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목소리 역: 하라 나노카)는 규슈 구마모토 현에 살고 있는 소녀다. 16살이며 엄마는 4살 때 실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공무원인 이모 타마키(목소리 역: 후카츠 에리)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이모는 죽은 언니 대신 스즈메를 키우느라 청춘을 보냈다. 남자를 집에 초대하지도 못했고, 마음 편하게 어디 놀러 다니지도 못했다. 스즈메는 스즈메대로 그런 이모가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구석도 있다. 스즈메는 아직도 엄마가 어딘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꿈을 자주 꾼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는데 책상 의자 같은 걸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고가 있던 ‘그날’, 의자 다리 하나가 빠졌었다. 스즈메는 그 ‘불량’ 의자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채 살아 간다. 엄마가 남기고 간 것이니까. 스즈메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모가 차려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냅다 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고개 아래 길 맞은 편으로 한 잘생긴 청년(나중에 알고 보니 교원을 준비 중인 대학생), 소타(목소리 역: 마츠무라 호쿠토)를 만난다.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 근처에 폐허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때부터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아니 소타를 ‘갖고’ 다니며 폐허 속 문을 찾아 문단속에 나서게 된다. 소타가 고양이 묘석 다이진의 저주에 걸려 스즈메의 다리 세 개짜리 의자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타에 따르면, 폐허 속 문을 닫지 않으면 대지진이 일어난다. 그의 설명으로는 일본 전역 동서 양쪽에 두 개의 묘석이 박혀 있고 이 묘석이 ‘미미즈’를 가둬 놓고 있는데 미미즈는 대규모 재난을 일으키는 엄청난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소타는 대대로 토지시(閉じ師, 닫는 자) 집안의 사람이다. 소타는 병석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 ‘히츠지로’ 대신 세상의 문단속을 하고 다니는 중이다. 애니메이션 판타지에 걸맞는 동화 같은 얘기지만 이 2D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와 작화, 연출을 모두 맡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 명료하다. 일본에서 더 이상의 재난은 없애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같은 것으로. 스즈메 같은 착한 소녀의 염원들을 모아서이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같은 소박하고 순수하며 어여쁜 소망이 담긴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착하고 선한’ 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이해하는 데는 영화 속 스즈메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된다. 스즈메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출발해 시코쿠 지역의 에히메로 갔다가 혼슈의 고베 그리고 도쿄를 들러서 큰 문단속을 하고 결국엔 고향인 후쿠시마까지 긴 여정을 완성한다. 시코쿠의 에히메는 지난 2021년 기록적인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다. 영화에서도 스즈메가 문을 닫는 과정에서 비바람이 치고 폭우가 내린다. 스즈메는 폐허 속 버려진 한 학교의 교실 현관 문을 닫는데 성공한다. 에히메 산사태 때 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 고베는 아예 ‘고베 대지진’이라는 말을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다. 1995년 규모 7.3의 대지진이 일어났고, 7000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으며 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한, 대재해였다. 영화에서 스즈메는 의자로 변한 소타와 함께 간신히 이 지진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한 유원지에 버려져 있는 대관람차 문 하나가 막 열릴 참이었다. 당시 고베에서는 평소처럼 유원지에 놀러갔던 가족 단위의 참사가 컸다. 자, 그리고 스즈메의 마지막 행선지는 도쿄와 후쿠시마이다. 도쿄는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때 무려 40만 명이 죽었다. 이 간토 대지진은, 직후에 벌어진 세계 대공황과 겹쳐 일본 사회를 극우 파시스트의 사회로 몰고 가게 한 직·간접적인 요인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는 도쿄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던 식민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느니, 방화를 일삼는다느니 해서 집단 학살이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즈메와 소타는 요석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미미즈는 나오지 못한다. 스즈메가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4살 때 집을 떠났던 후쿠시마다. 12년 전, 그러니까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규모 9.1이었다. 이 대참사로 18만 명이 매몰됐다. 이어 후쿠시마 원전 사태까지 터졌다. 일본은 아직도 이 동일본 지진의 재난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벗어나 있지 못한 상황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래서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식 일본 대지진의 역사 기록서로 읽히기도 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상상대로 요석이 잘 박혀 있었어야 했다. 하나는 규슈에 또 하나는 도쿄에. 