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캐나다 산 영화 ‘롱 레그스’는 요령부득의 영화이다. 이 영화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를 잠깐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영화가 시작된 지 57분이나 지나서이다. 주인공 리 하커(마이카 먼로)의 상관인 카터(블레어 언더우드)가 요약을 해 준다. 둘은 FBI 요원이고 리 하커는 신참이다. 마치 과거 조너던 드미 감독이 만든 ‘양들의 침묵’(1991)에서 팀장인 잭 크로포드(스콧 글렌)와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의 관계와 같다. ‘양들의 침묵’에서 둘은 버펄로 빌이라는 연쇄 살인범의 뒤를 쫓는다. 이번 영화 ‘롱 레그스’에서 리 하커는 카터와 함께 가족들만 골라 연쇄적으로 죽이고 다니는 일명 롱 레그스라는 이름의 살인범을 추적한다. ‘롱 레그스’는 기본적으로 ‘양들의 침묵’의 저예산 버전이고 여성 수사관의 캐릭터를 상당 부분 가져오되, 다소 비틀어서 가져온 작품이다. 그만큼 서로 같은 척, 사실은 상당 부분 다른 모습과 느낌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롱 레그스’는 그런 의미에서 ‘양들의 침묵’보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유전’(2018)을 더 닮아 있다. 일종의 사탄 숭배(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영화, 사탄(학) 영화이다. 이런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이 나오고 익숙하지 않은 계시록의 성경 구절이 나오기 마련이며, 색깔과 소리로 오컬트(심령)의 느낌을 만들어 내곤 하는데 이게 사실상 상당히 서구적이고 기독교적이어서 작품을 내재적(內在的)으로 파악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건 마치 우리의 무당 굿, 빙의(憑依)에 대한 이야기, 풍수지리, 사주 역술의 갖가지 문양 등등을 뒤섞어 놓으면 서구 기독교인들이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팀장 카터는 신참인 리 하퍼가 사건의 미스터리를 척척 풀어 오는 걸 약간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렇게 정리한다. “자, 자, 그러니까 1974년 1월 13일에 일가족을 죽인 롱 레그스란 인간이 20년 만에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살인극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이지? 그런 거라는 거지?” 영화는 오컬트의 환상과 미스터리, 실제 벌어졌음직한 살인극의 이야기를 오버랩 시키면서 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 속에 롱 레그스는 실재하는 인물로 나온다. 이 역할은 놀랍게도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았으며 그는 요즘 비교적 개성이 강한 작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연기 투혼을 다시 불사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2022년작 ‘피그’는 발군의 작품이었다. 케이지는 이후 24년까지 2년간 ‘올드웨이 : 분노의 추적자’ ‘렌필드’ 등 무려 10편의 독립영화에 출연했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 행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영화에서 케이지는 얼굴과 헤어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서인지 전혀 그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실제 사탄이 있다면 저런 스타일, 마치 하드 록커의 흉내를 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의 모습으로 나온다. 영화는 오프닝과 클로징 앞뒤로 록밴드 T-rex의 ‘집스터(Jeepster)’와 ‘겟 잇 온(Get it on)’을 사운드트랙 음악으로 사용한다. 일부의 사람에게 로큰롤은 악마의 음악으로 들렸다. 살인범 롱 레그스가 극 중에서 출현하는 방법은 마치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뛰어난 드라큘라 영화 ‘렛 미 인’(2015)을 닮아 있다. 악마는 누군가 초대하지 않으면, 곧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상대에게 들어갈 수가 없다. 사탄에게는 늘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드라큘라든 악마든 연쇄살인자든 그 불행과 비극은 우리 자신들이 초래한 것이라는 얘기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내 안에 있거나 우리 사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탄론의 정치사회학이다. 첫 살인극이 벌어진 1975년과 다시 연쇄 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1995년은 미국으로선 특기할 만한 시대이다. 70년대는 베트남의 공산화와 닉슨의 하야, 강경 보수주의자 레이건의 등장을 앞두고 큰 혼란을 겪었으며 1995년은 빌 클린튼이 등장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자본주의의 극단적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됐던 시기였다. 미국이란 나라와 공간은 이제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고립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분위기가 영화 ‘롱 레그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FBI 팀은 의도적으로 단출해 보인다. 팀이나 기동타격대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보이지 않고 요원들은 거의 혼자서 탐문과 수사를 하며 다닌다. 리 하커는 철저히 혼자이며 그녀가 다니는 곳도 거의 집 한 채만 있는 농장의 외딴곳이거나 버려진 곳이다. 리 하커의 엄마 루스(알리시아 위트)도 혼자 살아가는 기독교 광신도이다. 엄마 루스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딸 리 하커에게 “너 요즘 기도 는 하니?”라고 묻고 딸이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하자 한참을 낄낄댄다. 그리고 “기도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엄마 루스는 리 하커가 좇는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키를 쥐고 있음이 나중에 드러난다. 1975년에서 1995년까지의 미국이나,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미국이나 문제가 되는 건 정치나 사회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종교에도 큰 이슈가 자리하고 있음을 영화 ‘롱 레그스’는 느끼게 해준다. 광신도들이 암약했고 사회 한구석에 버젓이 자리해 왔음을 보여 준다. 이들로부터 툭하면 튀어나오는 성경 구절과 그에 대한 강박이 사회를 이상하게 몰아 간 측면이 있다. 사회의 이상성과 종교의 강박증이 만나면 인간의 정신은 마비되고 왜곡된다. 살인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클린튼 정부 때 텍사스 주 웨이코에 있던 다윗파가 FBI에게 체포, 충돌하는 과정에서 집단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시대의 어둠은 마치 사탄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듯 퍼지는 법이다. 고립무원의 공간에서 ‘롱 레그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악마에게 지배당한다. 사탄은 (내부의) 동조자가 없으며 사람을 해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은 인간의 손을 빌려 인간을 해하고 죽인다. 결국 사탄이 되는 건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탄화되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인간인 셈이다. 오컬트 영화가 줄곧 만들어지고 있고 일부에서 나마 마니아 계층들에 의해 비교적 마니악(maniac)하게 향유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세상사가 이상하게 변형돼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긴,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 남성들이 민주당의 낙태권 주장에 반기를 들어 자신들 같은 이민자들이나 유색인 하층 노동자를 탄압하는 트럼프에게 오히려 많이들 표를 찍었다는 그 종교적 특이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 또한 사탄에 동조하는 현상일 수 있다. ‘롱 레그스’는 그런 정치적 은유를 담고 있는 영화일 수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오스굿 퍼킨스는 그 옛날 안소니 퍼킨스의 아들이다. 영화 ‘사이코’에서 식칼 살인마로 나왔던 배우이다.
구룡성채의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다. 九龍寨城. 채는 울타리 채 자이다. 구룡에 있는 울타리로 쌓은 성이란 뜻이다. 현대에 이르러 좀 더 알기 쉽게 구룡성채, 九龍城砦로 바뀌었다. 구룡반도에 있는 일명 마굴(魔窟), 최악의 슬럼가였다. 1993년에 철거돼 지금은 공원으로 돼있다. 국가의 법, 사회의 공권력이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치외법권 지역이었으며 갱단 조직인 삼합회가 운영했던 곳이다. 그 얘기를 다룬 것이 바로 ‘구룡성채 : 무법지대’이다. 영화는, 겉으로 보기엔 삼합회와 또 다른 특정 세력인 범죄 조직과 그 우두머리들의 치열한 권력 다툼을 그린 내용처럼 꾸며져 있다. 실제로 홍콩 영화 특유의 과도한 권법 액션과 잔혹한 폭력의 장면으로 점철돼 있다. 영화 마케팅도 과거 1980년대 홍콩 누아르를 추억하거나 여전히 추앙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식으로 짜여 있다. 영화의 겉만 보면 좀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속 내용이 겉보다는 좀 더 깊다. 어마어마한 의미까지는 아니어도 홍콩인들이 지금의 홍콩, 더 나아가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지금의 중국 시진핑 정부가 홍콩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홍콩 사태, 곧 홍콩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서 처참하게 탄압된 지 만 5년이 지난 시점이다. 