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수 대 처리수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방류 계획과 관련된 뉴스가 연일 보도 되고 있다. 일본이 오염수 방류 계획을 실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의 시찰단이 방일 길에 올랐다. 그저 견학 수준이어서 들러리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도 있고, 오염수를 처리하는 과정에 대해 꼼꼼히 살펴볼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어서 시찰단이 어떤 역할을 할지 국민적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처리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우리 언론들은 ‘오염수’로 부르고 있다. 오염수일까, 처리수일까. ‘처리수’ 명명의 효과 언어는 프레임(frame)이다. 프레임 안에서 사고하도록 하는 영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일본에서는 다핵종제거설비(ALPS)를 통해 오염수에서 방사성 물질을 기술적으로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이를 통해 방사성 물질을 제거했으므로 처리수라고 사용한다. ALPS를 통해 처리가 되었으므로 이후의 오염수 농도가 낮아져 처리수로 부른다는 주장이다. ‘처리수’로 명명함으로써 과학적으로 처리되어 바다로 방류하더라도 듣는 청중에게는 안전하다고 인식되는 심리적 효과가 있다. ‘처리수’와 ‘오염수’에는 과학이 있고, 국제 정치가 작동하며, 이웃 국가 국민들의 심리가 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이름을 붙여 부른다. 명명(命名)이다. 사회문화적 변화 가운데 언어는 그 인식을 보여준다. 영어권에서 의장을 의미하는 어휘로 남성적 의미가 강한 chairman을 보다 중립적인 chairperson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은 남녀 성평등이라는 사회문화적 인식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종, 성별(젠더), 계층, 지역, 국제관계 등의 편견을 제거하고 보다 인간다운 언어 사용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80년대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사회 운동이 대두되었다. PC주의는 언어 표현이나 용어 사용에 있어서 편견과 차별을 배제하자는 의미에서 평등과 인권주의라고 하겠다. 정치적 올바름의 조건 과학은 객관성을 지닌다. 공개적으로 검증 가능해야 한다. 현재의 이론은 후속 연구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수정된다. 사회과학에서 연구하는 기본 철학이다. 일방적으로 ‘처리수’라고 명명한다고 해서 ‘오염수’가 ‘처리수’가 되지는 않는다. 국제기구와 전문 과학자들이 중립적으로 독립적으로 공개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결과로 확인 가능할 때 ‘처리수’가 될 수 있다. 방류가 현실화된다면 생선회나 수산물은 이제 못 먹게 되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불안이 고조된 가운데, 일본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설령 과학적으로 오염수가 처리수가 된다고 해서 불안감이 바로 해소되는가. 국민 심리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안전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과학의 장기적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여행 제약이 풀리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각 지방정부들이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경기도 역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관광자원 개발과 홍보, 해외마케팅과 팸투어 등에 나섰다. 지난 22일에도 도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일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JTB, HIS, 라쿠텐트래블 등 일본 주요 여행사 관계자를 초청해 수원에서 팸투어(홍보 목적 답사)를 실시했다. 참가자들은 수원화성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그해 우리는’ 촬영지인 수원 장안공원 일대, 지동벽화마을, 행궁동 카페거리 등을 방문하고 화성어차 탑승, 한복 착용 등의 체험을 했다고 한다. 도 관계자는 최근 대일관계가 개선되면서 이론 관광객 수가 많아졌다면서 도내 한류관광 콘텐츠를 활용한..
