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코믹스에 1962년 ‘거미 인간’이라는 첫 캐릭터가 등장하고 1963년부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란 시리즈가 본격 시작된 이후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할리우드 테크놀로지(스턴트 기술과 특수효과, CG, VFX 등)의 발달과 결합하는 구조로 계속해서 만들어져 왔다. 60년대에는 애니메이션이 나왔고 70년대에는 TV용 실사영화가 나왔다. (CBS TV, 1977~1979) 그러다 스파이더맨의 정체성, 세계관 등이 다듬어진 것은 2002년 샘 레이미 감독이 ‘스파이더맨’을 만들면서부터다. 샘 레이미는 2007년까지 3부작을 만들었는데 ‘스파이더맨 2’(2004), ‘스파이더맨 3’(2007)이다. 이때는 주인공 피터 파커 역이 토비 맥과이어였다. 맥과이어가 27살 때이다. 지금 피터 파커 역을 맡은 톰 홀랜드가 2017년 자신의 첫 스파이더맨 시리즈인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이 장대한 프랜차이즈 영화가 어떤 연령층을 겨냥하는 작품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2000년대 이후 만들어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토비 맥과이어 주연의 3부작을 시작으로 배우 앤드류 가필드판 1, 2부(2012, 2014)가 이어졌고 톰 홀랜드가 2017년 ‘홈커밍’으로 이어받고 이후 ‘파 프롬 홈’(2019), ‘노 웨이 홈’(2021) 등으로 트릴로지를 끝낸 후 이번 ‘브랜드 뉴 데이’로 새로운 3부작의 시작을 알렸다. 20년을 넘게 새롭게 또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스파이더맨’은 이른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마블 코믹스가 만드는 모든 캐릭터의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스파이더맨과 캡틴 아메리카, 헐크, 토르, 아이언맨, 블랙 위도우 등을 생각하면 된다. 이들 캐릭터는 각각 단독 시리즈를 갖고 있으면서 ‘어벤져스’ 시리즈 등에서는 총출동해 연합군을 형성하거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처럼 분리돼 서로 싸우기도 한다. 이들의 세계관은 어찌 됐든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인간이었다가 우연히 초능력을 갖게 된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토르 제외). 반면 DC코믹스의 캐릭터들은 배트맨이나 조커 정도를 제외하면 슈퍼맨, 원더 우먼, 아쿠아맨 등 대부분 외계인이거나 신적인 존재들이다. 따라서 스파이더맨을 포함해 마블의 캐릭터들 모두는 늘 자기 자신의 정체성,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한다. 자신처럼 정신적으로 분열된(가면을 쓰고 살거나 초능력이 발휘될 때는 육체가 변이된다) 존재가 세상을 바꾸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게 사회·윤리적으로 맞느냐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거미 복면을 쓰고 다니며 세상의 모든 일에 간섭하면서도 신나는 액션을 구사하는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사회정치적 정체성의 문제에 다가서 있다. 이 시리즈가 청소년부터 그 청소년이 성장해 성인이 된 연령층까지 관객으로 포섭하는 이유다. 스파이더맨의 정신적 갈등은 자신의 오랜 연인인 MJ(메리 제인)와의 로맨스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번 신작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에서 MJ(젠데이아)는 스파이더맨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가(‘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다시 복원된다. 새로운 3부작 시리즈에서 두 연인이 함께 움직일 것임을 예상케 한다. 이번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정치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자신의 육체적 변이가 점점 통제할 수 없는 지점에 다가서고 있음을 알게 된다. 파커는 자신의 초능력이 과부하가 되면 자신 안에 있는 괴물, 악한 본능이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제 브루스 배너 박사가 된 헐크(마크 러팔로)가 초능력 억제(통제) 장치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걸 응용해 자신도 같은 것을 발명하게 된다. 머리 뒤에 장치를 부착하면 초능력의 과부하를 방지할 수 있다. 피터 파커는 이렇게 자기 내면과 싸우는 동시에 또 다른 초능력자인 진 그레이(세이디 싱크)라는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진 그레이는 타인의 마음을 텔레파시로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녀의 공격 목표가 이른바 ‘데미지 컨트롤’이라고 부르는 미연방 핵심 조직이란 걸 알게 된다. 이 데미지 컨트롤의 역할은 초능력자 뮤턴트(돌연변이)들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일이다. 따라서 피터 파커는 자신이 지닌 초능력이 과부하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과 동시에 진 그레이의 슈퍼파워를 억눌러야 하는 이중적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중에 알려지는 진실은 진 그레이의 문제 너머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피터 파커는 결국 국가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지금의 트럼프 시대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슈퍼파워는 이 만화 캐릭터들처럼 개인에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조직이나 국가도 만들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슈퍼파워를 지닌 조직 혹은 슈퍼파워 국가가 그 능력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 사람들에게 혹은 인류에 어떤 문제를 초래할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텔레파시 초능력자 진 그레이는 아무리 다른 목적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많은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행동을 저지른다. 진 그레이는 데미지 컨트롤이 억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니 세라 그레이(올리비아 부스포드)의 행방을 찾으려는 것이다. 세라 그레이는 진 그레이 자신보다 더 엄청난 초능력의 소유자이다. 데미지 컨트롤로서는 세라의 능력이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질 경우, 세계가 큰 위기에 처할 것으로 생각한다. 데미지 컨트롤의 판단은 애초에는 이성적이었지만 슈퍼파워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슈퍼파워가 된 형국이다. 그렇다면 데미지 컨트롤은 누가 또 규제하고 통제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새로 발생한다. 엉뚱한 얘기일 수 있지만 미국이 이란을 공격한 것은 그들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정확하게는 핵무기 기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통제되지 않으면 세계대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우려의 주체가 누가 되느냐, 그래서 이란을 공격하는 주체에게 누가 또 그런 막대한 권한을 위임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핵전쟁을 걱정하는 미국이 오히려 핵전쟁을 교묘히 부추기는 지도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야말로 진짜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이다. 슈퍼파워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걸 통제하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그가 이끄는 조직과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가 묻고 있는 질문이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부제 속 단어 ‘뉴’를 통해 새로운 얘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스파이더맨이 지난 수십 년간 고민한 개인과 사회, 혹은 국가의 윤리 문제를 다시 한번 꺼내 들되, 그것을 한층 정교하게, 무엇보다 반복적으로 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암시하는 영화다. 이번 신작의 쿠키 영상으로는 차기작에서 그 세계관을 우주 차원으로 확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러닝타임이 무려 145분(2시간 24분 54초)이다. 엔드 크레디트가 거의 5분에 가깝지만 쿠키 영상이 맨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에 145분을 끝까지 견뎌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관객이 145분을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화려한 공중그네 액션(거미줄로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것)이 오감을 자극한다. 이야기가 덜컹댈 때쯤 헐크가 나오고, 이미 사망한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의 동생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가 나와 얘기에 흥미를 더해 준다. 뉴욕의 다크 히어로인 ‘퍼니셔’ 프랭크 캐슬(존 번탈)은 이번 영화에서 스파이더맨을 도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프랭크 캐슬의 육탄 액션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별미이다. 빌런으로 나오는 스콜피온이나 닌자 암살단 ‘핸드’와의 결투 신도 이 영화의 주요 액션 장면들이다. 