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저녁시간에 TV뉴스를 보지않고 공중파대신 유투브를 보거나 EBS를 시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천편일률적인 정부홍보 방송이거나 뉴스의 수준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대통령기자회견의 동문서답을 보면서 나는 대통령의 무지와 무능보다 대통령에게 제대로 질문하는 기자를 찾아볼 수 없음이 더 안타까웠다. 소환조사 한번 받지않은 김건희여사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 “지난 정권에서 치열하게 수사했다”고 눙치고 지나가도 감히 ‘외람되이’‘여쭙지’못하는 기자. 이들이 만드는 뉴스를 어찌 속절없이 고개 끄덕이며 볼 수 있을 것인가? 14일, 대통령의 장모가 가석방으로 출소한다. 349억 은행잔고증명서 위조한 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형기 80%를 채웠단다. 범죄사실을 보면 그냥 사기꾼이다. 영부인은 주가조작으로 23억 불법이..
트위터에서는 하이브도, BTS도, 천공도, 심지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이미 단월드가 되어 있다. 국내외의 팬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대형 엔터테인먼트가 특정 컬트의 신조를 콘텐츠 속에 숨겨 배포해 왔다는 음모론은 좀처럼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런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용자들의 글이나 댓글이 실시간으로 삭제되고 있다는 제보들이 있는데,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이고, 그래서 걱정이다. 우리 인터넷 세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정보게재자의 권리가 쉽게 경시될 수 있다. 정보서비스제공자는 적극적인 재량 행사를 회피할 수 있다. ‘힘 있는 자’들은 권리침해를 주장하기만 하면 자기가 보기 싫은 글을 남들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특정 컬트가 사적 검열을 하려고 든다면 전혀 어렵지 않은 구조다. 언론피해자들의 권리를 더 잘 보장한다..
일러스트도 예술인가? 일러스트는 처음에는 광고나 출판물의 내용을 보조하는 실용 디자인이어서 예술이라고 보지 않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같은 전시에 가보면 순수미술에 못지않은 감동과 공감을 부르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더구나 요즘의 컴퓨팅 신기술에 의하여 탄생하는 많은 이미지들의 퀄리티는 예술과 실용의 구분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오늘 소개할 내용은 어린이 그림책 일러스트로 잘 알려진 노라 힐브(Nora Hilb)의 대화하는 일러스트들로 필자의 블로그에서 단 하루에 800개 이상의 덧글이 달렸던 인기 있는 그림들이다. 5월 가정의 달에 진정으로 필요한 건 대화 겉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은 가정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남모르는 고민을 가슴에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고민들은 제3자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당사자에게는 너무 심각하고, 어떤 고민들은 너무 심각해서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대부분 현대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문제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 정신, 갈등과 괴리감, 관계의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 같다. 가정의 달을 맞아 아이들에게, 부모님에게, 스승에게 선물을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진정한 대화가 아닐까? 애정을 가지고 대화하는 순간만은 상대방에게 따뜻한 위로와 이해를 줄 수 있다. 그래서 대화를 하고 나면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굳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돌아섰던 마음이 다시 돌아앉게 된다. 단 한 번의 대화로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는 없고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자기 살기도 바쁜 요즘 누가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남을 위해 대화해 줄까 의심스럽지만 그렇게 대화해 주면 자신이 그런 막막한 처지가 되었을 때 분명히 누군가가 다가와 대화해 줄 것이다. Nora Hilb의 그림을 보면서 대화란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다. 그녀의 그림에서 독자들도 어른들이 어린이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Nora Hilb Nora Hilb는 수많은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녀는 현재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세계 여러 곳의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고 있다. 