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현대자동차가 생산 현장에 로봇을 투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노조가 강하게 반발하며 저지에 나섰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분노보다 먼저 든 감정은 피로감이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같은 논쟁을 반복해야 하는가. 기술은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했는데, 노동을 둘러싼 언어와 투쟁 방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고 기술은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했는데, 노동계의 투쟁 방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노조의 주장은 익숙하다. 로봇은 일자리를 빼앗고, 자동화는 노동자를 거리로 내몬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산업혁명 역시 대량 실업과 사회적 혼란을 낳았다. 그러나 지금의 자동화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 AI와 로봇은 인간의 팔과 다리를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생산 과정 전체에서 인간의 개입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구호 하나로 이 변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척한다. 냉정하게 말해, 로봇을 막아서 지켜낼 수 있는 일자리는 이미 미래의 일자리가 아니다. 글로벌 경쟁 속에서 자동화를 거부한 기업은 도태되고, 그 결과 남는 것은 보호된 노동이 아니라 사라진 산업이다. 로봇을 거부한다고 노동이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로봇을 받아들이지 못한 구조가 먼저 무너진다. 기술을 막는 투쟁은 결국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노조의 투쟁이 여전히 ‘고용 유지’라는 단일 목표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자동화로 사라지는 일자리는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적 전환의 결과다. 그럼에도 노동은 여전히 생존의 유일한 조건으로 설정되고, 노동에서 밀려난 인간은 곧바로 실패자이자 잉여로 취급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노동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만이 인간의 자격을 증명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봇은 노동자의 적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잠재력을 지닌 존재다. 문제는 로봇이 아니라, 로봇이 만들어낸 부와 효율을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분배하느냐다. 로봇이 생산을 담당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단순한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생산 구조의 소유자이자 기여자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논쟁에는 이 질문이 빠져 있다. AI 시대의 노동 문제는 더 이상 “일자리를 지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이 줄어드는 사회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존엄을 증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로봇을 적으로 삼는 순간 인간은 미래를 거부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저지가 아니라 전환이다. 노동을 지키는 싸움이 아니라, 노동 이후의 인간을 설계하는 싸움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 로봇은 이미 현장에 들어왔다. 남은 선택지는 명확하다. 과거의 노동을 붙잡고 몰락을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여의 질서를 설계하며 인간의 자리를 재정의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로봇과의 싸움은 결국 인간 내부의 싸움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결국 AI와 로봇의 확산은 노동의 위기가 아니라 상상력의 위기다. 우리는 기술의 속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없이도 인간이 존엄할 수 있다는 발상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문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집권 초기 내란 수습과 경제 회복의 기세를 몰아 수도권 집값 난제 정면 돌파를 천명하고 나섰다. “15년 동안 안 먹고 모아야 집 한 채 살 수 있다”는 대통령의 신년 발언은 다주택자 양도세 면제 불가 방침과 맞물리며 여론의 뜨거운 쟁점이 됐다. 정책의 성패를 가를 공론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주체는 단연 언론이다. 하지만 지난 2월 초 우리가 목격한 것은 권력을 감시하고 사실을 검증하는 언론의 모습이 아니라, 특정 이익집단의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복제하는 ‘확성기’의 모습이었다. 발단은 지난 2월 3일 대한상공회의소가 배포한 보도자료였다. 영국의 이민 컨설팅 업체 헨리앤파트너스의 자료를 인용해 ‘한국 고액 자산가 2400명이 상속세 부담 때문에 해외로 유출됐다’는 자극적인 내용을 담았다. 연합뉴스·조선·중앙·동아일보를 비롯한 도하의 수많은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부자 탈출’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냈다. 그것도 취재원이 요청한 2월 3일 12시 "상속세 60% 낼 바에 한국 떠납니다"(이데일리)류의 기사였다. 비판적 검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 ‘기사’들의 실체는 며칠 만에 처참하게 드러났다. 해당 보고서는 이미 2025년부터 영국 조세정의네트워크 등에 의해 방법론적 오류가 지적된 자료였다. SNS 프로필 기반의 추정치일 뿐이었고, 정작 원문에는 상속세가 이민의 원인이라는 언급조차 없었다. 대한상의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데이터를 언론이 최소한의 확인도 없이 공인해준 셈이다. 