피터 파커의 큰엄마 메이(마리사 토메이)도 중간에 눈길이 가게 하고 파커의 친구인 네드(제이컵 배덜런)는 지난 편에 이어 여전히 양념 역할을 해낸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이런 시리즈답게 걸작이나 명작이라 칭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 안에 정치성도 담고 있다. 7월 29일에 개봉해 첫 주 주말에만 40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고 있다. 1천만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근처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이비(니나 키리)는 막 임신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자리보전에 들어간 지 꽤 오래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비는 친구 저스틴(애덤 디마르코)에게 “이제 끝났으면 해. 이렇게 말하면 잘못인가?”라고 말한다. 저스틴은 그렇지 않다고 위로한다. 이비가 지내는 어머니 집은 그래서 늘 조용하다 못해 괴괴하다. 죽음이 깃들어 있다. 이비는 새벽 2시 반에서 3시 반 사이에 저스틴과 팟 캐스트를 녹음한다. 제목은 ‘언더톤’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괴담을 찾아내 이야기한다. 크리피(Creepy)하다. 오싹하고 으스스하다. 한 주에도 몇 번씩, 정해진 시간에 하는 걸로 보아 상당히 인기 있는 팟 캐스트이다. 넷플릭스에 새로 올라 있는 영화 ‘언더톤은 올해 소개된 공포영화 중 가장 오싹한 작품으로 보인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클릭한 사람들은 이어지는 여러 소리와 그 소리를 연출한 장면 때문에 흠칫흠칫 놀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공포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주는 무서움이 가장 기분 나쁜 것이다. 지금 저 방문 뒤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을 때, 머리 위 천정에 누군가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일 때 사람들은 늘 뒷골이 서늘해진다. ‘언더톤이 주는 아우라가 바로 그런 것이다. ‘언더톤’은 특이하게도 사운드로 공포를 이어가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목소리 연기를 제외하면) 단 두 사람만이 출연한다. 이비와 영화 내내 누워만 있는 엄마(미셸 뒤케)이다. 엄마는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몰래 눈을 떠 이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쳐다보고 있거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비가 팟 캐스트 녹음을 위해 특정 파일을 한창 듣고 있을 때 거실 저 구석 어둠 속에 앉아 음흉한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 죽어가는 척하는 엄마가 이비에게 벌이는 정신착란의 살인극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엄마의 문제는 그렇게 물리적이거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공포의 원천이 ‘엄마’인 것은 맞다. 이비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엄마에게 침대 곁에 앉아 말한다. “엄마 딸이 임신했어요. 근데 난 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산전 공포증, 분열적 우울증은 세상 많은 여성이 겪는 얘기이다. 여성들이 임신을 마냥 기뻐만 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현대의 제도교육이 만들어 낸 착시일 수 있다. 여성들은 생산과 파괴라는 양가적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는 생각에 기뻐하면서도 자기 삶은 파괴될 것이라는 예측에 우울해진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창조와 파멸의 행위이며 희망과 비관이 동시에 주어지고 선과 악이 한꺼번에 개입하는 이야기이다. 그 아노미의 절정이 출산이다. 영화 ‘언더톤은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원초적 공포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무섭다. 이런 얘기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 그건 순전히 이비와 엄마를 제외하고 영화에서 얼굴이 나오는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거의 1인극이다. 저스틴도 항상 팟 캐스트 건너의 목소리로 나올 뿐이다. 고립의 공포감이 극대화된다. 모든 것은 소리로 집중된다. 팟 캐스트 속 파일에서 나오는 이야기 소리, 거기서 나오는 기괴한 소음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 이상한 발음들 등등 이비의 신경을 옥죄는 것은 소리이다. 게다가 2층에 누워있는 엄마 방에서도 정체 모를 소음이 들린다. 이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소리만큼은 더욱더 세밀하게 들린다. 문제의 시작은 저스틴이 새로운 에피소드로 발굴하려는 (누군가가 보내온) 파일 10개에서 비롯된다. 이 파일 10개에는 연인이나 부부로 보이는 제사(목소리: 키아나 린 바스티다스)와 마이크(목소리: 제프 영) 커플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이 담겨 있는데 둘, 특히 여자 제사가 뭔가에 홀려 있는 것처럼 보인(들린)다. 제사는 자면서 ‘우오지바니에목’이라고 (자막에 나오지만, 실제 발음은 ‘우좌바니막’으로 들린다) 중얼거린다. 팟 캐스트 건너의 저스틴은 이건 백 마스킹 기법(소리나 메시지를 기록할 때 재생 방향을 반대로 하여 녹음해 역재생했을 때 새로운 메시지나 사운드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 1990년대, 서태지의 노래를 역재생하면 사탄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백 마스킹을 문자로 하는 것, 곧 글자 음절을 거꾸로 쓰거나 뒤섞어 쓰는 것을 애너그램이라고 한다)으로 녹음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걸 저스틴이 다시 거꾸로 돌리니 “들어와, 아비주 (Come in, Abyzou).”라는 소리가 된다. 아비주는 임신한 여성과 태아를 노리는 사탄의 이름이다. 악마나 드라큘라는 ‘초대’를 해야만 들어 올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파일 속 여자 제사는 잠결에, 무의식중에, 아니면 의도적으로 사탄을 자신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셈이다. 저스틴의 파일은 제사와 마이크가 저지르거나 겪게 될 비극의 실체를 하나하나 담고 있다. 특히 저스틴은 파일 속의 ‘언더톤’을 찾아낸다. 소리 밑에 깔린 또 다른 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저스틴은 주파수를 변환시키고 볼륨을 조절해 가며 자꾸 이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소리 들려?” 아니면 “저 얘기 들려?”한다. 그중 하나가 “마이크가 다 죽였다” 같은 것이다. 노래도 들린다. ‘런던 다리가 무너지네’라는 영국 전통 노래다. 저스틴은 중세 때 다리가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어떤 여자(귀부인)가 아이들(고아들)을 산 채로 묻었고 여자는 그 죄를 물어 거꾸로 매달아 사형시켰다는 이야기를 찾아낸다. 파일에서 여자 제사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따라 집안 어딘가에서 공포의 비명을 지른다. 모든 이야기는 아이로 집중된다. 파일 속에서 들리는 (‘반짝반짝 작은 별’ 멜로디와 유사한) 전래 동요 ‘음매 음매 검은 양 (Baa, Baa, Black Sheep)’도 결국 아이들이 부르는 것이다. 아이들, 아이들을 죽이는 이야기, 임신과 출산의 공포, 엄마가 된다는 것의 생래적 공포에 대해 영화는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주인공 이비는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엄마를 정신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살모(殺母)의식이다. 이비는 마이크에 대고 저스틴에게 고백한다. “나는 엄마를 죽였어.” 아마도 그건 성모송을 같이 불러 달라던 엄마의 청을 거절한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때부터 엄마가 말을 잃었으며, 그래서 이 지경(코마 상태)이 됐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이비가 엄마를 살해했으며 엄마가 누워있고 그 엄마를 자신이 간호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교란 상태가 빚은 환상일 수도 있다) 결국 이야기는 임신과 출산, 엄마와 딸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비가 저스틴과 듣는 파일 10개의 내용에서 제사와 마이크는 생후 4개월 된 아이를 죽이고 자신들도 계단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나온다. 아이는 축복이자 공포이다. ‘언더톤이 궁극으로 하려는 이야기는 그 지점에 있다. 공포의 감각을 사운드로 디자인한다는 ‘발칙한(?)’ 기획 덕인지 영화는 올해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 당시 꽤 큰 관심을 끌었으며 작가주의적이고 새로운 형식과 기법의 공포영화를 주로 배급해 온 A24가 ‘덥석 문’ 작품이다. 사운드 공포영화라는 신종 장르의 탄생은 초저예산 제작이라는 환경이 만들어 낸 산물로도 보인다. 오로지 여배우 한 명이 이끌어 가는 영화 ‘언더톤’의 제작비는 50만 달러, 7억5천만 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소리가 주는 공포가 이렇게 막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요즘 나오는 공포영화는 의도적으로 덜 무섭게 만드는 방향을 택한다. 너무 무서우면 관객 수가 급감하기 때문이다. ‘엑소시스트’(1973)나 ‘서스페리아’(1977) 같은 영화는 이제 거의 보기 힘들어졌다. ‘언더톤은 그런 환경에서 나온 ‘찐’공포영화이다. 올여름 공포영화다운 공포영화를 보고 싶으신가. 다만 불면증과 심야의 공포감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당신 침대 밑에 사탄 아비주가 이미 당신의 초대로 들어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짜 공포영화는 이런 것이다.