지난 5월 10일은 윤석열 정부 출범 1주년이었다. 언론 지상에 그러한 1년의 성과와 과오를 분석하는 특집 기사들이 넘쳤다. 기사마다 빠지지 않은 것은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심각한 퇴행 상황이었다. 1주년 당일, 보수의 아성이라 불리는 대구에서 터져 나온 시국선언은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총체적 평가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 도시의 25개 시민단체는 이렇게 단언했다. “민생을 파탄시키고, 민주주의를 짓밟고, 평화를 파괴하는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는 투쟁에 모두가 나서야 한다”. 왜 이토록 혹독한 평가가 나올까.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불통(不通)이다. 필수적 대화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취임 1년이 지났는데도 제 1야당 대표와 공식 회담을 갖지 않은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윤석열 대통령 밖에 없다. 서열과 관례 상 하위에 있는 야당 원내 대표 혹은 국회 상임위원장들과 만남은 적극 제안하면서도 정작 당 대표는 제외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당시 야당 총재는 집권 기간 내내 격렬히 충돌했다. 그럼에도 무려 7차례나 공식 회동을 했다. 삼권 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소통과 타협은 대통령의 절대 의무다. 안 하고 싶다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질까. 자기주장만 설파하고 남 의견을 듣기 싫어하는 일방주의 때문이다. 바다 건너 일본 총리와도 공식적으로 2번이나 회담을 가지지 않았는가. 좁쌀 같은 포용력에 대한 비판이 여기에서 나온다. 감정적 대응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정책 협력 대상인 야당을 무시하는 행태가 곧 민주주의 본질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안(不安)이다. 이태원 참사로 대변되는 사회 안전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외교 안보 영역이 불안하다. 2000년대 초반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는 국제사회에서 ‘부시의 푸들’이란 별명을 얻었다. 윤석열 정부의 대외정책은 어떤가. 가히‘미국과 일본의 푸들’로 불러도 과언이 아닌 1년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의 총대를 매고 스스로 한미일 삼각동맹의 첨병이 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갈등이 격화되고 한반도가 급속히 충돌과 균열의 신냉전 국면으로 내몰리는 중이다. 문제는 이러한 편향 외교와 맞바꾸어 일본의 고의적 역사책임 망각과 회피를 대통령이 앞장서서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문제적 발언이 이를 상징한다. 가해자의 논리에 오히려 힘을 보태고, 역사적 피해국가의 수장으로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언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태도는 곧 미래 행동의 예고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어찌 불안하지 않으랴. 셋째는 불신(不信)이다. 4월 말의 워싱턴 국빈 방문에서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정상회담 후 대통령실 핵심 책임자가 미국과 한국이 ‘사실상의 핵공유’를 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자 미국이 바로 그것을 받아서 부인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가관인 것은 이러한 미국의 반박이 나오자 “(핵공유) 용어에 대해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어이없는 견강부회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대통령실의 해명을 믿는다 해도, 이 같은 기괴한 논란이 나라 바깥에만 나가면 터져 나오는 것을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언론과의 관계도 상호불신으로 가득하다. 대통령 후보자 신분으로 참석한 2022년 4월 신문의 날 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언론과의 소통이 국민과의 소통”이라 강조했다. 하지만 1년 동안 그의 실천은 정반대를 향해 달렸다. 비판적 언론에 대해서는 불신을 넘어 적대적 태도까지 취하고 있다.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사건과 관련하여, mbc 기자들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동승 불허가 이를 표상한다. 목하 외교부와 mbc 사이에 소송이 진행 중일 정도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언명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그저 5년 간 행정부 수반으로서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난 1년간 윤석열 정부의 3가지 불(不)이 이끌어낸 재앙적 결과를 생생히 목도하고 있다. 비 선출 검찰권력이 무소불위 핵심 통치 수단으로 등장했다. 노동, 문화, 표현자유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서 저항을 억누르고 비판의식을 위축시키기 위한 광범위한 공격이 본격화되고 있다.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과시적 행정의 커튼 뒤에서 (낡은 레코드판을 돌리는)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인구 소멸이 가속화 중이다. 대중국 수출 격감을 필두로 하는 무역수지 악화와 경기 후퇴의 악몽이 눈앞에 닥쳐왔다. 하지만 지난 1년과 같은 불통, 불안, 불신이 계속되는 한 위기 극복의 기대는 난망(難望)일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를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정권의 패배를 넘어 국민 모두의 패배라는 비극이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이다.
