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하남 지역의 인구 증가와 빠른 고령화로 종합장사시설(綜合葬事施設 화장장) 건립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장사시설은 국민의 일생에서 누구나 반드시 이용해야 할 시설임에도 날로 팽배해온 님비(NIMBY), 핌비(PIMFY) 현상에 몰려 막다른 상황에 몰리고 있다. 장례를 흉한 일로만 여기고 무작정 기피하는 구시대적 인식의 혁신이 절박하다.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일임을 깨닫지 못하는 민심이 참으로 딱하다. 국내 장례문화는 올해 기준 화장률 95.1%를 기록해 장사시설은 필수 공공 인프라로서 지역 내 안정적인 공급이 시급하다. 경기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광주·하남 지역은 자체 종합장사시설이 태부족해 사망 발생 시 현재까지도 타 지역 시설에 의존해야 하는 낭패가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유가족들은 장거리 이동과 비용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형편이며, 특히 고령층과 취약계층일수록 그 불편은 더욱 심각하다. 광주·하남 지역의 종합장사시설 건립은 입지 선정과 주민 동의 문제로 오랫동안 난항을 겪어왔다. 광주시는 2029년 개원을 목표로 5만~10만m2 규모의 시설을 추진 중이지만, 적격 후보지가 없어 2030년으로 개원 시점이 연기된 상태다. 지난 연초 1월 2일까지 4차례나 공개모집을 진행했으나, 주민 동의율 60% 미달 등으로 적격 신청지가 없었다. 광주시는 지난해 5월 첫 공고를 시작으로 8~11월 또다시 공개모집을 진행해 3개 마을이 신청했으나 주민 동의율 60% 미달, 관련 서류 미비 등으로 적격 신청지가 없었다. 3차(2024년 11월~2025년 1월)에도 2개 마을이 신청했지만 조건 ‘미충족’으로 무산됐다. 지난 3월 4차부터는 수시 모집으로 전환했으나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상황이다. 주민동의율이 50%에 달하는 지역까지는 있으나 60% 벽을 넘지는 못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현재 추진 중인 시설 규모 및 구성은 화장로 5기 이상, 봉안시설, 자연장지, 장례식장 등 복합 장사시설로 계획되어 있다. 유치지역에는 최대 150억 원의 주민지원기금, 30억 원 이내 기금지원, 수익시설 운영권, 근로자 우선 고용, 사용료 면제 등 다양한 혜택이 제공된다. 종합장사시설 건립이 지연되는 동안 두 지역의 장례 환경은 날로 악화하고 있다. 하남시의 경우 마루공원에서 4,620㎡ 규모의 장례식장과 봉안당 시설을 운영하고 있지만, 관내 화장장이 없는 데다 미사·위례·감일 등 신도시 인구 유입에 따른 인구 증가로 화장 수요가 대폭 늘면서 광주시 화장시설 건립 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미사강변도시를 비롯한 신도심에 유입 인구가 증가하면서 관내 사망자 수가 급증해 화장장 적체로 장례가 4~5일장으로 늘어나는 형편이다. 결국 유가족들에게 많은 불편을 초래하면서 지역에 주소를 둔 고인들이 황천길까지도 차별받는다는 불만마저 팽배하고 있다. 장사시설을 놓고 난관이 악화하는 경향은 전국 각 지역이 다르지 않다. 이렇게 된 데는 장례를 흉사(凶事)로만 여기고 무조건 기피하고 보는 그릇된 인식이 깊게 자리 잡은 게 가장 큰 문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더 깊이 들여다보면, 좋은 시설은 무조건 자기 지역으로 끌어오려는 핌비(PIMFY) 심리를 무한 증폭시키면서, 동시에 혐오시설을 끝까지 반대하는 님비(NIMBY) 여론에 편승해온 정치꾼들의 선동정치가 미친 악영향이 지대하다. 아무리 민심을 업어야만 성공하는 게 정치라고 하더라도, 목민관(牧民官)의 도리를 팽개치고 그릇된 민심을 확대 재생산하는 미개한 정치만큼은 절제돼야 한다. 장사시설은 곧 나의 일이며, 장례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닌 자연스러운 인생의 일부분임을 깨우치는 모범이 그리운 시절이다. 생로병사 모두가 곧 고귀한 인생일진대, 죽음마저 힘겹게 만드는 이 어리석은 민심은 어떻게든 개선돼야 하지 않겠나.
어느새 다시 세모다. 연초 의미심장하게 계획한 것 중에 실천한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올 한 해도 여느 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자책에 잠시 돌아본다. 계획을 세우는 나는 훌륭하다. 그는 부지런하고, 합리적이며, 미래를 믿는다. 그에게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다. 일찍 일어나고, 커피를 줄이며, 미루지 않고, 삶을 정돈한다. 계획하는 나는 절제와 균형, 자기 통제를 신봉하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다. 문제는 실천하는 나다. 그는 계획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알람은 울렸으나 그건 사회의 강요일 뿐이고, 운동을 가야 하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 가기 싫다고 한다. 계획하는 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줄 알지만, 실천하는 나는 현재의 나를 위해 미래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 “내일부터 진짜 하면 되잖아” 이 말은 실천하는 나의 핑계이자 좌우명이다. 두 사람은 모두 내 안에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다. 계획하는 나는 칸트처럼 의무와 원칙, 보편적 도덕을 말한다. 반면 실천하는 나는 에피쿠로스적이다. 쾌락을 선호하고, 고통을 피하며, 당장의 만족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둘은 늘 싸운다. 계획은 명령하고, 실천은 변명한다. 계획은 말한다. “이건 너 자신과의 약속이야.” 실천은 대답한다. “약속도 상황 봐가면서 지켜야지.” 