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긴 대표적인 독재자가 히틀러였다. 그는 국민을 무지한 존재로 여겼다. 조종 가능하다고 했다. 또 쉽게 망각하는 존재였다. 반복적이고 간결한 메시지로 선전(프로파간다)하면 조작이 극대화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인간의 존엄성은 안중에 없었다. 사회분열은 관심 밖이었다. 우리 역사에 갑자사화가 있다. 1504년, 연산군 10년이었다.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폐출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찬성했던 사람들에 대한 처벌과 복수가 이 사화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사사된 사건은 22년이 지난 일로 사화의 직접 원인이 아니었다. 근저에는 자신의 절대왕정 구축에 걸림돌이었던 사간헌과 사헌부 등 감찰기관을 무력화하고 깐깐한 비판 세력이었던 선비들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인 지난해 12월 5일 조선일보 주필은 ‘정말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는 제목의 칼럼으로 윤 대통령의 실상을 압축해 고발했다. “스스로 자폭했다”. “이성적이지 않고 극히 감정적이다”. “사려깊지 않고 충동적이다”. “남을 존중하지 않는다” 등 대통령의 자격 상실을 요건을 적나라하게 열거했다. 민주당의 몇 개월 전 계엄령 선포 주장을 괴담으로 비판한 것도 사과했다. 이러던 조선일보가 돌변했다. 지난 3월 5일부터 3일간 보도한 105주년 특집 기사는 기획 의도를 의심케 했다. “2030 세대 ‘우린 86 부모 세대와 달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필두로 갈등을 과할 정도로 부각시켰다. 4050 세대보다 보수 성향 지수가 높고, 계엄·탄핵 시각도 온도차가 뚜렷하다고 보도했다. 반중(反中)의식은 70대 이상보다 강하다고 했다. ‘청년 70%가 비상계엄 선포에 부정적’이라는 조사결과를 보도하면서도 윤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2030 세대 4명만의 인터뷰를 집중보도했다. 이들의 사진을 같은 날 한 신문에 두 번 싣는 파격 편집까지 했다. 최소한의 균형조차 없었다. 결과적으로 2030세대 70% 여론은 없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항목설정도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민주주의가 항상 낫다’. ‘상황에 따라선 독재가 낫다’. ‘민주주의나 독재나 상관 없다’는 항목에 답하도록 했다. ‘독재가 낫다’거나 ‘상관 없다’는 두 항목에 답한 응답자가 20대와 30대가 각각 33%와 36%였다. 전체 평균 27%보다 높게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원인과 해결책 제시는 미흡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비율이 이 정도면 심각한 문제다. 이런 현상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기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2030 세대의 반중(反中)의식을 부각시킨 점도 바람직하지 못했다. ‘강의실과 사회서···내가 볼 혜택, 중국인이 뺏는 느낌’이라고 크게 보도 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혐한, 반한 여론이 일어났을 때를 역지사지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주류 언론은 과도하게 수용자를 계몽하려 들거나 특정 집단만을 부각해 아부성 기사라는 인상을 줘서도 안 된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본 가치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도 해야 한다. 이번 조선일보의 창간 특집 기사는 윤석열 대통령이 환호할 기사로 넘쳤다. 조선일보 보도 태도가 계엄선포 직후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라고 우크라이나를 압박한다. 우크라이나는 아쉬워도 끝낼 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가 열세에 있는 사이 러시아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 필사적이다. 막판 최전방에 북한군을 세웠다. 수천명이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통계가 나왔다. 전우의 시체를 넘으며 싸우는 기술은 날로 늘어 전투력이 높아졌다는 소식이다. 국가는 병사를 전장에 내몰면서 참전 사실마저 부인한다. 그러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포로를 감출 수 없다. 처음 붕대를 감은 북한 군인을 뉴스로 보았을 때 가짜라 생각했다. 북한군인 참전은 사실로 나타났다. 휴전 협상에서 포로는 가장 큰 이슈가 된다. 이슈가 되는 북한군 포로를 놓고 벌써부터 신경전이다. 국가가 참전을 부인하니, 병사에게 국가는 없다. 그렇다고 러시아 군인도 아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병사는 한국을 희망한다. 이들을 국내로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병사는 한국으로 올 수 있을까. 참전을 부인하는 국가는 포로를 송환할 생각은 있는가. 존재조차 인정되지 않는 병사에게 어떤 선택이 있을까. 그들은 귀향할 수 있을까. 병사의 생명에 조금도 관심 없는 권력자가 병사를 전쟁 소모품으로 내몰고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름도 국적도 없이 전쟁에 참여한 병사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기 어렵다. 