영화는 늘, 사회와 역사의 문제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구룡성채가 지독한 슬럼이 된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청 말기인 1898년 영국이 아편전쟁 이후 홍콩을 무력으로 점령할 때 청의 허울뿐인 방어선의 하나가 이곳 구룡성채였다.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그곳을 탈출한 본토 난민들이 불법적으로 체류하며 자신들만의 국가 아닌 국가를 구축한 곳이다. 당연히 홍콩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곳이었으며 이후에도 각종 난민들의 본거지가 됐고 그 와중에 범죄조직인 삼합회가 독자적으로 관할 운영하게 된 곳이다. 영화 ‘구룡성채 : 무법지대’는 이 지역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전설의 고수 3인의 얘기부터 시작된다. 극중 관계는 다소 복잡해서 오프닝 시퀀스의 자막 설명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과거의 주요 인물은 사이클론(고천락)과 레이, 찬 짐(곽부성)이다. 찬 짐은 레이 갱의 최고 살인 병기이다. 셋은 형제 관계를 맺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이클론은 다른 조직 ‘추’에 붙었고 곧 벌어진 피 터지는 싸움에서 사이클론은 추와 타이거라는 또 다른 일파와 손을 잡고 레이 파를 제거한 후 구룡성채를 접수한다. 이 과정에서 사이클론과 찬 짐은 (전설에 따르면) 7일의 낮과 밤을 싸운다. 그 전장(戰場)의 흔적은 현재까지 구룡성채의 성지로 남아 있다. 사이클론은 이후 추 밑에서 성채 치안위원장으로 사실상 구룡성채를 지배한다. 바깥에는 또 다른 삼합회 조직인 미스터 빅(홍금보)이 호시탐탐 구룡성채의 지배권을 노리는 중이다. 문제는 그다음 세대에서 다시 재현된다. 추는 자신의 일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한 찬 짐에 대한 복수심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자신 역시 찬 짐 일가의 대를 끊겠다고 결심해 왔다. 그런데 찬 짐의 아들이 살아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그가 바로 찬 록 쿤(임봉)이다.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베트남 난민이 돼 구룡성채로 들어온 인물이다. 찬 록 쿤이 찬 짐의 아들인지 처음엔 몰랐던 사이클론은 그의 보호자가 되고 자신의 심복인 신이(유준겸)를 붙여주기까지 한다. 찬 록 쿤과 신이, 사이클론의 또 다른 후계자 급인 AV(장문걸)와 타이거 조직의 1인자 십이소(호자동), 그렇게 4인은 형제 관계의 연을 맺기 시작한다. 갈등의 시작은 조직의 우두머리 급인 추 조직과 동조자 타이거 파 보스가 찬 록 쿤의 살해를 명령하고 이를 사이클론이 거부하면서 시작된다. 사이클론의 실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추는 바깥의 삼합회 조직 미스터 빅을 끌어들인다. 미스터 빅 수하에는 킹이라는 살인귀가 있다. 구룡성채는 곧 피바다가 되기 시작한다. 추 조직과 오랜 동지 관계를 맺어 왔던 사이클론은 찬 록 쿤을 죽이라는 지시를 거부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 “우리 세대의 문제를 애들한테 떠넘기지 말자.” 사이클론은 과거 찬 록 쿤의 아버지 찬 짐을 죽이면서 그에게 아들을 살려주고,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이클론이 레이를 배신한 것은 레이 때문이었지 찬 짐 때문은 아니었으며 그는 자신이 찬 짐을 죽이게 된 일을 이후 내내 뼈아프게 후회하며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 세대의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자는 말은 홍콩의 지난 역사를 생각할 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사이클론은 찬 록 쿤이 찬 짐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된 후 그에게 구룡성채를 떠나 멀리 도망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찬 록 쿤은 사이클론에게 돌아오려 한다. 그는 말한다.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이곳에서 살다가 죽고 싶어요.” 찬 록 쿤의 이 대사 역시 기묘한 기시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중국 정부는 어쩌면 홍콩과의 오랜, 굴곡진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의 일은 우리에서 끝내고’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홍콩에서 낳고 자란 홍콩인들이 홍콩에서 살고 홍콩에서 죽기를 바랄 만큼 홍콩에 대한 애정이 높고 그것을 잘 알지만(사이클론), 강고한 국가주의 원칙에 따라 소개와 이주가 이루어져야 한다(추)고도 생각한다. 중국 정부는 그 가운데에서 과연 현명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 ‘구룡성채 : 무법지대’는 중국이 홍콩(인)의 문제를 바라보는 일단의 시각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 전의 홍콩을 구룡성채=슬럼=치외법권지대의 아수라 구렁텅이였을 뿐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구룡성채 같은 이미지의 홍콩이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말끔하게 정상화됐다는 것이다. 아마 그 점 역시 강고한 전체주의적 입장의 현 중국정부가 이 같은 누아르 영화의 부활을 용인한 이유일 수 있다. 구룡성채를 과거의 이미지 그대로 복원해 구현한 미니어처, CG, 세트의 공학이 놀라운 작품이다. 중국 영화의 기술력이 일취월장을 넘어서서 위협적인 수준이 됐음을 보여 준다. 극중 인물들이 구사하는 홍콩 무술 액션의 호쾌함, 그 속도감과 정밀함의 미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홍콩 액션의 영화지만 한편으로는 홍콩의 씁쓸한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픈 작품이기도 하다. 홍콩은 홍콩인에게. 이제 그런 말은 결코 들을 수 없는 메아리가 될 것이다.
중학교 졸업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타쿠미 아사(하야세 이코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버려진 대야 같은 신세가 됐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는다. 성격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인 이모 코다이 마키오(아라가키 유이)는 아이에게 화난 목소리로 대야는 한자로 관(盥)이라고 쓴다며 관은 절구 구(臼)에 물 수(水), 접시 명(皿) 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마키오는 죽은 언니 미노리(나카무라 유코)와 의절한 채 살아왔다. 그녀는 청소년 소설 작가인 듯이 보이고 작품이 웹툰 등으로 만들어지는 등 성공한 작가여서인지 자립해 살아가고 있다. 자립해서 독자적으로 산다는 건 독립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깥 세계는 차단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이기적인 고독일 수 있다. 당연히 이모 마키오와 조카 아사의 동거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타 나츠키 감독의 ‘위국일기’는 야마시타 토모코의 순정만화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왜 일본의 이야기 문화가 단행본 만화나 웹툰이 기반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제 일본 사회의 특징 같은 것이 돼버린 지 오래이다. 일본의 단행본 만화책 시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1년에 7천억엔, 7조 규모다. 우리의 영화 시장 사이즈는 2조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구 대비 작은 시장은 아니라는 평가이다. 따라서 일본과 한국이 영상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위국일기’라는 영화의 제작은 그렇게 개별적인 세계(만화책은 혼자서 보는 것이니까)를 탐닉하는 일본인 특유의 전통에서 탄생한 서사(敍事)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위국(違國)이란 말은 국가가 망가졌다는 의미이다. 작게는 가정이 무너졌고 더 작게는 개인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 위국(衛國)을 위해서는 어긋난 국가, 곧 위국(違國)을 버려야 하거나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위국(衛國)을 위해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 익숙하지 않은 애매하고 모순돼 보이는 상황에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은 불편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자신의 언니와 완전히 틀어진 채 불화의 삶을 살아온 주인공 마키오는 조카 아사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 마키오 이모가 조카 아사는 짜증이 난다. 자신을 짜증 내 하는 아사를 두고 마키오는 성가셔 한다. 성가시고 짜증 나는 두 명의 관계는 대체로 좁혀질 수가 없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모와 조카의 동반 성장기를 그린다. 마키오는 충동적 육아를 통해 조금씩, 평생을 멀리해 왔던 언니의 마음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아사는 이모와의 삶, 타인과의 비자발적이면서도 강제된 일상을 통해 부모의 죽음, 그 상실의 상처를 조금씩 극복해 나간다. 두 사람 모두 개인의 관계를 통해 전체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거나 회복해 간다.(마키오는 극 후반에 자신과 자신의 언니를 구별해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 악수를 청한다.) 세상에는 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의 불행은 그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이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로 대체돼야 한다는 점에 있다. 대체 불가능하지만 뭔가로 대체해야 할 때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이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고 형성해야 하는 관계이다. 