우리는 이 싸움에서 실천하지 못한 자신을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며 자존감이 낮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왜 우리는 계획하는 나를 ‘진짜 나’로 여기고, ‘실천하는 나’를 자책할까? 실천하는 나도 분명 나다. 오히려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함께 버티는 쪽은 후자다. 피곤을 느끼는 쪽도, 귀찮음을 견디는 쪽도, 불확실한 오늘을 살아내는 쪽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흄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보다 습관에 의해 움직인다. 그렇다면 계획하는 나는 이성의 목소리이고, 실천하는 나는 습관의 총합이다. 이성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걷는 건 다리다. 다리가 아프면 아무리 멋진 목적지도 소용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목적지를 너무 자주 바꾸고, 다리는 쉬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계획은 종종 자기기만이 된다. 오늘의 나를 과대평가한 채 내일의 나에게 부채를 넘기는 행위. ‘내일부터’라는 말은 사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사과문이다. 하지만 그 사과는 늘 같은 주소로 배달된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또다시 현재의 내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에게 연체 이자를 물린다. 이 둘을 화해시키는 것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데서 시작된다. 계획은 조금 덜 거창하고, 실천은 조금 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하루 한 페이지, 10분, 딱 하나. 실천하는 나에게는 위대한 비전보다 구체적 타협이 더 설득력 있다. 어쩌면 성숙이란 계획을 완벽히 실천하는 실행력이 아니라, 이를 수정해도 자책하지 않는 너그러움일 것이다. 우리는 둘 이상의 나로 이루어진 존재다. 계획하는 나와 실천하는 나, 이상을 바라보는 나와 현실을 사는 나. 이들이 완전히 일치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가끔은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는 있다. 오늘도 나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내일도 다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괜찮다. 둘이 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니까. 그 자리에서 비로소 삶은 계획이 아니라 조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있다. 목이 타고 외롭고 두려운 가운데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기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길 역시 알 수 없는 운명을 향해 암흑 속을 더듬어 걸어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면서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번민하기도 한다. 또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등불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아마도 그 등불의 존재가 다름 아닌 종교일 것이다. 그러면 종교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종교(宗敎)의 한자 의미는 ‘으뜸 되는 가르침’, ‘근본적인 교훈’이라고 풀이된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근본적인 문제, 즉 현실 이상의 영원한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한편, 종교(Religion)의 영어 어원은 ‘다시 묶는다’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엇을 다시 묶느냐면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 묶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래 묶여 있다가 끊어진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묶어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종교가 있었다. 프랑스의 한 심리학자는 “사람은 종교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사람은 식욕과 번식욕 등 자연적· 생리적인 욕구와 함께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교활동을 통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깊은 유대감을 가지게 되는 한편, 사회생활을 올바르게 영위해 나가는 데 필요한 윤리의식도 형성하고 키워 나올 수 있었다. 아울러 종교는 우리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삶의 역경과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 심리적 안정과 위로를 제공하는 역할도 해오고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계기는 참으로 다양하다. 