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사색의 숲 속을 걷고 싶어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그 순간 같은 아파트 10층에 살면서 중형자동차 몇 대를 소유하고 개인 사업을 하는 김 사장을 만났다. 그는 오늘 아침 3시 30분에 일어나 이곳저곳에 살고 있는 기사의 집 앞에 자기 차를 세워두고 차 안에 자동차 열쇠와 행선지를 알리고 오다 보니 이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바쁘게 할 일이 있어 ‘당신의 봄은 지금입니다’하고 돌아서 내 길을 걸었다. 보고 싶은 얼굴은 교회에 가서 보고 그리운 얼굴은 자연의 표정 속에서 읽는다.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의 표정을 보면서 어릴 적 농촌의 안방에서 어머니 젖을 물고 잠들었을 내 모습을 기억의 저장고에서 발굴해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런 성장과정에서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읍내의 백합사진관으로 가서 중학생 교복을 입고 촬영한 사..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계절별로 옷을 가지고 있다. 드레스룸이 아주 큰 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옷들을 매일 사용하는 옷장 속에 모두 걸어놓을 수 없어서 계절에 맞는 옷 이외에는 상자나 드레스룸의 자주 사용하지 않는 구석에 보관한다. 나 또한 그래서 철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옷장을 열어보면 그 주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옷을 정리해 놓은 스타일이나 옷의 형태, 컬러, 브랜드, 수량 등등 옷장에는 옷의 주인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올해는 여름이 너무 일찍 와버려서 겨울과 이른 봄 옷들을 모두 꺼내고 일찍이 여름 옷들을 옷장 메인 옷걸이에 걸었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을 하기 위하여 옷장 문을 열고 무엇을 입을까 고르는 일상적인 행동을 하다가 문득 옷장에 걸린 옷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하루 동안의..
임태희 교육감이 지난달 31일 이현재 하남시장을 만나 교육현안을 논의한 자리에서 하남교육지원청 신설 필요성 등을 강조해 지역민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임 교육감은 “하남시는 교육지원청이 신설돼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고 최우선으로 추진하려고 한다”고 화답했다.(관련기사 경기신문 3일자 8면, 이현재 하남시장 “하남에도 교육지원청 필요”) 임 교육감은 지난 선거에서 ‘1시·군 1교육지원청 설립’을 공약으로 내건바 있고 하남교육지원청 분리, 신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남시는 1989년 1월 당시 광주군에서 분리됐다. 하지만 교육행정기관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후 35년간 하남지역 교육행정 업무는 광주시에 있는 광주하남교육지원청에서 담당하고 있다. 하남시는 가파르게 학생 수가 증가하고 있다. 하남시 거주 초·중·고등학교 학생 수..
지난주에 수원상공회의소 김재옥(金載沃) 회장의 전기 출판기념식이 있었다. 돌아가신 분도 아니고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물의 전기물이 발간된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들을 수도 있지만, 내용을 보니 결코 간단치 않은 인물의 기록이었다. 금수저 출신이 아니면 성공하기 힘든 시대에 입지전적인 인물이란 말이 떠오른다. 하인천역 인근에서 강보에 싸인 채 발견된 아기는 이름은 고사하고 생년월일도 알 수 없었고 부두에서 막노동하던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당시는 6.25 전쟁이 휴전된 뒤라 전쟁고아들이 수없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기는 양부의 성을 물려받았고 발견된 날이 그대로 생년월일이 되었다. 양부의 손에 인천 덕적도에서 젖동냥으로 성장한 아이의 어린 시절은 최 극빈의 삶이었다. 밥 굶기가 허다했고, 겨울에 다리 밑..
6월이다. 6.25가 발발한 지 74년이 된다. 3년 한국전쟁이 끝날 즈음 태어난 나는 한반도 분단시대를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통일에 대한 기대가 크게 일어났던 때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날이었다. 이제 우리나라 3.8선도 머지않아 무너지지 않겠는가 하고 내심 바랬지만 그것은 남의 나라 잔치로만 끝나고 말았다. 독일은 통일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였건만 우리는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후 남북의 정상들이 수차 만나서 합의서를 교환하고 진척시켰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아무런 진전이 없다. 지금 한반도 주변 정세는 험난하고 남북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꼭 비관만 할 수 없다. 난관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잘 극복해 오지 않았던가! 휴전선은 보통‘38도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경기도 연천이 북..
경기도가 ‘난임부부 시술비 지원사업’의 여성 나이별 시술 금액 차등 지원 기준을 폐지했다.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은 ‘경기도아이돌봄광역지원센터’ 출범식을 갖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난임부부의 시술 부담을 차별 없이 도와주고, 경기도의 대표정책인 아이돌봄 지원체계를 강화하는 일은 적극적인 저출산 대응책의 일환이다. 인구소멸 재앙에 대응하는 경기도의 전방위 정책들이 큰 성과를 거두기를 소망한다. 경기도는 고연령 임신에 따른 건강상의 위험성 때문에 45세(여성)를 기준으로 지원금액에 차등을 두던 ‘난임부부 시술비 지원사업’에서 모든 차등 기준을 없앴다. 지금까지는 45세 이상 여성의 경우 44세 이하 여성에 비해 최대 20만 원 지원금액이 적었으나, 소득·거주지·횟수·나이 등 모든 기준이 사라져 더 많은 난임..