2달쯤 전이었다. 70대 중반의 그녀와 친우분들이 오셨다. 모 종교의 회합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올라오시는데 함께 진료를 받으러 들어왔다고 했다. 잠도 잘 못 자고 변비도 심해서 치료가 필요한데 혼자서 잘 안 가니 같이 치료받으러 오는 거라며 껄껄껄 웃으시는 친우분들이 따뜻했다. 그렇게 치료를 시작한 지 1달 후에는 변비약 없이 대변을 볼 수 있어 기뻐했는데 며칠 전 입맛이 없어서 못 먹었고 그래서인지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보약을 지어달라고 내원하셨다. 음식은 특이사항이 없었는데 식체가 있고 화병 소견을 보였던 분인지라 “신경 많이 쓰신 일이 있었어요?” 여쭈어보니 최근에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고 속상하며 자책했고 그때부터 입맛이 거의 없었다고 하신다. 몸과 마음은 하나와 같기에 마음의 긴장과 억울함은 식욕, 소화, 배변 기능에도 영향을 준다. 그녀에게 자기자비(self-compassion)가 필요했다. 몸과 마음 모두를 위해서 그렇다. 자기자비는 여러 연구에서 치료 효과가 보고되고 있다.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하고 행복감을 증진시키고 면역력을 강화한다. 침 치료를 하면서 그녀에게 “OOO(그녀의 이름)야. 사느라 애썼다. 수고 많다.”고 해주라고 했다. 이름을 부르는 건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두어 보는 방법이다. 수고했다고 하는 건 자신의 성격, 환경, 한계 등 여러 조건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어떠했던 노력 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노고에 대한 인정, 그러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수용을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살면서 나한테 수고했다, 애썼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네요. 예전부터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주라고 하던데” 한다. “맞아요. 어머님. 지금 하시는 것도 자기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이에요.”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불쑥 자신의 결혼생활 이야기를 꺼내신다. 결혼 처음하고 남편에게 많이 놀라고 무서웠다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OOO야 결혼해서 남편에게 적응하고 시댁 식구에게 맞추고 아이들 키우고 사느라 참 많이 애썼다”라고 말해주라 했다. 그러니 “별로 잘한 것도 없는데.” 하신다. “어머님. 철모르던 마음 여린 스무 살에 시집와서 무섭게 느껴지는 남편에게 말 한마디 잘 못 하고 견디고 사셨던 거 아녜요. 아이들 낳고 그 아이들 잘 키우려고 노력하며 사셨잖아요. 애쓰셨잖아요. 그 노력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줘야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니 "그래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살았지." 하신다. “계속 침 맞으면서 수고했다 애썼다. 자신에게 말씀해주시고 침 맞고 계세요.” 하는 처방 혹은 부추김이 있은 얼마 후 “휴지 좀 주세요.” 하신다. 치료실의 커튼을 조용히 닫았다. 커튼 뒤로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소리 없이 하염없이 우는 듯한 기척이 든다. “살면서 이런 말을 해보는 게 처음이네.”하고 몇 번을 되뇌신다. 팍팍한 세상, 자신에게 보내는 격려, 그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경기도가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불법행위 단속기준 통합가이드를 마련했다. 이번 업무지침서는 시군 단속 공무원이 참고하는 관계 법령과 사례 중 애매하거나 해석이 분분하던 내용을 도가 형평성 있게 통일한 것이다. 그린벨트 내 불법행위 단속은 개인의 이해관계가 예민하게 얽혀있는 행정조치여서 그간 형평성 논란이 끊임없었다. 이번 통합가이드 마련이 기존의 민원을 해소하고 공무원들의 업무 효율성 제고에 기여하길 기대한다. 2019년 12월 공식자료에 의한 전국의 그린벨트 지정 면적은 3만8372㎢로서, 전 국토 대비 3.8%다. 이 중 수도권 개발제한구역은 전 그린벨트의 1/3이 넘는 36%에 달한다. 수도권 중 경기도가 점하는 면적 비중은 무려 83%다. 경기도의 그린벨트는 전국 그린벨트의 28.7%로서 1/4을 초과한다. 총 31개 시..
언론은 노동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진보 성향 매체나 노동 전문 매체를 제외하면 노동 관련 기사를 애써 다루려 하지 않는다. 언론사 수익인 광고를 대주는 물주가 기업인 상황에서 노동조합(노조)이나 노동자를 중심에 둔 보도란 예외적 상황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노동쟁의가 일어나야 언론이 보도하니까 노동 관련 보도는 ‘노동문제’ 위주가 될 수밖에 없다. 곪았던 문제가 터진 상황이래도 기업이 언론을 상대로 광고로 거래하고, 취재 응대를 거부하면 그마저도 기사로 접하기가 쉽지 않다. 언론이 노동 주제를 적극 다루지 않으니까 노동을 둘러싼 공론의 힘은 약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분쟁의 경우만 해도 2007년 사태가 시작되었지만 2010년이 돼서야 언론이 조금씩 보도를 냈다. 이전까지만 해도 언론 상당수는 사태를 외면하고 침묵하는 태도를 보였다. 삼성의 최신 설비와 안전한 작업 환경을 부각한 보도가 훨씬 많았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노동자의 백혈병 피해 사실을 주장한 반올림의 목소리는 소외되거나 축소됐다. 그나마 삼성이 사태 해결에 나서겠다는 입장으로 2014년에 전환하자 비로소 노동 건강권에 대한 논의가 증가했고 언론도 덩달아 보도량을 늘리는 모습을 보였다. 