모태신앙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혹은 어떤 특별한 계기로 인해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일반적으로 가족의 종교를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특히 최근에는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은퇴한 남자들이 종교를 찾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층 더 종교에 대한 목마름을 지니고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시간적 여유가 많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현실적인 사유는 죽음의 시간이 점차 가까워지면서 이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사후세계가 존재할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나이가 들어가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층 더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다. 인간이 사후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삶이 변화된다. 보다 진지하게 내 삶을 들여다보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거창한 질문에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상당히 낭만적인 답변이다. 인간사가 시작된 이후 줄곧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해 왔으나 아직껏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영생을 위해 미이라를 만들기도 했고,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발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시기를 조금 늦추는 것은 가능해졌을지언정 영생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해답 찾기를 단념한 인간은 이제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제아무리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라도 죽음이 가까워지면 자연히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이는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은 죽은 뒤 천국으로 가는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천국이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미래세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어떤 사유를 가지고 종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든 그들은 신앙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을 삭이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종교가 가진 그 어떤 힘이 아닐까? 이처럼 종교는 죽음의 공포, 번민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선하게 살아가도록 이끈다. 나 역시 이런저런 계기와 사유로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로서의 본분을 될 수 있는 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평군, 광주시, 구리시, 남양주시, 양평군, 하남시(가나다 순) 등 경기 동북부 6개 시·군의 수변 구역 주민들과 지방정부들은 수십 년간 각종 규제 속에 어려움을 겪어 오고 있다. 북한강 팔당호는 수도권에 생활·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따라서 일정부분 구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수도권 식수원 보호를 이유로 겪어온 개발 제한과 규제는 지역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재산권 행사와 생업에 제약을 받는 등 지역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이에 지방정부와 주민들은 지금까지 관계기관에 건의하는 등 규제를 해소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처럼 북한강 팔당호 수변의 경기 동북부 권역은 중첩규제가 적용, 주민들의 심각한 피해가 반복되고 지역발전이 저해돼 민원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주민들의 기본권 행사를 제한하면서 규제와 희생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적 해결방안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해당 지방정부와 주민들은 새로운 관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양주시가 먼저 나서 구상을 밝혔다. “더 이상 중앙정부의 변화에만 기대할 수 없다”면서 인접 시군이 힘을 합쳐 문제해결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남양주시를 비롯, 가평군, 광주시, 구리시, 양평군, 하남시 등 6개 시·군이 협력해 가칭 ‘경기 동북부 친환경 수변관광벨트 조성’(이하 수변관광벨트 조성)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이 구상은 북한강과 팔당호를 중심으로 지역 관광자원과 정책을 연계하자는 것이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언제까지 규제와 희생만으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되었기에 중앙정부의 Top-down 방식 정책 추진과 환경 보전을 위한 규제 및 희생 중심의 제도에 대응하는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고 협력방안에 대한 공동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남양주시의 설명이다. 