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이름 좋은 책은 옷도 잘 입는다.’ 책 제목이 얼굴의 눈이라면, 표지의 꾸밈은 그 사람 의상과도 같다. 는 생각에 평소 내가 즐겨 써온 문장이다. 좋은 책은 옷도 잘 입는다는 뜻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과도 맥이 통한다. 책 쇼핑을 나갔을 때, 생각지 않았던 책이 손에 잡혀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책 사냥의 쾌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독서인으로서 미소를 머금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생각은 ‘그래 이 책이 내 영혼을 만져주겠지’ 하는 기대감이다. 집으로 돌아와 책장을 넘겨 읽을 때 첫 문장에서 전체를 밀고 나가게 하는 힘이 느껴지는 책이 좋은 책이다. 방송 광고는 20초 전쟁이라고 했다. 20초 안에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순간의 스릴을 강조하는 말이다. 아침햇살이 엷은 안개 같이 숲 속 나무사이로 비단길을 내듯 내리는 아침, 숲의 의자에 앉아 생각에 젖을 때, 내 마음은 고요하고 아늑해진다. ‘너만의 명작을 생각하라’는 은혜의 시간인가 싶어 감사 량이 가슴속으로 차오르기도 한다. 그때 나는 메모를 하며 작은 기쁨 속에 새로운 문장을 구상하면서 한 작품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안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의 길에서 순수한 보람 같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날만큼은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복 짓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다는 넉넉함이다.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는 책을 2003년 홍지서림에서 만났다. 우연히 만나 작가로서 읽지 않으면 안 될 뻔한 책임을 알게 되었다. 사온 책 안표지에는 사인도 하지 않고 넘겨지는 책장이 모아지는 곳에 낙관만 하나 찍어두었다. 저자의 첫 문장이다. ‘나는 왜 이 책을 썼는가, 그리고 당신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로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문장은 ‘어떻게 하면 짧고도 기적적인 삶을 가장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금부터라도 가장 덜 후회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까?’라고 쓰여 있다. 이 책을 대구에서 사업하고 있는 친구 아들에게 선물했다. 그 녀석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제 아버지에게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는 책이 정말 좋은 책이었다.’고 했다면서 친구는 내게 그날 저녁 식사파티를 멋지게 해 주었다. 조금은 늦었지만 이때쯤이면 대학 진학과 인생의 길을 선택할 시즌이다. 그런데 나와 고향이 같은 후배 여인의 아들이 의사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다. ‘작지만 큰 교회’에서 만난 아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봉사활동 그리고 얼굴 드러내지 않으며 실천하는 행동‘ 등의 믿음생활이 깊은 강물 같다는 것을 보고서 그분들 아들에게 줄 선물로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를 선택했다. 공군을 지원 입대한 세온(손자)이가 제대를 하면,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라는 책을 구입해 ‘마음에 드는 사람만 골라 만날 수 없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숲을 이루듯/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는 글을 새겨서 줄 것이다. 고등학생으로서 독서활동에 매달릴 때의 일이다. 1945년 8월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뇌병원 원장으로서 국내 1호 정신병원 설립자 고 최신해(崔臣海)라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의사요 병원 원장이었지만 내가 읽은 그분 수필집이 세 권이다. 의사요 약사요 변호사라고 해서 자기만의 명작을 그리(짓)지 말라는 법 없다. ‘피천득!’ 하면. 수필가로서의 그의 수필 ‘오월’이 금방 떠오른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는 수필이다. 그리고 그분의 ‘인연’이란 수필이 뒤를 잇는다. 그분 아들은 의사였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는 의사인 자기보다 더 유명한 분’이라면서 그도 작가가 되어 글을 썼다. 직업은 직업이고 나의 명작은 명작의 길에 존재 한다. 살다 보면 전공보다 부전공이 훨씬 더 그 사람의 명작이 될 수 있다. 세상의 창을 ‘넓게 그리고 남달리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젊은 영혼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사회적으로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더욱 유머러스하며 자유롭게 나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만의 명작’을 고민하고 있다. 거짓 없이, 그날까지 그렇게 살 것이다.
