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방소멸 전문가’랍시고 ‘경북연구원 생활인구센터’ 현판식에 초대받았다. 행사는 오후 4시로 잡혀 있었기에 아침 일찍 출발해 예천 회룡포 마을을 둘러보았다. 육지의 작은 섬으로 참 아름다웠다. 은빛 백사장, 강물 위 뽕뽕 뚫린 뿅뿅다리. 산을 배경으로 한 작은 호수들. 마을 여인이 모는 빨간 스포츠카. 밭 가는 농부들의 목소리. 이색적인 정취에 젖어 이곳저곳을 거니는 데 한 여행객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정자만 가득해. 여기도 정자, 저기도 정자. 어디를 가도 정자 투성이야!” 그 말을 듣고 보니 역시 그러했다. 여느 지자체처럼 회룡포 마을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인구감소시대, 지자체들은 마을 살리기에 고군분투라지만 정부 보조금으로 덕지덕지 건물만 세운다. 회룡포의 정자들 역시 닮은꼴이다. 영혼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아이디어를 짜내기보다 카피만 하니 전국의 봄 축제, 가을 축제가 거의 똑같다. 여기도 핑크뮬러, 저기도 핑크뮬러.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 이는 뼈를 깎는 품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개발을 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인구 유인은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핀란드의 피스카스(Fiskars)는 우리에게 상당한 울림을 준다. 피스카스, 한 번쯤 들어 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유명한 주황색 손잡이가 달린 피스카스 가위의 산지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헬싱키에서 남서쪽으로 100km 지점에 위치한다. 참나무, 단풍나무, 자작나무가 늘어선 구불구불한 강변에 오래된 방앗간과 벽돌 대장간은 동화 속 마을을 연상시킨다. 17세기 초부터 약 3세기간 이곳은 핀란드의 금속 가공 단지였다. 하지만 공장 부지가 협소해지자 회사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동네는 곧 침체되었고 그대로 가면 죽은 마을이 될 게 뻔했다. 이를 심히 걱정한 피스카스의 부사장 잉마르 린드베리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 냈다. 공실인 피스카스 제철소를 예술가 공동체이자 문화 관광지로 탈바꿈시켜 시내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성공을 거두었고, 600여 명의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유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최고급 가구, 보석, 유리 제품, 미술품, 조각품, 직물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제 피스카스는 ‘핀란드의 그리니치빌리지’로 예술가, 상인,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활기 넘친다. 피스카스의 매력은 빌라, 옛 공장, 곡물 창고 등 오래된 건물들에서 비롯된다.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상점이나 카페로 복원되었다. 카페에서는 수제 음식과 지역 맥주 및 사이다를 판매하며, 전시회와 라이브 음악을 공연한다. 다른 일부는 고전적인 건축 양식과 현대적인 편의 시설을 결합한 호텔로 개조되었다. 대표적으로 테겔 호텔은 현대적인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객실을 비치하고 있다.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이 건물들은 산책과 휴식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피스카스의 부활은 이처럼 창조적인 아이디어 덕분에 가능했다. 우리 지자체들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 수 있어야 한다. 인구 선순환 구조는 너도나도 베끼는 계절 축제로는 이뤄낼 수 없다. 더욱이 축제는 소비재에 그치지 않던가! 고유 상품 개발로 일자리 창출에 매진할 때 공동체는 부활할 수 있다.
인류가 겪는 대재난은 어떻게 나에게 전달되고 수용되는가. 매체의 발달로 자연 재앙이든 인위적 재난이든 우리는 그 현상 현실을 빠르고 여실하게 전달받는다. 재난을 어떤 언어(매체)를 통해서 전달·수용 받고 의미화하는지에 따라, 재난을 이성적·감성적으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양태에 차이가 있는 듯하다. 러·우 전쟁이나, 미국·이란 전쟁의 내용을 다루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이야말로 인위적 재난의 앞순위에 놓이지 않는가. 2001년 9월 11일 아침, 알카에다 테러범들이 납치한 여객기를 빌딩에 충돌시키는 자살 공격으로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빌딩은 폭발했다. 사망 2996명, 부상 2만 5000명의 피해 장면을 영상으로 보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사람들은 이 영상 장면으로 수없이 빠져들어 갔다. 그것은 안타까움과 분노를 공유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놀라움[驚異]에 대한 목격 욕구도 작동하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일본 동북해안에서 대 쓰나미 재앙을 겪을 때도 나타난다. 40m 높이의 쓰나미가 밀려닥치고 2만 명의 사망·실종자를 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나미에 파묻히는 영상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이 영상 또한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심리 기제 하에서 오래도록 소비된 측면이 있다. 