사랑 역시 저절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공부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키오는 아사를 통해 아사는 또 마키오를 통해 사랑과 배려를 배우고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며 그렇게 서서히 가족이 되어 간다. 위국은 결국 위인(違人)이어야 하며 개인을 구하지 못하는 사회는 국가를 구할 수 없으며 가족을 위해 싸우는 자들만이 국가를 위해 투쟁할 수 있다. 영화 ‘위국일기’라는 순정만화의 스토리가 궁극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모두 11권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순정만화를 2시간 안쪽의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다소 지루한 맛을 띠게 됐다. 원작의 캐릭터가 지닌 에피소드를 모두 다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압축의 미학을 표현해 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민이었겠으나 연출 역량이 거기에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듯이 보인다. 이럴 때는 두 가지이다. 원작을 그대로 살려 11부작 드라마로 만들든지 과감하게 캐릭터를 걷어 내든 아니면 합쳐 내든 해서 이야기를 두세 명의 캐릭터로 집중시키든지 해야 했을 것이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중간 지대에서 눈치를 보는 식이다. 일본 영화가 갖는 총체적인 문제, 곧 스토리를 어떻게 빌드 업하고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자기만의 매뉴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점이 더 좋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일본 영화는 밋밋하다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일본 화의 대체적 평가의 분기점은 이런 데에서 나온다. 영화 ‘위국일기’는 패전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국가적 유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청소년기의 방황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 사회의 순정만화 같은 영화이다. 그래도 이 작품을 비교적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11권의 『위국일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겠다. 아마도 이 영화의 국내 수입은, 청소년들이나 젊은 관객들에게 퍼져 있는 만화 원작의 인기를 고려한 탓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의 인기가 영화의 흥행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만화를 좋아하는 팬층은 영화가 원작의 풍부함을 잘 살려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키오와 죽은 언니 미노리의 성격 차이는 확연하다. 미노리는 늘 깔끔하고 정돈을 잘하고 사는 스타일이다. 요리와 살림을 잘하고 딸을 키우는데 정성을 다했다. 동생인 마키오는 도무지 정리 정돈이란 걸 할 줄 모르고 사는, 오로지 나 살기에 바쁜(소설쓰기에만도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요리는 전혀 하지 못한다. 조카 아사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려면 유일한 단짝 친구인 다이고 나나(카호)를 초대해야 할 정도이다. 위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개인부터 구해야 한다. 개인을 구할 줄 알아야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 사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개인의 가치가 국가나 전체의 가치보다 뒤처지는 사회는 열린 사회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극 중에서 부모가 죽은 아이 아사처럼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국가주의와 전체주의, 파시즘의 재 부활을 막는 것이다. 원작이든 영화든 아사의 부모를 ‘죽인 후’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든, 일본과 준하는 사회이든, 부모(국가)가 죽어야 새로운 세대(미래의 나라)가 산다. 일종의 살부살모(殺父殺母)의 의식, 이데올로기이다. 영화 ‘위국일기’가 단순한 순정만화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영국 유명 작가 닉 혼비의 소설 『벌거벗은 줄리엣』을 영화로 만든 작품으로 2018년 작품이지만 뒤늦게 국내 개봉된 ‘줄리엣, 네이키드’는 여러 층위를 깔고 있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음악영화 같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맨스 물이고 조금 더 생각해서 들여다보면 인생에 대한 성찰을 그린 작품이다. 기대하지 않고 골랐다가 의외의 케이크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맨 위에는 초콜릿이 얹혀 있고 그 밑에는 달콤한 크림이, 그 안에는 푹신한 느낌의 빵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많이 먹으면 느끼하지만 적당히 한두 조각을 먹으면 뇌를 활성화시키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유의 영화, 곧 멜로 영화가 지닌 순기능적 특성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로맨스 작품을 봐야 한다. 아니 사실은 스스로 보려고들 한다. 그것이 아무리 판타지에 불과하고, 궁극의 거짓말인데다, 결국 헤어짐으로 끝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러브 스토리에 열광한다. 사랑은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줄리엣, 네이키드’의 기본 로그 라인은 “1993년에 미니애폴리스의 한 클럽에서 공연 도중 갑자기 사라진 미국의 전설적인 록 가수 터커 크로우(에단 호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근데 그건 이 영화의 일부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 샌드클리프에 사는 한 대학교수 던컨(크리스 오다우드)이라는 남자가 포문을 연다. 이 남자, 터커 크로우의 광 팬이다. 15년 동안 그를 추적 중이다. 인터넷 동호회도 만들었다. 최초 음반부터 이런저런 글과 신문 자료까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수집하고, 회원들과 그것을 공유하며, 늘 터커를 놓고 흥분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에겐 터커의 유령을 쫓아다닌 15년 만큼 같이 동거해 온 연인 애니(로브 번)가 있다. 애니는 샌드클리프의 시(市)박물관의 학예사이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래된 유물, 몇 안 되는 유적(상어 눈 같은 것)과 자료를 뒤적이며 산다. 그녀는 곧 1964년을 모티프로 한 전시를 계획 중이다. 1964년에 영국 샌드클리프에서는 롤링스톤즈 공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샌드클리프는 한때는 북적였지만 지금은 쇠락한 해변 마을이다. 런던의 남쪽, 영국 해협과 그리 멀지 않고 대서양과 북해의 바다를 볼 수 있는 지형의 도시로 보이지만 실재하는 곳인 지가 다소 불분명할 만큼 잊힌 해변도시이다. (실제 촬영은 동부 켄트주의 타넷이란 섬의 소도시 브노드스테어스에서 진행됐다.) 어쨌거나 이런 작은 도시에서의 대학교수라고 하는 던컨이나, 이런 곳에서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아가는 애니의 삶이란 그냥 별 볼일 없이, 평범하고 서민적이며,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둘은 결국 터커 크로우에 대한 던컨의 집착 때문에 싸우고 갈라선다. 그 와중에 던컨은 대학의 동료 교수와 바람이 나고 애니는 우연찮게 진짜 터커 크로우와 문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애니도 사실 바람이 난 셈이다. 그렇고 그런 얘기 같지만 실상 닉 혼비의 이 소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시스토 로드리게스라는 걸출한 싱어 송 라이터의 존재감을 픽션화 한 느낌을 준다. 로드리게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의 노동자 가수로, 터커처럼 아주 오래전, 곧 70년대에 한 장의 명반을 발표한 후 홀연히 사라졌고 거의 40년이 지난 후 한 열성 팬인 말릭 벤젠룰에 의해 재발굴, 발견되어 다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다. 그 얘기가 바로 말릭 벤젤룰이 만든 음악 다큐영화 ‘서칭 포 슈가맨’(2012)이다. ‘슈가맨’은 시스토 로드리게스가 마지막 공연에서 부르고 사라지기 전 부른 노래이다. 지금 얘기 중인 영화 ‘줄리엣, 네이키드’의 제목 역시 영화 속 전설의 가수 터커 크로우가 공연 중 사라지기 전에 불렀던 노래 제목이다. 두 얘기는 이 부분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영화를 만든 제시 페레츠 감독은 이야기를 좀 더 말캉말캉한 러브 스토리로 바꿔 놓았다. 거기에다 성찰의 드라마를 비벼 놓고, 할리우드 식으로 비교적 ‘해피’한 ‘엔딩’으로 끝을 맺기도 한다. 그게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슬며시 미소를 짓게도 만든다. 전설의 가수 터커 크로우는 잃어버린 20년간 사방 군데에서 여자를 만났고 마약과 술에 취해 살았으며 그래서 낳은 자식이 5명이나 되는데 각각 다 엄마가 다른 아이들이다. 지금은 아주 어린 아들 잭슨을 돌보며 살고 전처의 집, 뒤편 창고에서 백수로 지낸다. 그래도 그의 생계는 과거 그 전설의 음반이 만들어 내는 음원 수익으로 가능한 상태이다. 한때 막 살았던 인간은, 막무가내의 삶과 엉망의 일상을 살았던 사람은, 어느 순간 철 지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 사람들은 비교적 통찰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터커 크로우가 애니와의 문자’질’에서 여자가 자신의 지난 15년 인생이 온통 마이너스뿐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답을 쓰는 식이다. “인생에서 15년을 낭비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좋아요. 우선 숫자부터 줄여 봅시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보낸 시간을 빼고, 즐거운 대화와 수면 시간도 빼요. 그것들은 중요한 거니까요. 그럼 낭비한 시간이 10년쯤으로 줄어들 거고 10년 미만의 모든 것은 세금 낼 때도 탕감해 줘요. 