남양주시가 관련 시·군에 이 사업의 추진 필요성을 설명하자 즉각 공감대가 형성됐다. 각 지방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인문·사회·자연 등 풍부한 지역적 자원과 다양한 정책사업을 연계해 새로운 성장동력 사업을 발굴·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정부 간의 효율적이고 강력한 협력체계를 구축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국가·지역의 상생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에도 적극 공감했다. 그리고 지난 5월 12일 경기 동북부 6개 시·군이 참여한 ‘경기 동북부 친환경 수변 관광 상생 협의체’가 출범했다. 협의체는 공동선언문을 통해 ▲주민의 자주권 회복과 자립적 성장 지원 ▲균형 있는 환경 보전과 지역 발전 추진 ▲특화된 수변 관광인프라 구축을 통한 글로벌 관광거점 조성 ▲중첩규제의 합리적 개선을 통한 자족도시 기반 마련 ▲경계를 초월한 협력적 거버넌스 확대 ▲지속가능한 지역발전 모델 구축 등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했다. 50여 년간 수도권 인구의 식수원 보호를 위해 희생한 만큼, 중앙정부는 주민 삶의 질 향상과 지역 발전을 위해 합리적 수준으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의체는 최근 경기도에 친환경 수변 관광거점 위한 정책 협력과 제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공동건의문을 전달하고 도지사와의 공식 면담도 요청했다.(관련기사: 경기신문 24일자 7면, ‘경기 동북부 6개 시·군, 친환경 수변 관광거점 도에 요청’) 건의문에는 ▲관광권역 형성을 위한 제도적 지원 ▲규제개선 공동 대응 등 친환경 수변 관광거점 조성을 위한 경기도 차원의 다각적 협력과 지원 요청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앞으로 공동 연구와 국가사업 반영을 위한 정부·국회 대상 공동 건의, 공공·민간 협력 거버넌스를 단계적 연대할 계획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도 경기 북부의 ‘특별한 희생’과 ‘특별한 배제’ 문제를 언급한 바 있으므로 ‘합리적 수준의 규제와 개발로 수변의 대전환’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주 뉴욕 방문길에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를 보게 되었다. 이 공연은 우리나라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가 아시아인 최초로 뮤지컬 본고장인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리드 프로듀서를 맡아 기획부터 제작까지 주도한 작품이다. 2024년 3월에 브로드웨이를 시작으로, 올해 4월엔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그리고 지난 8월엔 서울에서도 공연하였다. 겨울밤 찬 공기에 비도 내렸는데, 공연을 보러 온 인파로 극장 안은 오히려 훈훈할 정도였다. 나처럼 여행 중에 극장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근무를 마친 직장인들을 비롯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벼르고 뮤지컬을 보러 온 현지인들이 대부분인 듯했다. 멋지게 차려입고 칵테일 한 잔씩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상기된 표정들이 그렇게 보였다. 공연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주인공 제이 개츠비 역을 맡은 국민 배우 제레미 조던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낌없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위대한 개츠비’가 미국민들에게 주는 감흥은 남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된 건 1925년이다. 당시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산업 생산국이 되어 호황을 누렸지만, 과소비와 부채, 금융 거품 등으로 1930년대의 대공항의 전조가 보이기도 한 때였다. 그때 유행했던 재즈, 스윙 음악은 아메리칸드림의 빛과 그림자를 대비해 주는 듯하다. 내용은 이렇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를 떠나야 했던 개츠비는 오직 그녀를 다시 만나겠다는 신념으로 엄청난 부를 일구고, 웅장한 저택을 마련하고,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다시 만나게 된 데이지는 개츠비와 다시 사랑을 이루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륜과 계급 갈등, 거짓과 위선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남편을 따라 떠나고 만다. 결국 개츠비는 오해와 사고로 총을 맞고 죽음에 이른다. 이런 주인공 개츠비를 미국인들은 위대하다고 부른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 색상은 초록이다. 그 빛은 강 건너 데이지의 집 선착장 불빛으로, 그 빛이 초록이다. 초록빛은 시간 너머의 꿈, 손에 닿지 않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개츠비에게는 사랑의 꿈을 지키는 순수함과 결코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희망 능력’이 있었다. 물질 만연주의의 피폐함과 출신 배경으로 인한 차별이 현실이었던 그 시대에 이런 개츠비의 모습은 빛났으리라. 외로움과 절망 중에도 희망을 찾고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관객이 그때의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부르는 이유이리라.