재난을 전하는 전통적인 언어는 문자 언어나 구두언어였다. 구두언어는 전달의 범위가 제한되고, 공신력이 떨어진다. 반면 문자 언어는 근대 이후 신문 매체에 등장하여 그 기록성과 공신력을 바탕으로 지구적 대재난을 인류가 공동으로 감지하고 서로 공유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영상 언어가 빠른 속도로 진화하면서 지구촌의 대재난은 거의 실시간으로 그 재난 현실 현상의 여실함을 보여주는 영상 언어가 지배하게 되었다. 문자 언어로 대표되는 재난의 언어는 재난에 대한 메타 진술을 응축성 있게 나타내는 장점이 있다. 재난에 대한 메타 진술은 재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재난의 총체적 의미를 설명하고 그 영향을 예측하게 하는 데에 필요하고 유리하다. 그런데 세태는 변했다. 이보다 더 수용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재난을 현상으로 증언하는 영상이다. 요즘의 대중 수용자들은 재난 현장의 여실한 모습을 직접 보기를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매체 차원에서는 영상도 언어의 일종이다. 영상 언어라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재난 소식을 받아들이는 평균적 대중은 언어적 설명이나 언어적 분석보다는 재난의 실상 모습을 먼저 목격하고 싶어 한다. 재난이 인간과 세계의 존재론 차원에서 대단히 심오한 철학적 이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재난이 인류의 공존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류학적 문제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재난은 인문학적 성찰의 주제이다. 결코 감정적 소비의 콘텐츠로만 지나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재난을 눈요기처럼 소비하는 풍조는 위태롭다. 재난은 궁극으로는 문학의 이슈로, 철학의 고뇌로, 공동체의 미래 의식으로 숙고 되어야 한다. 인문학적 고뇌가 당장의 해법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 재난 현실 앞에서 무력해 보이는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재난의 언어를 인문의 가치로 살려내고 심화하는 일은 재난과 인간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대전 대덕구 문평동 한 자동차부품 제조 공장에서 무려 74명이나 숨지고 다치는 인명피해를 내는 대형화재 참사가 발생해 국민의 가슴을 에게 하고 있다. 경기도에서도 의정부 섬유공장과 안성 원곡면 창고 등에서 잇따라 화재가 발생하는 등 봄철 건조기 화재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초대형 화재가 아니었긴 해도 산불이 가장 많이 발생한 기록이 있는 지역도 경기도다. 화재 발생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대책들이 적극적으로 강구돼야 할 시점이다. 지난 20일 오후 대전 대덕구 문평동 한 자동차부품 제조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는 사망 14명, 중상 25명, 경상 35명 등 부상자 60명을 포함해 모두 74명이 죽고 다치는 끔찍한 비극으로 귀결됐다. 화재는 공장 내부 절삭유와 기름때, 임의로 마련한 ‘2층 복층’ 구조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해 급속히 확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밀 조사 결과가 나와 봐야 정확한 전말이 밝혀지겠지만 또다시 조금만 잘했으면 방지할 수 있었던 비극으로 판명될 개연성이 높다. 같은 날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용현산업단지 내 한 섬유공장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건물 2층에서 시작돼 건물 상당 부분을 태웠고, 인근 공장으로까지 불길이 번지기도 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해당 섬유공장 건물은 대부분 소실됐다. 이에 앞서 19일에는 안성시 원곡면 반제리의 한 주택 뒤편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창고 내 화목보일러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주택에 있던 거주자 2명은 모두 대피하여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지난 21일 경기 여주시 현암동의 한 2층짜리 상가건물에서는 가스 폭발에 따른 화재가 발생했다. 1층에 식당과 미용실, 2층에 키즈카페 등이 입점해 있는 연면적 653㎡ 규모의 철골조 건물에는 당시 모두 31명이 있었으나 모두 스스로 대피해 무사했다. 해마다 해빙기 봄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끔찍한 화재 소식을 접하게 된다. 크고 작은 화재는 영락없이 사람의 안전의식 해이와 불법 부실 시설로 인한 인재(人災)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안전사고 중에도 화재만큼 국민의 안전의식 결핍이 문제의 소지로 파악되는 재해는 없다. 그야말로 ‘자나 깨나’ 조심하고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지혜가 발휘돼야 할 재해가 화재인 셈이다. 