결국 대통령이 SNS를 통해 “고의적 가짜뉴스”라며 질타하고서야 대한상의는 사과했고 기사들은 수정되거나 삭제됐다. 저널리즘의 바이블로 불리는 <저널리즘의 기본 요소>에서 강조했듯, 저널리즘의 제1 원칙은 ‘검증의 규율’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맥락을 짚어내는 검증은 단순한 정보 전달과 저널리즘을 구분 짓는 유일한 기준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한국 언론은 이 기초적인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재계가 던진 ‘상속세 인하’라는 프레임에 매몰돼, 그것이 공공의 통계인지 사설 기관의 마케팅 자료인지조차 가려내지 못했다. 더 뼈아픈 지점은 언론이 스스로 해야 할 검증을 ‘권력’이 대신했다는 아이러니다. 대통령의 지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사실 확인에 나선 언론의 모습은, 우리 언론이 누구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부동산이나 조세 같은 전문 영역에서 언론이 비판적 질문을 포기하고 보도자료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는 관행은 독자에 대한 기만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언론의 신뢰는 단순히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이해당사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무능이며 방임이다. 보도자료 배포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숫자의 진실성이다. 만약 이번에도 언론이 “바빠서 확인하지 못했다”거나 “상의의 자료라 믿었다”는 변명 뒤에 숨는다면, 다음에도 똑같은 오보의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대한상의와 최태원 회장의 사과로 이번 해프닝은 일단락되는 모양새지만, 언론의 숙제는 그대로다. 스스로가 이해집단의 확성기였음을 통감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의 미래는 없다. 보도자료가 도착했을 때 언론이 택해야 할 것은 ‘전송’ 버튼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여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연대경제(SSE)가 거대한 전환의 파도를 맞이하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정책 기조가 급변하며 사회적경제에 대한 지원 체계가 재편되는 시점이다. 누군가는 위기를 말하지만, 20년 이상 이 현장을 지켜온 전문가의 시각에서 지금은 오히려 보조금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과 ‘연대’라는 본연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진정한 승부처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경기도 안산에서 들려온 ‘2030 안산사회연대경제 비전 선포’ 소식은 경기도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연대경제가 나아가야 할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2026년 1월 21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 모인 200여 명의 사회연대경제 주체들은 ‘안산을 경기도 사회연대경제의 모범도시로 만들자’는 기치 아래 2030년까지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선포했다. 이번 선포식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정책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들을 매우 구체적이고 도전적으로 설정했다는 점에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직화의 규모’다. 안산은 2030년까지 안산시 인구의 15%인 약 10만 명을 사회연대경제 조합원으로 조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사회연대경제가 특정 소수의 활동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을 지탱하는 보편적인 경제 체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의료, 돌봄, 에너지, 먹거리 등 삶의 핵심 영역에서 시민들이 사회연대경제를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정책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시민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둘째는 ‘금융의 자립’이다. 정부 보조금 축소라는 외부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안산은 매년 5천만 원 이상의 자조기금을 조성하여 2030년까지 최소 5억 원의 연대자조기금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는 금융협동조합인 신협 등과 협력하여 사회적 금융의 실질적인 토대를 닦겠다는 선언이다. 스스로 자금을 모으고(자조), 이를 필요한 곳에 융통하는(상호부조) 금융 시스템의 확보야말로 자립적 생태계의 핵심이다. 셋째는 ‘비즈니스 모델의 통합과 확장’이다. 안산은 재생에너지 100MW 달성, 협동조합형 아파트 건설, 통합 돌봄 네트워크 구축 등 굵직한 통합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했다. 특히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공공주차장과 유휴 부지를 활용한 태양광 발전소를 시민협동조합 방식으로 추진하겠다는 대목은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이익공유를 동시에 실현하는 영리한 전략이다. 이러한 안산의 실험은 경기도 내 타 시·군 사회연대경제 조직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제는 개별기업의 생존을 넘어, 상호출자와 조합원 교류를 통한 ‘상호이익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안산시 사회연대경제대학의 재개설 계획처럼 전문 인재와 활동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하는 교육 플랫폼을 갖추는 것도 필수적이다. 전환의 시대, 경기도 사회연대경제 기업들이 부응해야 할 핵심은 ‘관성과의 결별’이다. 공공 보조금에 의존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시민의 필요를 해결하는 강력한 비즈니스 모델로 승부해야 한다. 