농담이고요, 난 내가 잃은 것들 때문에 여전히 마음이 아프지만 밤이 되면 그냥 그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잠을 잘 못 자나 봐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애니는 뒤늦었지만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터커를 만나러 런던에 갔다가 그가 갑자기 심장 쇼크로 병원에 실려 간 후 문병을 간 자리에서 그 많은 터커의 자식들, 몇 명의 전처들을 한꺼번에 만난 후 자신은 이 ‘패밀리’에 낄 틈이 없다고 느낀다. 아이를 갖는 것에 망설이게 된다. 애니가 전처들과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터커를 만나는 병실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코믹한 장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장 편안하고 평화로우며 동시에 아주 착한 장면이다. 이복의 형제들은 어색하고 낯설지만 서로 예의를 다해서 인사를 나누고 전처들은 ‘한심한’ 남자를 한때 공유했던 ‘한심한’ 사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줄리엣, 네이키드’는 하찮아 보이는 작품들, 트로트 콘서트 영화와 아이돌스타들의 팬덤 콘텐츠들이 극장가의 메인 룸을 차지하고 있는 이 허름한 세상의 한구석을 지키며 스스로 조용히 빛을 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작은 진주를 발견한 듯한 느낌을 준다. 에단 호크의 늙어 가는 연기가 일품이다. 소설도 쓰고 연주와 노래도 하는 배우답게 이 문학 영화에 딱 들어맞는 메서드 연기를 펼친다. 로즈 번은 ‘노잉’(2009)을 찍은 지 15년이 지났지만 거의 그때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았다. 영화 속 애니와 달리 15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는 얘기일까. 닉 혼비의 소설 속 캐릭터를 자기만의 무엇으로 재해석해 낸 배우들 연기의 합이 좋은 작품이다. 터커는 애니를 만난 후, 그들만의 재결합을 한 후에 25년 만에 새 앨범을 낸다. 앨범 제목이 ‘자, 그래서 나는 지금 어디인가?(So, where am I?)’이다.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영화가 묻고 있는 질문의 핵심이다.
극장가 한편에서 조용히 개봉 중인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연극 ‘라스트 세션’(국내에서도 2023년 대학로에서 번안 공연됐다. 신구 이상윤 출연)을 기반으로 한 작품인 만큼 매우 연극적인 작품이다. 두 배우의 다이얼로그가 영화 전반을 차지하고 내용도 꽤나 깊고 철학적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이전의 연극이 어쩔 수 없이 ‘평면적’일 수밖에 없었다면 영화는 영화인 만큼 시공간을 오가는 입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예컨대 영화에서는 프로이트 박사의 꿈과 환상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가 지니는 표현주의 미학의 정점 같은 것을 담보해 내는 것이다. 그런 장면은 마치 오래전 알프레드 히치코크가 만든 ‘스펠바운드’(1945)를 연상케 한다. 한국에서는 『 KBS명화극장 』 방영 당시 ‘백색의 공포’라는 제목의 영화였으며 그레고리 펙과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왔던 작품이다. 정신분석이지만 스스로 정신병, 강박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은 종종 꿈을 꾸는데 그 내용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 영상으로 이어진다. 이번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에서도 프로이트 박사(안토니 홉킨스)는 꿈을 꾸는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휠체어에 태워진 채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는 장면이다. 침대에는 자신의 딸 안나(리브 리사 프리에스)와 그녀의 동성 연인 도로시(조디 발포어)가 벌거벗은 채 서로 껴안고 누어 있다. 옆방에는 어릴 때 아버지가 그때 모습 그대로 나와 자신을 노려 보고 있으며 벽에는 온통 성 딤프나(정신병 환자들을 지켜주는 수호성인) 등 가톨릭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가득하다. 프로이트 박사의 턱수염은 그가 흘린 피로 가득해진다.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이처럼 연극 ‘라스트 세션’이 보여 줄 수 없었던 장면들을 ‘영화적으로’ 재창출해 낸다. 그 연출의 작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정신분석 의학의 최고 경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마지막 미팅 혹은 마지막 회의의 몇 시간을 보여 준다. (그는 며칠 후 구강암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안락사 하는 것으로 나온다.) 회의의 상대는 옥스퍼드 대학교수이자 훗날 『나니아 연대기』란 소설을 써 판타지 문학의 최고봉 작가가 된 C.S.루이스이다. 영화 속에서는 잭 루이스(매튜 구드)로 불린다. 때는 1939년 9월 1일이 막 지난 때이고 장소는 영국 런던이다. 1일은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날이다. 런던 시내에는 연일 공습경보가 울리고 일단 아이들을 대상으로 소개령이 내려져 기차역에는 자신의 아이를 시골로 내려보내는 엄마들로 넘쳐 난다. 라디오에서는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나와 독일이 폴란드 국경에서 9일까지 물러나 줄 것을 요청했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체임벌린 내각은 전쟁 전 히틀러와 밀약을 추진할 만큼 순진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전쟁 전야의 와중이다. 곧 나치의 런던 대공습이 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프로이트 박사는 잭 루이스를 초대한다. 그가 얼만 전 발표한 신학 에세이 『순례자의 귀향』때문이다. 둘은 세계관이 다르다. 한때는 둘 다 무신론자로서 같은 대열에 있었으나 루이스는 현재 성공회로 개종한 상태이다. 지금의 세상을 과연 신이 창조했는지, 그런데 왜 이 모양(1차 대전에 이은 또 다른 대전 직전)인지, 신은 무능한 것인지 이기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 탓인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두 박사는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프로이트 박사는 스스로를 ‘믿음과 숭배에 집착하는 열정적인 불신자’라고 명명한다. 그의 정신분석은 세상의 폭력과 인간 내면의 폭력이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한 기초에서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젠주흐트(Senhsucht, 갈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는 ‘우리가 보거나 인식하는 것은 다만 꿈속의 꿈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꿈에 대한 분석을 어떻게 사회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느냐야 말로 프로이트 이론 분석의 시작이다. 반면 옥스퍼드 교수인 잭 루이스는 인간의 행동은 때론 신의 영역이어서 모든 걸 다 분석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인간의 모든 잘못은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를 올바로 행사하지 못한 탓이지 결코 신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루이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본질적으로 성적(性的)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프로이트는 그런 그에게 정신분석학에서 성이란 쾌락의 상호성을 말하는 것이지 꼭 육체적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인데 두 사람이 종종 꾸는 꿈은 공히 숲속에 홀로 버려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지만(아버지의 부재를 갈망했기 때문에) 루이스는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와중에 꼭 사슴이 자신 주변에 있음을 느낀다. 프로이트는 큰 딸 조피와 그녀의 아들을 병으로 잃고 난 후 막내 딸 안나에 대한 자신의 집착에 시달린다. 안나가 갖고 있는 아버지인 자신에 대한 근친 갈망(일종의 애착 장애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을 어찌하지 못하는 비밀을 갖고 살아가는 중이다. 루이스는 루이스대로 전장에서 같이 싸우다 죽은 친구의 엄마 제니(올라 브래디)와 동거 중이다. 그 역시 비밀스러운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 모두 정신 분석학적으로 ‘사람이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다. 극중 프로이트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 모모스 얘기를 한다. 모모스는 인간을 싫어하는 신으로 조롱과 풍자가 전문이며 인간과 살아가려는 다른 신들에 의해 신전에서 내쫓긴 상태이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혐오하며, 따라서 신 중에 닮은 신은 ‘쫓겨난’ 신 모모스 를 닮았다는 의미이다. 전쟁의 와중에 두 석학의 이 같은 비공식적인 고담준론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꽤나 깊은 울림을 준다. 세상의 폭력은 내면의 폭력을 치유하는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 인간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한 내면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는 한 세상의 모든 잘못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무신론자인 프로이트와 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루이스가 합의해 가는 내용이다. 프로이트는 루이스와 헤어지면서 친구라는 표현을 쓴다. 