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도 불어주어 찜통더위는 완전히 물러간 듯하다. 가을이다. 외로움을 느끼는 계절이 왔다. 왜? 가을은 잎이 떨어지는 계절이고 잎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 나무가 생애 주기 중 생명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무는 겨울이라는 죽음에서 봄이 되면 다시 생명을 활성화해 찬란하게 부활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을은 한 해의 마무리 단계를 준비하는 시기이고 이 준비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온 한 해를 돌아보는 성찰이다. 이렇게 성찰할 때 내가 이뤄낸 것들도 떠오르겠지만 가장 먼저 나 자신의 “존재”를 보게 된다. 존재 자체를 돌아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없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사진 찍을 때마다 까치발을 하며 키를 높이거나 자신에게 대중..
충무로 대한극장이 9월말 폐관했다. 대한극장은 1958년 개관 당시 미국 20세기 폭스사가 설계를 맡아 70mm 원본 필름을 그대로 상영할 수 있도록 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빛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한 무창극장이었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최첨단 시설을 갖춘 대한극장은 관객들에게 웅장한 스크린과 생생한 음향으로 벤허, 사운드 오브 뮤직, 킬링필드와 같은 대작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을 것이다. 2000년대 들어 극장의 형태가 영화만 보는 게 아니라 쇼핑과 오락, 식사까지 할 수 있는 멀티플렉스로 바뀌어가자 대한극장도 건물을 철거한 뒤 2001년 12월, 7층 건물에 11개 상영관을 갖춘 지금의 영화관으로 재개관했다. 이 시기에 한국 영화들은 주로 대한극장에서 시사회를 했으며, 외국 배우들의 내한 행사도 거의 대한극장에서 열렸다. 대한극장이 영업종료를 알리자 영화의 한 시대가 저물고 추억이 사라진다며 아쉬움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 대형 멀티플렉스가 급성장하고,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이 확대되었으며, 코로나 팬데믹을 겪는 동안 극장 관객이 현격히 줄었으니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대한극장 폐관이 순전히 경영 문제 때문이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영화사업자의 소명을 폄하하는 것이 아닐까. 대한극장을 설립한 고 국쾌남 세기상사 대표는 다른 사업체를 매각하거나 축소하면서까지 대한극장 운영에 집중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그는 극장이 사람들에게 전쟁의 상흔을 잊고, 꿈과 희망을 품게 하는 특별한 공간이라는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우양산업개발이 세기상사를 인수했던 2021년은 이미 극장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다. 그런데도 대한극장을 인수했다면 우양산업개발은 극장산업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양산업개발은 힐튼 경주 등 호텔업 외 우양미술관도 운영하고 있는데, 대한극장을 인수하며 문화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한다는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대한극장은 최근 도심 속 옥상 정원 씨네가든에서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으며, 특별히 독립영화를 꾸준히 상영해왔다. 2022년 10월에는 WDG와 함께 7층 11관을 리모델링하여 300석 규모의 WDG e스포츠 스튜디오로 개장하는 등 문화 확장의 시험적 운영을 이어왔다. 대한극장은 폐관 후 문화예술공연 시설로 리모델링하여, 2025년 4월 세계적인 이머시브 공연 ‘슬립노모어’와 함께 돌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머시브 공연은 건물 전체를 무대로 사용하며, 관객은 배우를 따라 다니면서 자유롭게 관람하고 스토리에 참여한다. 즉 관객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소비하도록 짜여 지는 공연이다. ‘슬립노모어’는 2003년 런던에서 초연하였고, 현재 뉴욕과 상하이에서 공연하고 있다. 예술의 전당에서 일했고, 세종문화회관 사장을 역임한 이승엽은 극장 경영에 관한 그의 저서 '극장에 대하여'(2020)에서 ‘모든 극장은 특별하다’고 말한다. 극장 자체는 지극히 실체적 존재이지만, 극장은 예술가와 관객뿐만 아니라 권력, 시민, 언론, 기업 등 다양한 주체로부터 발현되는 다양한 욕구와 욕망이 현실적인 조건과 만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지는 실체라고 묘사한다. 한국 영화계를 ‘충무로’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대한극장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극장으로 한국 영화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그런 대한극장이기에 폐관 이후 우리나라 공연 예술계를 어떻게 새롭게 견인해갈지 기대하게 된다.
의정 갈등 여파로 인해 응급환자 관리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의사·간호사 등 의료인이 응급실에서 폭행이나 폭언 피해를 본 사례가 최근 3년간 21%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급실 폭력이 증가하는 것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12조 (응급의료 등의 방해 금지) 등의 강화 조치만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음이 입증된 셈이다. ‘응급실 안전’을 답보하기 위한 실효적인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인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응급의료종사자가 응급실에서 의료행위와 관련해 폭행 등 피해를 본 사례는 2021년 585건, 2022년 602건, 지난해 707건으로 최근 3년간 지속해서 늘었다. 지난해 응급실에서 벌어진 의료인 폭행 등 피해 사례 707건을 행위별로 보면, 폭언·욕설이 45..