안산이 선포한 비전처럼 사람과 공동체의 존엄을 최우선에 두면서도, 투명한 정보공개와 민주적 참여를 통해 경영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안산 사회연대경제 주체들이 다짐한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연대와 협동의 정신으로 한 걸음 나아가겠다’는 약속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외침이다. 안산이 쏘아 올린 이 비전이 경기도 전체로 확산되어, 사회연대경제가 지역공동체의 회복력을 높이는 실질적인 대안 체계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이태원 참사 이후 대책으로 마련한 ‘안전예방 핫라인’의 안전점검 신청 건수가 크게 늘고 도민들의 만족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소식이다. 주민들의 안전 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정책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여서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일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안전사고 위험성을 신고하고 지방정부가 이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체계야말로 바람직하다. 정책을 더욱 효율적으로 다듬고 발전시켜갈 가치가 충분하다. 김 지사는 지난 2022년 이태원 참사에 따른 후속 대책으로 같은 해 11월 관련 부서에 안전예방 핫라인 도입을 지시했다. 핫라인이 도입되면서 곧바로 안전점검 신청 건수가 큰 폭으로 증가한 데 이어 2023년 이후에도 연평균 증가율을 20%대 이상 유지하고 있다. 경기도가 밝힌 도민들의 연도별 안전점검 신청 건수를 살펴보면 2022년은 225건, 2023년은 324건, 2024년은 384건, 2025년은 473건이다. ‘안전예방 핫라인’은 활용 증가율이 높아지는 동시에 정책 서비스에 대한 도민들의 만족도 또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에 따르면 안전예방 핫라인 만족도 조사 결과, 응답자(201명) 중 매우 만족이 50%, 만족이 32%, 보통이 15%, 불만족이 3%로 각각 조사됐다. 서비스 만족 응답률을 종합하면 대다수(82%) 도민들이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는 셈이다. 서비스에 불만족한다는 의견의 경우는 대체로 ‘민간시설에 대한 지원 부족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안전예방 핫라인은 경기도민 전용 안전예방 신고 수단으로서 안전에 위험이 되는 요소를 발견하거나 위험을 느끼는 도민 누구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기존 도민안전점검청구제에는 없던 전용전화(핫라인) 방식을 추가하는 등 접근성도 강화됐다. 안전점검 신청은 안전예방 핫라인 전용전화는 물론 누리집·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24시간 연중 가능하다. 지난해 접수된 안전점검 신청 분야 비율은 시설물이 447건, 생활안전이 20건 재난·기타가 6건으로 시설물 관련 접수가 많았다. 작년 8월 안전예방 핫라인으로 도내 한 지자체의 고층건물(시설물) 지붕에서 콘크리트 낙하물이 떨어진다는 신고가 접수돼 즉시 처리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도는 관할 지자체와 협의해 즉각적인 현장점검과 3D영상 공개, 위험 구간 도로 통제, 낙하물 방지망 설치 등 안전조치를 재빨리 진행해 피해를 막았다. 안전점검 신청서가 접수된 이후 현장점검·컨설팅까지의 2025년도의 평균 처리 기간도 전년 4.4일에서 4.2일로 단축됐다. 도는 올해부터 주요 안전조치 권고사항이 이행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사후관리를 강화할 예정이다. 경기도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민간시설에 대한 지원 부족 등’에 대한 불만족 대목을 주목해야 한다. 도민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관리하는 일이 공공시설에 치우치는 건 완전하지 않다. 위험성을 안고 있는 민간시설의 경우, 예산 문제 등으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안전사고 위험성이 제기된다고 해도 신속하게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케이스가 한둘이 아니다. 사고가 발생하여 일어나는 비극성은 공공시설과 민간시설이 따로 있을 턱이 없다. 민간시설이라고 해도 안전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공공이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일단 위험한 시설물이나 행사, 집회 등이 발견됐다고 하면, 행정력과 제도와 예산을 총동원하여 이를 우선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대형 안전사고들을 분석해보면 하나같이 우연을 가장한 ‘안전불감증’이라는 필연적 요인이 존재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크고 작은 안전사고는 ‘예방’보다 더 확실한 해법이 없다. 그야말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가는’ 철두철미한 자세가 필요하다. 경기도의 ‘안전예방 핫라인’이 우리 사회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을 일소하는 최고의 안전 정책으로 발전해 가길 기대한다.
팔란티어의 창업주 피터 틸의 <제로 투 원>(한국경제신문, 2014)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람을 채용하려고 면접을 볼 때 내가 자주 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정말 중요한 진실인데 남들이 당신한테 동의해주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13면) 좋은 대답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X라고 믿지만, 진실은 정반대예요.”(14면) 흔히들 믿고 있는 잘못된 믿음을 찾아낼 수 있다면 반대로 그 뒤에 숨겨진, 통념과는 다른 진실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21면). 잘못된 믿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들 받아들이고 있는 믿음이 있다. 