그녀와 작업한 출판사는 아르헨티나의 Planeta, Sudamericana, Alfaguara, Aique, Atlantida, AZ, 스페인의 Edebe , Alfaguar, 미국의 Charlesbridge Publishing, Sandvik innovation, 스위스의 Sud Berlag, 캐나다의 Annick Press, Key Porter Books 등이다. 그녀가 주로 그린 유머와 부드러움을 지닌 동물 캐릭터를 통해 따뜻하게 대화하는 아빠와 아기, 엄마와 아기의 상황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자. 대화가 필요해~ 대화하는 가족들 대화를 할 때에는 서로 마주 보고 깊은 사랑을 나눠주어야 한다. 서로를 깊이 마주 본다면 눈이, 코가, 입술이, 볼이, 머리카락이.....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너무 사랑스러워서 보고 또 보았던 그림이다. 잠을 잘 때도 대화할 수 있다. 따뜻하게 껴안아주거나, 얼굴을 가슴에 묻거나, 팔베개를 해주면, 아이가 잘 표현하지 못했던 말을 가슴에 안겨 아빠에게, 엄마에게 체온으로 전해줄 것이다. 때로는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눈여겨 봐두었다가 꼭 필요한 때에 말없이 가져다주는 행동 하나가 더 깊이 있는 대화가 될 때도 있다. 아직 상대방이 마음을 열지 않을 때에는 마주 앉는 것보다는 옆에 앉아주는 것이 좋다. 나란히 앉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가깝게 느끼면서도 평등하게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나란히 앉아 부드럽게 얼굴을 돌려 쳐다봐주는 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개미핥기와 개미, 서로 잡아먹고 먹혀야 하는 관계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마주 보며 대화할 필요가 있다. 표정과 태도가 얼마나 진지한가 보라. 지긋지긋한 웬수 놈(?)과도 때로는 대화가 필요하다. 나는 이 그림을 국회로 보내고 싶다.^^ 그리고 늘 약자라고 생각했던 상대방의 뒤를 쫓아서 그의 의견대로 묵묵히 따라 해봐 주는 것, 늘 순종만 강요하던 아빠였다면 때로는 아이가 하자는 대로 야구방망이를 들고 공원에 묵묵히 따라 나가주는 것, 어떤 대화보다는 훌륭한 대화이다. 때론 아이가 혼자 달음박질을 치고 싶어 한다. 너무 부끄러워서 숨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 달음박질치도록 내버려두거나 숨을 곳을 찾아주는 것도 좋은 대화이다. 속상한 일이 있어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자꾸 꼬치꼬치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다가가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것. 엄마와 아빠가 가장 잘 해야 하는 대화이다. 아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 시간을 존중하고 바라봐 주는 것 또한. 때로 아이는 달이나 인형과도 대화하고 싶어 한다. 아이가 잠들었다면 괜히 깨운다고 생각하지 말고 살살 들어가서 한 번쯤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것. 정말 따뜻한 대화가 아닌가? 너무 바쁜 요즘의 아빠들에게 꼭 필요한 대화이다. 아이들을 위하여 동물 친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정말 좋은 일이다. 강아지, 고양이 등의 동물들과의 사랑 속에서 보호하고 보호받는다는 것을 아이들이 배우게 된다. 고양이의 애교와 개의 충직, 이 두 가지 모두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겁이 많은 요즘 아이들, 비 내리고 컴컴한 밤, 천둥 치는 하늘과도 대화할 수 있다면 두려움이 변하여 새로운 이야기가 생길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접고, 인형놀이를 하고, 아빠가 태워주는 목마를 타고. 이런 일상의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그 모든 대상들과 대화를 한다. "해야ㅡ 이렇게 환하게 비쳐줘, 즐거운 아침이다~" "배야~ 멀리멀리 무사히 흘러가서 꼭 내 소식을 바다 건너편에 있는 친구에게 전해줘." "아가야, 이젠 잘 시간이야, 코~ 자야지?" "아빠, 내 키가 너무 커졌어요 헤헤헤~" 때론 너무 크고 낯설어서 두려운 존재 앞에서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때가 생긴다. 꼬옥~ 아이를, 아내를, 남편을, 애인을 껴안고 "걱정 마 아빠가 있으니까, 걱정 마 내가 있으니까."하고 용기 있게 이야기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두려웠던 거대한 존재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형과 동생은 놀리고 놀림당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그렇게 커간다. 그 모든 시간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대화의 시간이다. 큰 강과 같은 세상살이, 험난하고 깊은 강, 그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는 존재. 그 등에 타올라 있으면 안심이 되는 따뜻한 존재. 우리의 아이들에게 부모는, 형제는, 어른들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끌어주고 밀어주고, 노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교육이다. 논다고, 맨날 놀기만 한다고 너무 야단치지 말고, 그 놀이 속에 숨겨진 대화와 교육을 이끌어 내어 보자. 책은 평생 동안 곁을 떠나지 않는 좋은 친구이다. 때로는 책 속에서 염소를 만나 대화를 하기도 하고 달님이나 별님을 만나 대화하기도 하고 수 만년 전에 살았던 옛날 사람과 만나 우우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원시인 울음소리로 대화하기도 한다. 모든 대화에는 진정함이 있어야 한다. 어떤가? 그녀의 그림에서 대화의 감동을 느꼈는지? 이 시대가 아무리 가볍고 말초적인 자극에 민감하다고 해도 우리의 가슴이 공허한 것은 진정한 사랑을 담은 깊이 있는 대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내어, 자신의 가장 진실한 표정을 담아 우리 옆의 사람과 대화하여 보자. [ 글 = SG디자인그룹대표. 시인 권은경 ]