지난해 3월 22일 의성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은 잠깐의 부주의가 얼마나 큰 피해로 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끔찍한 재해였다. 때마침 불어닥친 강풍으로 인해 산불은 경북도 내 5개 시·군을 휩쓸면서 산림 9만9417㏊를 태웠고, 183명의 인명피해와 5499명의 이재민을 낳아 역대 산불 피해 규모 1위를 기록했다. 경기도에서 발생하는 산불이 전국 시·도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점한다는 통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도내에서 발생한 산불은 총 2673건이었다. 이 같은 발생 건수는 같은 기간 전국 산불 발생의 약 22%를 차지해 경기도의 산림 면적이 전국의 약 8%(51만2천㏊)에 불과한 측면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강풍 등 악재와 겹친다면 참으로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기도는 유난히 물류창고 대형화재 사고, 지난해 배터리회사 아리셀 화재 등 대형화재 참사의 아픈 기억이 많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지난 17일 양평군 일원에서 민간 전문기관·공공기관과 함께 ‘산림 인접 주거 취약 시설 화재안전망 구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봄철 산불 예방 활동 강화에 나서고 있다. 화재 재해를 방지하는 소방 안전은 소방 당국의 노력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지자체의 적극적인 안전의식 고취를 위한 홍보활동과 민간 차원의 예방 활동, 대피 훈련 등이 체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올봄만큼은 경기도에서 대형화재 참사 뉴스가 터져 나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취약지역을 중심으로 민관이 합심하여 ‘다시 보고 거듭 살펴보는’ 경각심을 발휘할 때다.
얼음 베개를 베고 자려느냐 완전 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서 겨울을 입고 밤 지새는 겨울나무가 되려 하느냐 사납게 휘두르며 달겨드는 혹한에 맨살을 맡겨 마구 쳐라 해라 내 남루한 의지를 기꺼이 던져 놓으리니 허공을 헤치듯 갈겨 오는 저 하늘의 회초리 그래 나 여기 있느니 빗나가지 마라 - ‘다시 겨울이다’ 부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신달자 선생의 시 ‘다시 겨울이다’의 두 연 중 첫째 연이다. 겨울이라는 계절을 통해 삶의 순환과 노년의 시간, 그리고 엄혹한 순간을 견디는 의지와 그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담은 시다. 이 한 부분만으로도 선생의 시가 가진 섬세하고 치열한 감성, 그 곤고한 심정적 곡절들을 균형성 있게 감당하는 내면 세계를 유추할 수 있다. 시와 에세이, 그리고 소설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문학은 여성적 감수성과 자아 성찰, 삶의 고난과 죽음의 절대성에 대한 사유(思惟), 이를 표현하는 맑고 선명하고 절제된 언어로 충일하다. 문필가로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사랑과 인생에 대한 수발(秀拔)한 통찰을 담고 있어, 사뭇 친숙하게 독자들과 만난다. 지난해 연말, 12월 4일의 일이다. 경남 거창군 남하면에서, 이 고장 출신의 문인 신달자 선생의 문학을 기리고 이를 널리 공유하기 위해 건립된 신달자문학관 개관식이 있었다. 현존 여성 시인 가운데 그 자신의 이름을 표찰로 건 문학관은 초유의 일이다. 이날 행사에는 150여 명의 문학계 인사와 지역 인사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필자 또한 한국문학관협회 회장 자격으로 자리에 있었고, 흔연한 마음으로 축사를 했다. 전시 공간, 강의실, 북카페, 수장고, 기획전시실이 훌륭했다. 거창군은 앞으로 이 문학관에서 지역 문인 창작 및 낭송 프로그램, 주민 대상 문학 강좌와 글쓰기 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신달자 선생은 지난해 6월 19일, 필자가 촌장으로 있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의 문학교실에서 ‘인생에는 쓴맛은 없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선생은 인생에서 겪는 고통과 상처를 ‘쓴맛’으로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감당하고 시간이 지나면 성숙과 깊이를 만들어주는 자양분이 된다고 말했다. 더불어 시는 ‘잘 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진실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성 시인으로서의 삶과 문학에 대해 진솔하게 토로하면서, 고통도 결국은 삶의 자산이라고 결론지었다. 삶과 문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학적 대가의 논리였다. 선생은 지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문학에 있어 국가 원로의 지위에 있다. 필자는 젊은 대학교수 시절,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김재홍·김종철 등 선배 문인들과 함께 선생을 자주 뵈었다. 