그때나 지금이나 스즈메와 같은 착한 소녀 그리고 소타 같은 불굴의 토지시가 있다면 사람들은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즈메의 엄마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다며 방글대면서 엄마와 바이바이를 했던 아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아이들을 무심코 보냈던 엄마들,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갔던 남자들, 그 많은 사람들의 사연. 그 모두와 모든 것이 다 살아 있게 됐을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목놓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 그럼에도 그 폐허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무엇과도 같은 심정인 셈이다. 스즈메는 현재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후쿠시마로 향해, 집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에서 폐허의 문을 열고 4살 때로 돌아 간다. 그리고 곧, 꿈 속에서 늘 엄마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엄마처럼 성장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스즈메는 비로소 엄마의 죽음을 직시하고 그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쳐 한 단계 다른 차원의 자신으로 성장한다. 스즈메가 커 나가듯 일본 사람들도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임으로써 그 죽음을 넘어서야 한다고 신카이 마코토는 이야기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을 그리고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재난 철학, 재난에 대한 사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전하는 작품이다. 재난은 재난을 당하는 과정에서는 분루(憤淚)의 감정에 휩싸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는 늘 감동의 휴먼 드라마와 눈물 없이 듣고 볼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영화 엔딩에 나오는 밴드 래드윔프스의 노래 카나타하루카(カナタハルカ, KANATA HARUKA)는 많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 사랑은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너’였어/ 몇천 년 후 인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얼굴로 웃는 너를 보고싶어/ 너와 보는 절망은 네가 없는 희망따위 흐릿하게 빛나게 할테니까 우리는 흔히 일본 사람들, 특히 일본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비판적이 되곤 한다. 우파인 자민당 70년 체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느냐고 지적들을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하루하루 살아낸다는 것, 대자연재해의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수 있겠다. 그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니까. 신카이 마코토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스즈메처럼 남들을 살리려고 애쓰는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며 사람들 간 연대이고,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올바른 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바로 너, 내 곁에 오늘도 숨쉬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 ‘너’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기 전에 자신 곁의 단 한 사람부터 구할 일이다. 세상은 차곡차곡, 한 발 한 발, 매우 구체적으로 바뀌어 나가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토지시’를 위하여!
Dear Mr. 브루스 윌리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서울에 사는 사람입니다. 영화 평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데일리 신문과 방송, 유튜브로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 리뷰어입니다. 당신의 최신작, 아니 거의 마지막 작품 격이 될 것 같은 영화 ‘디텍티브 나이트: 가면의 밤’을 소개하려다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한국은 잘 아시지요? 제 기억에는 1995년엔가 서울 강남 논현동이란 곳에 플래닛 할리우드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그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실베스타 스탤론인지 아놀드 슈왈제네거였는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신은 거기에 갔다가 당시 용산 미8군도 들렀었지요. 한 방송사 기자였던 나는 그 과정을 취재했었습니다. 아주 오랜 얘기지요. 플래닛 할리우드는 당신 포함, 세 액션..
알리 아바시 감독의 2022년작 ‘성스러운 거미’는 충격 그 자체의 영화이다. 많은 사람, 특히 무슬림에 대해 일정한 편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하고, 역설적으로 신선할 정도의 소재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란 사회, 특히 테헤란도 아니고 순교자의 땅이란 뜻의 종교 도시 마슈하드에서 매춘부들이 공존하고 있는 데다 그 여성들 16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히잡을 쓰고 몸을 파는 여인들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이란 사회가 종교적으로 폐쇄적이어서 윤락이라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강직성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지 못한다. 윤락 여성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문제이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여자..