프로이트는 루이스의 저서 『순례자의 귀향』을 루이스에게 선물로 주는데 거기 첫 장 서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러면 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실제로 만났는지는 역사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순전히 상상력의 산물로 두 인물의 사상을 접목시켰을 때 어떤 논쟁이 벌어질까를 생각하고 개발한 대본이자 시나리오이다. 영화와 연극이 해낼 수 있는 상상력의 극치이다. 이런 걸 두고 흔히들 ‘예술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안토니 홉킨스의 명불허전 연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루이스 역의 매튜 구드 연기도 그 못지가 않다. 저렇게 수많은 대사를 어떻게 외울까 싶을 정도로 달변의 연기들을 선보인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에서의 ‘세션’ 열기는 실로 불꽃이 튀긴다. 두 사람의 연기와 그것을 잡아낸 연출(감독 맷 브라운) 덕이다. 대화 장면은 커트 수를 잘게 나누지 않고 대체로 길게(롱 테이크로) 찍었다. 영화의 시작과 후반에는 『천로역정』의 문구가 쓰인다. 1678년 존 번연이 쓴 성서소설이다. 영화 오프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세상의 황야를 거닐다가 / 한 동굴이 있는 장소를 발견하곤 / 몸을 뉘어 잠을 청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후반에는 루이스가 집 앞에서 만난 프로이트의 딸 안나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이 분노와 눈물의 땅 너머로 / 공포의 그림자만 어른거리지만 / 세월의 협박은 지금도 앞으로도 / 날 두렵게 하지 못하리.” 한 사람에게 동굴은 정신분석학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성서였지만 세상의 공포가 자신을 두렵게 하지 못한다는 것에 합의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상 최고로 미스터리한 논쟁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논쟁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이 가르쳐 주는 궁극의 대목이다.
한국에서 가장 과작(寡作)의 감독 군에 속하는 오승욱 감독이 9년 만에 세 번째로 내놓은 신작 ‘리볼버’는 필름 누아르에 정통한 감독과 제작자(사나이 픽처스 한재덕 대표)답게 어두운 욕망과 비정한 관계, 하드보일드한(hard-boild : 냉혹한) 액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간의 평가는 저점을 오가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자로서의 짐작으로는, 극의 결말 부분에서 감독과 제작자, 배우의 의견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관객들도 그 부분에서 영화에 대한 전체 반응이 엇갈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영화의 완성도가 어떻다느니, 배우들의 연기가 어떻다느니 하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저급한 인상비평에는 동조하기가 어렵다. ‘리볼버’는 잘 만든 영화이고 나름 숨이 막히는 서스펜스가 있으며 이런 류의 영화 치고 속도도 빨라서 오히려 감독이 느린 작가주의 풍을 따라가지 않고 상업주의 영화의 흐름을 타려고 했다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이 정도면 흔히들 ‘재미가 있다’고들 말한다. 게다가 조영욱의 음악은 ‘올드 보이’나 ‘신세계’ 때처럼 자신의 강점과 특성(클래식과 재즈를 오가는 크로스 오버 풍의)을 잘 살려 내고 있어 극적 긴장감을 배가 시킨다. 영화는 모자란 틈이 별로 없다. 아마도 일부 저널에서 야박한 평가가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극중 인물인 ‘황정미’라는 존재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주인공인 하수영(전도연)은 정마담이라 불리는 정윤선(임지현)의 도움을 받아 황정미의 존재를 좇는다. 황정미가 자신이 간신히 (돈을 착복해) 마련해 놓은 아파트와 7억이라는 돈의 행방을 알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정미는 이스턴 프로미스라는 위장 조직의 본부장과 그레이스라는 총수 여인(김종수, 전혜진)에 의해 살해 당한 채 화종사(충남 청양의 화정사)에 묻혀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비밀은 한때 하수영의 애인이자 선후배 경찰 사이였던 임석용(이정재)이 알고 있었는데 임석용 역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한 후 자살로 위장 처리된 상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임석용의 부사수 형사였던 신동호(김준환)이다. 여기에 그레이스 동생으로 잔혹한 짓을 일삼은 양아치 조폭 앤디(지창욱)까지 나온다. 영화의 기둥 줄거리는 외견상 하수영 대 앤디, 곧 덜 악한 자와 아주 악한 자의 대결로 구성된다. 바야흐로 영화 ‘리볼버’는 인물 관계가 씨줄날줄로 엮여 있어 다소 따라가기가 힘들 만큼 복잡하다. 극 중에서도 정 마담과 하수영의 대화가 이를 보여 준다. 정윤선이 말한다. “(설명하기가) 좀 복잡해요.” 하수영도 말한다. “그래. 복잡하네.” 하수영과 임석용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부패 경찰이었다. 유흥업소의 뒤를 봐주며 돈을 챙기다가 거기에 마약 거래까지 포함된, 비교적 큰 혐의의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이다. 당연히 수사망에 잡혔고 하수영은 7억을 받는 대가로 입을 다물고 모든 걸 혼자 다 뒤집어쓴다는 조건을 걸고 2년을 복역한다. 당연히 경찰복은 벗었다. 하수영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을 몰락시켰다는 데 대한 분노와 원한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그를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외롭고 화가 나 있으며 돈 때문에 절박하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한데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하다. 게다가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아파트는 임석용이 정윤선, 곧 정마담에게 증여를 했지만 정작 소유주는 황정미란 여인의 것으로 돼있는 상태이다. 그녀는 정 마담을 옆에 두고 황정미를 찾아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사람들의 불만은 이 황정미가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으며, 또 왜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오승욱이 정작 노리고 있는 건 바로 그 혼선과 모호함이다. 황정미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맥거핀(Macguffin)은 영화에서, 일종의 눈속임 장치로 관객의 관심을 극대화하지만 결국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존재나 사건을 의미한다. 영국 출신의 유명 감독이자 서스펜스 영화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이 종종 사용했던 영화 기법이다. 그러니 황정미란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든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황정미는 무당(김혜은)의 신(神)딸로 돈이 엄청 많은 남자를 낚아 스위스 어딘 가로 도피해 있는 것으로 슬쩍 언급된다. 이스턴 프로미스 총수 그레이스 역시 무당의 또 다른 신딸이었으며 이 두 명이 조직을 놓고 경쟁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그레이스는 나중에 큰 비밀을 안고 있는 여자임이 드러난다. 어쨌든 황정미는 중요하지가 않다. 극중 인물들 모두 황정미를 좇고 있는 것이 중요하고 그중에서 결국 누가, 과연 누가, 그 실체를 깨닫거나 알게 됐는지, 그래서 돈 7억과 아파트를 차지하게 됐는지가 더 중요하다. 주지하건대 필름 누아르는 진실보다 욕망이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계열의 작품들이다. 누가 무엇을 저질렀든, 그리고 주인공이 누구를 사랑했든, 결국 각자의 욕망을 얼마만큼 실현했고 또 거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타협해 갔는가가 중요하다. 정의는 아예 없다. 정의로운 인물도 없다. 그래서 이런 하드보일드 누아르 영화는 비정하고 냉혹하다.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이 있을 뿐인데 그게 오히려 더 지금의 사회를 현실적으로 반영해 그려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리볼버’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리얼리즘의 영화인 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황정미의 존재, 그 실체를 알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에둘러서 말하자면 황정미는 임석용의 ‘사랑’이다. 그는 하수영을 걱정했고 사랑했으며 미안해했다. 그래서 그는 황정미란 ‘존재’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황정미를 그쯤으로 정리해 내면 영화 ‘리볼버’의 모든 줄거리는 단박에 이해가 간다. 그래도 불만인 관객들은 있을 수 있겠다. 현대 영화는 질문이 정확하고 답변이 명쾌하며 인물들 간 행동 동기가 뚜렷해야 하는 것이 철칙처럼 돼있다. 아마도 오승욱은 늘 그런 상궤(常軌)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연출자이고 바로 그런 점이 그로 하여금 첫 작품(‘킬리마낮로의 눈’)이 나온 후 15년 만에 두 번째 작품(‘무뢰한’)을 찍게 하고 또 9년 만에 이번 세 번째 작품을 찍게 만든 요인이 됐을 것이다. 영화를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작자 입장에서는 오승욱 감독은 통제하기 힘든 인물일 것이다. 이번 ‘리볼버’가 그의 영화 미래의 분기점이 될 듯싶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말 잘 듣는 감독이 될 것인가, 계속 고집스러운 연출자로 남을 것인가. 대중 입장에서는 이래도 피곤하고 저래도 피곤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사실 하수영이 아니다. 정 마담이다. 이 여자야말로 누아르 영화의 필수 요소인 팜 파탈 역이다. 정윤선은 한편으로는 하수영을 돕지만(아마도 하수영이 감옥에 있을 때 임석용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고 두 여자는 한 남자를 고리로 감정이 엮여 있는 셈이다.) 이스턴 프로미스 본부장의 하수인으로 일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신 형사의 정보원이기도 하다. 