언제나 활력에 차 있고 유머와 위트에 넘치던 선생이, 삶의 여러 어려움을 견디고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그러므로 선생은 참된 문학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 남모르는 질곡을 통과하는 사람들, 특히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여성 문인들에게는 하나의 귀감이요, 나침반이요 청신호다. 선생과 함께 한 지난날들이 귀하고 소중한 만큼, 남아 있는 날들에도 아름답고 좋은 마음의 후진으로 그 곁에 남아 있으려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1950년대. 미국의 과학자들 사이에는 공통된 두려움이 흐르고 있었다.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의 저자 새뮤얼 W. 프랭클린은 전후 심리학자들이 마주했던 고민의 흔적을 추적한다. 전쟁은 과학기술이 어떻게 반인권적 살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 처절히 보여주었고,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가 또다시 전체주의와 독재정권을 위해 쓰이지 않을지 극도로 경계했다. 과학자들에게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다. 당대 심리학자들은 사회의 발전 동력이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있으며,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진보를 일굴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과학자들은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특정 인종이나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전체주의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창의성 연구는 그 고뇌의 결과였다. 심리학자들은 창의성이 교육과 훈련을 통해 누구나 계발할 수 있다고 찬양했다. 창의성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에 의한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미국적인 개념이자 국가적 방어 기제였다. 창의성에 대한 예찬은 산업계로까지 확장되었다. 혁신적인 기업은 창의적 인재를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광고 업계는 영감과 신선함이 넘치는 예술적 집단으로 탈바꿈했다. 소비 행위조차 기존의 소비문화에 매몰된 ‘대중’의 선택이 아니라, 창의적 개인의 개성적 표현으로 그려졌다. 혁신은 창의적 개인에 의해 가능했다. 개인은 얽매임 없이 자유로워야 했고, 새로운 시도는 장려되었다. 이러한 서사의 정점에는 실리콘밸리가 있었다. 실리콘밸리는 엔지니어를 구속하는 모든 관습을 타파하려 했다. 근무 방식은 자율적이었고, 직원의 창의성을 높일 수 있는 경영 방식이 활발히 논의되었으며,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전 세계 인재들을 끌어당겼다. 창의성은 당대 국가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과학자들은 개인을 강조함으로써 과학기술이 국가의 쓸모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인가. 한때 창의성을 예찬했던 미국의 과학기술 생태계에 최근 새로운 국가주의 담론이 무섭게 파고들고 있다. 팔란티어의 공동 창업자인 알렉스 C. 카프와 최고 업무 책임자인 니콜라스 W. 자미스카는 저서 ‘기술공화국 선언’에서 실리콘밸리가 공동체적 가치를 잊어버렸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미국과 체제 경쟁 중인 ‘적국’들이 국가 안보를 위해 과학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미국은 고작 소비자를 위한 안락한 서비스를 만드는 데 급급하다며 한탄한다. 이들은 기술 ‘엘리트’들에게 도덕을 호소한다. 미국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과학기술이 국가의 전략적 목표에 맞게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과학기술 패권을 적국에 빼앗길 것이라는 공포와 함께 인공지능 방산 기업의 대표주자 팔란티어를 위한 ‘도덕적’ 서사가 완성된다. 팔란티어가 미국의 이란 공습에 깊숙이 관여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카프가 주장하는 도덕의 실체는 미국의 존속이며, 이는 곧 군사기술 분야에서의 압도적인 우위와 동의어다. 2020년대의 과학기술은 1950년대 과학기술이 그토록 경계했던 지점, 즉 과학기술이 국가적 목적 아래 도구화되는 지점으로 다시금 회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전후 과학자들이 품었던 두려움은 이제 국가를 위한 혁신이라는 깃발 아래 우리 눈앞에 당도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가 6·3 지방선거에 적용할 선거구 획정 등을 4월 16일까지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하겠다고 21일 밝혔다. 송기헌 정개특위 위원장은 “시일이 촉박한 만큼 심사에 속도를 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정개특위는 1월 13일 첫 회의를 열었지만, 그동안 공전을 이어갔다. 이날 정개특위는 진보 4당이 요구하는 3~5인 중대선거구제 확대, 비례대표 정수 확대, 통합특별시의회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과 관련한 법안도 함께 상정했다. 