불법 참전한 병사를 우크라이나에서 어떻게 할지 또한 관심사이다. 우크라이나는 북한 병사를 어떤 방식으로 교환할 것인가. 북한 병사를 최전방에 내몰고 설마 참전 사실마저 부인하면 포로가 된 그들이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병사의 나라가 당신을 버리지 않고 참전을 인정한다면 군인으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군인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진다. 한국전쟁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포로의 귀향 문제는 이슈가 된다. 전쟁은 참혹하다. 보다 참혹한 일은 포로 교환이다. 정치의 연장이 전쟁이라는 말처럼 포로 교환에 정치가 작동한다. 더욱이 이념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포로들을 어떻게 했었는지 아직 과거는 살아 있다. “당시 아버지는 전쟁 포로가 되어 거재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고향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나서라 했다.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선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총으로 모두 쏘아 죽였다. 아버지는 뒷줄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먼저 나선 사람들의 죽음이 있은 뒤 아버지는 포로 교환으로 함북도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살아왔다는 이유로 의심에 눈초리를 받았다. 포로 교환된 사람들은 사상 증명을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이다. 한국전쟁 휴전협정에 서명한지 70년이 지났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 포로가 된 병사의 생사에 권력자는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전장에서 죽은 병사와 살아남은 병사의 귀환을 책임져야 한다. 사상검증 했던 시대는 지났다. 병사는 소모품이 아니다. 병사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라. 살아있음을 부정하지 마시라. 포로의 귀환은 병사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전쟁으로 얻는 이익보다 포로 귀환이 먼저 이슈가 되어야 한다. 살아있음에 당당해지도록.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수원과 용인, 안양에 큰 선물을 줬다. 김 지사가 11일 수원 월드컵경기장 야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회타운 3대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수원월드컵경기장, 용인 플랫폼시티, 안양 인덕원 역세권에 2030년까지 새로운 랜드마크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관련기사:경기신문 12일자 1면, ‘김동연, 더 고른 기회로 삶의 선진국’ 만들 것‘) 김 지사는 우만테크노밸리는 경기 남부의 AI지식산업벨트와 경기 북부까지 이어지는 바이오 벨트를 잇는 거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용인플랫폼시티는 반도체 메카 동탄테크노밸리로 이어지면서 AI와 반도체 산업을 하나의 생태계로 만들고, 안양 인덕원 기회타운은 경기 남부의 테크노밸리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핵심 고리가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특히 서울대농대, 농촌진흥청, 기상청 등 국가 공공기관과 경기교통공사, 경기환경에너지진흥원, 경기도농수산진흥원,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 경기도사회서비스원 등 도 공공기관이 잇따라 이전했고, 앞으로 경기연구원,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경기신용보증재단, 경기주택도시공사, 경기도일자리재단, 경기관광공사,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 경기문화재단 등도 이전을 추진하고 있어 불만이 큰 수원시민들에게 위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공공기관 대거 이전이 공동체를 위한 특별한 희생을 하고 있는 북·동부 지역 주민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 “공정의 가치에 부합하고, 균형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밝혔지만 수원시민들과 해당 기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반발이 크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동연 지사는 매번 빼앗기기만 한다고 생각해오던 수원시민들을 위로하듯 “직장과 집 사이 거리와 출퇴근 시간·비용은 줄고, 여가와 휴식을 즐길 기회”를 늘여 ‘내 삶이 더 나아지는 도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우만 테크노밸리에 대한 이재준 수원시장의 기대감 또한 크다. 우만 테크노밸리를 “환상형 첨단과학 혁신클러스터의 마지막 조각” “주변 역세권 개발 등과 결합해 ‘수원 대전환’을 이끌어가는 한 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역개발 혁신의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만 테크노밸리 사업은 7만㎡ 규모의 수원월드컵경기장 내 유휴부지를 활용해 첨단산업 융복합 혁신 허브를 구축하는 것이다. 