감독 유은정의 신작 ‘그림자 아이’는 말하자면 도플갱어의 한국식 확장 버전이다. 영화 내내 언급되는 ‘그림자 아이’라는 잔혹 동화는 이 영화가 만들어 낸 순수 창작물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간이 동시대에 존재한다면 이 둘은 정체성이 하나인가, 아니면 분열된 자아가 외연화한 것인가. 같은 세상에 똑같이 생긴 내가 존재하고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둘이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둘이 서로 마주친다는 것은 두 가지 결론 중 하나이다. 둘 중 하나가 없어지게 되거나 아니면 둘의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두 결론 모두 결과적으로는 분열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는 얘기이다. 일본의 구로사와 기요시가 만든 ‘도플갱어’(2003)와 캐나다 감독 드니 빌뇌브가 만든 ‘에너미’(2014)가 그런 내용이었다. 유은정의 도플갱어, 아니 그림자 아이는 그 서사를 한국 부모의 이기적 욕망, 오로지 내 아이만 잘살면 된다는 왜곡된 심리에 투영시켰다. 그런 점에서는 진화된 도플갱어 얘기이지만 아직은 숙성되지 않은 느낌이 강하다. 무엇보다 다소 애매한 지점에서 서성이며 결정 증후군 같은 것을 내비친다. 이것은 심리극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의 왜곡된 가족주의를 얘기하는 사회물인가. 아이 둘의 엄마 금옥(임수정)은 죽은 딸 수련(유나)과 똑같이 생긴 아이 재인(유나의 1인 2역)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망상일까, 실제일까. 영화의 답이 좀 더 잔혹했다면 ‘그림자 아이’는, 다소 논란이 있더라도 상업영화로서 완전체가 됐을 것이다. 유은정은 대신, 애매한 예술(영화)적 결말을 선택했다. ‘그림자 아이’의 특징은 ‘부재’에 있다. 금옥의 남편, 아이 둘 곧 수련과 수안(박소이)의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금옥 역시 아버지는 있어도 엄마는 없다. 거실에 있는 액자에는 할아버지와 금옥, 수련, 수안만 있다. 금옥의 이모(오민애)도 혼자인 사람처럼 보인다. 수안이 3년간의 코마에서 깨어나자 병원으로 금옥을 찾아와 “죽은 너의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겠니?”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기이하게도 형부와 처제의 관계를 뛰어넘는 느낌을 준다. 금옥의 이모는 엄마 같은 존재로 보인다. 영화 <그림자 아이>에는 맥락상 여러 ‘그림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결국 금옥의 집안은 결핍과 채움의 문제가 항상성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다들 고립됐으며, 집안에 내려오는 기이한 괴담에 언제든지 현혹될 수 있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심지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그것도 대를 이어 연쇄적으로 죽일 수 있는, 알고 보면 살인 가족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 거기에 집중했더라면 이 영화 ‘그림자 아이’는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같은 장르 영화제에서 주목받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살인극은 대를 이어 승계되거나 사회적 바이러스로 확산하지 않는다. ‘그림자 아이’는 금옥의 아이 수련과 수안이 각각 13살이고 10살일 때 불의의 사고였는지, 아니면 의도된 것이었는지 둘이 동시에 할아버지 저택의 옥상에서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배경이다. 수련이 엄마 금옥에게 유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아이는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며 동생인 수안이 말리는 과정에서 동반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수련은 죽었고 수안은 추락의 충격으로 3년간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지내게 된다. 수련은 왜 죽으려 했을까. 이 집안에 내려오는 전래동화에 따르면 집안에 그림자가 있는데 지하 생활을 벗어나 세상에서 몸을 얻어 살고 싶고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그 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는 것이다. 수련과 수안 중 누군가 몸을 주지 않으면 둘 다 몸을 뺏기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수련이 동생을 위해 희생한 셈이 된다. 이 집안의 할아버지(박윤희)는 과거에 딸 금옥을 살리기 위해 금옥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데려와 살해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외동딸인 금옥을 키웠고 그다음엔 금옥의 딸이자 자기 외손녀인 수련을 살리기 위해 아이와 똑같이 생긴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 눈치챈 수련이 먼저 죽는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는, 결국 수안이 병원에서 깨어나는 것은 물론, 죽은 수련과 꼭 닮은 아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반복적으로 딸 금옥에게 ‘준비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금고 안에도 자신이 벌인 살인 행위를 기록한 글을 남겼다. 자신이 벌인 살인 행위의 요지는 ‘나는 내 딸을 살리기 위해서 그랬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준비하라’는 말은 딸 금옥 역시 수련과 닮은 그 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그림자 세상에서 온 그림자 아이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아이들 편에서 볼 때) 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엄마의 행동 동기는 분열된 서사 속에 파편처럼 쪼개져 있다. 그걸 맞추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그 과정이 지나면 관객은 영화의 개연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가족 내력으로 존재하는 정신병적 광기의 문제인지, 그걸 뛰어넘는 영화적 메타포인지를 가름하는 건 나중의 일이다. 만약 이 부분을 가족 내 광기의 유전적 병인으로 풀어나갔다면 영화는 어쨌든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두 개의 좋은 장면이 있고 그건 심지어 보는 사람들을 울컥하게까지 만든다. 엄마 금옥이 수안과 같이 있는 재인을 보고 놀라 아이를 껴안고 흐느끼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는 장면이다. 그때 금옥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아, 수련이는 죽었지.” 이 분할된 컷의 시퀀스는 ‘그림자 아이’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세련된 촬영분이다. 임수정의 표정 연기가 빛을 발하되 그걸 정중동의 메소드 연기로 성취해 냈다. 아이를 잃은 엄마는 죽은 아이와 눈매만 비슷해도 자신의 아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엄마이겠기에 이 장면은 영화의 분기점이었다. 엄마 금옥은 이후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새 아이를 키울 것인가. 이 아이를 죽일 것인가. 이모가 일하는 병원으로 찾아가 금옥이 하는 말도 인상적이다. 금옥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은 채로 뜻하지 않게 ‘무섭다’는 말을 한다. “그 아이가 수안이를 데려갈까 봐 무서워요.” 실제로 수안에게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는 수안에게 둘 중 한 명의 몸을 달라고 말한다. 수안은 처음에 그 존재가 언니 수련이라고 생각하나 곧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자각한다. 결국 죽은 수련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칫 엉뚱하게 새로 사귄 친구 재인(수련을 닮은 아이의 이름. 이 아이는 중간에 윤서라는 아이의 얼굴도 된다)만 죽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재인의 얼굴이 그때그때 바뀌는 것은 아이의 존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아이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하되 이기적으로 바라는 과정에서 원래는 다르게 생겼던 아이 얼굴이 도플갱어처럼 같아지기도 한다, 라는 것이 이 영화의 설명이다. 그건 그럴 수가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이야기의 앞뒤를 꿰어맞춰야 하는 ‘고단함’이 있다. 주제 집중력이 가져오는 몰입감, 공포나 미스터리 스릴러에 필수적인 ‘타격감’이 아무래도 아쉽다. 그럼에도 공간이 주는 결핍과 상실의 아우라는 잘 살린 작품이다. 비교적 규모가 있는 저택에서 가족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처럼 묘사돼 있다. 금옥은 상담사이지만 그녀 자체가 상담이 필요한, 결핍의 모성의 병을 앓는 중이다. 그 심리적 공백을 공간의 여백으로 묘사해 내는 촬영과 미장센이 괜찮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좋은 장면이 있다. 세 개까지는 아니다. 상업적으로, 그리고 비평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좋은 장면이 있어야 했다. ‘좋은 장면 세 개’론(論)은 할리우드 감독 하워드 혹스의 얘기다.