정 마담은 양 다리가 아니라 세 다리를 걸친다. 화종사에서 극중 모든 인물이 모이는 이유 역시 다 이 정 마담, 곧 정윤선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녀는 하수영에게 또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언니. 나는요 언니가 요~만큼만 믿을 수 있을 거예요.” 이래저래 정윤선의 역할은 크다. ‘리볼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서브 텍스트들, 주변 인물들이 좋다. 임석용 역의 이정재도 사연 있는 눈빛 연기를 선보인다. 매력적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임석용의 선배로 지금 지병으로 죽어 가고 있는 전직 형사 민기현 역의 정재영이다. 민기현과 임석용은 한때 둘도 없는 짝이었고 그 사이에 하수영이 끼어들고, 또 게다가 둘이서 부패 경찰 짓을 해 먹었으니(민기현은 임석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자에 대한 욕망에 눈이 멀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기현은 하수영을 미워한다. 그러나 하수영이 출소 후 돈을 찾고 임석용이 왜 죽었는지, 그것을 파헤치는 전체 전략을 짜는 데 있어 민기현은 ‘뒷 배’ 역할을 한다. 임석용이 죽을 때 쓰였던 리볼버 권총을 하수영에게 전달하는 것도 민기현이다. 리볼버는 복수와 비밀의 실체를 상징한다. 더 중요한 것은 리볼버 안에 세 발의 총알만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세 발. 임석용의 죽음에 간여한 인물들은 세 명이거나 세 명 군(群)일 것이다. 그런 상징과 은유가 넘치는 작품이 ‘리볼버’이다. 잘 따라가야 한다. 영화는 종종 사람들의 뇌를 빠르게 회전시킨다. 뇌 회전만이라도 사람들은 건강해진다. 무슨 말인지, 어떤 까닭인지 다 모르겠다 한들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세상이란 해법 없는 질문과 사건이 연속되는 곳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드 보일드, 필름 누아르 영화를 즐기는 방식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미국産이다. 넷플릭스 재팬이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워낙 사무라이 색채가 강하고 다수의 일본인들이 제작에 참여해서 마치 일본 작품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 지난해 11월 첫 공개됐을 때 그다지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건 일본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반감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이 애니메이션은 국내에서 폭발적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지만 비교적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세계 반응도 비슷해서 인구에 회자되는 빈도가 높아지고 결국 넷플릭스가 올해 말 시즌 2를 내놓을 예정이다. 시즌 1, 에피소드 8편 마지막이 얘기의 매듭을 짓지 않기도 했다. 완연하게 시즌 2를 예고하는 끝맺음이었던 셈이다. 주인공이자 혼혈 사무라이 검객인 미즈(타무라 무츠미)는 자신의 원수 중 한 명인 어바이저 파울러(타키..
영화가 사람처럼 의도된 가벼움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면 그런 작품은 ‘핸섬 가이즈’가 될 것이다. 일부러 궁색하고 못나게 군다. 작정하고 사람들을 웃기려고 한다. 넘어지고 자빠진다. 이런 시대, 이런 시절에는 이렇게라도 웃고 넘어가자며 허허실실 댄다. ‘핸섬 가이즈’의 두 남자 재필(이성민)과 상구(이희준)는 핸섬한 남자들이 아니다. 그저 ‘못생겼다’의 차원도 아니다. 극중 파출소장(박지환)은 이 둘이 자신의 마을을 범죄의 소굴로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소장과 부하 경찰(이규형)은 이들이 흉악범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는 재필과 상구의 외모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그들이 전혀 잘못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다소 어폐가 있다. 한국 같은 비뚤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못생긴 것은 죄다. 그들은 1차 용의자로 오해받아도 싼 것처럼 취급받는다. 영화 ‘핸섬 가이즈’는 구르고 넘어지며 사람들을 몸으로 웃기려고 애를 쓰지만 그 안에서는 우리 사회에 대한 기묘한 ‘돌려 까기’가 느껴진다. 우리는 지금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재필과 상구는 죽마고우에 가까운 선후배 관계이다. 공사판 노동자들이다. 오랜 노동으로 돈을 모았고 시골집을 샀으며 이제 막 이사를 가고 있는 중이다. 스스로들은 빠지는 게 없고 차도 있고 집도 있는 버젓한 존재들이 됐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그 둘, 특히 형 뻘인 재필만의 생각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영락없는 루저들, 낙오자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을 마주치기만 해도 섬뜩한 두려움을 느낀다. 소리를 지르고 무슨 괴물이나 병균이 옮는 것처럼 군다. 시골 별장에 놀러 온 다섯 명의 ‘싸가지’ 없는 남녀 5명이 특히 그렇다. 그들은 오로지 유흥과 섹스, 약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리더 격인 성빈(장동주)은 멤버 중 한 명인 보라(박정화)가 데려온 순진한 여자 친구 미나(공승연)를 잠깐 데리고 놀 궁리로 한창이다. 성준 등 5명 무리들의 못된 계획은 핸섬 가이즈 두 명의 일상과 조우하면서 끔찍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죽음을 이어 가게 된다. 몸에 구멍이 나고 머리에 대못이 박히며 불에 타고 분쇄기에 몸이 갈려 죽는다. 모든 죽음의 책임은 재필과 상구에게 몰리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 마을에 있는 악마가 문제다. 66년 전 이 마을의 천주교 교구에서는 염소 형상을 띠고 있는 악마를 성당 지하에 봉인한 상태다. 그런데 미나를 꼬드긴 5명 악동들의 벤츠 차량이 산길 국도에서 염소를 치어 죽인 후 버리고 간다. 그걸 또 재필과 상구가 이를 자신들의 새 집 앞에 묻어 주게 되면서 악마가 깨어나게 된다. 성경의 외전으로 악마를 다룬 경전에는 다섯 명의 악인이 염소 귀신을 깨우고 세 명의 의인(재필과 상구, 미나)이 이를 막아 낸다고 쓰여있다. 이제 이들 모두가 벌이는 소동극은 천주와 악마, 세상의 선과 악, 삶과 죽음의 일대 혈투로 변하기 시작한다. 영화 ‘핸섬 가이즈’는 못생기고 무섭게 생긴 두 남자의 해프닝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못생겼다는 것은 못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계급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 그것도 일용직 하층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영화는 무산계급과 유산 계급의 갈등, 그 대립을 유쾌한 소동으로 그려 낸다. 그 일시적 반란이 주는 기묘한 쾌감이 ‘핸섬 가이즈’의 진정한 흥행 포인트이다. 사람들은 지금 웃으면서 혁명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을 오해하고 비웃으며, 편견으로 몰아세우기 일쑤인데다 돈과 학식, 불로소득으로 얻어 낸 것들(부동산, 주식, 코인 등의 막대한 수익)을 앞세워 억압하려는 자들, 그런 기득권의 악마들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싶어 한다. 1929~1939년 세계 대공황이 들이닥치고 나치즘이 횡행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찾았던 영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넘어지고 자빠지는 식의 슬랩스틱 코미디(클라크 케이블 주연의 1934년작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이거나 필름 누아르처럼 아예 어두운 작품(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1946년작 ‘빅 슬립’) 들이었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내몰리고 정치사회적으로 억압받을 때 역설적으로 웃음을 찾는다. 차라리 웃자고 얘기한다. 웃으면서 고통을 잊자고 말한다. 이는 거꾸로 현재 어떤 유형의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모으느냐를 잘 살펴보면 지금 사회가 어떤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핸섬 가이즈’는 개봉 2주 만에 130만 관객을 모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BEP를 넘겼다. 이런 B급 영화가 100만을 넘기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꼽힌다. 이건 역설적으로 좋은 신호가 아니다. 불안한 측면이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 여러 불길한 징조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투자하고 제작한 사람들은 흥행의 성공에 만족하고 좋아할 수 있어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야 한바탕 웃고 떠들 자격이 있지만, 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평단과 저널까지 부화뇌동 해서는 안 될 일일 수 있다. 영화는 종종 그 사회에 시그널을 주고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법이다. 그 경고를 잘 읽어내야 한다. ‘핸섬 가이즈’는 변종의 장르이다. 코미디와 공포, 엑소시즘, 오컬트 장르를 합쳤다. 우리 영화 ‘시실리 2Km’란 영화에 할리우드 영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와 ‘엑소시스트’를 섞은 느낌을 준다. 그것도 일정한 법칙 없이 의도적으로 엉망진창으로 섞고 비벼냈다. 어울리지 않는 장르를 결합하면서 불시의 웃음을 유발한다. 기묘하면서도 약간은 음흉한 웃음, 내면의 변태스러움을 자극하는 기운을 불러낸다. 가진 자, 당신들이 그토록 엉망인데 우리라고 이 정도야 괜찮지 않겠느냐는 식의 속내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주 빵빵 터지는 수준은 아니다. 세대 간 차이가 좀 있다. 중장년 층은 다소 씩 웃거나 그저 킬킬 거리는 수준이다. 노년층은 아예 안 보거나 보더라도 무표정한 태도들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세대 간 차이를 극명하게 갈리게 하는 측면도 있다. 