난 드라큘라 영화 ‘렛 미 인’(2015)을 닮아 있다. 악마는 누군가 초대하지 않으면, 곧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상대에게 들어갈 수가 없다. 사탄에게는 늘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드라큘라든 악마든 연쇄살인자든 그 불행과 비극은 우리 자신들이 초래한 것이라는 얘기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내 안에 있거나 우리 사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탄론의 정치사회학이다. 첫 살인극이 벌어진 1975년과 다시 연쇄 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1995년은 미국으로선 특기할 만한 시대이다. 70년대는 베트남의 공산화와 닉슨의 하야, 강경 보수주의자 레이건의 등장을 앞두고 큰 혼란을 겪었으며 1995년은 빌 클린튼이 등장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자본주의의 극단적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됐던 시기였다. 미국이란 나라와 공간은 이제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고립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분위기가 영화 ‘롱 레그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FBI 팀은 의도적으로 단출해 보인다. 팀이나 기동타격대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보이지 않고 요원들은 거의 혼자서 탐문과 수사를 하며 다닌다. 리 하커는 철저히 혼자이며 그녀가 다니는 곳도 거의 집 한 채만 있는 농장의 외딴곳이거나 버려진 곳이다. 리 하커의 엄마 루스(알리시아 위트)도 혼자 살아가는 기독교 광신도이다. 엄마 루스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딸 리 하커에게 “너 요즘 기도 는 하니?”라고 묻고 딸이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하자 한참을 낄낄댄다. 그리고 “기도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엄마 루스는 리 하커가 좇는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키를 쥐고 있음이 나중에 드러난다. 1975년에서 1995년까지의 미국이나,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미국이나 문제가 되는 건 정치나 사회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종교에도 큰 이슈가 자리하고 있음을 영화 ‘롱 레그스’는 느끼게 해준다. 광신도들이 암약했고 사회 한구석에 버젓이 자리해 왔음을 보여 준다. 이들로부터 툭하면 튀어나오는 성경 구절과 그에 대한 강박이 사회를 이상하게 몰아 간 측면이 있다. 사회의 이상성과 종교의 강박증이 만나면 인간의 정신은 마비되고 왜곡된다. 살인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클린튼 정부 때 텍사스 주 웨이코에 있던 다윗파가 FBI에게 체포, 충돌하는 과정에서 집단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시대의 어둠은 마치 사탄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듯 퍼지는 법이다. 고립무원의 공간에서 ‘롱 레그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악마에게 지배당한다. 사탄은 (내부의) 동조자가 없으며 사람을 해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은 인간의 손을 빌려 인간을 해하고 죽인다. 결국 사탄이 되는 건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탄화되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인간인 셈이다. 오컬트 영화가 줄곧 만들어지고 있고 일부에서 나마 마니아 계층들에 의해 비교적 마니악(maniac)하게 향유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세상사가 이상하게 변형돼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긴,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 남성들이 민주당의 낙태권 주장에 반기를 들어 자신들 같은 이민자들이나 유색인 하층 노동자를 탄압하는 트럼프에게 오히려 많이들 표를 찍었다는 그 종교적 특이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 또한 사탄에 동조하는 현상일 수 있다. ‘롱 레그스’는 그런 정치적 은유를 담고 있는 영화일 수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오스굿 퍼킨스는 그 옛날 안소니 퍼킨스의 아들이다. 영화 ‘사이코’에서 식칼 살인마로 나왔던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