영화가 늘 새롭고 선진적인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라면 1년여의 소문 끝에 대중 앞에 선보인 감독 한창록의 ‘충충충’은 적격의 작품이다. 날 것 그대로인 듯 매우 정교하고 이야기가 성겨 보이는 듯 사실은 꽤 영리하고 촘촘한 구성이다. 아마추어인 듯 프로 근성이 돋보이고 새로운 듯 실은 과거의 영화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다. 새롭지만 전통적인 예술주의를 보여주면서도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독특한 차별성을 자랑한다. 이 영화 ‘충충충’이 한국 영화의 새로운 트렌드, 예컨대 제2, 제3의 코리안 뉴웨이브의 줄기를 구성할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그 단초가 될 만한 작품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마치 1990년대 후반 일본의 뉴웨이브를 대표했던 나카노 히로유키의 ‘사무라이 픽션’(1998)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킨다. 당시 이 영화는 감독이나 작품이나 ‘반짝’ 지대한 관심을 모았으나 그것이 밀레니엄 시대로 넘어가는 일본 영화의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미완성의 새로운 실험으로 그쳤다. 그것은 나카노 히로유키 유의 신세대 감독의 책임이나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 주류 영화계가 지닌 상업주의의 보수성 때문이었다. ‘충충충’이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인 가의 여부 역시 작품이나 감독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국내 기성 영화계의 관성이나 거기에 익숙해 있는 기존 관객들의 저항성에 달려 있을 수 있다. 젊은 감독들이 그렇듯이 처음에 ‘충충충’은 파편화된 이미지의 나열을 선호하는 척한다. 이건 초창기 쿠엔틴 타란티노나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쓰던 ‘수법’으로 B 무비 스타일의 컬트영화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교이기도 하다. 스크린에 비가 내리고, 화면이 갈라지거나 일부가 찢겨 나간 듯, 파일에 의도적으로 ‘스크래치’를 내는 것이다. 젊은 감독들이 이 같은 ‘필름 에이징 효과(고의로 낡은 필름인 듯 보이게 하는 것. 디지털 시대에는 파일을 의도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와 ‘디지털 노이즈(화면 속 인물이 초록색으로 뭉개진다든가 한다)’ 효과를 일부러 노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틀리고 얼룩진 자신들, 곧 이 시대 청춘들의 불안증, 반항심, 죽음에의 충동 등을 표현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충충충’은 영화 전편에 이런 촬영과 편집, 후반 작업의 기교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결국 이 시대 청년들의 그러한 정서를 대변하는 영화임을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 감독 한창록은 90년생으로 30대 중반이다. 그는 이 영화를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과정인 예술전문사 졸업작품으로 만들었다. 그의 지도교수이자 ‘충충충’의 프로듀서는 이승무(‘워리어스 웨이’ 감독, 2010)와 최용배(‘괴물’ 제작, 2006), 그리고 김순모(‘피에타’ PD, 2012) 등 3인이다. 이 영화가 신예 감독의 창작물인 듯 실은 기성 영화인들의 예술적 변화 의지가 결합한 결과물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이미지만 나열돼 있다면 ‘충충충’은 그다지 새로운 작품이 아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사 구조가 매우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돼 있다는 점이다. 제목 ‘충충충’은 ‘충’이 세 개이고 그렇다면 영화 안에 세 개의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한다. 실제로 영화는 88분의 러닝타임 동안 ‘충동’을 시작으로, ‘충돌’(39분 8초), ‘충격’(61분 5초)의 이야기를 펼친다.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흔한 옴니버스 영화가 각기 다른 단편을 이어 붙이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허덕인’다면 ‘충충충’은 전체 이야기를 세 개로 나누되, 이를 점층적으로 고양하는 문학적 기법을 선보인다. 감독 한창록이 스토리텔러로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무리 새로움을 지향한다 해도 영화는 서사, 곧 스토리가 좋아야 한다. 그 기본기가 모자란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치기(稚氣)에 불과한 것일 때가 많다. ‘충충충’의 주요 인물은 넷이다. 여자 한 명과 남자 셋이다. 고등학생들이다. 고2인 여자 성지숙(백지혜)은 외모 강박증에 시달린다. 다이어트약(일명 나비약)을 무작위로 먹고 거식증에 걸린 상태다. 그녀는 예뻐져서 돋보이기를 원한다. 스타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어릴 때 아빠란 남자가 매일같이 자신과 엄마를 두들겨 팼다. “아빠가 안 때리는 날은 오히려 무서웠어. 그러다 맞으면 마음이 편해져.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지숙은 가끔 그런 아빠한테 문자를 보낸다. 한참의 비난 끝에 ‘이 발정 난 개새끼야!’라고 보내면 곧이어 ‘아빠라는 인간’한테서 50만 원이 송금된다. 지숙의 결핍은 자신의 비루한 일상 때문이 아니라 기성세대, 부모 세대의 무책임 탓이다. 영화 ‘충충충’의 한창록이 보여주는 세대관이 요즘 풍미하는 그것과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이 부분이다. 한창록은 지금의 2030세대가 지닌 결핍이 전 세대(예컨대 386, 586, 686이라 불리는)가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다 차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무책임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건 결이 조금 다른 얘기인데, 전 세대의 무책임성은 사뭇 보편적인 것이어서 그렇다면 청년세대의 결핍감이란 워낙 생래적인 것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건 일종의 통과의례와 같은 심리적 정서로서 요즘들 많이 얘기하는 것처럼 계급적, 정치·사회적 분석으로 치유할 이슈가 아니라는 얘기일 수 있다. ‘충충충’은 세대와 세태를 바라보는 시점이 남다르다. 지숙을 좋아하는 김용기(주민형)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뭔가 대단한 걸 할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아무도 안 믿어주는) 인물이다. 지숙은 그런 그를 이용하고, 좋아하는 척해주고, 때론 동정하지만 결국은 그를 ‘병신새끼’ ‘너 같은 루저 새끼가 뭘 한다고’ ‘다 때려 쳐’라고 말할 뿐이다. 김용기의 문제도 다 엄마 탓이다. 엄마는 아들을 내팽개친 채 새로운 남자와 살림을 차린다. 어느 날 용기가 만신창이로 얻어터져 찾아갔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니?” 용기의 엄마야말로 ‘무책임’의 극치인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책임감 없는 세대의 이기주의가 만들어 낸다. 용기와 지숙의 또 다른 친구는 덤보라 불리며 넷카마(온라인상에서 여자 행세하는 사람)로 섹스 쳇을 하는 아이(신준항)이다. 꽤 영리해서 사물과 사건을 꿰뚫어 보고 용기에게 문제를 풀어 갈 해법(예컨대 딥페이크를 이용한 여론 조작 같은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아이의 성 정체성은 극히 불안하며, 그 때문에, 용기, 지숙 외의 사람과는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는 늘 ‘왕따’와 놀림의 대상이다. 모든 파국은 키 183의 미남으로 한 학년을 ‘꿇어’ 전학을 온 우주(정수현)란 남자아이 때문에 벌어진다. SNS 팔로워가 10만 명이다. 당연히 지숙은 그에게 반한다. ‘몸을 줘 가면서’까지 여자아이는 이 남자아이를 가지려 하지만 이 우주라는 아이 역시 ‘발정 난 개’에 불과하며 ‘양다리’를 넘어 ‘문어발’임이 드러난다. 우주는 유도 국가대표로 상당히 폭력적인데 지숙은 그런 그에게서 과거의 아빠를 연상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숙의 이 애매모호한 태도는 우주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죽이고 싶어 하는 지를 자기 자신도 분간하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 이용당하는 것은 착한 아이 용기일 뿐이다. 지숙이 점점 팜파탈로 변해가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용기와 지숙, 덤보의 일상은 ‘충동적 행동’들로 이어지느라 다소 비정상적이긴 해도 그나마 평온했던 셈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등장으로 이들 셋은 균열하고 ‘충돌’한다. 그리고 곧 이 ‘충돌’은 ‘충격’의 파국을 맞게 된다. 사건이 끝난 후 여자 수사관은 지숙에게 말한다. “이거 애들 장난 아녜요. 사람이 하나 죽었잖아. 피의자는 아직도 중태고.” 세 명의 아이가 세 명의 피의자가 되는 이야기를 감독 한창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그 개연성을 촘촘히 이어 나간다. 세상의 아이들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는지를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상세하게 풀어나간다. 기성세대와 지금의 젊은 세대가 다른 점이라면 ‘욕망의 집합화’와 ‘욕망의 파편화’라는 차이일 수 있다. 기성세대는 사회적 집합체로서 함께 욕망을 실현해 간다는 의식이 강했거나 그렇게 의식이 주입됐었다. 그래서 그 집합 내 인자들 간에 약간씩 차이가 있더라도 전체의 욕망이 실현되는 한 공정성의 문제나 기회의 차별로 반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젊은 세대는 용기와 지숙, 덤보처럼 욕망이 각자 개별화돼 있으며 지나치게 파편화된 경향이 있다. 결핍의 원천은 이렇게 달라진다. 지숙의 외모 강박, 용기가 갖는 슈퍼맨 욕망, 덤보의 여성성에 대한 욕구는 사회가, 학교가, 집단이, 그 어떤 집합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로서는 이들이 지닌 욕망의 통과의례를 지켜보며 책임을 다하는 태도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충충충’을 보고 있으면 지금의 한국 사회 기성세대가 그걸 전혀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이것이 교육제도라는 시스템의 문제를 넘어 사회심리학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얘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충충충’이 도달한 곳은 영화의 뉴웨이브 지형을 넘어 새로운 사회심리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이다. 영화에는 한 여학생이 이들 용어 ‘라방(SNS를 통한 생방송)’으로 자신의 투신자살을 중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죽음조차, 자살조차 인정욕구에 의한 존재 증명이 필요한 세대이며 그런 시대가 됐다는, 다소 끔찍한 사회병리 현상을 보여준다. 충동과 충돌, 충격의 이미지들이 높은 수위로 제시되는 만큼 ‘충충충’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고 있다. ‘충충충’은 따라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인정할 부분이 많은 작품일 수 있다. 반면에 이해는 된다고 하더라도 극 중 인물들의 모습을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주제 의식이 강한 영화일수록 늘 ‘이해’와 ‘인정’의 길목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모든 게 어쩌면 다 필요 없는 얘기일 수 있다. ‘충충충’은 뉴웨이브의 경향성을 지닌 새로운 맛의 영화이다. 재미도 만만치 않다. 일단은 많은 (젊은) 관객들이 봐야 할 영화이다. 지난 6월 17일 개봉했지만, 관객 수는 5천 명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스크린 수는 단 55개에 불과하며 상영회수도 58회뿐이다. 이건 분명 공정성의 문제이다.