인공지능이 모든 전문직을 대체할 것이고, 법률가들도 대체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벌써부터 이러한 믿음에 따라 변호사 시장의 신규 채용이 줄어들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국내 10대 로펌의 신입 변호사 채용 인원이 작년에 비해 23.3% 감소했는데, AI 확산의 영향이라고 한다. 미국 노동통계국장도 “앞으로 법조계로는 절대 진로를 정하면 안 된다”, “로펌들은 인공지능에 리서치를 시키면 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해럴드경제, 문과 전문직 ‘사망 선고’ 나왔다... “법조계 진로 절대 안돼”, 2026. 1. 6.자 기사). 변호사 시험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후배들을 향해 선배들은 “자리가 없다”는 “걱정”부터 해 주느라 호들갑이다. 요즘은 모두가 서로를 향해 “너의 노동력은 대체 가능하고 무가치하다”고 말하느라 바빠 보인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해 줄 것이므로 이제 사람은 뽑을 필요가 없다.” 법조계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은 법률가도 대체할 것이고, 법률가가 필요 없을 것이다.”, “주니어부터 필요 없어진다.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법률가 없이 인공지능만으로 법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법률가의 일은 줄어들 것이다. 법률가도 줄여야 한다.” 이런 믿음들은 잘못된 믿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통념이 되어 가고 있는 믿음이다. 이런 시대에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법률가들이 그들의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있으며, 인공지능 시대이기에 법률가들이 할 일이 더 많아질 수 있고 법률가들이 더 많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통념과는 다른 생각이다. 정작 팔란티어의 창업주는 2014년에 이렇게 썼다: 어느 쪽도 더 뛰어난 컴퓨터가 반드시 인간 노동자를 대체할 것이라는 그 전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전제다. 컴퓨터는 인간의 보완물이지, 대체물이 아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가장 가치 있는 기업을 세울 기업가들은 인간을 한물간 폐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키워줄 방법을 찾는 사람일 것이다(186면). 분별력을 가진 인간이 수십 년 후에 훨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가능성도 아직 남아 있다. 컴퓨터는 단순히 인간이 이미 하고 있는 일만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199면).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법률가들을 한물간 폐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키워줄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이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릴 수 있음은 행운입니다. 기다림의 반대편에는 조급함이 있고, 체념이 있고, 재촉이 있습니다. 얼핏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조건에 따라 기다림의 반대편에 서는 건 제각각입니다. 기다림이 시간을 의미할 때, 반대편에 서는 건 조급함입니다. 기다림이 희망을 품은 상태라면 체념은 절망에 짓눌린 상태이고, 기다림이 배려로 쓰일 때 코웃음을 날리는 건 재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불행이기보다 다행에 가깝습니다. 다행이기로는 기다릴 수 있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봄을 기다릴 수 있음은 겨울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당신도 나처럼, 그늘진 시간을 뒤로 하고 온기가 머무는 계절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와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일정표에는 모든 날, 모든 순간이 기다림이라는 두근거림으로 빼곡할 테니까요. 올겨울은 유난히 춥습니다. 그래서겠지요. 겨울과 작별하려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그들에게 겨울은 꽁꽁 얼어붙은 땅과 하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전쟁과 기아는 계절과 상관없는 겨울입니다. 그 겨울이 지구별 곳곳에 눈물 폭탄을 투하하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와 우즈베키스탄은 벌써 몇 해째 겨울입니다. 봄은 없고 겨울만 연속인 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겨울은 공습경보와 굶주림의 다른 이름이라서, 봄은 태어나기도 전에 영양실조로 쓰러집니다. 오지 않는 봄은 우리가 사는 땅에도 엄연합니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봄은 전쟁과 기아의 계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지 않는 봄은 조급함과 체념과 재촉을 지나, 결국 도피로 모습을 바꿉니다. 기다림으로부터의 도피는 삶으로부터의 도피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완전한 결별을 위해 한강 다리 난간에 멈춰서고, 인터넷 사이트에 “내일 죽을 겁니다”라는 글을 올리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춥습니다. 당신과 나라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당신이 외투로 버티는 겨울을 나는 털모자로 견딜 뿐입니다. 당신과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만의 겨울을 버티고 견딥니다. 성적과 취업, 결혼과 육아, 질병과 이별, 고독과 우울이라는 겨울 말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맞서는 용기를 또 다른 겨울에서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버리려고 한강 다리 난간에 멈춰 섰던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를 살린 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소녀였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 앞에서 멈춰 선 소녀의 자전거 바퀴가 죽음의 강을 건너려는 그를 붙들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내일 죽을 겁니다”라고 글을 썼던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만 남은 그의 삶을 연장시킨 건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의 댓글이었습니다. “내일은 내 월급날이야. 