이런 변칙의 영화들은 기성세대들이 만든 질서와 규칙을 깡그리 무시하고 싶어 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기존의 질서를 타고 넘어가고 싶어 하는 앙팡테리블(반항아)의 내면을 지닌다. 그건 이래야 해, 라는 요구에 그게 꼭 왜 그래야 해, 라는 반문을 담는다. 이런 영화일수록 영화적 법칙과 연기의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재의, 발군의 연기자들이 큰 몫을 하기 마련이다. 이성민과 이희준은 다시 한번 스스로들이 매우 뛰어난 배우들임을 입증했다. 조연배우들 박지환과 이규형도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낸다. 상업영화 쪽으로는 신인 급인 공승연도 장단을 척척 잘 맞춘다. 공승연은 독립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로 2021년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여우상을 탄 바 있다. 이들 연기자들의 합을 연출로 잘 끌어내고 합치게 한 감독 남동협은 비교적 ‘듣보잡’이다. 영화 ‘핸섬 가이즈’는 신인들 천지이고 그런 새로움들이 이성민 이희준 등 깨어 있는 기성 배우들을 만나 흥미로운 작품으로 탄생한 결과이다. 영화는 늘 새로워야 하며 변칙적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핸섬 가이즈’는 그 모범을 보여 준다. 영화가 어떻게든 사회를 생존해 가게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B급 영화가 성공하고 있는 시그널을 너무 쉽게 읽어 내서는 곤란하다. 그 위기의 경고음을 잘 알아채야 한다. ‘핸섬 가이즈’의 성공이 이 혹독한 시기에 꽤나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불길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프렌치 수프’는 무려 30년 전 ‘그린 파파야의 향기’와 ‘시클로’를 만들어 주목을 받았던 베트남계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홍의 뒤늦은 신작이다. 그는 중간쯤인 2009년에 이병헌, 기무라 다쿠야, 조시 하트넷을 주연으로 내세워 ‘나는 비와 함께 간다’라는 영화를 찍었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했다. 그 직후인 2011년에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상실의 시대’를 영화로 만들었고 수작이었지만 역시 흥행에서 실패하면서 오랫동안 메가폰을 잡지 않았다. 젊은 관객들에게 이제 트란 안 홍은 새로운 인물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제목과 달리 프렌치 수프만 만드는 얘기는 아니다. 프랑스 요리, 그것도 만찬을 즐기는 미식가와 요리사, 그 파트너십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 도댕(브누아 마지멜)은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 불릴 만큼 음식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요란하고 까다로운 입맛을 20년 동안 채워주고 만족시켜 준 요리사는 여인 외제니(줄리엣 비노쉬)이다. 이 둘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하며 살아가는 연인이다. 둘은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긴 했지만 이제 막 결혼을 하려 한다. 도댕이 줄기차게 결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외제니는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도댕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는 당신의 요리사인가요, 당신의 아내인가요?” 도댕은 과연 무어라 답할 것인가. 영화가 시작한 후 30분간 외제니의 조리 과정이 이어진다. 15분은 순수하게 외제니와 그녀의 조수인 비올레트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과정이, 또 다른 15분은 도댕이 자신의 친구들, 역시 미식가들인 남자들과, 외제니의 음식을 먹고 품평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외제니가 만든 음식으로 만찬을 하기 전 도댕은 견습생으로 들일까를 생각 중인 폴린이라는 소녀에게 부르기뇨트 소스를 한 입 먹게 한 후 무슨 맛이냐고 물어본다. 소녀는, 마치 모짜르트가 세 살 때 절대 음감을 가졌던 것처럼 절대 미감의 특출함으로 하나하나 얘기하기 시작한다. “소갈빗살이 들어갔고요, 훈제 베이컨도요. 그리고 홍피망하고 버섯, 회향 맛이 나요. 토마토와 오렌지, 와인과 파슬리, 타임과 월계수잎, 커민이 들어갔어요. 노간주 나무 열매와 정향도 들어갔네요.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도댕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폴린의 말을 잇는다. “파프리카와 코냑이 들어갔단다. 까치밥나무 열매와 젤리도 들어갔고. 모두 와인의 산미를 잡기 위해 필요한 거였단다.” 부르기뇨트 소스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식재료로 무려 17가지가 쓰였으며 영화의 첫 장면은 외제니가 그 많은 재료를 썰고, 다듬고, 으깨고, 끓이고, 굽고, 볶고 하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이처럼 복잡하고 오묘해 보이는, 풍미와 절대적 맛이 가득한 요리를 만드는 내용이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롭고 탐미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한가하고 ‘재수 없는’ 내용으로 비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는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 궁극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어떻게 구현됐느냐에 따라 선택이 좌우될 것이다. 도댕과 그의 친구들은 만찬을 즐기기 전 마치 정식 요리 코스와 같은 현란한 수사들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와인은 만찬의 정신이고 고기와 채소는 물질이지, 라든가 인간은 갈증이 없어도 마실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등등의 얘기들이다. 남자들은 주방에 있는 외제니가 함께 즐기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외제니는 당신들에게 나간 모든 음식은 이미 자신의 혀 속에, 눈 속에, 마음속에서 다 맛을 본 것이라 답한다. 외제니는 어린 폴린이 자신이 만든 오믈레트 노르베지엔(노르웨이 식 오믈렛)을 맛본 후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에 이 아이가 특별한 재능을 지녔음을 감지한다. 그녀는 연인 도댕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건 그들이 먹은, 무언가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트란 안 홍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에는 분명한 것 몇 가지가 눈에 보인다. 일단 그가 요즘, 아니 오래전부터 음식을 만드는 것, 음식을 만든다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해 있거나 매우 탐닉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음식을 모르면, 요리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런 고급 레시피의 만찬이 준비되는 영화를 찍을 수 없다. 그러니 트란 안 홍은 스스로 요리에 미쳐 있을 것이다. 둘째는 그가 복잡하고 정교한 요리를 완성하거나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요리를 만든다는 것과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다르지 않거나 그 차원을 넘어 매우 흡사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요리라는 특수한 분야는 영화라는 또 다른 특수한 분야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그 둘의 공통점은, 심지어 남녀의 20년 연애나 사랑과도 같은 맥락일 수도 있다는 철학적 통찰로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수가 보편을 만들고 보편을 통해 특수를 더욱 깊고 넓게 만드는 변증의 사고를 이뤄 나갔을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따라서, 절대로 프렌치 수프를 만드는 얘기가 아니다. 프렌치 음식을 만드는 얘기 만도 아니다. 이 영화는 인생과 사랑을 요리하고 그 맛을 알아 가는 과정에 대한 얘기이다. 트란 안 홍은 이 영화의 소재가 어떻게 자신이 추구하는 주제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에피소드를 만들어 나간다. 그 매개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파트너십이다. 20년간 계속돼 온 둘의 신뢰는 사랑 때문에, 혹은 요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둘 다일 것이다. 다만 선후는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요리사인가, 아니면 당신의 아내인가는 무엇이 먼저인가를 묻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어느 것이 먼저라 해서 그것이 자신들 관계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감독이 작품을 만들면서 영화와 관객의 우선순위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것과 같은 흐름이다. 영화가 먼저인가, 아니면 관객이 먼저인가.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다. 때론 영화가 먼저인 작품을 만들 수도 있고 때론 관객만을 염두에 둔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본질은 그 둘의 관계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불란서 식 메뉴와 그 레시피가 줄줄이 이어진다 해서 겁먹거나, 기피하거나, 예단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건 마치 양념과 같은 것이다. 다만 영화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많은 부분 유리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일 수 있다. 