‘법적 영역’과 ‘인식의 영역’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인식의 영역’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현장을 다수의 국민들은 두 눈으로 확인했었다. 이것이 법적으로 불기소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은 틀린 법적 판단은 아닐 수 있지만, 국민의 ‘인식의 영역’에서는 불기소 처분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역시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지만, 이런 검찰의 판단 역시 국민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바로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이었던 시절 명태균 씨와 통화했던 녹취가 공개됐다는 것인데, 이번 녹취에서 드러난 사안만 놓고 보면, 탄핵 사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아무리 당선인 시절이었다고 해도 당선인의 이런 발언을 ‘좋게 말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대통령은 명태균 씨와의 관계를 경선 이후에는 끊었다고 말했는데, 통화 시점이 대통령 취임 바로 전날인 2022년 5월 9일이었다고 한다면, 국민들은 이를 두고도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통령실은, 명태균 씨와의 관계를 대통령이 “매몰차게 끊었다고 한다. (명 씨가) 경선룰에 간섭하니까 ‘앞으로 나한테도, 집사람한테도 전화하지 마’하고 딱 끊은 것”이라고 전하며, 5월 9일 통화는 오랜만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에 공감할 국민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아직도 이런 국민의 ‘인식 영역’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통령실은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누구를 공천했으면 좋겠다’는 의견 개진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시 인식이 아닌 법적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대통령이 인식의 영역이 아닌 법적 차원의 주장을 반복하면, 국민은 대통령을 점점 더 멀리할 것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11월 1일 발표한 자체 정례 조사(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1005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 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마침내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번 조사에서는 윤 대통령과 명태균 씨 사이의 통화 녹취 파장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녹취 파장이 포함되는 다음번 조사에서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더욱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10% 중반으로 지지율이 하락할 경우에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통령은 상설 특검을 먼저 제시하는 등의 파격 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한, 대통령이 위축되지 않음을 보여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대통령은 국회 시정 연설에도 불참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대통령은 더욱 고립될 것이고,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외면 현상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조기 대선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진영 간의 대립이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다.
중장년층이 장기간 재취업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창업으로 노선을 튼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인생 제2막을 이렇게 시작한 이들 중에는 다행히 과거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흔하다. 회사 눈치 안 보고 모든 일을 소신껏 할 수 있는 창업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안정적인 월수입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중 주말할 것 없이 일해야 할 때가 많다. 일이 곧 삶이며 삶이 곧 일이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웃픈’ 말도 있지 않은가. 중장년층이 자영업을 시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이’ 때문에 취업 문턱을 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취업할 곳이 거의 없다보니 일할 곳을 스스로 마련할 수밖에 없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로 섣불리 창업을 했다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오랜기간 경력이 단절됐다가 재취업에 실패하거나, 동종업계..