같이 맛있는 것 사 먹자.” “모레는 나랑 같이 노래방 가지 않을래?” “글피에 영화 보러 가자. 아바타 개봉했더라.” 그렇게 꼬리를 문 댓글은 한 달 동안의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내게도 신의 형상과 음성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신은 자전거를 탄 소녀의 모습으로 오셔서, 댓글 가득 아기천사와 관세음보살을 남겼습니다. 이 겨울, 당신의 봄은 어디만큼 왔습니까. 당신의 겨울 너머에도 소녀의 자전거가 멈춰 섰으면 좋겠습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과 안전은 공동체 발전의 중요한 두 축이다. 특히 생명과 직결된 안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우선 가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가 K-컬처밸리 아레나 사업의 안전성을 들어 사업 기간을 조정한 점은 아쉽지만 불가피한 상황이기에 긍정 평가한다.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는 지난해 10월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 기획사인 라이브네이션 컨소시엄을 K-컬처밸리 아레나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협상을 진행해 왔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라이브네이션 컨소시엄은 2월 20일 기본 협약을 체결하고, 17% 공정률을 보이고 있는 아레나 구조물을 인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조물의 원형을 유지해서 아레나를 건설하게 돼 있다. 그런데 최근 라이브네이션 측은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하자를 완벽히 차단하고, 국제적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기존 구조물에 대한 정밀 안전 점검을 요구했다. 이에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는 기술적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사업 성공에 필수불가결 하다고 판단하고 라이브네이션 의견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기존 구조물 점검에만 그치지 않고, 흙막이 시설과 지반 등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점검 요소들을 전반적으로 확대했다. 안전 점검 과업의 깊이와 범위가 대폭 확대됨에 따라, 안전 점검 기간은 기존 4개월에서 8개월로 연장됐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위험 요소까지 사전에 확인해, 도민들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기반을 탄탄하게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 합리적 판단이다. 아무리 급하다고 실을 바늘허리에 감아선 바느질을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일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자칫 서두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거나 실패할 수 있는 개연성이 크다. 일에는 차례가 있어, 급함이 있어도 충실한 과정이 긴요하다. 더구나 주민 등 공공의 안전이 좌우되는 공공 건축물의 경우 절차적 원칙과 규정을 무시하면 참담한 재난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숱하게 보아왔던 터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글로벌 위상을 보일 수 있는 아레나 건설을 위해 세계적 기술력을 갖춘 국내 기술자를 참여시켜 국제 기준을 충족하는 정밀 안전 점검을 하길 바란다. 또한 K-컬처밸리의 장기적 가치와 아레나 건설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복합 문화 거점을 조성하고 주민 삶에 기여하기 위해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 라이브네이션은 협상 연장 기간 동안 함께 논의할 주제도 적잖다. 무엇보다 글로벌 공연 수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아레나 사업 범위 확대다. K-컬처의 글로벌 흥행으로 라이브 공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내 대형 국제 공연장인 아레나 부족으로 인해 '코리아 패싱' 현상이 발생하는 등 인프라 확충이 시급한 상황이다. K팝 공연이 음원·음반 매출을 능가하는 핵심 산업이 됐으나, 이를 수용할 3~5만 명 이상 규모의 전용 공연장이 거의 없다. 대형 공연장 확보 실패로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이 아시아 투어에서 한국을 제외하거나, 국내 가수의 공연이 소규모 공연장에서 열리는 현상이 빈번한 현실이다. 라이브네이션과 같은 글로벌 기획사와의 전략적 협의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아레나를 완성하고, 임시공연장을 활용하는 등 단계적인 인프라 확충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전성과 편의성, 다양한 활용성을 두루 갖춘 대형 공연장들이 완공되면 한국은 K-pop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관광 및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21세기는 정보화와 기술 발전을 기반으로 경제와 문화가 융합돼 문화적 가치가 핵심 경쟁력이 되는 ‘문화의 세기’다. 경제의 문화화와 문화의 경제화가 진전되면서 삶의 질 향상, 다양성 존중, 문화 향유권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사리가 이러하기에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의 글로벌 수준 K-컬처밸리 아레나 사업이 주목된다.