2005년생 유튜버 케인 파슨스가 만든 ‘백룸’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작품이다. 영화 내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런 비틀린 서사를 스무 살 갓 넘은 이가 쓸 수는 없다, 다른 누가 뒤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제작진 구성을 뒤져 보게 된다. 일단 프로듀서로 참여한 인물 중 제임스 완이 눈에 띈다. ‘쏘우’ 확장판, ‘컨저링’ ‘인시디어스’ 등을 만든 공포영화 전문가이다. 그의 2021년 영화 ‘말리그넌트’는 케인 파슨스의 ‘백룸’과 콘셉트가 비슷하다. 다만 내 안에 다른 내가 있는 것의 실체가 다르다. ‘말리그넌트’가 실제로 한 사람의 몸 안에 두 개의 육신이 들어 있는 얘기라면 (마치 샴쌍둥이가 신체 외부와 내부로 나뉘어 있듯이) ‘백룸’은 그 둘의 존재가 심리적이고 정신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백룸’은 어려운 얘기인 듯 사실은 미스터리 공포영화가 줄곧 다뤄왔던 얘기이다. 제임스 완만 있느냐, 여기에 로베르토 파티노 같은 TV 프로듀서 이름도 제작진에 올라 있다. 그는 윌 수딕의 각본 작업에 깊이 관여한 듯이 보인다. 파티노는 ‘썬즈 오브 아나키’나 ‘웨스트 월드’처럼 탄탄한 드라마와 차별화된 SF 공포 이야기를 오갈 줄 아는 인물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에서 비교적 저예산의 제작비로 차별화된 독립영화와 예술상업영화를 만들되 그것을 할리우드 기법으로 전개하는 배급사 A24(‘미나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패스트 라이브즈’ 등)가 맡았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생소한 유튜브 세계관의 작품을 기성 영화적 서사로 탈바꿈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존 영화는 전체 이야기의 프레임에 기승전결의 에피소드를 짠다. 유튜브 영화는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며 전체의 얼개를 짠다. 쉽게 말해서 쇼츠를 모아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를 다 만든 후 쇼츠를 잘라서 보이는 방식이 아니다. 시작점이 다르다. 그렇기에 짧은 이야기, 해당 부분이 갖는 영상의 완성도에 치중한다. 종종 이런 방식이 ‘대박’을 친다. 케인 파슨스는 아마도 16세 때부터 그랬던 것으로 보이며 그게 그의 유튜브 채널 ‘케인 픽셀즈’의 ‘백룸 웹시리즈’였고 그걸 지켜보던 A24가 당시 17세였던 케인 파슨스와 계약을 맺고 콘텐츠 자체를 픽업해 이를 확장하는 영화의 기획, 연출, 제작에 개입했을 것이다. A24였기에 노르웨이 스타 레나테 레인스베나 스타급 배우 추이텔 에지오포 캐스팅도 가능했을 것이다. ‘백룸’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계열의 영화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 옛날 이 계열의 효시 격으로 불리는 ‘블레어 윗치’(1999)나 ‘파라노말 액티비티’(2009)를 생각하면 된다. ‘곡성’을 만든 나홍진 제작의 태국 영화 ‘랑종’(2021)도 같은 계열이고 순수 우리 영화 ‘마루이 비디오’(2023)가 원색적인 파운드 푸티지 영화였다. 파운드 푸티지 영화는 세상에 괴담과 기담이 많고, 이것의 원천을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 마침 그런 일을 기록한 영상이 우연히 발견됐다는 식의, 그런데 그걸 찍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식의, 허구적 다큐, 페이크 다큐멘터리 구성의 작품들을 말한다. ‘블레어 윗치’ 콘셉트는 영화학도 세 명이 전설로만 내려오는 블레어 윗치에 대한 다큐를 찍으러 메릴랜드주 버키츠빌 숲에 들어갔다가 모두 실종된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이들이 찍은, 디지털카메라가 발견된다. 그 안에는 끔찍한(척 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번 ‘백룸’도 시작은 딱 그런 것이다. 약 5분 정도 길게 이어지는 ‘백룸’의 오프닝 시퀀스는 빈 건물 안에 미로처럼 돼 있는 어딘지 이상한 방과 복도들을 무언가(괴물이나 악마 혹은 살인자)에게 쫓기듯 뛰어다니는 누군가를 보여 준다. 전체가 시점 쇼트이다. 일인칭의 시점으로 대상(만)을 보여 준다. 영화 속의 누군가는 공포에 질려 방호복 속에서 가뿐 숨소리로 헉헉대며 쫓기고 도망치다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그는 백룸 내부에서 통신 장치를 발견하고는 동료인 듯한 이들과 교신을 시도하나 응답을 얻지 못한다) 그 과정이 담긴 테이프가 나중에 발견된다는 콘셉트이다. 녹화된 시점은 1990년 6월이다. 백룸의 미로만큼 복잡해 보이는 ‘척’하는 이 영화의 서사를 얼기설기 정리하면 이렇다. 극 중 인물들은 신축 중인 건물 ‘크레스트 릿지 타워’ 주변에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며 건축가를 꿈꿨으나 지금은 중고 가구점 ‘캡틴 클락의 오스만 제국’의 사장인 클락(추이텔 에지오포)은 정신적 노이로제 문제로 심리 치료사인 메리 클라인(레나테 레인스베)에게 정기적으로 상담받는다. 그는 운영하는 가구점이 경영난을 겪는 데다 (자신이 로스쿨 학비까지 지원했지만 결국 학업을 그만둔) 아내와도 이혼하고 (그는 자신이 집세를 내는 집까지 전처에게 빼앗기고 매장 쇼룸 침대에서 잔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메리는 그런 그와 역할극을 벌여 클락이 정신적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 찾게 하려고 노력한다. 가게의 전기요금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와 점검차 전기기사를 불렀다가 지하의 배전함에서 이상한 스위치를 발견한 클락은 전기장치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뾰족한 답을 얻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지하층 벽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벽을 더듬거리던 그는 (유령처럼) 벽을 통과해 그 벽 너머의 공간인 백룸(들)을 발견한다. 아무도 안 보인다. 그런데 누군가가 있다. 클락은 이 사실을 메리에게 얘기한다. 메리는 믿지 않는다. 클락은 조립식 주택에서 동거 중인 가게 직원 바비(핀 베넷)와 캣(루키타 맥스웰)에게 추가 임금을 주겠다며 백룸으로 끌고 들어간다. 바비는 클락의 홍보 동영상을 홈비디오로 찍곤 했기에 백룸의 상황을 비디오로 기록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셋 모두 없어진다. 상담 때 보인 클락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미심쩍어하던 메리는 그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자신은 못 돌아간다는)를 듣고는 그를 찾아 가구점에 갔다가 지하에서 역시 이상한 문(정확하게는 벽에 그린 문 표시)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메리는 거기서 클락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녀를 의자에 묶어 놓고는 자신을 변호한다. 하지만 메리는 클락의 말에 반박한다. 한편 메리는 어린 시절 살았던 엄마의 집이 헐리고 거기에 대규모 상업시설 건물인 크레스트 릿지 타워가 들어서는 것을 지켜본다. 이 건물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철거된 자기 집 때문에 엄마인 노라(크리스타 코소넨)가 피해망상에 시달렸고(그녀는 집 유리창을 신문 조각으로 다 가려놓고 살며 외부의 공격, 철거에 저항한다) 결국 정신병원에 갇힌 것으로 추측된다. 백룸에서 만난 클락은 목각인형처럼 보이는 거인 선장(캡틴 클락의 괴물 버전)에게 잡아 먹힌다. 구석에 앉아 있던 얼굴이 일그러진(몇 개의 단면으로 쪼개진) 여자는 그 과정에서 도망친다. 백룸이 열리고 구출된 메리는 어딘 가에 억류된다. 필이라는 남자는 메리에게 에이싱크 연구소가 MRI 기술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백룸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좀 더 안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다’고 말한다. 메리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자, 이쯤 되면 이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이며 극 중 화자의 실체는 무엇이고, 누가 환상 속의 인물인지, 누가 현실의 인물인지가 구별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누군가의 머릿속 회로에서 벌어진 일로 가구점 안 백룸의 미로에서 벌어진 일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왜곡에 왜곡을 거듭한 것일 수도 있다. 클락의 트라우마가 자신의 실패한 인생이 ‘가구탑’으로 재현되는 지하 1층 상황이었다면 이제 메리의 트라우마는 지하 몇 층인지도 모르게 끝도 없이 추락하는 ‘폐쇄된 집’으로 그녀를 가둔다. 몸속을 스캔하던 MRI가 이제는 심리를 스캔해 공간으로 찍어낸다는 이야기인데, 한 인간이 자신의 머릿속에 담고 사는 트라우마와 수많은 병적 징후가 MRI 같은 기계로 과연 판독해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어쩌면 영화 ‘백룸’은 바로 그 점을 짚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근데 이런 얘기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유용해? 라고 묻는다면 그’따위’ 질문은 케인 파슨스 같은 감독에게는 ‘저리 꺼져!’에 해당하는 것이다. 케인 같은 새로운 세대는 게임의 세계관을 통한 현실 세계의 해석이 익숙하다. 현실 세계의 빈틈은 그저 ‘버그’ 현상이라 하면 그만이다. 더 이상의 의미 부여는 필요치 않다. 세상이 달라졌으며 세대가 바뀌었다. 영화 ‘백룸’은 유튜브가 영화예술로 진화하고 있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지난 5월 27일에 개봉했고 6월 7일 현재 731,838명을 모으며 흥행 중이다.