다소 요령부득하던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단 한 신으로 모든 걸 정리한다. 아빠(폴 메스칼)는 사람들 틈에서 우스꽝스럽지만 나름 진지하게 춤을 춘다. 주인공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눈에는 그때 아빠 모습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명멸하듯 깜박인다. 그것은 그 장면을 떠올리는, 이제 31살이 된 소피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기억이란 늘 깜박거리며, 그럼으로써 그 사이사이에 놓인 추억을 소환시키는 법이다. 어쨌든 이 장면이 이 영화 ‘애프터썬’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순전히 그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팝 음악 하나 때문이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이다. 이 노래 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영화의 주제에 밀물처럼 다가선다. 가사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안다는 것은 정말 재앙이야/ 계속 사랑으로 극복해 보려 하지만 결국 난도질당하고 찢겨 버렸네/ 사랑은 한낱 철 지난 단어에 불과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 줄 거야/ 우리 스스로를 보살펴 줄 수 있게끔 만들어 줄 거야/ 이게 우리의 모습이지/ 억압 속에서 억압 속에서/ 억압!’ 이 장면과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영화는 약간의 착시를 준다. 영화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해, 아빠와 했던 튀르키예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담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했듯이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알게 되면 재앙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재앙에 대한 얘기일 수 있다. 행복과 재앙 사이에 끼어 있던 어렸을 적 언제쯤에 대한 얘기이다. 소피가 세상을 알게 된 시점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때였던 듯 보인다. 이제 31살이 됐고 레즈비언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유년 시절의 그때만큼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 삶의 저 밑바닥에 놓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 끊임없이 휩싸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0년 간극의 소피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오래된 일은 단편의 기억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게 하는 법이다. 아마도 소피에게는 그것이 ‘애프터썬’을 걱정해, 그러니까 해변에서 햇볕에 그을릴 것을 대비해 아빠가 자신의 어깨와 팔에 살살 발라줬던 선크림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촉감과, 그때의 햇살과 바람과 바닷물의 출렁임이, 연상작용으로 떠올랐을 것이며 어느 순간 그 여행의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아빠가 그때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바꿔 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아빠는 그때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지금의 나로 바꿔 냈을 것이다. 소피의 삶은, 우연한 기회(아빠의 캠코더를 발견한 것)에 그 사실을 기억한 지금, 또 다른 영역과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그렇게 인간의 정신적 의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표현해 낸다. 물질이 의식을 규정하지만, 때론 의식이 물질을 규정한다. 한 번의 깨달음이 세상을 바꾼다. 영화는 정신성(性)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지니는, 그 경이의 순간을 그려낸다. 이 영화가 온갖 평론가협회에서 상찬받은 이유(런던, 전미, 시카고, LA, 보스턴, 뉴욕비평가 협회상)는 그 찰나의 각성을 물리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는 글이나 문학으로 혹은 음악으로 아니면 그림으로, 더더군다나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해 내기가 워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에피소드 뒤에 숨어 있는 무섭고 어두운 삶의 오라(aura), 그 고통의 평범성을 끄집어내는 것, 관객이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에는 매우 정교한 연출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무엇보다 인생의 진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진지한 고찰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 감독인 샬롯 웰스에게서 느껴지는 부분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엄마와 헤어져 살고 있는 데다, 집이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아빠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어느 해 둘만의 여행을 계획한다.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여행사 단체 여행과 자유여행을 섞어 튀르키예에 온 첫날부터 아빠는 침대가 하나뿐인 것을 두고 여행사에 항의 전화를 하게 된다. 소피는 이미 잠들었고 아빠는 아이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베란다에 나가 아이 몰래 담배를 피운다. 그는 이상한 몸짓으로 몸을 흔드는지 춤을 추는지 하는데 이때의 롱테이크 장면은 묵음으로 이뤄진다. 완벽한 밤의 침묵. 아이는 침대에서 자고 있고 그 건너 창을 열고 바깥 베란다에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흔드는 아빠. 이건 아이의 기억인가. 상상인가. 아마도 그건 이 모든 기억을 소생시킨 캠코더 속 장면일 수 있다. 소피가 이 모든 이야기를 스스로 엮어내게 된 건 아빠가 여행 중 찍었던 캠코더 속 영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니까. 영화는 다소 불길하게 느껴질 만큼 어두운 암시가 중간중간 박혀 있는데, 그건 아빠의 ‘본질이 갖는 무엇’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떠난 것은 뒤늦게 발견한 성정체성 때문일 수 있다. 