미술사는 더 이상 하나의 연속된 서사로 설명되기 어렵다. 지금 우리는 분명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의미와 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미술사 전기(前期)와, 발생과 귀속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미술사 후기(後期) 사이의 경계다. 미술사 전기는 재현, 형식, 개념이라는 질문의 축으로 요약된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왜 예술인가라는 물음이 미술의 방향을 이끌어왔다. 이 시기 예술의 중심은 의미 생산이었고, 작가는 해석 가능한 메시지의 주체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전기의 말미에서 의미의 해체와 상대화를 수행했지만, 질문의 구조 자체를 전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무엇을 말했는가’라는 질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구조가 작품이 되고, 조건이 이동하며, 그 결과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발생하는 작업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미술의 질문은 달라진다.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열어버렸는가, 그리고 그 이후의 결과는 누구에게 귀속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이 미술사 후기가 작동하기 시작한 지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론적 가설이 아니라, 이미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필자는 이 과정을 구조, 조건, 책임이라는 세 단계의 작업을 통해 통과해왔다. ‘지퍼니즘(Zipperism)’은 구조 미학의 실천이다. 열고 닫히는 지퍼 구조를 통해 작품은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결합과 분리, 참여와 비참여가 반복되는 구조 자체를 드러낸다. 관객은 더 이상 해석자가 아니라, 구조를 통과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왜 이 구조를 열었는가라는 선택의 문제다. ‘에머젠티즘(Emergentism)’은 조건 미학의 실천이다. 구조를 고정하지 않고, 환경과 상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도록 조건을 이동시킨다. 작품은 완성된 대상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 발생은 통제되지 않으며 반복되지 않는다. 작가는 결과를 관리하지 않고, 조건을 열어두는 선택만을 감당한다. ‘노 다지(No daji)’ 시리즈는 책임 미학의 실천이다. 관객은 선택할 수 있지만, 무죄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을 유지할 수도 있고, 분리할 수도 있으며, 현실의 이익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선택도 그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작업은 감정이나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책임의 귀속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작동한다. 이 세 작업은 서로 분리된 개별 작업이 아니라 하나의 연쇄다. 구조가 열리고, 조건이 이동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회수되지 않는 과정이다. 따라서 미술사 전기와 후기의 구분은 과잉된 주장이나 개인적 선언이 아니다. 이미 다른 질문이 작동하고 있다는 현실을 최소한의 언어로 명명한 것이다. 전환기는 언제나 지나간 뒤에 설명되지만, 그 징후는 내부에서 먼저 나타난다. 오늘날의 미술은 의미의 경쟁을 넘어, 선택과 발생, 그리고 귀속의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미술사 후기의 현실이다. [ 경기신문 = 최순철 기자 ]
성인이 된다는 것은 말의 무게를 입술이 아닌 종이 위에 얹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흔히 사회생활에서 '신뢰'를 강조하는데, 신뢰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둥은 서류이다. 인간의 기억은 주관적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감정과 구두 약속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갈등이 발생했을 때 시시비비를 가릴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서류는 변하지 않는 객관적 지표이자,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들이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공통분모가 된다. 특히 근로계약에서 서류의 중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근로기준법상 근로계약서 작성과 교부는 사용자의 엄격한 법적 의무다(근로기준법 제17조). 이를 위반할 경우 사용자는 단순히 과태료를 무는 수준을 넘어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라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근로기준법 제114조). 이는 국가가 서류의 힘을 빌려 고용 관계의 투명성을 강제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피고용인이 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불신이나 무례함의 표현이 아니라, 법이 보장하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정당한 절차다. 임금, 근로 시간, 휴일 등 핵심적인 근로 조건들이 서류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 놓일 때 노사 양측은 불필요한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서류는 관계를 불신해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오해로부터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선의는 상황이 악화했을 때 가장 먼저 변질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안일한 태도는 대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결과로 귀결되며, 이는 곧 개인과 관계의 실질적인 손실로 이어진다. 계약서에 적힌 숫자와 문구들은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을 넘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책임의 경계를 설정하는 고도의 전략적 행위다. 