살면서 우리는 종종 장애물들을 맞닥뜨린다.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잘 해결되지 않고 쌓일 때 과도한 스트레스로 작용해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며 소화 불량, 불면증, 두통 등 증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런 증상이 반복되면 불안과 우울이 더 커진다. 지난 20여 년간 화병 등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병이 된 환자들을 진료해 오면서 일시적으로 증상만 누그러뜨리는 약과 치료로 병을 키우시는 분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원인과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 가족이나 지인 등 가까운 관계에서의 상처, 큰 경제적 손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으로 인한 해소되지 않은 분노 등의 감정해결 되지 않고 쌓이는 정신적 스트레스, 그리고 육체적 과로. 환경오염. 영양부족, 인스턴트 음식 등의 육체적 화..
일본 관동지역 한글학교 협의회가 개최한 '2024 한국어 교사 학술대회'(9/20-9/22)에 다녀왔다. 필자는 이 학술대회에서 ‘재외동포 차세대 교육의 혁신과 미래 : 미래 글로벌 생태와 차세대 정체성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기조 강연을 했다. 떠나온 모국 밖에서 자신의 삶과 미래를 헤쳐 나아가야 하는 재외동포 차세대들은 그들 부모 세대가 견지했던 정체성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더 확장된 정체성, 더 고양된 정체성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시민 정체성은 세계의 시공(時空)에서 자아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의미 있는 성취를 향하게 한다.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그냥 세계 무대에서 세속적 성공을 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일종의 범(汎)도덕성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세계인의 공동 발전에 나의 참여를 다짐하는, 그런 정체성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선한..
강화도 주민들로 구성된 강화갯벌유네스코자연유산등재추진위원회 회원들이 강화갯벌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지난 25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 촉구 선언대회를 열고 선언문도 발표했다. (경기신문 26일자 15면, ‘강화갯벌 유네스코 등재 한목소리’) 선언문에는 “강화갯벌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강화갯벌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 “강화갯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생태학적, 지질학적, 생물다양성 가치들을 전 세계로 알리고 유네스코를 통해 강화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거듭나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울러 검은머리물떼새, 두루미, 상괭이 등 수많은 희귀종이 살고 있으며 무인도서에는 천연기념물인 저어새가 수백 마리씩 무리를 지어 이 갯벌에서 먹이를 먹고 또..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나. 대외적으로는 ‘글로벌 중추국가’를, 대내적으로는 ‘다문화사회’를 지향한다는데 과연 그런가. 러시아·CIS(독립국가연합) 출신 고려인(кореец. 카레이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자. '재외동포에 대한 내국민 인식조사(재외동포청, 2023)'에서 “러시아·CIS지역동포(고려인)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항목에 대해 응답자 1,000명의 3.1%가 “매우 가깝게 느낀다”, 26.2%가 “어느 정도 가깝게 느낀다”, 50.6%가 “보통이다”, 17.1%가 “다소 이질적이다”, 3.0%가 “매우 이질적이다”라고 응답하였다. 이 결과를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우리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은 고려인을 불편해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30대의 부정적 인식(8.5%)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이는 우리 사회..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버스 정류장에 다섯 살쯤 된 어린이가 두 손 포개 기도하고 있었다. 어린이는 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외출 중이었다. 어머니는 두 아들과 한여름 도로 위를 방황하고 있었는데, 어린 둘째는 더위와 피로에 지쳤는지 유아차에서 노곤히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택시를 잡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택시는 흔드는 손에 멀찍이서 다가오다 이내 가속 페달을 밟아 신속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어머니는 유아차가 있으면 택시를 잡을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지글지글 끓었다. 그렇게 택시를 몇 대 보냈다. 정말이지 지독한 여름이었다. 한탄을 외면할 수 없었던 큰아들은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럼, 버스 타고 가자 엄마.” 어머니는 유아차가 있으면 버스 기사분들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는 수 없이 집까지 걸어가 볼까 하며..
윤석열 정부 임기가 절반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매일 쏟아지는 여권발 뉴스는 마치 임기 말을 연상케 한다. 특히 수 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갈등은 역대 정권들의 임기 말에도 보지 못했던 수준의 ‘레임 덕(lame duck) 장면’이다. 레임덕 발생의 시작점은 민심 이반이다. 민심을 회복하지 못하면 국회에 대한 대통령의 권위가 무너지고, 이를 방치하면 여권 내부의 권력싸움으로 전염되어 국정동력은 완전히 상실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 후반(2016년 10월) ‘최순실 스캔들’로 국정지지율 17%를 찍으며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임기 마지막 해인 2012년 8월에 20%가 붕괴되면서 레임덕을 피해 가지 못했다. 윤 대통령에 대한 민심 이반은 점점 심각해 지고 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3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
찾아낸 약(藥)은 생각이다. 오랜 실패 끝에 터득한 처방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덮고, 생각으로 생각을 지운다. 덮고 지우기를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들린다는 생각마저 사라지게 된다. 아니 망각하고 만다. 들리는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 도망쳐서, 들림에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내게는 그것이 기쁨이다. 들리지 않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선 쉬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생각을 멈추면 기쁨도 따라서 멈추고 만다. 기쁨이 멈춘 자리에 남는 건 소리다. 풀벌레 울음 같은 그 소리. “찌르르르.” 헤아려 보니 벌써 이년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귀울림(耳鳴)에 시달리고 있는 게. 귀를 막으면 도리어 또렷해진다. 없는 소리를 있는 것처럼 지어내서 들려주는 녀석의 정체는 뇌(腦)다. 왜 그러는지 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