국내는 역사전쟁 중이다. 주변 나라와의 전쟁이 아니다. 영화 ‘건국전쟁’으로부터 촉발된 1948년 8월 15일 ‘건국절’ 주장,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하는 궤변(詭辯), 모두 뉴라이트의 주장이다. 그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잘못된 것이다. 1949년 10월 국회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3월 1일을 3.1절, 7월 17일을 제헌절, 8월 15일을 광복절, 10월 3일을 개천절 등으로 정하였다. 당초 이승만 정부는 7월 17일을 ‘헌법공포기념일’로, 8월 15일를 ‘독립기념일’로 제안하였는데 국회가 각각 제헌절과 광복절로 수정하여 의결한 것이다. 잘 된 일이다. 개천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건국기원절’로 경축하던 것을 명칭변경하여 의결한 것이므로 건국절의 뜻을 담고 있다. 이 나라의 반만년 역사를 축소하여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한 신생국으로 만들려는 것은 누구를 위한 발상인가? 8.15는 영토를 되찾은 날이지 독립을 선포한 날이 아니다. 독립선포는 이전으로 소급한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1987년)은 헌법전문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 위에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라고 하고, 제헌헌법(1948년)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라고 하였다. 대한민국 관보 제1호는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기록하였다. 일제시기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은 전문에서 “삼일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여.....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라고 하였고,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임시헌장은 “신인일치로 중외 협응하여 한성에서 기의한 지 30유여 일(有餘日)에 평화적 독립을 ....선포하노라" 라고 하였다. 3.1독립운동으로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해 9월 11일에는 상해임시정부, 한성정부, 노령정부 등을 통합하여 하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동되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을 1948년에 건국한 것으로 하려는 것은 나라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다. 미국은 1776년 독립선언을 발표했지만, 연방정부를 수립한 것은 1789년이다. 그러나 미국은 독립을 선포한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한편 필리핀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자 독립을 선언하고 필리핀공화국을 수립했다. 그후 필리핀은 1946년 미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하였으나 1898년 6월 12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한다. 대한민국의 독립선언일은 1919년 3월 1일이다. 그러므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4월 11일이거나 혹은 제 임시정부를 통합한 9월 11일이 우리의 독립기념일이 되어야 한다. 뉴라이트는 누구를 위하여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려 하는가? 보수는 왜 일제 독립투쟁의 역사를 지키려 하지 않는가? 역사를 파괴하는 것은 스스로 한국인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경기도가 전국 최초로 추진 중인 ‘안전 전세 프로젝트’의 참여 공인중개사를 확대하는 등 전세 피해 구조적 예방을 강화한다. 이 프로젝트는 전세 피해 대책과 관련한 법과 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과 더 효과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각성의 산물이다. ‘전세 사기’는 어떻게든 근절시켜야 할 사악한 범죄다. 경기도의 각별한 노력이 큰 성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근근이 장만한 목돈을 한순간에 앗기고 절망하는 무고한 주민들이 더 나와서는 안 된다. 지난 9월 말까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접수된 전세 보증사고와 전세 피해 지원 센터에 등록된 피해 금액의 합계는 전국적으로 13조7907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경기도는 4조2284억원으로 전국의 30.7%를 차지하고 있다. 무주택자 모두가 품는 ‘내 집 마련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절실하다...
몇 년 전 인상 깊게 봤던 동영상이 있다. 성인이 된 제자가 초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는 내용이었는데 꽤 감동적이었다. 어린 시절 제자는 집안 사정이 어려운 데다가 반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방과 후에 매일 담임 선생님과 루미큐브라는 게임을 하는 거였는데, 선생님과 같이 논다는 사실이 학생의 마음에 안정을 줬다고 했다. 제자는 지금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별 거 아닌 놀이가 학생에게 위안을 준 것이다. 영상을 보면서 나도 학생과 함께 놀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아이들과 같이 논다는 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은데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몇 가지 장점 중에 가장 좋았던 점은 교사가 놀이에 참여하면서 교실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이 없어졌다는 거다. 이것만으로도 함께 놀기를 시도해볼만한 가..
학문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어떻게 세상을 변모시키는가? 조선시대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은 영남 성리학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1501년생)였고 퇴계는 경상좌도를 남명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일생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서로 상대방의 학문을 인정하고 인격을 존중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문(성리학)의 라이벌이었다. 남명이 53세(1553년) 때, 그의 학문을 인정한 퇴계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에 임명된 남명에게 벼슬을 하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에 남명은 자신이 벼슬을 할 만한 덕(德)이 없음을 들어 관직에 나갈 마음이 없음을 전한다. 