따라서 서류를 꼼꼼히 챙기는 태도는 까다로움이 아니라, 자기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전문성과 성숙함의 방증이다. 갈등이 임계점을 넘어 법적 절차에 들어섰을 때, 서류의 위력은 더 절대적이다. 법의 언어는 감정의 호소가 아닌, 오직 증명된 사실과 기록된 문장에만 반응한다. 서류가 없는 상태에서의 싸움은 맨손으로 벽을 치는 것과 같다. 단 한 장의 서류라도 확보해야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점이 마련된다. 확보된 문서는 법정이라는 전장에서 나를 대신해 싸워주는 가장 충직한 대리인이자 방패가 된다. 계약 당시에는 사소해 보였던 쪽지나 메일 한 통이라도, 객관적 정황과 결합하는 순간 상대방의 변명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물증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의 세계에서 서류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공적으로 증명하는 방식이다. 기록되지 않은 약속은 책임질 수 없는 방종에 가깝고, 기록된 약속만이 비로소 권리와 의무로 인정받는다.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자의 힘을 깨달아 왔다. 서류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가장 지혜로운 방어 기제다. 진정한 어른의 언어는 화려한 수사나 감동적인 연설이 아니라, 담백하고 명확하게 적힌 종이 위에 있다. 기록만이 우리의 노동과 진심, 그리고 권익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패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단어 ‘빨리빨리’는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유명사가 되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가 ‘빨리빨리’라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속도와 효율에 진심인 민족인지를 방증한다. 이러한 압축 성장의 에너지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 짙은 그늘을 남겼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 급격한 가족 해체, 그리고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는 우리가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무엇을 놓치고 짓밟아 왔는지를 아프게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 AI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밀려왔다. AI는 인간이 수십 시간에 걸쳐 하던 일을 단 몇 초 만에 처리하며 인간이 추구해 온 속도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이제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거나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은 더 이상 인간만의 경쟁력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속도의 경쟁이 사라지는 자리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지혜를 빌려오고 싶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번역하면 "서둘러 하는 일에는 복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이 오래된 격언은 오히려 혁신적인 삶의 이정표가 된다. 그들에게 ‘복’이란 성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유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얻는 평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탄자니아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방식은 '뽈레뽈레'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스와힐리어로 ‘천천히’를 뜻하는 이 말은 게으름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속도의 강박 대신 여유 속에서 현재를 음미하며 꾸준히 걸어가는 태도를 말한다. 그들의 걸음은 산책하는 이의 그것과 같다. 천천히 걷는 사람은 길가에 핀 이름 없는 들꽃에 멈춰 설 줄 안다. 구름의 무늬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바위에 걸터앉는 여유가 있다. 무엇보다 곁에 있는 이와 눈을 맞추며 안부를 묻고 대화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그것이 바로 ‘뽈레뽈레’ 정신이다. AI가 우리를 노동의 속도에서 해방시켜 준다면, 그로 인해 생긴 시간의 빈자리는 ‘의미 찾기’와 ‘관계 맺기’로 채워져야 한다. 우리 사회의 관계 단절은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보폭을 맞추어 걷는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가족의 지친 표정과 이웃의 슬픔은 오직 여유의 속도에서만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서로의 걸음을 기다려 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서로의 걸음을 기다려 주는 배려 속에서 공동체는 단단해지고 삶은 비로소 깊어진다고 믿는다. ‘공감의 느림’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더 빨리 성과를 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더 깊이 사랑하고 연대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삶의 깊이는 속도가 아니라 그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나누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천천히 가는 길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더 많은 이의 손을 잡을 수 있다. 뽈레뽈레 정신은 우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인다. “천천히 가도 괜찮아. 복은 여유 속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순간 함께하는 사람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