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고등학교 교과 커리큘럼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지도하고 있다. 이 소설이 타임 선정 20세기 영문학 100선에 들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다음 세대도 희망의 미국을 위해 무엇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어느덧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세밑 온정과 같은 따뜻한 소식을 듣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는 엉켜 있는 실타래처럼 어둡고 무거운 소식들만 들려온다. 내년 지방선거도 소급하여 긴장감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런 현실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보게 하는 그런 정치인들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당장 ‘위대한 정치인 누구’라고 불러줄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뉴스나 신문에는 단골처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거리의 시민들에게 “새해에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모습이다. 저마다 건강, 취업, 주거 안정 같은 소망을 말한다. 소중한 질문이지만, 한편으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노력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구조적 장벽에 그 소원이 가로막혀 있다면, 우리는 개인의 다짐 이전에 공동체가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마침 올해 연말,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들이 다시 확인되었다. 최근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청년 삶의 질 2025’ 보고서를 보면 건강, 고용, 주거 등 62개 지표가 보내는 신호가 엄중하다. 지난해 청년 자살률은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열 명 중 세 명은 육체적·정신적 에너지가 소진된 ‘번아웃’ 상태다. 학업이나 취업으로부터 멈춰 선 ‘쉬었음’ 청년도 72만 명으로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많았다. 특히 내년을 준비하며 눈여겨볼 대목은 바라는 미래에 대해 ‘전혀 실현할 수 없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7.6%에 달한다는 점이다. 이는 2022년보다 2.4%p 증가한 수치다.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청년이 늘어난 현실은 단편적인 이유로 설명하기 어렵다. 자산 격차가 삶의 질 불평등으로 고착화되고, 저성장과 기술 변천 속에 양질의 일자리가 감소하며, 실패 시 회복을 돕는 안전망마저 부족한 현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 통제하거나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요인들이 청년들의 삶을 제약하고 있다. 그래서 기대되는 내년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적 변화가 절실하다. 단순히 경제 성장을 통해 기회의 총량을 늘리는 것만으론 부족하며,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의 전환이 요구된다. 아프면 쉴 권리가 보장되는 노동 환경, 인간다운 주거권 확립, 고립된 개인을 연결하는 관계망, 위기로부터 회복을 돕는 사회안전망이 갖춰져야 한다. 이러한 토대가 전제될 때 비로소 개인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이번 보고서 말미에 실린 이슈보고서 ‘청년의 주관적 웰빙과 사회통합 : 시민참여와 포용성을 중심으로’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청년이 미래를 긍정적으로 인식할 때 시민 참여의 가능성이 커지고, 삶의 만족도와 기대 수준이 높을수록 타인을 포용할 확률도 높았다. 이는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말하면, 공동체가 개인의 내일을 기대되게 만들어줄 수 있어야 그 개인 역시 사회의 내일을 위해 힘을 보탤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기대되는 내년을 위해 바뀌어야 할 것은 ‘개인의 다짐’이 아닌 ‘사회의 토대’다. 청년들이 마주한 위기를 개인의 분투로만 치부하는 구조 속에서는 그 어떤 희망적인 전망을 하기 어렵다.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삶의 만족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그 기대감을 동력 삼아 개인들이 공동체의 내일을 함께 일궈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이 2026년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변화다. 