시대 배경은, 유라시아 왕자가 나오는 걸로 봐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일부가 남아 있는 때를 삼은 만큼 1800년대 후반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공화국 혁명과 왕정, 나폴레옹 식 황제의 통치가 엎치락뒤치락 했던 혼란의 100년이 이어진 직후일 것이며 러시아에서는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가 이루려는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모든 시대의 공기를 배척하려는 듯이 느껴진다. 트란 안 홍의 생각에, 사람들의 삶은 궁극적으로 거대담론의 수레바퀴에서 벗어 날 수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체제나 이데올로기와도 비껴가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며 어느 쪽으로 살아갈 것인가 역시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지일 수 있다는 점에 모아져 있다. 가장 순수한 생각의 결정체가 어쩌면 가장 이념적이거나 사회적인 무엇일 수 있다는 셈이다. 비정치적이므로 해서 가장 정치적일 수도 있다는 이 같은 반어적 사상은 현재의 세상이 그만큼 오염되고 타락했으며 극도로 혼란해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런 얘기 역시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건 어디까지 이 영화에 대한 각자의 해석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패스트 푸드가 넘쳐나는 인스턴트 시대에 맛과 풍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준다. 매우 뛰어난 수작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통찰의 무엇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음미할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영화 ‘원더랜드’가 좋은 영화라는 것,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가 신하균에게 하는 대사, 곧 “나 너 착한 거 안다”처럼 따뜻하고 착한 작품이라는 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또 동의하는 내용이다. 게다가 할리우드 전설의 영화감독 하워드 혹스가 얘기한 대로 좋은 영화란, 좋은 장면 세 개쯤이 있는 작품이라는 원칙 아닌 원칙을 적용할 때 ‘원더랜드’는 세 개 정도는, 아니 그 이상의 좋은 장면으로 차고 넘치는 작품이다. 그 점에 대해서도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17일 현재 전국 570,347명을 모은 수준으로 이 정도면 시쳇말로 ‘폭망’ 수준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원더랜드’의 이야기 축은 세 개이다. 아니 네 개이다. 중심은 해리(정유미)와 현수(최우식)가 이끄는 AI 여행사 원더랜드 팀이다. 이 둘은 죽어 가는 사람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그들 존재가 지닌 모든 정보를 사이버 상에 심어 놓고 앞으로 그를 그리워할 사람들, 그의 존재를 여전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 모두와 소통할 수 있도록, 그것도 쌍방향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도록, 고도의 대화 능력을 엔코딩하는 일을 한다. 영화 ‘원더랜드’는 AI 정보 커뮤니케이션 사설 업체 원더랜드의 작업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를 그린다. 해리-현수 팀이 관리하는 AI 존재는 세 개이다. 하나가 바이 리(탕 웨이)이다. 그녀는 매우 바쁘게 살았던 회계 변호사였고 하나 밖에 없는 딸 아이를 엄마(鲍起静, 파우 희 칭)에게 내팽겨쳐 둔 채 살다가 후회 끝에 사망한 상태이다. 바이 리는 현재 아이의 태블릿 안에서만 존재하며 이제는 고고학자로 살아 간다. 바이 리의 어릴 때 꿈이 고고학자였다. 또 한명은 정인(수지)과 태주(박보검) 커플이다. 둘은 스튜어디스와 스튜어드이다. 무슨 일 때문인지, 태주는 현재 식물인간, 코마 상태이다. 정인은 그런 그를 인공지능으로 만들어 놓고 매일 아침 그가 깨우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AI 태주와 함께 일상을 보낸다. 스마트 폰 안의 태주는 우주 비행사이다. 그가 돌아 오지 못하는 이유는 장기간 동안 우주 정거장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돼있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은 진구(탕준상)란 젊은이이다. 갓 청소년기를 지난 진구도 죽었다. 그를 혼자 힘으로 키운 할머니(성병숙)는 AI가 돼서도 끊임없이 못되게 구는 손자의 뒷바라지를 이어 나간다. 할머니는 손자가 살아 있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샌다. 김태용 감독은 이야기의 중심을 탕 웨이 쪽에 기울여 놨다. 나는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결정적 패착이라고 봤다. 영화 전체를 주도하는 것은 수지-박보검 에피소드가 맞았을 것이다. 그들이 젊어서도 아니고, 스타급 배우들이 보여 주는 러브 스토리가 애틋해서도 아니며, 수지와 박보검이 초절정 인기를 모으는 스타들이어서는 더욱 아니다. 이 둘이 그려 나가는 이야기야말로 어쩌면 AI 시대의 모든 난제이자 궁극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제인 ‘미래 인간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하게 묻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자 정인이는 실제 남자 태주가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AI 태주와 연애와 사랑을 이어 나간다. 물론 그녀는 그의 손길이 그립고 그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거나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싶은 실제적 욕망에 시달리지만 그를 매일처럼 손아귀에 쥐고 살 수 있다는(그녀는 태주를 핸드폰 안에서 넣어 놓고 늘 꺼내 본다.) 현실을 넘어 서지 못한다. 정인이의 일상을 뒤흔드는 화산 폭발과도 같은 일은 병실에서 코마 상태였던 태주가 깨어난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제 정인에게는 태주가 둘이 된다. 자 그렇다면 정인은 깨어난 인간 태주를 새롭게, 더욱 열렬히 사랑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다소 손쉽고 편리한 AI 태주와의 일상을 더 귀중하게 생각할 것인가. 어쩌면 영화 ‘원더랜드’가 이 이중배상과 같은 문제, 곧 현대인이 지닌 정체성의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했다면 보다 더 놀라운 작품이 됐을 공산이 크다. 김태용은 작가주의적 상업영화 감독으로 다시 한번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부분에 ‘베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하는 투자와 제작자 쪽에서 안전한 영화를 요구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대중들은 복잡한 생각을 요구하는 작품을 싫어한다고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분명 생각을 비비 꼬이게 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귀신같이 ‘고급스러운’ 내용은 알아본다. 대중은 무식한 척 꽤나 지식인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다. 대중관객들은 늘 앞으로 나아 가고 있으며 ‘원더랜드’는 오히려 관객의 의식 수준보다 한 걸음 더 처진 행보를 보인 셈이 됐다. 그것이 실패의 이유이다. 영화의 심도를 더 깊게 하는 방법으로는 AI 존재가 실제 인간 존재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얘기까지 이어 가게 하는 것이다. 태주가 태주를 만나면 세상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공지능의 존재가 그 인공의 지능이 과다하게 많아지게 되면 어떤 일을 벌이는가는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2004년 영화 ‘아이, 로봇’(2004)에서 이미 한번, 그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보여 준 바 있다. 사실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그러한 얘기를 기반으로 한 전쟁 액션 영화일 뿐이다. 알렉스 가랜드가 만든 수작 ‘엑스 마키나’(2015)도 AI 지능이 인간보다 높아졌을 때의 불안하고 불길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 모든 것은 위대한 과학철학자이자 SF 소설가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의 이론을 영화로 구현한 것이다. 로봇 3원칙이란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거나, 해가 되는 상황을 방치하면 안 된다. 둘째, 로봇은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복종한다 셋째, 로봇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이다. 간단한 문제 같지만 이 세 가지가 섞이면 매우 이상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을 해할 수 있게 된다. ‘원더랜드’가 그런 얘기까지 해냈다면 엄청난 능선을 넘어서는 작품이 됐을 것이다. 적어도 탕 웨이의 AI는 태블릿 밖으로 나와 홀로그램 정도로라도 구현됐었으면 좋았을 법 했다. 홀로그램 인간은 영화 리들리 스콧 영화 ‘블레이드 러너2049’에서 그 레퍼런스(일례)를 선보인 바 있다.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는 집으로 오면 자신의 지친 몸을 AI로 만들어진 매혹적인 여성 조이(아나 데 아르마스)에게 맡기고 위로를 받는다. ‘원더랜드’의 바이 리도 딸아이에게 홀로그램으로 등장하거나 아예 로봇으로 나오는 것이 더 그럴 듯했을 것이다. 한국계 미국 감독 코코나다의 2022년 영화 ‘애프터 양’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가정교사이자 베이비시터인 양이란 존재(저스틴 H. 민)가 노후화되고, 고장을 일으키면서 겪게 되는 한 가정의 이야기였다. ‘원더랜드’는 다른 영화들이 거기까지 확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소 ‘아웃 오브 데이터’의 얘기로 일관했다. 세상 인식에 대한 오류, 그 부조화가 이 영화와 관객을 더 적극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한 셈이다. 평론의 3원칙 중 하나는, 평론은 감독에게 해를 가하거나, 해가 되는 상황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이 그 원칙을 지켰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