김동연 지사의 말처럼 우만 테크노밸리가 들어서는 수원월드컵 경기장 부지 인근은 생활 기반과 교통기반이 잘 갖춰져 있는 곳이다. 인덕원~동탄 복선전철과, 신분당선 광교~호매실 연장선에 들어설 ‘수원월드컵경기장역’과 가까우며 영동고속도로 동수원IC는 차로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아울러 인근엔 광교 테크노밸리, 200개 이상의 바이오 기업, 경기대·아주대, 3개 종합병원 등이 있다. 산·학·연 연계가 잘 이뤄질 것이라는 수원시의 전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만 테크노밸리가 개발되면 1만 개의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경기도의 예상도 과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 더해 기존 월드컵경기장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체육시설을 추가 조성하겠다고 한다. 체육인과 지역주민 모두를 위한 스포츠 타운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만 테크노밸리 사업은 경기도와 수원시, 수원월드컵경기장 관리재단이 함께 추진하는 사업이다. 내년 하반기에 착공, 2030년 12월에 준공할 계획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개발 계획 수립 과정에서 탄소중립을 고려한 건축계획 수립 등을 적용, ‘기후타운’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태양광, 소형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를 갖춰 사용한 에너지의 30%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겠다고 한다. 또 단열과 채광을 활용해 건축물의 에너지 성능을 높여 에너지 소비의 40%를 줄이고 ‘제로 에너지 빌딩’을 목표로 에너지 자립률을 높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탑동이노베이션밸리, R&D사이언스파크, 북수원테크노밸리 등 거점을 연결하는 첨단과학 혁신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수원시와 경기도의 목표가 계획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보험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1%는 가족 간병에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가장 선호하는 간병 형태로 ‘재가서비스’를 선택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년 노인 실태 조사’에서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현재 거주지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하는 노인이 87%를 상회하였다. 내년 3월부터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돌봄통합지원법)이 시행됨에 따라 지역사회에 적합한 돌봄·의료 서비스 모델 및 보건의료와 연계한 통합 돌봄 거버넌스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전반적인 의료·돌봄·복지 수요를 바탕으로 재택의료센터를 확산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의료·요양·돌봄 서비스를 체계적이며 통합적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초고령사회 대응 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정부는 요양시설에 입소하지 않고도 내 집에서 필요한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하고 장기요양 공급 체계 전반에 대한 개편과 제도적 개선을 병행해 가기로 했다. 전국적으로 95곳에 불과한 재택의료센터를 2027년까지 250곳으로 확대함으로써 노인들이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진료받을 수 있도록 돕는 ‘재택의료’를 강화하고, 국민 간병 부담을 줄여나갈 계획이다.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가 팀을 이뤄 환자의 집을 찾아가 건강을 관리하고 지역 복지 자원을 연계해 필요한 돌봄 서비스도 제공한다. 또한, 큰 비용 부담 없이 고령자가 자신이 살던 집에서 의료·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방문진료비 본인부담률을 기존 30%에서 15%로 대폭 낮출 예정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장기요양 수급자가 다양한 서비스를 복합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급자의 80% 가량이 하나의 서비스만 이용하고 있는 현실 속에 통합서비스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노인장기요양보험에 가입된 1~5등급의 수급자에게 필요한 재가 서비스를 한 기관에서 제공하는 '통합 재가서비스'가 이번 달부터 제공된다. 주·야간 보호나 방문간호를 제공하는 기관에서 간호사와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이 방문요양과 목욕, 간호 등 수급자가 원하는 서비스를 통합하여 제공한다. 우선, 주·야간 보호형 103개소와 가정 방문형 87개소 등 총 190개 기관에서 서비스를 시작하고 하반기에 추가 공모를 통해 확대해 갈 계획이다. 