이제 우리는 “개인이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가”를 묻기 전에, “공동체가 개인이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카카오와 네이버, KT 등을 상대로 한 폭파 협박에 이어 삼성전자에도 폭파 협박 신고가 접수되는 등 일부의 극단정서가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대개 순간적인 분노나 객기·장난으로 판명 나지만, 대응에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극히 일부라고 해도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이 같은 폭력성 확산은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 범법자들에 대한 엄벌체계 강화는 물론 대중정서 순화를 위한 유효한 프로그램 작동이 시급하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18일 오전 10시 50분쯤 112에 “KT 분당 사옥에 사제 폭탄 40개를 설치했다”는 내용의 협박 문자가 발견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협박 글은 자신을 대구 지역의 한 고등학교 자퇴생이라고 밝힌 인물이 지난 17일 오후 8시 20분쯤 KT ‘온라인 간편 가입 신청’ 과정에서 남긴 것으로 파악됐다. KT는 하루 뒤인 18일 오전에야 이를 인지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해당 사건을 명의도용에 따른 협박 범죄로 보고, 실제 위험성은 낮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현장 수색은 진행하지 않고, KT 측에 자체 경비 강화와 함께 순찰을 늘리도록 요청했다. 앞서 지난 15일에도 같은 인물 명의로 카카오 고객센터 게시판에 판교 아지트 건물에 사제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협박 글이 게시됐으며, 회사 고위 관계자를 특정해 사제 총기로 살해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확인 결과, 해당 명의로 지난달 9일과 이달 9일에도 유사한 폭파 및 살해 협박 신고가 접수됐으며, 이 역시 대구남부경찰서가 명의도용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를 상대로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8월 5일에는 서울 중구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협박 글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현장 출동한 경찰이 주변을 통제하는 등 긴박한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달 27일 오전에는 서울성동경찰서 관내 중학교 2곳에 수제 폭탄을 설치했다는 내용의 발신자 미상의 팩스 신고가 접수돼 한바탕 법석을 빚었다. 또 서울종로경찰서도 관내 중학교 1곳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에 현장으로 출동했다. 학교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학생들을 귀가 조처하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폭발물·테러 등 허위 신고로 인한 경찰 출동은 지난 2022년 4235건에서 지난해 5432건으로 약 28.3% 증가했다. 올해도 지난 7월 말 기준 2933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놀라운 것은 공연장 폭파, 황산 테러, 백화점 폭발물 설치 통보 등 잇따르는 허위 테러 협박을 저질러 ‘공중협박죄’로 검거된 이들 중 절반이 20~30대라는 사실이다. 공중협박죄가 적용된 사건은 법이 시행된 올해 3월 18일부터 지난 7월 말까지 모두 72건으로 집계됐다. 경찰은 이 사건들로 48명을 검거했는데 이들 중 20대가 16명으로 가장 많았고, 30대가 8명이었다. 20~30대가 전체 검거 인원의 50%를 차지했다. 이런 범죄는 인간관계·사회생활에서 자존감이 낮은 일부 20~30대가 익숙한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불만을 표출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이상 동기 범죄가 급증하는 상황 속에서 ‘모방성’이 강하다. 유사 범죄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국의 경우처럼 일벌백계(一罰百戒)의 강력한 상징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다. 독일에서는 지난 2003년 뒤셀도르프공항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허위 신고를 한 여성에게 20만 7000유로(약 3억 3600만 원)의 배상금을 물렸다. 미국에서도 지난 2022년 회사 건물 폭파 장난 전화를 건 남성이 45만 6000달러(약 6억 3800만 원) 규모의 배상금 폭탄을 맞았다.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애먼 개구리가 맞아 죽는 어이없는 불행이 일상이 되는 사회를 우려한다.
청계천을 복개해 도로로 만드는 공사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시작됐지만 미완으로 끝난 채 광복을 맞이했다. 1958년 6월에 재개됐고, 도성 안의 구간이 1960년 4월에 끝나면서 원행을묘 백리길의 행차가 건넜던 광통교도 묻혔다. 40여 년 후인 2003년 7월에 이명박 서울시장의 주도로 청계천의 복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2005년 10월에 완료하면서 광통교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많은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서쪽 150m 지점으로 옮겨 복원했다. 복원된 광통교의 길이가 지금의 청계천 폭보다 짧다. 청계천이 옛날보다 넓게 복원됐기 때문이다. 광통교의 밑으로는 청계천의 맑은 물이 사시사철 일정하게 흐르는데, 그 양이 생각보다 많다. 한강의 물을 24시간 일정하게 퍼 올려 흘려보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옛날 청계천의 평상시 물은 지금보다 적었다. 자연 상태의 물을 그대로 유지하려 고집했다면 도심 속 휴식의 공간으로서는 좀 아쉬웠을 것 같다. 지금의 청계천 모습이 좋다. 