국회의 ‘직무 유기’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제9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일인 6·3지방선거가 70여 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선거구획정안을 내놓지 않아 소수당 및 예비후보들은 냉가슴만 앓고 있다. 공직선거법상 선거구 획정은 선거일로부터 180일 전인 작년 12월 5일까지 이뤄져야 했다. 정개특위는 여야 간 이견차로 실질적 논의를 못했다. 통상 선거구 획정은 국회에서 광역의원 선거구에 대한 안이 정해지면, 이를 기반으로 지역별 선거구획정위원회가 가동돼 기초의원 선거구를 정하게 된다. 그러나 제때 이뤄지지 않이 폐해가 일파만파다. 경기도의 경우 정당별로 수백 명에 달하는 광역·기초의원 후보들을 검증해야 하지만, 선거구 변동을 우려해 이 같은 절차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는 신도시 개발 사업이 곳곳에서 이뤄지면서 인구 변화의 폭이 크고, 도농 복합 지역으로 인구 소멸 지역도 포함하고 있어 선거구 조정이 불가피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정당에서는 종전 선거구에 맞춰 후보자 신청 등을 받고 있긴 하지만, 기초단체장 면접 등의 실무 절차는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채 발만 구르는 중이다. 선거구 획정과 관련해 22대 국회 정개특위 출발점은 분명하다. ‘인구 5만 미만 자치구·시·군 최소 1석, 5만 이상 최소 2석’ 규정과 ‘각 시·도의 평균 인구 대비 상하 50% 편차 기준’을 동시에 맞추는 것이다. 선거구 간 인구 편차의 헌법 기준 준수로 농·산·어촌의 지역구 축소와 도시 지역구 확대의 선거구 재배분, 소선거구냐 중대선거구냐 또는 비례대표제 확대냐 등의 선거구제가 쟁점이다. 2018년 헌법재판소는 지방선거의 인구 편차 기준을 4:1에서 3:1로 낮췄고 ‘자치단체별 최소 1인 보장’을 이유로 인구 편차 기준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인구 편차의 국제 기준은 더 엄격하다. ‘선거구 인구는 가능한 한 같게 하고 허용 편차는 ±10%를 넘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며 특수한 경우에도 15%를 넘지 않도록 하라’는 게 기본 원칙이다. ‘1인 1표(one man + one vote)와 1표 가치의 평등(one vote + one value)’의 실현이다. 여하튼 정개특위 활동이 늦어지면서 기존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에 비해 새 후보자와 입지자는 선거구도 모른 채 활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이전 지방선거보다 공천 시계를 최대한 앞당겨 선거에 전력하겠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지만, 선거구 획정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광역 및 기초의원 후보자 선정은 뒤로 미루고 경기도지사와 기초단체장에 대한 절차만 우선 진행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이는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공천관리위원회가 꾸려지고 후보자 신청을 받은 후부터 속도전을 펼치면서 최대한 빠르게 관련 절차를 진행하기로 한 국힘 역시 광역 및 기초의원에 대한 절차는 선거구 획정으로 인해 언제 이뤄질지 예상할 수 없는 상태다. 아무튼 선거구 획정 지연은 매 선거마다 반복되는 고질적인 문제다. 무엇보다 거대정당 간 이해관계에 따른 협상 지연이 가장 큰 원인이기에 당리당략이 아닌 선진정치 구현 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 선거구 획정이 지연되면 후보자들의 공약 준비와 선거 전략 수립에 차질이 생길 뿐더러, 유권자들의 알 권리와 선거권도 침해하게 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선거구 획정을 빠르게 마무리해 후보자들과 유권자들의 혼란을 잠재우길 촉구한다.
지난 15일에 열린 제98회 아카데미시상식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K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감독 매기 강·크리스 애플한스)가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골든’)을 수상했다. 골든 글로브와 그래미에 이어 오스카상까지 받았으니, 한국의 K팝이 세계 주류 문화가 되었음을 할리우드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감독, 2003년 개봉)를 리메이크한 ‘부고니아’(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도 작품상, 여우주연상 등 4개 부문 후보에 올라 주목했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한국 영화를 할리우드가 리메이크한다니 ‘K 콘텐츠’에 몰리는 세계인의 관심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20년이 더 지난 우리 영화 ‘지구를 지켜라!’가 어떤 영화인지 찾아 감상해 보았다. 주인공 병구(신하균 분)는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려 한다고 믿고 있다.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백인식 분)이 외계인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납치, 음모를 밝히려 한다. SF 영화인가 싶었더니, 구조조정, 산업재해, 노동자의 죽음 등 우리 사회의 무거운 주제들이 이어진다. 이런 구조적 폭력에 시달려 온 사람, 그가 바로 병구다. 영화에 몰입되다 보니, 미친 사람이 병구인지, 우리 사회가 그런지 혼돈이 일어날 정도다. 