경기도는 '간병 걱정 없는 나라'라는 비전을 세우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호자 없이도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맞춤형 방문 의료 및 돌봄 서비스를 도입하여 환자에게 안정적인 회복을, 가족에게는 간병 걱정 없는 일상을, 간병인에겐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간다는 방침이다. 1인당 연 최대 120만 원의 간병비를 지원해 ‘돌봄의 부담을 지역사회가 함께 나누어지고자 한다’는 실행 전략에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 가속화되고 있는 고령화사회에서 대다수의 노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남은 여생을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한다. 중앙정부, 지방정부뿐만 아니라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을 통해 돌봄서비스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회서비스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개개인 삶의 변화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회가 구현되기를 기대한다.
새로운 기술로 등장한 인공지능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우리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기계의 행동은 실제 우리의 행동과 비교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가 세상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5년 전의 일이다. 1950년 수학자 앨런 튜링은 ‘컴퓨팅 기계와 지능’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기계에 지능을 부여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게 바로 ‘튜링 테스트’ 개념이다. 그는 기계가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완벽하게 파악했다. 즉, 어떤 사람이 인간과 대화 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계와 대화 하고 있는지 구별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이즈음 워렌 위버는 기계가 자동으로 텍스트를 번역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냄으로써 인공지능에 의한 번역의 역사를 예고했다. 그로부터 단 5년 만인 1956년, 인공지능은 전 세계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미국의 명문 대학들은 앞 다퉈 인공지능 연구에 들어갔다. 기술 혁명은 점점 더 가속화됐고 많은 전문가는 인공지능이 2000년대에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혁명이 그리 쉽게 오겠는가? 1970년대 초반 ‘AI의 겨울’이 찾아왔다. 값비싼 투자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않자 투자자들은 뚜렷한 결과가 도출되는 프로젝트로 선회하며 인공지능을 포기했다. 인공지능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들이 쏟아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공지능은 1980년대 들어 다시 명성을 찾기 시작했다. 시장 규모는 약 10억 달러(한화 1조 5000억)로 인공지능에 다시 자금을 투자하는 투자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금상첨화로 1997년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IBM이 딥블루를 출시했다. 이 기계는 높이가 2미터, 무게가 700킬로그램이 넘는 슈퍼컴퓨터로, 체스게임에 특화됐다.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세계 체스 챔피언인 가리 카스파로프와 두 번의 경기를 개최했다. 첫 번째는 199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렸고 이때 카스파로프는 6개의 경기 중 4승을 거두어 인간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불과 1년 후인 1997년 뉴욕에서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 기계는 인간을 3.5 대 2.5로 물리쳤다. 이는 우리를 전율케 했다. 다양한 기술적 발전과 혁신으로 인공지능이 진화하며 우리는 사회적 문제를 염려해야 했다. 이는 많은 영화의 중심 주제로 떠올랐고,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매트릭스’가 1999년 개봉됐다. 이후 인터넷이 널리 보급돼 대부분의 가정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의 연결이 가능해 졌고 컴퓨터가 대량 생산되면서 구입도 훨씬 용이해졌다. 물론 컴퓨터의 용량과 기능도 훨씬 우수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10년대부터 딥러닝과 머신러닝이 등장했다. 이는 기계가 작동하기 위해 규칙을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세스이다. 이 사업은 아마존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디지털 거대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이 기업들은 핵심사업을 잊은 채 혈안이 돼 대형 프로젝트에 투자 중이다. 인간의 일상에 전 방위적으로 침투하고 있는 인공지능은 그들에게 분명 매력적인 아이템일 것이다. 그러나 기술을 통해 현재의 환경문제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지 않을까!