그건 소피 자신이 게이가 돼 있는 장면 같은 것, 어린 소피가 난간 위에서서 아래층 구석의 두 남자가 키스하고 몸을 더듬는 장면을 엿보는 것 등으로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아빠가 여행 중 줄곧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던 모습은 딸을 위해 만들어 낸 매우 의도적인 가벼움의 일환일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왠지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자살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슬쩍 보여 주는데 소피와 싸운 밤, 아빠는 비교적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주조(主潮)는 아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튀르키예 여행이 아빠를 만난 마지막 때였거나 아빠와의 행복했던 시간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아빠는 없다. 그 부성의 상실은 소피 자신에게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원천 같은 것이다. 상실과 결핍. 인생에서 그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외로운 것은 없다. 재앙은 없다. 퀸의 가사처럼 아빠는 누군가,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았을 것이다. 게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경제적 삶, 중하층 계급의 고단한 삶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억압은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 무언가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었을 것인 바 그 하나하나를 열거하지 않으면서도 그 억압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매우 특이한 귀착점을 보여 준다. 단체여행 중에 벌어진 노래자랑에서 아이는 혼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R.E.M의 ‘루징 마이 릴리전(Losing My Religion)’이다. ‘난 네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지/ 너의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했어/ 네가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어/ 모든 속삭임,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난 나의 고백의 말을 고르고 있어/ 너의 눈을 맞추려 애쓰면서/ 상처받고 사랑에 눈먼 바보 같은 너’ 어쩌면 소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11살 때 삶의 진창을 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검게 그을린 햇볕의 자국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할 것임을 그녀는 이제 확실히 깨닫는다. 그건 사라진(혹은 자살했거나 죽은) 아빠가 남겨 준 유산이다. 삶은 재앙이지만 늘 아름다운 것은 사랑 때문이다. 이 말이 단순한 관념의 서사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증명하고 증거해야 하는 법이다. ‘애프터썬’은 그 모호하면서도 상세한 기억의 진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마스터 클래스에 나가 토크도 해야 하고, 줄리어드 음대 같은 곳에 가서 특강도 해야 한다. 집에 돌아와 아내 혹은 남편에게 약도 먹여야 하고, 아이도 종종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며, 그 와중에 틈틈이 개인 작업실에서 작곡도 해야 한다.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도 바꿔야 하고, 부지휘자도 선임해야 하는데 단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관례가 있지만 개인의 결정을 관철시키기도 해야 한다. 자신을 이끌어 준 스승과 종종 점심을 먹어야 하고, 후원 재단 대표를 맡고 있는 다른 지휘자와도 연을 쌓아 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일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예술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일 가운데에서 존재..
무협 소설의 대부 김용의 방대한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천룡팔부: 교봉전’(이하 ‘천룡팔부’)은 짐작하거니와 내용을 따라가기에 다소 심란한 면이 있다. 무협 소설을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 본 경험이 있어야 전체의 얼개, 그 오라(aura)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에 9대 문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면 좋기 때문이다. 9대 문파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소림사가 그 문파 중 대표 격이며, 무당파도 들어 본 이름일 것이다. 곤륜파, 아미파 등도 있는데 아미파는 여걸들의 문파이다. 영화는 일명 거지들의 소굴이라는 개방파의 얘기다. 무협 영화는 둘 중 하나이다. 매우 흥미롭거나, 도통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데다 이야기 흐름이 너무 억지스러워 도저히 목불인견이거나이다. 때문에 무협 영화는, 매우 잘 골라 봐야 하며 이쪽 분야에 제작, 연..
이야기의 시작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습지에서 쿼터 백 출신의 남자 체이스(해리스 딕킨슨)가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는 데서부터이다. 이 사체는 동네 아이들이 발견하는데 그건 마치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첫 장면과도 같다. 보안관 둘이 탐문을 시작하고, 이들은 오로지 남자 몸에서 나온 붉은색 털실 한 오라기를 근거로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성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한다. 영화는 카야의 재판 과정을 추적하며, 여자 스스로 자신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변호사인 밀턴(데이빗 스타라탄)에게 지난 10년의 삶을 들려주거나 진술하는 플래시 백의 기법을 따라 대부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처음엔 미스터리 살인극으로 시작된 영화가 곧바로 서정의 서사시를 이어 나가는 이유다. 카야, 아니 주변 마을 사람들에..