블랙코미디와 스릴러, SF와 사회 풍자를 오가며 장르 파괴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했지만, 장준환 감독은 그의 첫 영화로 2003년 대종상과 청룡상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영화로 평가받고 있는 이 영화는 세계 영화학교에서 분석하는 컬트 영화가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현재 지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지구인의 모습이 보인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연합하여 이란의 핵시설과 군사시설을 선제공격함으로써 대규모 전면전을 일으켰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이스라엘과 이란의 골 깊은 갈등, 중동 지역 세력 경쟁 등 묵은 이유들이 폭발한 결과다. 결국 폭격으로 민간인 수천 명이 사망하고 수도 테헤란을 포함하여 학교와 주거지 등도 붕괴되었다. 혁명수비대는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사후 그의 아들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후계자로 세워 강경노선을 띠고 있다. 헤즈볼라와 중동 국가들도 가세하여 전쟁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미국 정부에 군사용 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납품하는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의 창업자 피터 틸은 기술이 국가 안보를 결정하며, 기술기업은 국가의 미래와 안보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번 전쟁으로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가 엄청난 수익을 보았음은 아이러니다.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던 이란은 중국 위안화로 거래한 원유를 실은 선박에 대해서는 해협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8개국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란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국제 원유 거래를 미국 달러로 해왔던 ‘페트로 달러’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핵무기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지킨다며 시작된 전쟁은 오히려 수많은 민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유가 급등과 이권 쟁탈, 세계 경제 불안으로 전개되고 있다. 양측에 휴전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줘서라도 지구를 지켜야 할 지금이다.
우리는 선택 앞에서 늘 이유를 찾는다. 더 나은 쪽을 고르기 위해서다. 손해 보지 않는 방향, 실패 확률이 낮은 쪽,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선택. 머릿속에 저울을 올려놓고 하나씩 비교한다. 조건을 따지고, 가능성을 계산하고, 때로는 타인의 경험까지 끌어와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대체로 설명 가능한 선택이 된다. 왜 이 길을 택했는지 말할 수 있고, 누가 물어도 납득시킬 수 있는 선택. 그런데 이상한 순간이 있다. 충분히 따져봤고,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지도 알고 있는데, 자꾸 다른 쪽이 신경 쓰인다. 논리적으로는 덜 맞는 선택인데도,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미 결론을 내린 뒤에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쪽. 이유를 붙여보려 해도 잘 되지 않고, 설명하려 하면 오히려 더 어색해지는 선택. 그럴 때 우리는 대개 그 감각을 밀어낸다. 근거 없는 끌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택은 책임을 동반하니, 더 확실하고 더 안전한 쪽으로 기울게 된다. 스스로를 설득하기에도 그 편이 훨씬 수월하다. 그렇게 대부분의 선택은 설명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정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는 것이 있다. 이유를 다 붙이고, 가능성을 다 따져도 사라지지 않는 쪽. 논리를 통과하고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감각.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상하게 나를 더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듯한 방향. 그 감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만은 느껴진다. 요즘은 그것이 단순한 충동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경험들, 말로 꺼내지 않은 감정들, 지나온 시간 속에서 쌓인 미세한 판단들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다가, 선택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이성과 감정을 나누어 생각하지만, 실제의 선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이성으로 계산한 결과 위에, 설명되지 않는 감각이 겹쳐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선택은 더 이상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결심의 문제가 된다. 