생활고 등 다양한 이유로, 가족들을 살해한 후 사망하는 야만적인 가족살인 비극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수원의 한 아파트에서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되는 끔찍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처자식 등 가족은 엄연히 별도의 인격체를 지닌 독립적 생명이다. 도대체 왜 귀한 생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숨지는 비극이 그치지 않는가. 제대로 된 교육과 계몽을 통해서라도 이 그릇된 인식과 몰상식한 사고체계는 하루빨리 세척돼야 한다. 수원중부경찰서에 따르면 10일 오전 11시쯤 수원시 장안구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40대 남성이 숨져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남성의 신원 확인을 통해 이 아파트 주민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후 집 내부를 수색했다. 그 결과 경찰은 안방에서 숨진 남성의 40대 아내와 중학생인 큰아들, 초등학생인 작은 딸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의 목 부위에는 졸림 흔적과 불을 지핀 흔적 등이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유서는 없었다. 경찰은 자영업자인 남성이 지인에게 3억 원가량의 돈을 빌려준 뒤 이를 되돌려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어 왔던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해당 지인에게 여러 차례 “생활이 어려우니, 빌려준 돈을 빨리 갚아달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다만, 이들 가족은 복지지원 대상(기초생활수급)은 아니었다. 경찰은 주민센터 호적등본 등에서 찾아낸 다른 유족과 함께 남성의 신원을 확인한 지 27시간 가량이 지난 10일 오전 11시쯤 해당 집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문을 개방했다.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적마다 이를 ‘가족살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나왔다. 자신의 사망을 염두하고 홀로 남겨질 자녀를 살해하는 범행에 대해 법원은 번번이 ‘자녀살해’라고 지적해왔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살해한 후 사망하는 것은 ‘살인’일 뿐이며, 다른 표현으로 감싸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다.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사망하려는 심리는 이기적인 목적이 아니라 ‘이타적 살해’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 있다. 내가 죽고 나면 자녀가 스스로 개척해야 할 세상이 너무나 참담하기에 질병과 빈곤으로부터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한 결단이라는 분석이다. 혼잡한 세상에 자식을 혼자 놔두고 갈 수 없다는 책임감, 자식을 향한 사랑에서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낫다는 착각에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자식을 개별적 유기체로 존중하는 서양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다른 존재이기에 부모는 사망하더라도 별도로 보장돼야 할 자식의 삶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들은 “부모들이 자녀들은 소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인격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자녀 인생을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생각도 버려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잠시 도와줄 뿐 서로가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부모일수록 난관이 닥쳤을 때 자녀를 위해서라도 삶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갖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어떤 양형 이유’라는 책의 저자인 박주영 부장판사가 한 판결문에서 밝힌 “사건의 원인을 개인적 문제로만 치부해버리는 시각 역시 동의할 수 없다”는 견해에 주목한다. 유사한 사건 발생이 좀처럼 그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우리 국가사회가 국민의 안전한 삶을 온전히 담보하는 ‘비상벨’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죽음’이 떠오를 때, 누구든지 손쉽게 누를 수 있는 ‘비상벨’이 완비된 그런 사회를 구축해내야 할 것이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상담 전화 ☎109 또는 자살예방SNS상담 '마들랜'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고령화 시대를 맞아 집집마다 노환을 비롯한 환자 돌보는 부담이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제안한 간병국가책임제가 긴요한 정책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구소멸 현상이 불러온 급격한 생산연령인구 감소로 2050년에는 약 1.