노동자의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 안 된 일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통과될 수 있었던 데에 경향신문의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1748번의 죽음의 기록’(2019년)과 같은 심층보도가 한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라는 불명예, 매년 2000명가량 노동자가 사고나 질병으로 숨지는 상황을 모아보니 그 자체가 충격이었다.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선 작업장 자체 안전 문제도 중요하지만, 고용이나 교육, 노조 활동의 보장 등 개선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이처럼 노동 분야가 관심을 덜 받고 의제를 만드는 힘이 취약하니까, 노조 활동을 부정적이고 불편한 그리고 기업의 경영 활동에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많다. 노조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상황에서 폭력적인 시위 방식을 부각하고 불법과 연관하게 한다. 질서를 어지럽히고,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불결하고 불편한 대상으로 노조 자체를 부정적으로 낙인찍는다. 조선일보가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의 분신 사망을 두고 자살 방관을, 월간조선은 사망자가 남긴 유서가 대필이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유가족이나 목격자에게 사실 확인을 제대로 했다면 나오지 않았을 내용이었다. 기자의 추정을 담은 내용이 상당수다. 전국언론노동조합조차 ‘반저널리즘 행위’라고 규정하고 비판했다. 대통령과 장관부터 ‘건폭’(건설 현장 폭력 행위) 운운하며 엄정 대응 분위기를 조성하니, 언론이 갈등을 해결하긴커녕 없던 갈등조차 만들고 싶어진 것인지 묻고 싶다.
우리나라 무역수지 적자가 14개월째다. 상황은 IMF 금융위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보다 안 좋다. 물가상승률 역시 24년 만에 최대치다. 민생 현장엔 소비가 현격히 줄었다. 이구동성이다. 여기에 공공요금은 30% 이상 인상됐다. 증권가는 SG증권발 하한가 ‘주가조작’ 사태 등으로 어수선하다. 은행가엔 부동산 PF에 경고등이 켜져 있다. 미분양 아파트 문제는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대한민국 핵심 산업인 반도체와 2차전지는 미국의 IRA(인플레이션감축법)와 EU의 CRMA(핵심원자재법) 발표로 분투 중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생산시설을 미국과 유럽 현지에 갖춰야 수혜를 받을 수 있단다. 외국에 투자하는 금액만큼 국내 투자는 줄 수밖에 없다. 국내 산업의 발전, 고용과 소비 활성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갈라파고스가 되지 않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투자해 온 우리 기업의 노력이 무색하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치밀한 외교와 정보 전략을 펼치고 있을 때, 과연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난 4월, 윤 대통령은 “2차전지 우위 격차 확실히 뒷받침 하겠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같은 달 검사 출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2차전지 주요종목 조사 착수”를 밝혔다. 주가는 일제히 하락했다. 투자자들은 “불법 공매도와 주가조작이나 신경 쓰라”고 지적했다. 경제의 앞날을 대변이라도 하는 양 증시 하락장은 길어지고 있다. 개미투자자들은 “주가하락은 윤 대통령 리스크” “윤석열 정부는 답이 없다”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이런 와중에 금감원장은 이례적으로 지난 8~12일, 해외 기업설명회(IR)를 다녀왔다. 금융감독기관장이 금융사와 동행해 해외 IR을 다녀온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자기정치를 한다”는 평가가 금융계 안팎의 여론이다. 비전문가의 정치와 행정으로 많은 부분의 영역이 뒤죽박죽이다. 공직자의 언행이 위와 아래가 다르다보니 민간영역은 자기이익 취하기에 바쁘다. 정부는 2차전지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증권사들은 2차전지 공매도 포지션에 중국의 전기차 및 2차전지 ETF 판매에 열심이다.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중국과 적대시하고 있는 반면에 목하, 증권가는 중국투자를 유도하고 있다. 필부가 보기에 우스운 나라꼴이다. 게다가 RE100(재생에너지 확대 캠페인)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우리 기업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현 정부는 CFE(원자력을 포함한 무탄소 에너지 체계) 캠페인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RE100 세계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진 행태다. 캠페인의 성공적 안착을 점치기 어렵다. 총체적인 위기다. 이런 때일수록 국민은 정신 줄을 놓아선 안 된다. 자각해야 한다. 매체를 통한 각종 정보취득의 경우, 필터링을 철저히 해야 한다. 불확실한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경제가 어렵다면 정부는 모든 역량을 경제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속국도, 중국의 속국도 아니어야 한다. 일본과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군사적 동맹관계가 될 수 없다. 외교와 안보, 경제, 모두 국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어려운 때, 정부는 오로지 국민을 위해 국정의제를 새롭게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한 줌 극우세력과 특권층의 나라가 아니다. 시민이면 누구나 부자를 꿈꾸며 부자 될 수 있는, 든든한 나라경제가 펼쳐져야 할 것이다.