충분히 생각했고, 충분히 따져봤다는 전제 위에서, 마지막 한 발을 어디에 디딜 것인가의 문제. 물론 모든 선택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계산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며, 때로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만으로는 삶을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완전히 배제된 선택 역시 어딘가 공허하게 남는다. 그래서 요즘은 그 감각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으려 한다. 충분히 따져본 뒤에도 남아 있는 쪽이 있다면, 그 방향을 들여다본다.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나에게서 비롯된 신호일 가능성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납득한 뒤에 움직이는 삶보다는, 끌리는 것을 선택하는 삶이 더 나와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가장 옳은 선택만을 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때로는 이유보다 끌림이 앞섰고, 계산보다 감각이 먼저 움직였다. 그 선택들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후회를 남기지 않은 느낌을 남긴다. 결국 삶은 완전히 설명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순간은 논리로 정리되지만, 어떤 순간은 그 경계를 조금 벗어난 곳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지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정적 서민 생계가 시급하다. 불법 고리사채업자들의 횡포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악덕 고리 사채업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고물가와 고환율 등 어려운 경제 상황을 틈타 부당 이득을 챙기는 일부 사채업체들의 불법행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더구나 이들 불법 사채업자들은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면서도 교묘한 수법으로 탈세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아 사회 문제화되고 있다. 불법 사채업자는 대표적 민생 침해 사범이다. 말이 좋아 ‘대부’지 살인적인 고리채로 인해 서민들의 피해가 극심하다. 불법 사채업자들은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을 상대로 신체 장기에 대한 백지 위임계약을 강제로 맺도록 하고 원리금을 상환하지 않으면 공갈과 협박을 통해 연 수백, 고리를 갈취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사례다. A씨는 2024년 한 사채업자에게 사업자금 5000만 원을 빌린 뒤 상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돌려막기’를 하다가 같은 해 10월 이후 채권이 31개로 불었다. 채권 31개의 이자율은 모두 연 1000%를 넘었다. 하루 100통 넘게 쏟아지던 독촉 전화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채권 31개 중 사채업법 개정 이후 체결된 30개 대출은 법적으로 무효다. 지난해 7월 개정된 사채업법에 따라 연 60%가 넘는 고금리 대출은 이자는 물론 원금까지 무효다. 특히 정부 신용회복위원회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가 가동돼 불법사금융 피해자를 지원하는 ‘원스톱 종합·전담 지원 체계’ 운용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피해자는 금융감독원, 경찰 등에 피해 사실을 각각 신고해야 했는데, 신복위에 한 번만 방문하면 전담 직원이 배정돼 불법추심 중단과 구제 절차가 빠르게 진행된다. 불법 고금리 대출을 받고 협박과 불법추심을 당하고 있다면 신복위에 신고해 정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니 기대가 크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엔 불법사금융이 적잖다. 콜 센터를 차려놓고 '대출금액 40% 정도를 예치하면 이자가 낮은 대출로 전환해주고 예치금도 돌려 준다'는 문자메시지를 무작위로 보낸 뒤 예치금만 챙기는 수법으로 수천만 원을 편취하기도 한다. 급전이 필요한 서민을 상대로 폭행·협박 등을 일삼은 불법 채권추심 및 무등록 사채업자도 대대적인 단속이 요청된다. 고통스러운 고금리와 채권 추심으로부터 서민 취약 계층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다. 효율적 실행이 중요하다. 총리실을 중심으로 경찰청·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이 협력해 강력한 단속과 처벌뿐만 아니라 신복위의 빠르고 효율적인 피해자 지원을 바란다. 심각한 상황은 불황으로 영세상공인 등이 은행 이자마저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폐업을 피하고자 불법사금융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법사금융을 이용한 사람의 약 70%는 제도권 금융사에서 대출 또는 만기 연장을 실제 거부했거나 스스로 금융기관 대출을 못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사채를 쓰게 된 사례들이다. 