개봉됐는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야구 경기’는 50, 60대 연령층에겐 ‘병맛 코미디’(어이없지만, 이상하게 중독성 있는 코미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이퍼스’로 읽히는 ‘Eephus’이다. 야구 용어이다. 일부러 느리게(시속 70~80km) 던지는 커브 볼이다. 우리 식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고치면 ‘아리랑 볼’쯤이 된다. 재밌는 것은,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이퍼스 볼이 그럴듯하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그려지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는 야구영화이지만 야구 경기가 극적으로 펼쳐지지는 않는, 이상한 스포츠 영화이다. 외야에서 ‘놀멘놀멘’ 하는 중년들, 더그아웃에서 일상의 불만을 투덜투덜 늘어놓거나, 1루에 서 있는 1루수와 베이스 주자가 경기 후 먹으러 갈 메뉴 얘기를 두런거리는 모습 등등을 끈덕지게 보여주는, 느려 터진, 그런데도 안 웃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슬로우 무비’이다. 일반 상업영화와는 서사의 속도가 다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속도가 리얼하다. 그래서 이게 ‘진짜’라는 느낌을 준다. ‘마지막 야구 경기’는 국내에서의 ‘대접’과 달리 미국 공개 과정에서는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한국의 ‘들꽃영화상’이 벤치마킹한 미국 독립영화상)’에서 존 카사베츠상과 편집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뉴욕비평가협회로부터 장편 데뷔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같은 느낌의 카스 룬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고 키스 윌리엄 리처즈, 네이트 피셔, 조 카스틸리오네 등등 국내에는 낯설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국 독립영화 배우들이자 나이 많은 배우들이 줄지어 나오는 영화이다. 특이한 것은 미국 다큐멘터리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캐스팅 리스트에 있는데 영화를 복기해 보면 오프닝 시퀀스의 라디오 캐스터 목소리가 바로 와이즈먼임을 알 수가 있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2026년인 올해 초 타계했으나 세상을 뜨기 전인 2024년에 목소리로만 출연한 이 영화가 그의 유작이 된 셈이다. 그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라디오 대본 내용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영화는 종종 오프닝에서 모든 걸 보여준다. “또다시 정각에 찾아온 ‘비포 위 비긴’의 브랜치 모어랜드입니다. 먼저 힐즈버러 카운티 사고 소식입니다. 화물트럭 한 대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도로를 이탈했으나 외곽지역인 덕분에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주요 뉴스입니다. 동네 개들을 위협하던 코요테 한 마리가 드디어 처단돼 열흘 뒤 할로윈을 편히 보낼 수 있게 됐으니 반려견과 함께 즐기세요. 물론 초콜릿은 주지 마시고요. 점점 쌀쌀해지겠지만 다양한 할로윈 행사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안타깝게도 올해 캔디콘 빨리 먹기 대회는 사탕을 세어 주던 ‘숫자 세기 신동’이 이사 가는 바람에 열리지 않을 예정입니다. 숫자 세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투표가 통과되어 3주 안으로 더글러스의 새 중학교 건설공사가 시작됩니다. 힐즈버러 카운티 위원회가 더글러스 중심부의 토지 재개발을 승인해 수년 만에 가장 큰 공사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하나 인근 마을 야구팀의 안방이었던 솔저스 필드가 사라지게 됐습니다. 새 야구장 건설 계획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으며 옆 축구장은 체육 수업에 활용된다고 하네요. 긴 겨울을 앞둔 노스 카운티 학부모들은 이제 럼색 중학교까지 40km가 넘는 거리를 운전하지 않아도 돼서 기쁘겠네요. 많은 학부모들이...(찌지직전파 소리)” 그리고 프래니(클리프 블레이크)가 늙은 몸을 이끌고 접이식 책상과 의자를 끼고 나타나 자리를 잡는다. 그는 스코어 키퍼이다. 곧 솔저스 필드에서 열릴 마지막 야구 경기를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선수들이 한명 한명 등장한다. 건설공사를 책임질 그레이엄(스티븐 라도치아)도 오는데 그는 리버 독스 팀의 리더이자 베이스 코치이기도 하다. 이번 마지막 경기는 리버 독스 대 애들러스 페인트이다. 두 팀 모두 힐즈버러 카운티 안 작은 마을을 대표하는, 일종의 사회인 야구단이다. 애들러스 페인트라는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어느 페인트 회사 소속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 야구는 프로들의 시합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9명을 채우지 못한 채 시합을 시작한다. 안 온 사람은 8번으로 배치하고 그래도 안 오면 9번으로 한다는 식이다. 투수를 강판했다가 구원투수로 다시 세우기도 한다. 주심이 6시쯤 자기는 퇴근 시간이 됐다며 야구장을 떠나기도 하고 어느 팀의 1루수는 부심에게 차에 실어놓은 스테이크용 고기를 줄 테니 주심 좀 잡아 보라고 하지만 그는 결국 9달러만 챙긴 채 주심을 따라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리버 독스의 선발 투수는 경기 내내 캔맥주를 마시다가 나중에 외야에서 벌렁 누워 버리기도 한다. 심판은 나중에 기록원인 프래니가 ‘대충’ 맡기로 하는데 중계석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침침하기 이를 데 없어서 공이 타자의 유니폼 글자 위로 왔느냐 밑으로 왔느냐를 가지고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별하기도 한다. 선수들은 밋밋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자기 팀의 공격을 바라보는데 꼭 이기겠다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경기 중간쯤 선수 중 한 명인 리치(레이 흐립)가 이런 말을 한다. 동료들이 막 그레이엄에 대해서 뒷담화를 하는 중이었고 리치는 그레이엄이 일종의 배신자라고 말하던 참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이 경기도 전투야. 가게에 가는 것도 전투야. 학교에서 애를 데려오는 것도 전투야. 자궁암 4기로 죽어가는 90세 할머니를 병문안하러 가는 건… 전투가 아냐. (그건) 사랑이지.” 이 대사는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가 하려는 얘기를 압축해서 다 담아내고 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거대한 미대륙의 커다란 한 주인 매사추세츠주, 거기서도 작고 작은 마을 더글러스에서 살아 온 ‘쓸모없어 보이는 인간들’ 혹은 ‘루저들’의 궁색하고 비루한 모습을 담아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그렇고 그런 신파 영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의외로 돋보이는 것은 인생이란 원래 스러져 가는 것이고 그래서 쓸모가 없어져 가는 것일 뿐인데, 그 시간의 흐름과 함께 스러져 감의 쓸쓸함을 차분하면서도 다정하게 담아내고 있는 부분 때문이다. 야구장 솔저스 필드처럼 자신들도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거 뭐,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조적 태도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미덕이다. 살짝 감동을 주되 괜히 울리려고 하거나 격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야구 경기 자체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러닝타임을 극 중 인물 간의 대사나 독백으로 이어가야 하며 적절한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 서사의 창의성이 만만치 않다. 후반에 이르러 MLB의 전설 빌 리를 깜짝 등장시킨다. 1970년대 이퍼스 피칭으로 유명했던, 진짜 투수이다. 빌 리는 더그아웃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선수들 앞에 나타나 누군가 자신을 본 적이 없다고들 하자 “자넨 그때 똥이나 싸는 강아지였으니까”라고 말한다. 그가 “지금도 그래요”라고 대꾸하면 “식단을 바꿔. 섬유질을 많이 먹어.”라고 말해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한다. 그는 계속 말한다. “나랑 뛰던 친구들은 거의 죽었어. 절반은 죽었고 절반은 죽고 싶어 하지. 송장 상태로 돌아다니고 싶어 하지 않거든. 요양원에 가서 볼에 흐른 콧물 닦는 신세가 되고 싶지 않잖아.” 이때의 빌 리의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다. 감독이 빌 리에게 진짜 자신의 얘기를 하라고 한 듯이 보인다. 빌 리는 영화에서 딱 한 이닝을 던지고 퇴장한다. ‘슬슬 기어 다니던’, 슬로우 시네마의 정석을 따라가던 이 영화에서 빌 리의 등장은 가장 어색하지만, 가장 진실되고, 가장 재미있으며 가장 울컥하게 만든다. 친구들의 절반은 죽었고 절반은 죽고 싶어 한다. 인생의 진리이다. 영화의 엔딩곡은 톰 웨이츠의 ‘Ol’ 55’이다. ‘올드 피프티 파이브’라고 읽는 노래이며 톰 웨이츠의 대표곡이다. ‘오래된 55년식 자동차’를 말하며 가사에서는 1955년형 캐딜락을 의미한다.