광통교의 기둥 아래쪽에는 庚辰地平(경진지평), 癸巳更濬(계사갱준), 己巳大濬(기사대준) 세 개의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경진년(1760)에 청계천의 바닥을 평평하게 했다”, “계사년(1773)에 청계천의 바닥을 다시 파냈다”, “기사년(1869)에 청계천의 바닥을 크게 파냈다”란 뜻이다. 글씨를 기둥 위도, 가운데도 아니고 아래에 쓴 이유는 그 글씨가 모래에 묻히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경진년(1760)의 준천(濬川) 작업은 매우 유명하다. 당시로서는 워낙 대공사였기 때문에 영조가 몇 년의 토론과 장고 끝에 내린 결정이며, 단순히 하천의 바닥에 쌓인 모래와 자갈만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방 쌓기,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꾸기, 주변 산의 나무 보호하기 등 모든 측면에 걸친 하천 정비작업이었다. 게다가 본류인 청계천뿐만 아니라 사방의 산과 산줄기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지류까지 정비하는 총체적인 사업이었다. 의무적으로 차출된 서울 거주 백성 15만 명과 임금을 주고 고용한 5만 명 등 연인원 총 20만 명이 동원되고 57일이나 걸려서 공사를 끝냈다. 영조는 공사를 끝낸 후 전 과정을 정리해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는 책을 편찬하고 준천사(濬川司)라는 상설기구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 수도 서울의 도성 안 하천 정비작업은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시행됐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문명권이나 국가의 수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은 현상이다. 산과 산줄기가 저 멀리 물러간 평지, 언덕이나 산 위에 도시의 핵심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는 왜 그랬을까? 조선에서는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의 산과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를 택해 수도 서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큰비가 내릴 때마다 사방의 산과 산줄기의 급경사에서 많은 흙과 모래와 자갈이 쓸려 내려와 모이고, 비가 잦아들면 분지 가운데 평지의 하천에 많은 모래와 자갈이 퇴적됐다. 그렇게 하상이 낮아지면 큰비가 내릴 때마다 범람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때때로 준설을 포함한 하천 정비작업을 해주는 것밖에 없다.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歲月如流水)’고 하더니, 소설가 김용성 선생을 저 먼 나라로 떠나 보낸 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중앙대학교 병원에 누워 급작스럽게 필자를 호출하시기에 그동 안 좋지 않았던 허리 수술 때문이겠거니 했는데, 이미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병상의 선생은 필자의 손을 붙잡고 세 가지 부탁을 했다. 하나는 젊은 날의 역작 ‘한국현대문 학사탐방’을 재출간하는 일, 다른 하나는 그동안 쓴 에세이를 책으로 묶는 일, 그리고 마지막 으로 다른 비평가나 연구자들이 쓴 김용성론을 책으로 출간하는 일이었다. 다른 논의가 필요 없었다. 즉시 서두르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급하게 서둘렀다. 그래도 6개월이 족히 걸렸다. 마지막 교정을 마칠 즈음에 연락을 받았다. 떠나셨다는 비보였다. 혼자 앉아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오래 울었다. 누구보다도 필자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준 선배였다. 내게 남긴 유언이 있었다. 세 권의 책을 진행하여 ‘한국현대문학사탐방’ 복원판과 에세이집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및 작가연구 총서 ‘김용성론’을 간행하고, 그 이듬해 문학의집서울에서 추모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행사를 마치면서 다시 또 서럽게 울었다. 선생과 함께 할 때는 그 세월의 소중함을 모르지 않았던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갓 군문을 나와 대학에 복학한 1980년 봄이었다. 그때 우리 의 은사 황순원 선생을 모시고 ‘작단’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소설가 동인 회합에 따라갔다가, 전상국·김원일·유재용 등 당대의 작가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복을 누렸다. 그 모임의 일원이었던 김용성 선생은 막 불혹의 고개를 넘는 청춘이요 동안인 열혈 전업 작가였다. 선생은 이미 ‘리빠똥’ 시리즈로 이름이 높았던 장편 ‘리빠똥 장군’과 ‘리빠똥 사장’을 출간하고, ‘내일 또 내일’과 ‘홰나무 소리’ 등 다수의 소설을 내놓음으로써 문단에 성명(盛名)이 쟁쟁하던 시기였다. 1982년 선생은 늦깎이 학생으로 대학원에 입학했고 필자는 선생과 같은 교실에 있었다. 선생은 박사를 마치고 곧바로 인하대 교수로 갔다. 하지만 언제나 책상 앞의 일만 바라보는 고리타분한 글쟁이가 아니었다. 당시의 우리 후배들은 선생과 함께 한 자리에서 늘 밥과 술을 얻어먹었다. 그래서 필자는 나중에 세상 위로 날 수 있는 날개가 생기면, 선생을 모신 곳 어디에서나 밥값 술값을 내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은퇴 후에 이 말씀을 전해 들은 선생은 “김 교수, 약속을 지키시오”라고 다짐을 받았고 필자는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모두 꿈에 서도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들이다. 선생의 노년이 조금 한가해지고 2009년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 문을 열었을 때, 선생을 초대 촌장으로 모셨다. 작가로서의 명성과 순후한 인품은 황순원 선생의 행적을 닮아, 촌장으로는 그보다 더 적격의 문인이 없었다.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소중한 것은 그가 훌륭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보낸 시간의 소중함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 다. 이 마당에 사뭇 걱정인 바는, 과연 필자가 후배 중 누군가에게 선생과 같이 선한 영향력 을 남길 수 있겠는가 하는 지난(至難)한 문제다.