경기도 내 인구(내국인+외국인)가 사상 최초로 1400만 명을 돌파했다. 우리나라 전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국민이 경기도에 살고 있다는 얘기다. 때맞춰서 경기도가 저출생 대응을 위한 ‘인구2.0위원회(가칭)’를 만든다는 소식이다. 인구절벽으로 인한 국가소멸의 위기가 심각한 난제로 등장한 시점에 경기도가 국가 존속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저출생 대책’ 성공으로 암울한 국가 미래를 살려내야 할 엄중한 사명이 부여되고 있다. 행정안전부의 주민등록인구와 법무부의 등록외국인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4월 말 현재 경기도의 주민등록인구는 1360만 7919명, 등록외국인은 39만 5608명으로 총 1400만 3527명이다. 이는 국내 총인구 5264만 5711명의 26.6%로서, 서울 인구(967만 명)의 1.4배가 넘는다. 경기도 인구가 1000만 명을 넘긴 시점이..
꼰대를 생물학점 관점에서 보면 전전두엽의 활성화와 성장호르몬, 성호르몬의 분비 결핍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전전두엽은 결정과 판단을 담당하는 뇌영역으로 나이 들어 지위 높아가며 활성화된다. 호르몬의 결핍은 노화를 유발시키는데 노화되면서 나타나는게 꼰대다. 과거에도 꼰대는 있었고 Z세대도 나중에 꼰대가 된다. 꼰대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정욕구가 강하다는 특성이 있다. 스스로가 옳다 믿으며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려한다. 특히 스스로 잘 살았던 사람은 대접받던 때를 잊지 못하고 지금도 인정받으려 한다. 배운 사람일수록 논리가 있기에 뭐라 반발하기에도 불편하다. 그래서 꼰대질을 한다. 꼰대와 꼰대질은 다른거다. 서구에도 꼰대는 있다. 시민사회 성장과 함께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문화가 일찍 정착한 탓에 우리나라 같진 않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답이 나온다. 조선 양반사회는 신분과 나이든 어른 한마디가 결정권을 가졌다. 변화가 더딘 사회여서 그게 삶의 지혜이기도 했다. 해방후 국가주도 경제발전을 거치면서 개인보다 집단이 중요했다. 장기간의 군사정권과 그 후유증으로 획일적이고 상명하복적인 집단주의 문화가 사회에 만연하고 자연스레 군대 갔다온 남자들이 주로 일하던 직장으로 전이됐다. 이제 경제성장으로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는 사회로 변했다. 집단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가 상충되면서 헤게모니 싸움을 하는게 세대갈등이고 꼰대 논쟁이다. 정보사회가 되면서 세상의 발전속도와 변화가 빨라졌다. 어떤 면에서 노년세대는 디지털공화국에 정착한 아날로그난민 같은 신세다. 노인만 아니라 베이비부머도 디지털 변화속도를 쫓아가기 힘들다. 생활양식, 생산양식의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한다. 세상은 노년부터 Z세대까지 어울려 사는 공동체라 다르지만 공존해야 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통합은 쉽지 않다. 요즘 M, Z세대에겐 구찌가 핫하다. 젊은 세대에게 가장 친화력 높은 명품이다. 왜? 구찌의 최근 경영혁신이 답이다. 리버스멘토링을 했다. 젊은 직원이 팀장급 이상의 멘토가 된거다. 그결과 구찌는 중성적 이미지,스트리트 패션과의 협업을 통한 확장성을 얻었다. 메타버스 안에 제일 먼저 입점한 명품이 구찌다. 배움과 소통이 꼭 물 흐르듯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게 아니다. 누구나 꼰대가 되지만 누구나 꼰대질을 하는건 아니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지금의 내 생각도 틀릴수 있다 생각하면 좋은데 그게 어렵다. 그래서 “라때”가 나오는거다. 21세기를 살면서 왜 20세기 이야기를 하는가. 나이먹은 나도 꼰대가 싫다. 아니 난 꼰대다. 그래도 꼰대질만은 경계하고 싶다. 세상이 바뀌었다.내 살던 시절 이야기는 동창회 가서나 하자. 자식들에게도 하지 말자. 그게 습관되면 꼰대질의 유혹에 빠진다. 새로운 시대의 정보와 지식체계를 받아들이자. 세상 살이 시작한 Z세대보고 베이비부머를 이해하라 하면 말이 안된다. 스스로 살기도 버거운데… 더 살아본 세대가 시작한 세대를 이해하는게 순리다. 새로운 가치, 정보의 섭취가 꼰대질을 막는 백신이다. 섭취,攝取 한자로 쓰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진다. 영양분을 흡수하는 섭취의 攝자가 손수변에 귀 耳자가 세개다. 취 取자도 귀이자에 오른손을 나타내는 “또 우”자가 결합된 거다. 섭취는 입으로 하는게 아니라 귀로 듣고 손을 쓰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한자의 조합이 경이롭다. 요즘의 꼰대가 뭐가 문제인지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알았나 보다. 강변 고수부지를 걷는데 “아저씨, 공 좀 차주세요” 소리가 들렸다. 들은 척도 안하고 앞으로 걸었다. 나는 아저씨가 아니고 영원한 오빠니까.