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난 낡은 55년식 차를 타고 번개처럼 달렸지. 해가 뜨고 있고 난 운이 좋은 것 같아. 별들이 지기 시작하네. 조금만 더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노랫말이다.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의 솔저스 필드는 야간경기를 할 수 있는 스타디움 라이트가 켜지지 않는다. 선수들은 마지막 경기를 위해 자신들이 끌고 온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이용한다. 경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들은 약간 풀이 죽은 상태로 각자의 차를 몰고 경기장을 떠나기 시작한다. 톰 웨이츠의 이 노래는 가장 어울리는 영화를 만난 셈이 됐다. 수작이다. 지난 4월 22일 개봉됐다. 1449명이 봤다. 영화의 질은 꼭 관객 수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고로 친구끼리는 동업을 하면 안 된다. 연인끼리, 부부간에 무엇을 같이 도모하는 건, 인생을 살아 본 사람들이라면 가능한 한 다 피하는 일이다. 서로 달라야 산다. 동업을 하는 친구들은 반드시 싸우게 된다. 예술을 같이 하는 부부는 서로에 대한 시기심과 호승심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서로 달라야 같아진다. 우리가 인생에서 나중에 깨닫는 것은 같아지려 노력하지 않을 때 같아진다는 것이다. 투게더는 투게더에 대한 강박증에서 벗어날 때 투게더가 된다. 한국 극장가에서 홀대받고 있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일본 영화 '사토상과 사토상'은 바로 그런 얘기의 영화이다. 주인공 남녀, 사토 사치(키시이 유키노)와 사토 타모츠(미야자와 히오)가 같이 사법시험을 본다. 시작은 남자가 먼저였다. 남자가 한두 차례 낙방한 후 여자는 페이스메이커로 남자와 같이 공부한다. 그런데 여자가 먼저 손쉽게 합격하고 변호사가 된다. 남자는 이후 계속 시험에 떨어진다. 둘은 그사이 혼인 신고도 하고 아들을 낳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는 점점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토 사치는 어쩌다 보니 이혼 전문 변호사가 된다. 타인들의 이혼을 조정하거나 소송을 전담한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이혼 문제가 다가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남편인 사토 타모츠는 수험생활 10년 만에 마침내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둘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토 사치와 사토 타모츠는 대학 시절 자전거를 보관하는 거치대에서 만난다. 대단한 만남은 아니다. 일본의 사토란 성은 한국으로 만나면 김 씨나 이 씨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토와 사토의 만남은 극히 평범한 것이며 그 둘이 이어가는 인생 역시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는 얘기일 수 있다. 실제로 타모츠가 고향 집에 가서 만나는 선술집 주인 여자 요시다 리사(사사키 노조미)는 요염한 척, 흔들리는 타모츠를 유혹하더니 어느 날 쐐기를 박듯이 얘기한다. “시시해.” 그 뜻을 묻는 타모츠에게 리사는 말한다. “(너도 남들처럼) 위로를 받고 싶은 거잖아.” 사토 타모츠든 사토 사치든 이들이 만나는 누군가, 혹은 그 모두는 다 각자의 사연으로 일상을 투쟁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거기에는 특별할 것도, 무엇보다 그 어떤 우열(偶劣)도 없음을 보여 준다. 세상의 모든 갈등은 이 우열에 대한 인식, 그것이 정말 대단한 문제라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사토 타모츠는 먼저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아내 사토 사치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사토 사치 또한 남자가 모든 일을 다 자기 탓으로 돌린다고 생각한다. 둘은 서로를 위한다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들 상대에 맞추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엔 교묘한 틈이 있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휴지가 없네’와 ‘휴지가 없어’는 뉘앙스가 아주 다른 말이란 것을 사토상과 사토상의 부부싸움으로 이해하게 된다. ‘휴지가 없으니 내가 사 와야겠다’란 것과 ‘휴지가 없는데 당신이 사다 놔’의 차이라는 것이다. 모든 뉘앙스의 차이는 관계가 좋을 때는 뭉개지지만 사이가 안 좋아지면 예민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영화 '사토상과 사토상'은 사이가 안 좋아질 때, 서로가 예민해질 때의 얘기이다. 사랑‘했던’ 연인이나 부부는 단 한 단어로, 단 1초 만의 감정 차이로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얘기는 사토란 성이 가장 흔한 성이듯 가장 평범한 얘기일 수 있다. 다들 이렇게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셈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젊은이들 일부가 사법시험에 목을 맨다는 점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다. 타모츠가 사법시험 예비시험에서는 사치보다 점수가 높았던 모양이다. 일본에서는 이 예비시험을 통과하면 5년 이내, 다섯 번 이내까지 본시험을 볼 수가 있으며 이 횟수를 넘어가면 시험 자체를 볼 수가 없다. 이건 로스쿨 졸업자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처럼’ 사법시험을 9수까지 해서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그렇게까지 ‘병적으로’ 법조인이 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사토 타모츠는 대학 1학년부터 시작한 사법 공부가 예비시험 합격 기간까지 포함해 10년이 걸린 것으로 나온다. 타모츠와 사치는 30대에 이르러 구직과 결혼, 육아, 무엇보다 인생에 대한 자기 결정권과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법시험 통과나 전문 변호사가 되는 것은 사실 그 모든 일에 비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에 법적 용어가 난무하거나 법정 장면이 수시로 나오거나 하지 않는 건 그 같은 사회적 지위나 가치가 살아가는 데 있어 사실은 거의 효용성이 없음을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사치는 아들 후쿠가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를 때린 것을 두고 해당 아이 부모에게 무조건 사과하려 한다. 타모츠는 법률을 공부하는 남자답게 싸움의 원인, 선후를 따지려 한다. 사치는 그런 타모츠에게 더 이상 따지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 이 일로 타모츠는 사치와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치로서는 법률적 판단에 앞서 유치원의 규율이 더 중요한 것이지만 타모츠는 시시비비를 먼저 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늘 먼저 성숙해진다. 남자가 인생의 관습적 질서를 깨닫는 건 늘 여자 다음이다. '사토상과 사토상'은 극장용 영화치고는 시야가 좀 좁은 느낌을 준다. 이야기가 냇물을 통해 바다로 나아 가지는 않는다. 그 냇물이 동네의 개천 정도에 머문 느낌을 준다. 실제로 '사토상과 사토상'은 민영 방송 메테레(NBN, 나고야 TV)가 제작한 영화이다. 일본의 TV가 줄기차게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이유는 영화와 드라마가 거의 융합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NHK나 후지TV, TBS 등 거대 방송국이 극장용 영화를 직접 제작하거나 메인 투자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보다는 일본의 영화가 그만큼 일상적인 소재를 많이 다루고 있어서 TV 드라마의 정서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은 에세이형 소설인 이른바 사(私)소설이 히트 칠 때가 많은데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작품들) 이는 일본 사회가 개인의 영역을 극히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 시대 동안 전체와 집체(集體)를 강조했던 군국주의 시대에 대한 역작용이다. '사토상과 사토상' 역시 개인의 삶이 그 무엇보다 앞선다는 것을 보여 주고 강조하는 일본 영화적 풍토의 한 줄기로 읽힌다. '사토상과 사토상'은 결혼과 출산, 육아의 과정을 거치며 경력 단절을 겪은 많은 여성에게 여러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들 것이다. 사토 사치처럼 자기 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의 문제, 그 ‘지긋지긋한’ 이슈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인가. 영화 초반부에 사토 사치는 친구 시노다 아사(후지와라 사쿠라)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친구 시노다는 결혼식 때 행복했던 모습과는 달리 첫 아이 미키를 낳은 후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고민하며 변호사가 된 사치를 찾아온다. 이후 시노다는 남편과 별거하며 경제적으로 자립한다. 시노다는 사치에게 명함을 주며 자신이 이제 하세가와 아사라는 남편 성의 이름을 버리고 원래 이름인 시노다 아사를 찾았다고 말한다. 이제 더 이상 미키 엄마라는 말도 듣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시노다 아사는 다시 남편인 하세가와와 재결합하며 둘째 아이를 낳기도 한다. 인생은 묘한 것이며 생각하던 대로만 풀려 가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사토상과 사토상'은 인생은 미완성이고 쓰다가 마는 편지이며 부르다 마는 노래라는 걸 얘기하는 영화이다. 우리 서로가 모두 타향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말하는 영화이다. 이진관의 통속 곡 '인생은 미완성'의 노래 가사와 같은 얘기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은 결코 우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그 우월감과 열등감이 사랑의 관계를 규정해 나간다. '사토상과 사토상'은 국내 예술영화 전문 배급사인 엣나인이 2026 재팬무비페스티벌에서 상영한 작품이다. 지난 4월 29일에 개봉했다. 11일 기준 2080명의 관객을 모았다. 아트나인 같은 예술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