이런 실정이기에 서민과 한계 기업들이 사금융에 내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선 현재 20%로 묶여 있는 법정 최고금리를 높이는 등 시장 상황에 맞춰 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대안으로 연동형 법정 최고금리제 도입이 거론된다. 시장금리 상황에 따라 법정 최고금리도 유연하게 오르내리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반대가 걸림돌이다. 현재 국회에서는 20%인 최고금리를 오히려 12∼15%로 더 낮춰야 한다는 취지의 법률 개정안들이 발의돼 있다. 법정 최고금리 조정은 시행령 개정으로 가능해 국회 동의가 필수는 아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영업환경 악화에 따른 사채업 시장 기능 위축 및 불법 금융 피해 증가 등 법정 최고금리 규제의 역기능이 급격히 나타나고 있다며 취약계층 보호를 위해 도입된 규제가 고금리 장기화 상황에서는 오히려 취약계층 금융 소외를 가속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당국의 서민 및 폐업 위기에 놓인 영세상공인, 자영업 등을 살리기 위한 실질적이고 합리적 대책이 긴요하다.
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밖을 본다. 봄이다. 자꾸만 발밑을 보게 되는 계절, 겨우내 잠들어 있던 것들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철근 같았던 나뭇가지에 잎이 돋아나고 있다. 그 모습이 연둣빛 이파리를 가득 물고 있는 어린 새들 같다. 가까이에서 새가 지저귄다. 먼지와 구름을 걷어내는 색과 소리가 날마다 조금씩 번지고 있다. 어디선가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작년에 피었던 꽃이 잊지 않고 찾아왔다. 봄이니까, 올 게 왔다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이 이제는 그저 고맙다. 얼었다가 녹았다 추위 속에서 얼마나 떨었을까, 사라지지 않고 살아내는 생명들이 애틋하고 그래서 더 절절한 봄이다. 이제 곧 개나리, 진달래가 줄지어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산벚꽃이 뒤를 쫓아 산은 꽃으로 출렁일 것이다. 꽃의 공습이다.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고 꽃소식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문득 걱정이 앞선다. 올해는 제발 산불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꽃과 나무에 색이 드는 봄이면, 어김없이 여기저기서 산불이 났다는 뉴스가 쏟아진다. 타들어 가는 나무와 둥지를 떠나지 못한 작은 새들, 숲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들이 스러지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기를. 어리고 여린 것들의 비명조차 불의 포효 속에 갇히는 슬픈 일이 없기를 바란다. 벌겋게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숲. 공중에 뜬 헬기는 전시 상황처럼 긴박하다. 그을리고 재가 된 숲에서 몇 날이고 연기가 피어오르던 장면은 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산불은 생명과 자연에 대한 폭격이다. 봄이면 무수히 사라져간 아름다운 생명들을 떠올리다가, 다시 인간이 만든 불 앞에서 스러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곳에도 꽃은 피었을까, 누구라도 핀 꽃을 본 이가 있을까. 인간에게 처음 불이 생겼을 때 그것은 우리를 한곳으로 불러 모으는 힘이었다. 어둠을 밀어내고, 그 앞에서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불이 꺼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이 불이 우리가 두 손 모아 꺼지지 않게 지켜온 불인가, 우리를 살려 온 불은 지금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가만가만 겨우내 잠든 것들을 흔들어댄다. 하나, 둘 깨어나 가지마다 잎을 틔우고 땅속의 싹을 밀어 올린다. 날마다 초록이 번지고 분홍과 빨강이 번져간다. 그러나 바람에 번져가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 불, 화염이다. 꽃과 불을 번지게 한 힘으로, 어둠을 밝혔던 빛으로, 이리저리 날뛰는 불길을 바람이 쓸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아깝고 귀한 것이 있다면 살아있는 생명 말고 무엇이 있을까. 창밖에 빛이 더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다. 물오른 나뭇가지에 초록이 짙어지면 이파리는 바람의 리듬에 흔들리다 곧 날개를 펴고 어린 새처럼 파닥이며 소리를 낼 것이다. 봄은 발밑을 보게 되는 계절이다. 그곳에는 눈부신 생명들이 움트고 있으니 말이다.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봄의 얼굴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어루만지며, 살아갈 힘을 내는 같은 운명을 지녔다. 그러니 서로를 아까워했으면 좋겠다. 꽃이 꽃으로 피어나는 봄,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는 계절을 꿈꾼다. 볕에 따뜻해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내일은 어떤 꽃이 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