경기도의 현 학교폭력 대응 시스템이 ‘교육적 개입’보다는 ‘법적 절차 이행’과 ‘응보적 처벌’ 등에 치중되면서 본연의 교육적 기능이 상실됐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경기도와 경기의회가 개최한 ‘도내 학교폭력 실태와 제도 개선’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최근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그 수법이 다양화되고 있는 학교폭력에 대한 대응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학교가 고작 학폭 사후 대처에 허둥대기만 하는 현실은 하루빨리 혁신돼야 한다. 지난 19일 파주시 다누림 노인복지관 대강당에서 열린 ‘2025 경기도 정책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최근 5년 간 학교폭력의 형태가 사이버폭력·성폭력 등으로 다양해지고 폭력 피해·가해 응답률도 증가하면서 현행 대응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토론회에서 이근영 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은 “학교는 사법기관이 아닌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있다”며 “교사들은 (학교폭력 대응에 있어) 교육적 전문가가 아닌 법적 절차 관리자로 전락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연구위원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학생의 성장을 돕는 회복적 정의 관점을 도입하고 갈등 초기 개입을 의무화하는 ‘교육적 기능 회복’, 교육 전문가 참여 확대, 객관적 사안조사 지침 마련을 통해 당사자 진술권·참여권을 보장하는 ‘절차적 공정성 확보’, 표준화된 매뉴얼 보급, 교육지원청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 등을 추진하는 ‘과정의 투명성 확보’ 등을 제안했다. 이근영 연구위원은 특히 “학교폭력 대응의 목표는 처벌이 아닌 모든 학생의 회복과 성장이어야 한다”며 “공정성과 투명성을 갖춘 교육적 해결 시스템을 통해 무너진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고 학교의 교육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토론에 참여한 김희진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도 “현재 학교폭력 대응 제도는 ‘문제 행동에 처벌’을 가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어 결코 아동권리에 기반한 접근이라 할 수 없고 가해학생은 물론 피해학생의 보호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폭력에 대한 대응은 명확하고 단호해야 하지만 그 필요는 관계된 모든 아동의 차별 없는 보호와 지원이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경기도교육청 김익환 장학사는 “학교 밖 학교폭력 예방과 초등학생 대상 조기 개입, 신체·사이버폭력 대응 강화가 필요한 과제로 남았다”며 “도교육청은 실태조사 및 현장 의견을 바탕으로 제도 보완을 추진해 학생들이 더욱 안전하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25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기도내 학교폭력 피해 유형은 언어폭력(38.9%), 신체폭력(14.8%), 금품갈취(4.9%), 사이버폭력(8.0%) 등으로 나타났다. 또 도내 초중고교 학교폭력 피해·가해·목격 응답률은 초등학생 4.6%, 중학생 2.0%, 고등학생 0.7% 순이다. 학폭 문제는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가 빚어낸 구조적 산물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에 공감한다. 학폭 예방 교육은 형식적인 PPT 수업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담임 교사는 과중한 행정 업무로 학생 개개인을 세심하게 돌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교사가 학생과 충분히 대화할 시간, 정서적 신호를 감지할 여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 학폭의 싹은 조기에 발견될 수 없다는 비관론에 주목해야 한다. 학폭 예방은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온 국가사회가 나서서 자존감이 튼튼한 아이, 타인을 존중하는 아이, 갈등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조정할 수 있는 아이를 길러내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아이들을 경쟁의 도구가 아닌 하나의 주체로 존중하는 사회 환경 구축에 나서야 한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식으로, 그저 드러난 학폭 사건에 대한 대증적 요법에 발이 묶인 학교의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대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