우리나라는 헌법보다 국회가 먼저 만들어졌다. 1947년 11월 14일 UN 총회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했다. UN한국임시위원단의 관리하에 1948년 3월 31까지 총선거가 계획됐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UN은 다시 1948년 2월 26일 ‘한국 가능지역 총선거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한국 가능지역’은 남한을 뜻했다. 이렇게 총선거는 남한만을 대상으로 치러졌다. 우리나라의 제헌의회는 이렇게 구성됐다. 제헌의회의 당면한 숙제는 헌법의 제정이었다. 헌법이 없다는 것은 정해진 정부형태도 없다는 것을 뜻했다. 제헌의회의 정부형태에 대한 초기 논의는 내각제가 유력했다. 하지만 연장자 순으로 국회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고집했다. 정부형태를 내각제로 선택하였을 때 국내 지지기반이 부족했던 이승만 세력..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총선이 2주 이상 지난 시점에서도, 20%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일 발표된 NBS 조사(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3일간, 전국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조사, 응답률 14.6%,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3.1%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나타난 윤 대통령 지지율은, 직전 조사와 마찬가지로 27%였다. 이런 조사 결과는, 이번 영수 회담이 대통령 지지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영수 회담은 정권 출범 이후 처음 열린 회담이어서, 성과와 관계없이 충분히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호재였음에도 지지율이 20%대에 머문다는 사실은,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상황이 이래서 그런지 몰라도, 야당은 21대 국회 마지막임에도 각종 특검을 들고나오며 여권을 압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회를 마무리하는 시기에는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관례’였는데, 21대 국회 막판까지 야당이 여권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것을 보면, 정권의 기를 확실히 누르려고 하는 것 같다. 이런 ‘이례적 상황’이 연출되는 이유는, 야당의 총선 승리와 무관하지 않다. 즉, 의석수로만 보면 야당이 압승한 것은 분명한데, 이런 기세를 몰아 정권의 기를 확실하게 누르고, 이를 통해 ‘야당’으로 출발한 22대 국회를 ‘여당’으로 마무리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부, 여당에 대한 기죽이기는, 상임위 배분에서도 나타난다. 민주당은 법사위원장과 운영위원장 자리도 자신들이 가져가겠다고 주장하는데, 이중 특히 법사위원장 자리를 가져가려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법사위는 법안 통과의 ‘길목’ 역할을 하는 상임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민주당이 법사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을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국회의 관례를 모조리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사위의 경우, 원내 2당이 위원장을 맡는 것이 관례였다. 국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회의장이 1당 몫이기 때문에, 제2당의 목소리와 의견도 충분히 배려하고, ‘의견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취지에서 생긴 ‘관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례를 무시하려 드니,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관습법도 법의 범주에 들어가듯이, 관례 역시 존중되어야 마땅한 존재인데, 법을 만드는 곳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관례가 무시되니, 이는 국회의 기능과 역할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또한, 소수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존속해 온 관례가, 수(數)를 내세운 다수당에 의해 무시되면, 국회는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소수의 의견도 배제하지 않고 제도에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2대 국회가 심히 걱정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작도 하기 전의 국회를 걱정한다는 것은, 우리 정치에 희망이 없음을 의미한다.