“새로 출시된 사료를 먹은 지 불과 1~2일이 지나 모두 죽어버렸어요.” 인천 남동구 구월동에서 희귀종에 속하는 애완용 도마뱀의 분양 매장을 운영하던 A씨(27)는 올해 1월 초 경기도 한 업체에서 사료를 구입해 급여(먹이 제공)를 했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사료를 먹은 700여 마리에 달하는 도마뱀 대부분이 심각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바닥에 널부러졌기 때문이다. 상태가 조금 나았던 도마뱀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행동이 느려지더니 같은 증세로 바닥에 널부러져 움직이지 않았다고 A씨는 주장했다. A씨는 이들 도마뱀 모두가 사료를 먹은 뒤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배가 크게 부풀어오르는 증세를 보였다가 이내 가죽만 남은 형체로 죽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A씨의 주장은 증거로 내놓은 사진과 영상에서도 확인됐다. 영상에서는 사료를 먹은 대부분의 도마뱀들은 움직임이 크게 줄더니 곧이어 배를 내민 채 끝내 목숨을 잃었다. A씨는 이들 도마뱀 중 그나마 살아있는 도마뱀을 선별해 지역 동물병원 등에 부검을 의뢰한 결과 간이 크게 부풀어 올라 다른 장기를 누르고 있었으며, 혈액 등에서는 대장균과 살모넬라균, 칸디다균 등이 검출됐다고 주장했다. A씨는 이번 사료 피해로 4억 원에 달하는 금전적 손해를 입었으며, 공황장애와 스트레스성 장애, 무기력증 등의 정신질환까지 앓게 됐다고 거듭 주장했다. A씨는 “업체 누리집에서 FDA(미국 식품의약국) 승인까지 확인했기에 전혀 불량 사료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며 “믿고 구입해 도마뱀들에게 급여를 했는데 이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업체는 자기들이 성분검사를 하겠다고 수거해 가고선 수개월 째 하지 않다가 되레 저를 경찰에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해 경찰 조사를 받고 왔다”며 “오히려 업체는 FDA 승인 문구도 누리집에서 지웠다. 증거들을 모두 수집해 무고죄 등으로 역고소할 계획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업체측은 “A씨가 주장한 내용들 모두 허위사실이다. 경찰 수사 중이라 밝힐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지만 대부분이 맞지 않는 말”이라며 “700마리 폐사도 실제는 200여 마리고 확인된 바이러스도 저희 사료에선 검출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어 “이는 분양 매장에서 생겨난 균으로 도마뱀들이 죽었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라며 “일부 다른 바이러스도 있지만 이는 도마뱀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관련 논문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 경기신문 / 인천 = 지우현 기자 ]
12·3 비상계엄 당시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전달하는 등 내란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 2심에서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내란전담재판부인 형사1부(윤성식 부장판사)는 12일 내란 중요임무 종사, 위증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 전 장관에게 징역 9년을 선고했다. 1심의 징역 7년형보다 2년 늘어났다. 2심은 1심과 같이 이 전 장관의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하고, 죄책에 비해 1심 형이 가볍다며 형량을 늘렸다. 2심 재판부는 이 전 장관이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회 등 주요 기관 봉쇄와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받고 당시 소방청장에게 “(경찰에서) 연락이 가면 서로 협력해서 적절한 조처를 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린 혐의(내란 중요임무 종사)를 유죄로 인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단전·단수 지시가 담긴 문건을 받지 않았고, 소방청장에게 전화로 “단전·단수 요청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뿐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상계엄이 위법했다거나 윤 전 대통령에게 국헌문란 목적이 있었음을 몰랐다는 주장도 배척됐다. 재판부는 “법 감정을 가진 일반인이라면 이 사건의 위헌·위법성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며 “내란에 대한 포괄적 인식이 없었다는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 경기신문 = 김태호 기자 ]
국립스포츠박물관이 추진 중인 ‘스포츠 스타 기증 릴레이’에 전 탁구 국가대표 홍차옥 선수가 참여해 큰 의미를 더했다. 홍차옥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탁구가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던 해 국가대표로 출전하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단짝’ 현정화와 호흡을 맞춰 여자 복식 금메달을 획득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두 선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춰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여자 탁구의 저력을 입증했다. 그의 선수 생활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91년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였다. 당시 그는 남북 단일팀의 일원으로 여자 단체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며 역사적인 성과를 함께 만들어냈다. 이번 기증에는 해당 대회에서 획득한 메달을 비롯해 총 24점의 소장품이 포함됐다. 그중에서도 당시 북측 선수였던 유순복이 직접 편지와 함께 전달한 탁구채는 남북 선수들이 함께 훈련하며 쌓은 신뢰와 우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용품을 넘어, 분단 상황 속에서도 스포츠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팀 코리아’의 정신을 담고 있다. 홍차옥은 "서로 살아온 환경은 달랐지만, 공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게 됐고 그 결과 하나의 팀으로서 금메달이라는 값진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회상하며 "이번에 기증한 소장품은 스포츠를 통해 서로의 마음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립스포츠박물관이 선수들만 간직해온 추억을 많은 이에게 알리고, 경기 결과만으로 담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스포츠 가치를 전하는 매개체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국립스포츠박물관은 이번 기증을 통해 선수 개인이 간직해온 역사적 순간을 국민과 공유하고, 경기 결과 이상의 의미를 지닌 한국 스포츠의 가치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또한 공식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채널을 통해 다양한 스포츠 스타들의 기증 릴레이 소식도 지속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한편 분단 상황 속에서 성사된 남북 단일팀은 스포츠를 통한 화합과 감동을 상징하는 사례로 평가받으며, 이후 영화 코리아로 제작돼 다시 한 번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남북 선수들이 함께 이뤄낸 값진 성과와 그 의미는 평화를 넘어 감동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 경기신문 = 김삼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