모든 건 다 그놈의 퍼센티지(%) 때문이다. 시청률, 청취율, 지지율, 취업률, 자퇴율, 퇴사율, 할당률, 가입률, 방어율 등등 그저 ‘율율율’하는 세상 탓이다. 모든 걸 다 정량평가로만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성평가는 사라진지 오래됐는데 특히 교육분야가 그렇게 됐으며 그건 대략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며 영어 발음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부 장관 기자회견 때부터 수상한 분위기가 감지됐었다. 정량평가(定量平價)는 양을 중심으로 한다. 무조건 실적 위주다. 이에 비해 정성평가(定性平價)는 내용과 가치를 중시하는 평가다. 모든 게 다 정성적이어서도 안되지만 모든 게 다 정량적이어서도 안 된다. 특히 정량평가로만 기울어 있는 사회에서는 결과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모든 걸 다 수..
영화 ‘교섭’은 일종의 ‘팩션’이다.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를 가져 오되 그것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픽션을 가미했다는 얘기다. 이런 팩션은 사실, 기획과 연출이 줄타기의 경지를 보여 줘야 하는 작품일 경우가 많다. 팩트(fact)를 어디까지 바꿀 것이냐 혹은 그 팩트를 어디까지만 보여 주는 것이 좋으냐를 놓고 매우 정교하게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교섭’은 몇 가지 지점에서 여러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사실을 영화로 만들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발생했던, 경기도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에 대한 아프간 탈레반의 납치 사건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샘물교회를 깊숙이 다루지 않는다. 기획 단계에서(특히 기획자들의) 불필요한 종교 논쟁을 피하겠다는 의지가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극중 인물을 통해 두어 마디의 대사로 이에 대한 연출의 태도를 드러내는 정도다. 아프간 통역사 카심(강기영)은 이런 말로 짜증을 낸다. “그러게 (저 인간들은) 왜 이런 데를 와 가지고서는.” ‘교섭’이 보여주는 이 소극성은 사회정치적, 무엇보다 종교적 논쟁의 절충점을 찾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그 고심은 이해가 가지만 이 영화가 지닐 수 있었던 긍정적 폭발성을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잠재웠다는 점에서 영화 전체의 족쇄로 작용한다. 팩션 드라마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명확하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중립이란 어쩌면 그저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이다. 중립은 있을 수 없다. ‘교섭’이 요르단 올-로케이션에 여러가지 미덕을 지닌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점이 잘 살지 않는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일부 대중관객들의 반응 중에는 ‘교섭’을 두고 재미가 없다. 긴장감이 떨어진다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 영화는 서사 구조와 스텍터클 신이 비교적 정교하게 짜여 있는 작품이다. 서스펜스의 고조도 계산된 강도로 진행된다. 예컨대 주인공인 외교부 기획조정실장이자 교섭관(황정민)이 납치의 주범인 탈레반 지도자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 장면 같은 것이 그렇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한미 공조를 통해 미군의 공군 폭격을 유도하며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한다. 탈레반의 은신처 바깥에서는 폭격과 굉음이 이어지고 안에서는 탈레반이 들이미는 총구의 위협이 이어진다. 이건 진짜일까? 진짜가 아니더라도 진짜처럼 찍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진짜처럼 느껴진다. 고답적인 연출 장면이지만(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진짜이든 그렇지 않든 진짜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에서 연출력, 연기 모두가 돋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교섭관 옆에서 그와 경쟁하는 동시에 그를 돕는 국정원 요원(현빈)이 인질 협상 사기단을 상대로 액션을 펼치는 장면은 다소 지나치게 인공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건 다분히 현빈을 위해 연출이 의도적으로 만든 픽션이다. 실제로 그런 총격전, 액션 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적 접근상 그 같은 스펙터클 장면 하나 쯤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윤색은 용서가 된다. ‘윤색의 윤리학’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전반적으로 임순례의 정치적 태도가 밋밋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감독 스스로가 상당 부분 의도했다는 점에서, 영화 전체마저 밋밋하게 보이게 하는 치명적 한계점을 보인다. 임순례 감독은 평소의 뚝심 있는 태도와 달리 이번엔 다소 보신주의적 입장을 나타낸다. 