인천고등법원 설치법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7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인천고등법원 설치법을 심사했지만 소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소위가 열리기 전까지도 인천고등법원 설치법은 통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됐다. 기존 민주당 김교흥(서구갑)·신동근(서구을)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각급 법원의 설치와 관할구역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다 최근 국힘 배준영(중구강화군옹진군) 의원이 인천고법 설치 내용이 담긴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기 때문이다. 여야가 힘을 합친 것이어서 기대감이 컸다. 경기신문(8일자 인천판 1면, ‘한계 벽 부딪힌 고등법원 설치 결국 좌절’)은 부산지역 국회의원이 법사위에서 이른바 '보이콧'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고등법원에 이어 해사법원까지 유치하려는 인천의 움직..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이 선거에서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국민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거에 지고 참담해하는 후배 정치인들이 자칫 국민을 탓하는 경솔함을 경계하는 말이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비슷한 말을 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국민의 뜻은 늘 옳다”고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은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말뿐이었다. 불통과 독주는 계속됐다. 국민은 6개월 뒤 지난 22대 총선에서 매섭게 윤 대통령을 심판했다. 혹독한 중간평가였다. 총선이 끝난지 한 달. 자기 확신으로 똘똘 뭉쳤던 대통령의 아집도 조금 꺾이는 모습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이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이 그 반증이다. 당연히, 수시로 했었어야 할 일들이 뉴스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기막힌 현실이다. 대통령이 얼마나 민심과 동떨어진 행보를 했는지 보여준다. 윤 대통령의 지난 2년간 국정운영은 실패했다. 수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대통령의 편향된 언론관이 핵심이다. 대통령 취임 후 언론 관련 뉴스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대통령은 국민의 신뢰를 잃은 일부 언론에 매달렸다. 22대 국민의힘 비례 국회의원 김민전의 말대로 전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은 언론인이기에 앞서 보수의 큰 어른이다. 85세(1939년 생) 큰 어른은 7일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능동적으로 일하고도 국민의 시선이 차갑다면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놀라운 조언을 했다. 이 말이 나오기까지의 논리 전개를 보면 ‘대통령 하야’라기보다는 총선 민심에 위축되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 그는 이번 총선을 ‘기괴한 선거’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정책보다 대통령의 부인 문제, 경제 정책보다 대파가 선거를 지배했다’고 했다. 한편, ‘이번 총선에서 심판을 받은 당사자는 대통령이라기보다 국민의힘이다’라고도 했다. 더 놀라운 건 ‘윤 대통령은 보수의 대통령이지 국민의 대통령은 희망 사항’이라고 했다. 이런 논리가 국민적 공감을 받을 수 있을까? 건강한 보수까지 등을 돌리게 하는 극보수의 논리다. KBS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크게 추락했다. 5공 시절 ‘땡전 뉴스’에 빗대 KBS를 ‘친윤 방송의 맏형’이란 비아냥을 듣는 실정이다. 대통령 친화적 보도가 대통령과 국민을 이간시키는 역설을 낳는다. 이번 총선은 전통언론(Legacy Media)이 SNS와 유튜브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디어에 완패한 선거다. 조중동은 물론 한겨레와 경향신문까지도 집권당을 도왔다. 거의 모든 방송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대통령은 참패했다. 혹자는 말한다. 요즘 사람들이 신문을 보지 않고 뉴스를 외면한다고 근엄하게 꾸짖는다. 꼰대의 훈수다. 이들은 이미 깨어있는 시민(civilized citizen)이다. 뉴스를 비판적으로 선별할 줄 아는 능동적 수용자다. 앞으로 남은 3년. 대통령은 조선일보를 접고, KBS를 멀리해야 돌아선 중도층이 돌아온다.