남명이 단성현감에 임명을 받고 이를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다. “왕대비(王大妃)인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명종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외롭고 어린 고아(孤兒)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라는 내용이다. 명종께서 남명을 처벌하려고 했으나, 조정 신하들의 만류로 남명은 무사하였다. 그렇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올린 강직한 내용의 사직소(辭職疏)는 전국 유림의 마음을 통쾌하게 만들었다. 남명은 당시의 선비들에게 올곧은 선비의 높은 기상(氣象)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한편 퇴계에 관하여 명종실록(1566.2.15)에 보면, “그 성품이 지혜롭고 온유하고… 도학에 전심하고 진리를 체험하고 연구하여 자득(自得)한 바가 많았다.”고 하였다. 그의 졸기(卒記)에도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광조(趙光祖) 이후 학문의 정미(精微)한 부분에서 그와 겨룰 자가 없다”고 하였다. 또 퇴계의 학문을 인정한 남명은 퇴계를 “몸소 상등(上等)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많다”고 언급하고 있다. 퇴계는 정주학(程朱學)과 강학(講學)에 주로 관심을 두었고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남명은 강론(講論) 보다는 체득(體得)과 실천을 중요시하였고, 엄격한 출처관과 척족정치(戚族政治)의 피해와 잘못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그후 경상좌도는 퇴계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신적 본산이 되었으나, 경상우도는 1728년 3월 정희량(鄭希亮)의 난 이후 정치보복에 의하여 벼슬길에 제약을 많이 받았다. 일제 국권침탈기에는 경상좌도에서는 많은 후학들이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독립유공자들이 배출되었다(안동,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경상우도에서는 1919년에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대표적인 유학자 곽종석, 김창숙 등 137명의 서명을 받은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산청, 유림독립기념관). 나라의 어려움을 당해서 구국(救國)의 길에는 좌도 우도의 구별이 없었다. 그뒤 광복이 되자 경상우도 주민들은 재산과 부(富)의 축적에 눈을 돌려 삼성과 효성, LG와 GS 그룹이 탄생하였다. 경상좌도는 학문과 전통을 중시하여 보수적인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처럼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는 경상도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라고 하겠다. 즉 대한민국을 보다 나은 복지사회로 이끌어 가는 두 개의 가장 중요한 핵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에 대한 시각(視角)의 차이는 이처럼 길고 크게 영향을 주어왔다.
시화호는 경기만으로 불리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어장 중 한곳이었다. 오밀조밀한 해안선에 닿은 바다와 갯벌엔 풍부한 물고기와 조개류가 살고 있어 풍어가(豊漁歌)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 1994년, 길이 11.7km의 시화방조제가 들어섰다. 바다를 막으면서 방조제 안쪽은 민물호수가 됐고 방대한 면적의 간척지도 생겼다. 이 간척지는 공업지구, 택지지구로, 농지로 개발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화호 오염이 시작된 것이다. 시화호의 물은 공업용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수질은 급속하게 악화됐다. 갯벌은 썩었고 그곳에 살던 생명체들은 모두 죽었다. 종 다양성이 파괴됐다. ‘죽음의 호수’가 되면서 시화호 오염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환경보전과 개발에 따른 지역사회 갈등도 심화됐다. 결국 1997년 3월 시화방조제 배수갑문이 개방됐고..
언론 위기가 일상화된 현재다. 입법부·행정부·사법부에 이은 제4부로서 이들 3권에 대한 감시 역할이 소홀하다는 비판은 표현과 강도만 달리할 뿐 언제나 들린다. 광고 등을 통한 경제 권력의 직간접적인 통제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는 지적도 잦다. 시민이 필요한 뉴스보다는 언론이 시민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려는 뉴스가 더 많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러한 언론 위기의 일상화는 기업으로서 언론사의 한계를 보여준다. 공적 역할이 강조되는 언론사도 실은 하나의 기업이다. 기업은 영업행위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지속 가능하다. 언론사 역시 일정한 수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수익 창출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업으로서 언론사의 지위는 특별하다.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사익을 추구해야 한다. 대부분 자본주의 기업에서 공익..
푸른 행성인 지구의 기후는 자연의 영향을 받는다. 태양 주위의 공전 궤도, 태양 활동의 변화, 대기의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의 주원인을 인간의 활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20 리빙플래닛’ 보고서 역시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을 인간의 활동이라고 확인한 바 있다. 1970년부터 2016년 사이에 어류, 조류,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등 척추동물의 개체 수가 68%나 감소했다. 이는 세계자연기금(WWF)이 2년마다 지구의 건강과 인간 활동의 영향에 대해 수행하고 있는 과학적 분석인 ‘살아있는 지구’ 보고서에 실린 것이다. 현재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20세기 초에 비해 약 40% 더 높아졌다. 이러한 증가는 산업 시대가 시작되고 화석 연료가 대량으로 소비된 시기와 일치한다. 산업 부분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