권위주의적 정치문화가 지배했던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에서 여당의 총재와 대선 후보는 경선 없이 추대되었다. 야당에서는 대선후보 및 당 총재(대표) 경선이 이루어졌다. 오랜 기간 대통령은 여당의 총재였다. 당대표 경선은 김대중 대통령의 여당 총재직 사임(2001) 이후 제도화되었다. 정당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한 당원의 권리 확대와 공직선거 후보자의 공정한 추천 등이 입법되었다. 정당법에 ‘당원 등에 당직자 선거권 부여’(2000), ‘당 대표자 선출 당원 등 매수행위 금지·처벌’(2002), ‘공직선거후보자 추천 위한 당내 경선 제도화 및 선관위 위탁’, ‘경선(당대표 경선 제외) 관련 선관위에 범죄 조사권 부여’, ‘당내 경선등 위반 범죄 처벌’(2004), 공직선거 후보자 경선은 공직선거법으로. 당대표 경선은 정당법으로 분리(2005), ‘당대..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정치권에 지구당제도 재도입 논란이 일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현역과 원외 정치인 간의 가파른 기울어진 운동장 이슈다. 반대하는 쪽은 20년 전 지구당 폐지 명분이었던 ‘불법 정치 자금 온상’ 폐해를 상기한다. 찬성 견해는 기성과 신인의 형평성 확보가 시급하다는 논리다. 부작용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를 단단히 장착한 새로운 개념의 지구당 시스템을 추구해야 할 시점이다. 찬반으로 갈려 입씨름만 벌일 소재가 아니다. 22대 국회 개원 첫날 김영배 민주당 의원과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지구당 설치 및 후원회 모금을 허용하는 내용의 법안을 각각 발의하면서 여야를 불문하고 입법 논의에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이재명 대표가 지구당 부활을 주요 과제로 언급했다. 원외 인사가 많은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오래 전 2학년 담임을 할 때의 일이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도서실서 책에 쪽지를 숨겨 놓고 찾는 술래잡기를 종종 하고 놀았던 모양이다. 도서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교실에 있던 나는 알 수 없었고, 사서 선생님께서 나에게 지도를 부탁하고 나서야 어린이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물론 9살이었던 친구들은 도서실에서 조용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계속 뛰어 놀았다. 결국 뛰어다닌 아이들이 2주 동안 도서실 출입이 금지되면서 책 읽는 공간은 평화를 되찾았다. 여기까지는 있을 법한 내용의 이야기들이다. 예상치 못했던 건 학부모의 반응이었다. 부모로서 아이가 도서실에 출입을 못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을 수 있다. 화가 난 학부모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왜 도서실에서 뛰면 안 되냐?’는 것이었다. 뭐라고 답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자,..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고딕 양식의 경이로운 수도원 몽생미셸! 이곳은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인기가 높다. 지난 5월 19일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3만 300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4㎢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섬에 왜 이리 많은 사람이 모여 든 걸까? 신비롭고 경이로운 몽생미셸의 매력 때문이다. 이곳은 708년 세워졌다. 전설에 따르면 생 미셸 대천사가 오베르(Aubert) 주교에게 나타나 자신의 이름으로 성소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주교는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자 대천사가 다시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 빛의 손가락으로 주교의 머리를 만졌고 두개골에는 곧 구멍이 뚫렸다. 주교는 대천사의 존재를 확신하고 건물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 후 966년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이 이곳을 점령했다. 이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 공사를 60년간 지속했고, 수세기에 걸쳐 이 섬의 화강암 위에 여러 건물을 지었다. 그 결과 몽생미셸은 ‘중세 고딕식 건물의 백과사전’이 됐다. 이곳은 무엇보다 갈리시아로 가는 북유럽 순례자들의 산티아고 순례길 중간 기착지다. 따라서 일찍부터 유명세를 탔다. 1965년, 한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오늘날 몽생미셸은 전 세계의 유명한 관광지로 모든 국적의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그 당시 연간 관광객은 약 60만 명이었다. 지금은 약 5배 증가해 매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300만 명이 넘는다. 주민 3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 몰려드는 인파! 마을 사람들에게 관광객은 무척 고마운 존재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꼭 그렇지도 않다. 수도원까지 가는 셔틀버스는 만원이고 비좁은 거리는 셀카봉을 든 방문객들로 넘쳐난다. 이 섬에서 크레페 장사를 하는 비르지니 토마(Virginie Thomas)는 여름 성수기는 “인파가 광적이다”라고 소리친다.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종일 거리는 꽉 차 미치겠다”라고 탄식한다. SNS에선 몽생미셸이 매력을 잃을까봐 조바심을 치는 글들로 가득하다. 이곳의 서점주인 파스칼 르슈발리에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장사에 좋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넘쳐나는 관광객은 몽생미셸 만의 침식을 가속화하고 있다. 모든 만은 물이 차고 모래가 충적된다. 하지만 이곳은 인간의 발길로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그 결과 해안에서 4km나 떨어져 있던 몽생미셸 만은 이제 불과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대로 가면 2042년에는 초지로 둘러싸이게 된다. 하지만 이 넘쳐나는 관광객을 막을 수 있는 기적의 방법은 없다. 현재 몽생미셸이 방문객의 최대 수를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으로선 관광객의 대량 유입을 억제하기 위해 성수기의 주차 요금을 비수기보다 2~3배 더 받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몽생미셸의 관리자들은 SNS에 방문객들이 방문을 연기하도록 요청하는 색다른 메시지를 게시하고 있다. 이러다 몽생미셸 기슭에 게이트를 설치한다고 나올지도 모른다. 관광이 대중소비의 세계로 접어들면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몽생미셸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슬픈 상징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