임순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점이 기이하게 보일 정도다. 투자와 배급을 맡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전작 중 하나가 ‘헌트’였다. ‘헌트’를 생각하면 ‘교섭’은 매우 몸을 낮춘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른바 샘물교회 피납 사건은 명백히 종교적 이기주의가 낳은 참극이었다. 강성 무슬림의 근원지인 탈레반 지역인데다 테러 발생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무지가 낳은 비극이었다. 샘물교회 측 교인 23명은 세 차례에 걸친 정부의 간곡한 경고와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몰래 제3국을 거쳐 아프간에 잠입했으며, 피납 11일 만에 정부의 인질 협상에 의해 구조됐다. 이 과정에서 담임목사 등 두 명이 살해됐다. 샘물교회 측은 교인들이 극적으로 구조된 이후 정부가 출국금지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며 일종의 직무유기로 고소하기까지에 이른다. 이쯤 되면 종교적 광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샘물교회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짜증에도 불구하고 당시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무능으로 공격하기 바빴다. 두 명이 살해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테러 집단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제1원칙을 어긴 점 때문에 사건 정리를 변변한 수준에서 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인질 석방을 위해 탈레반 측에 막대한 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에서는 교섭관이 5000만 달러 요구를 2000만 달러에 협상을 성공시키는 것으로 나온다. 지금 돈으로 247억원 정도가 된다. 그런 팩트도 이 영화가 당시 사건을 심도 깊게 다루지 않은 ‘불편한 진실’의 한 축이다. 무엇보다 2007년의 샘물교회 사건이 2004년 한국 민간인이었던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저항 반군에 의해 납치 참수된 사건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당시 중동지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급박했던 분쟁사를 이야기의 줄기 중 하나로 다루지 않은 것도 ‘교섭’이 보여 준 아쉬운 점 중 하나로 거론된다. ‘교섭’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고난이도 첩보 정치 스릴러였을 것이다. 예컨대 스티븐 개건이 만든 2005년작 ‘시리아나’나 2008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바디 오브 라이즈’ 처럼 예민한 국제정치의 역학이 그려지는 드라마로 예상했었을 것이다. 임순례 감독은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샘물교회 사건의 민감한 이슈, 그 역사성을 희석시키고 둔감하게 만들며 비교적 범상한 버디 영웅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데 주력한 것처럼 보인다. 일부러 잘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임순례로서는 가장 후일담이 많은 필모그래피의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지나친 폄훼는 온당치 않아 보인다. 영화는 그렇지 않은 척 사실은 그것이 다루는 주제와는 별개로 그것이 구현되는 시기의 정치사회적 공기(空氣)에 영향을 받는다. ‘교섭’은 지금처럼 굴절된 사회 분위기를 상대로 민감한 역사 이슈를 놓고 진짜 ‘교섭’에 애를 쓴 흔적을 보인다. 가장 근접해 있는 현대사에 대한 성찰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영화다. 특히 우리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교회 문제를 이슈화 한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종교에 대해 국가가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작품은 그런 문제 인식의 시발(始發)이지 착지가 아니다. ‘교섭’은 민감한 주제를 볼만한 드라마로 안착시킨 영화이다. 그 정도면 됐다. 영화가 어디 신이겠는가.
아마도 국세청 조세과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매우 중요하다) 에이미 커(나오미 왓츠)는 요즘의 삶이 만만치 않다. 그건 순전히 남편이 1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탓인데, 에이미 커는 아직 초등학생인 딸 그리고 이제 반항기에 들어선 고등학생 아들 노아(칼튼 곱)와 일상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에이미는 오늘따라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아들의 이불보를 걷어 내 깨운 후 이런저런 짜증을 가라앉히려 조깅에 나선 참이다. 그런데 조금 뛰기만 하면 전화가 울린다. 오늘 나가지 않겠다고 연락한 사무실에서 동료인지 누군가가 서류 파일을 찾는다며 전화가 오고,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친정 엄마는 몇 시간 후면 비행기로 도착할 것이라며 곧 만나자고 연락이 온다. 여느 자식이 그렇듯 에이미 역시 약간 짜증을 덧붙여 상대를 한다. 그래도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