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할 것이라는 추계가 나오는 판국이다. 환자가 발생하면 영락없이 온 가족의 일상이 흔들리는 일은 개선돼야 한다. 간병국가책임제를 조속히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김동연 지사는 간병국가책임제 비전 발표에서 “한 사람이 쓰러지는 순간 가족의 삶까지도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는 비극을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며 ‘모두의 나라, 내 삶의 선진국’을 실현하기 위한 4대 전략을 제시했다. 김 지사가 내놓은 간병국가책임제 전략의 골간은 ‘국민건강보험 의료급여 항목에 간병급여 포함’, ‘재택의료·재가요양 인프라 확충’, ‘365일 주야간 간병시스템 도입’, ‘간병인 처우 개선’ 등이다. 김동연 지사는 우선 간병급여를 국민건강보험 의료급여 항목에 포함하고 간호·간병 통합병동을 대폭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건강보험 누적 적립금 30조 원을 활용해 상급종합병원부터 종합병원까지 전 병동의 간호·간병 통합병동 운영을 허용하고 간호 전문인력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병상을 늘리는 내용이다. 또 간병 취약층을 위해 노인주택 100만 호를 지원하는 한편, 주택 80만 호를 개조해 계단·문턱 등을 없애 노인이 독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반값 ‘공동 간병 지원주택’ 20만 호 이상 확충안도 제시했다. 독거노인이나 노인 부부가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하고 간병인이 365일 24시간 상주해 돌봄을 제공하는 형태다. 응급 버튼, 안전 감지기 등 스마트홈 설치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든 곳에서 나이 들기’가 가능한 재택의료, 재가요양 인프라도 확충한다. 김 지사는 2028년까지 주야간 보호시설을 1000개소까지 늘리는 동시에 365일 운영 확대도 촉구했다. 노인장기요양 수급자의 단기 보호 이용 일수를 현행 9일에서 20일로 늘리는 내용도 담았다. 그러면서 ‘돌봄 노인 24시간 응급 의료 핫라인’, ‘재택의료 네트워크’, ‘스마트 간병 시스템’을 통해 간병 부담을 줄이는 구상도 내놨다. 마지막으로 돌봄 종사자 전문성 제고·개인 역량 편차 해소를 위해 국가가 돌봄 종사자 양성·관리를 주도하는 내용을 담아 간병인 임금과 처우 개선을 촉구했다. 특히 AI 기반 실시간 원격모니터링을 강화해 야간 간병 부담을 줄여 지속가능한 간병 체계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동연 지사 취임 이래 경기도는 각종 복지정책을 확대해왔다. 경기도가 시행하고 있는 간병 SOS 프로젝트는 65세 이상 저소득층 노인에게 횟수 제한 없이 연간 최대 120만 원의 간병비를 지원하는 제도로서 도내 15개 시군이 참여하고 있다. 김 지사는 앞서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일곱 번째 나라 랩(Lab)·포럼 사의재 주최 공동심포지엄’에서 여·야, 진보·보수, 노사가 ‘통 크게 주고받는 빅딜(big deal)’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이날 김 지사는 해법에 ‘간병국가책임제 도입’을 포함했다. 간병국가책임제는 이미 온 국민의 여망이 담긴 정책 방향이다. 지난 2023년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은 응답자의 96%가 간병비가 ‘부담스럽다’고 답했고, 응답자의 무려 57.6%가 간병국가책임제에 대해 찬성했다. 간병국가책임제는 이제 선택과목이 아니다. 국가 예산 우선순위를 조정해서라도 방안을 찾는 게 맞다. 생산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해야 할 젊은이들의 발목을 잡는 부담들은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덜어주는 게 옳다. 국민이 더 안락한 나라를 만드는 게 정부의 존재 이유라는 대전제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발상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에서 위험한 것은 확신이다. 확신은 연대와 포용의 적이다. 영화 ’콘클라베’에 나오는 이 대사는 지금의 우리사회에 있어 진실로 귀담아들어야 할 경구이다. 이 말을 조금 더 확장하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그릇된’ 확신이라는 말이 된다. 한국의 선관위를 중국과 북한의 해커들이 조종하고 있다는 음모론, 대한민국에 현재 반국가세력, 종북 빨갱이들이 판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등이 그것이다. 얼마나 위험한지는 지난 서부지법 난동 사태에서 확인한 바 있다. 폭동을 일으킨 주범 젊은이들에게 정신교육으로 ‘콘클라베’를 감상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영국의 대(大)감독 스탠리 큐브릭(1928~1998)은 자신의 1971년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청년 알렉스(말콤 맥도웰)에게 루도비코라는 갱생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사지를 의자에 묶어 놓고 눈을 감지 못하도록 눈꺼풀에 장치를 해놓은 채 역사 영화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일종의 세뇌이다. 