아기들은 삼등신이다. 머리와 몸과 다리의 비율이 그렇다. 같은 길이는 불편하다. 앉고 서고 걷는 것이 모험이다. 모험에는 좌절이 함께여서 아기들은 넘어지는 것부터 배운다.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스스로의 터득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실패를 넘어 아기들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뒤뚱거리며 한걸음씩 위치를 옮긴다. 옮길 때, 아기들이 나아가는 방향은 일직선이다. 주저와 망설임은 아기들의 것이 아니다. 아기들의 걸음걸음은 정확히 순수와 일치한다. 감추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꽃밭으로만 향하지도 않는다. 송곳니를 드러내는 뱀을 향해서도 아기들은 손을 뻗는다. 뻗는 손을 따라서, 머리와 몸과 다리가 뒤뚱거린다. 어른들은 칠등신이다. 지위와 재산과 나이의 비율이 그렇다. 비율이 길어질수록 사는 게 고단하다. 앉고 서고 걷는 것이 죄다 돈이다. 돈은 성공의 다른 말이라서 어른들은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어른들의 배움은, 그러니까 돈을 버는 방법에는 끝도 없고 한도 없다. 훔치거나 속이거나 빼앗아서 돈을 버는 어른도 있지만, 대부분은 키우거나 팔거나 바꾸거나 만들어서 돈을 번다. 간혹,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나 같은 어른도 있는데 ‘등신’ 소리 듣기 십상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돈에 관한 한 나는 등신이다. 등신인줄 알면서도, 글을 써서 돈과 바꿔야 하는 나의 하루는 또 얼마나 등신 같은가. 나 같은 어른이 보기에 아기들의 삼등신은 귀엽다. 속없는 칠등신이라서, 아기들의 뒤뚱거림이 마냥 좋다. 발걸음 따라 흔들리는 머리와 몸과 다리가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다. 순수를 망각해 버린 나 같은 어른의 헛생각이다. 내게도 분명 첫걸음의 나이테는 남아있을 텐데, 최초의 직립과 숭고한 첫걸음의 기억은 돈 욕심에 지워지고 없다. 하기는, 지워져서 모르는 게 그것뿐일까. 아기들의 걸음걸음이야말로, 얼어붙은 땅을 뚫고 새순을 밀어내는 들풀의 처절함임을 나는 잊었다. 수백 수천의 추락 끝에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의 몸부림임을 나는 잊었다. 더 이상 알지 못해서, 눈물 흘리지 못하고 귀엽다며 웃는다. 아기들은 삼등신이다. 아니, 아기들처럼 뒤뚱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삼등신이다. 칠등신의 옷을 벗고 삼등신으로 돌아간 내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치매를 앓는 내 어머니의 기억은 자꾸만 허리가 굽어서 아들조차 몰라보고 뒤뚱거린다. 뒤뚱거리며 첫걸음마의 순간을 쫓아 혼자만의 세상을 걸어간다. 뒤뚱거리며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향해 다가간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젖 냄새를 향해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쪼그려 앉아 젖 물리던 부뚜막의 열기와 그을음 속으로 뒤뚱거리며 나아간다. 나아갈수록 내게서 멀어짐을 빤히 알면서도 나는 애써 붙들지 못한다. 입버릇처럼 돈을 벌어야 산다며, 되지도 않는 글을 붙들고 질끈 눈을 감는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 멀뚱거리는 나의 계절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