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실시한 소셜벤처 실태조사 보고서(‘21년 기준)에 따르면 경영 애로사항 1순위는 자금조달(61.1%)이었으며 2순위는 인력확보 및 운용(17.9%), 그리고 판로개척(12.8%) 순으로 3순위까지 모두 합하면 91.8%에 달했다. ‘사회적 가치 실현’을 ‘경제적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사회적금융은 사회가치 창출을 목적으로 사회적 경제기업에 투자·융자·보증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사회적금융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우수기업을 대상으로 사회책임투자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최근 들어 민간 영역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으며, 기업의 창업, 인큐베이팅, 사업화 등 경영 활동 전주기에 걸쳐 자본의 선순환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사회투자 방법으로서의 그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경기도가 사회젹경제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위..
전세사기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또다시 발생했다. 벌써 덧없이 스러진 여덟 번째 희생자다.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전세사기피해자법)이 지난해 6월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허점투성이다. 여야 정치권의 느리고 무딘 대응에 대한 여론에 날이 서고 있다. 이구동성으로 ‘민생정치’를 외치고 있는 정치권의 헛구호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여야는 하루빨리 머리를 맞대고 마주 앉아 답을 내라. 지난 1일 세상을 등진 희생자는 대구의 38살 여성으로 전해졌다. 공개된 고인의 일부 유서에는 “저는 국민도 사람도 아닙니까? 살려달라 애원해도 들어주는 곳 하나 없고…(대한민국은)돈 많은 시민만 살 수 있는 나라입니까? 서민은 죽어야만 하나요?”라는 내용이 담겼다. 유서의 내용이야말로 정부를 신뢰하고 사람들의 선..
한국 사회에서 '정상 가족'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전통적인 핵가족을 의미해왔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인 가족 형태는 유교적 가치관과 가부장제, 효 중심의 사회적 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정상 가족의 틀을 넘어 다양한 형태의 '대안 가족'이 부상하면서, 가족의 정의와 형태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정상 가족의 개념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안정과 전통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들어 가족의 형태가 다변화되면서 정상 가족 중심의 규범이 점차 약화하고 있다. 2018년에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인 핵가족 대신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나가며 혈연이나 결혼에 국한되지 않는 가족의 정의를 강조한다. 작품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존의 정상 가족 개념을 넘어서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노아 바움백 감독이 연출하고 스칼렛 요한슨과 애덤 드라이버가 주연을 맡아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영화 '결혼 이야기'는 이혼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화해를 통해 가족의 변화를 탐구한다. 이 작품은 정상 가족이 해체된 이후에도 가족 구성원들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혼이 가족의 끝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정상 가족의 기존 틀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혼 후에도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가족의 정의가 확장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러한 TV 드라마와 영화 작품들은 정상 가족 중심의 사회적 규범이 점차 약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대안 가족의 가능성과 가족의 새로운 정의를 탐구한다. 전통적인 정상 가족은 여전히 사회적 압박과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조명하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가족의 정의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인식하며 다양한 가족 형태가 사회에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예술은 시대의 반영이다. 드라마와 영화도 정상 가족의 전통적인 틀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대안 가족을 조명하여,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다양한 가족 구조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기반을 마련한다. 앞으로도 많은 대중 예술 작품이 정상 가족의 틀을 넘어 다양한 가족이 사회에서 존중받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