한국에서 요즘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극우 파시스트들을 보면 이렇게라도 강제적으로 의식을 개조하고 싶게 만든다. 극단은 극단을 낳는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은 상상도 해선 안 된다. 하루빨리 사회가 정상화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 지금의 한국이 1918년에서 1933년까지 꽃피웠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를 닮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일이다.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는 늙고 무능한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수상이 됐고 그가 죽자마자 총통 자리를 거머쥔다. 히틀러의 선동 정치는 극단적 민족주의, 반마르크스주의, 반유대주의에 기초했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 중심의 민족주의, 반국가세력을 일소해야 한다는 新반공주의, 반유대주의에 버금가는 반중주의에 모아진다. 히틀러는 뮌헨의 한 비어 홀에서 쿠데타를 도모했으나 실패한 후 잠시 투옥됐다가 석방됐으며 이후엔 쿠테타 대신 군중 선동정치를 강화하고 나치당을 전국에 확대했다. 동시에 당 내부의 명령체계를 강제하면서 독재자의 위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윤석열도 투옥됐다가 석방됐다. 히틀러의 우중을 이용한 선동정치는 그에게 총선에서 1130만 표라는 공고한 위상을 점하게 했다. 히틀러는 군사력이 아니라 우민들의 표로 집권한 것이다. 그건 윤석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한국 상황을 바이마르 시대의 몰락과 지나치게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 역사를 통틀어 독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했던 공화국으로 그 이상이 실현되기는커녕 역사의 최암흑기를 여는 데 일조했다. 바이마르 시대에 나왔던 예술품, 예술가들은 아직까지도 칭송 일변도이다. 건축학교 바우하우스를 만든 발터 그로피우스가 이때 사람이며 연극이론가 베르톨트 브레이트, 작가 토마스, 만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막스 라인하르트 등이 모두 이 시대에 활동했던 아티스트들이다. 마치 지금의 한국에서 한강 작가와 박찬욱, 홍상수, 봉준호 같은 영화감독 그리고 로제와 BTS, 블랙핑크 같은 세계적 가수들처럼. 역사는 종종 반복된다.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잘 들여다 보고 배우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바로 그게 부족하다. 그 점이 걱정이다.
가까운 이웃부터 낯선 이까지, 우리는 타인의 선택과 행동을 관찰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공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들에게 쏠리는 관심은 유독 강렬하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 사소한 언행까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회적 담론으로 변한다. 문제는 이 관심이 일정한 선을 넘어설 때다. 호기심이 감시와 통제의 형태로 변질될 때, 타인의 삶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대중이 공유하는 ‘공적 자산’처럼 취급된다. 그 원인을 찾으려면 인간 심리의 깊은 층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타인을 거울삼아 자신을 평가한다. 비교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열등감이나 질투로 이어진다. 공인의 삶이 더욱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구나 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동경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흔들릴 때 은밀한 안도감을 느낀다. 성공한 이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자신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특히 공인의 삶은 대중이 공유하는 ‘공적 서사’가 되기에, 성취는 찬양의 대상이 되며 실수는 철저한 반면교사로 소비된다. 관심이 감시로 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감정의 투영이다. 우리는 단순히 공인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특정 인물을 응원하며 희망을 투영하고, 그들의 서사가 기대를 충족시킬 때 대리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기대와 어긋나는 순간 실망은 분노로 이어진다.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 그들이 살아가길 원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비난을 가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이 감정의 배출구가 된다. 이는 일상의 불만과 좌절이 해소되지 않을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실의 문제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렵지만, 공인의 논란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특정 인물에게 비난이 집중될 때, 대중은 하나의 분명한 원인을 발견한 듯한 안도감을 느낀다. 정치적 무력감, 경제적 불안, 개인적 결핍이 쌓일수록 공인을 향한 감정적 투사는 더욱 거세진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삶은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못하고, 대중이 논평하고 개입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공적인 위치에 있다고 해서 개인의 삶이 제한 없이 소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선택과 실수가 집단적 비난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현상을 정당한 공론이라 보기도 어렵다. 타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개입은 결국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남의 삶을 소비하는 시간만큼, 자기 삶의 균형을 잃는다. 그리고 누군가를 지나치게 간섭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 잣대가 언젠가는 자신을 향할 것이다. 오늘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는 문화를 방관한다면, 내일 타인의 평가 속에 나의 삶이 놓일 수도 있다. 관심의 방향을 점검해야 한다. 공적 비판과 사적 간섭을 혼동하지 않고, 타인의 삶을 감정 해소의 도구로 삼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소비하는 사회는 결국 자기 삶을 중심에 두지 못하는 개인들로 구성된다. 우리 사회가 누구에게, 무엇에 관심을 쏟고 있는지 질문하고 점검해야 할 때다. 타인의 삶뿐만 아니라 나의 삶 또한 지키고 잘 꾸리기 위해서.
지난 연휴에 나는 네일 아트샵에 갔다. 아직도 네일 아트를 여성의 사치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 지나치게 긴 손톱을 붙여서 일상생활조차 불편하게 하는 네일 아트를 항상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제 나는 한 시간 동안 손톱관리를 받는 동안 손톱의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손톱은 우리 신체 중 최말단에 있어서 등한히 여기기 쉽다. 그러나 손톱의 색상, 모양, 강도 등은 우리 몸의 건강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손톱이 잘 부러지거나 갈라지면 노화나 영양결핍을, 흰 반점이 생기면 손톱 무좀을 의심할 수 있다. 검은색 세로 줄무늬가 생기면 피부암의 가능성이 있고, 둥글게 파임이 보이면 철분 부족이나 심장병 또는 갑상선 기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가로로 파임이 생기면 당뇨병이나 순환기 질환이 의심된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손톱이 닳도록 일을 하시느라 번번히 손톱을 돌아보지 못하며 살았지만, 손톱도 명색이 톱 중의 하나라서 때로는 앙큼한 자존심을 세울 줄 안다. 딱히 위협하려는 요량은 아니지만 얕보았다가는 날카로운 톱에 할퀴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즉, 손톱의 존재는 우리 신체의 말단에서 우리의 신체를 보호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톱이 없다면 우리가 능숙하게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도 하기 어려워진다.. 손톱이 닳도록 험하게 살아도 목숨만 부지한다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느리게 보이지 않게 자라는 손톱들도 주인공이 되는 날이 한달에 하루쯤 있어준다면 날카로운 슬픔도 오색영롱한 기쁨으로 감싸고 “너 참 예쁘구나” 하고 칭찬받는 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여자들이 미용실에서 헤어 스타일링을 할 때보다 네일 아트를 할 때 더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헤어 스타일링은 거울을 보기 전에는 자신에게 보이지 않지만 네일 아트는 언제나 스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도 네일 아트를 받아보지 않은 어머니나 할머니도 모시고 가서 해드리면 어색해하시면서 기뻐하실 모습이 상상이 되어 미소가 지어진다. 예쁜 색과 무늬야 다시 남루해지겠지만 얼마간 예뻐진 자신의 손톱을 보며 힐링이 된다면 무대에서 내려오는 배우들처럼 우리도 다음 무대를 차분히 준비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서로 얽혀사는 우리 사회도 그렇다. 두뇌 역할을 하는 사람, 심장 역할을 하는 사람처럼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손톱이나 발톱 역할을 하는 사람처럼 사소해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이 사회와 세계가 커다란 하나의 유기공동체라고 여긴다면 허투로 볼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한시되기 쉬운 손톱 역할을 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네일 아트는 무엇일까? 그 중요함을 인식한다면 스스로 두뇌나 심장이라고 생각하는, 또는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은 손톱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 오늘은 내 손톱이 예뻐서 기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