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붉은 해가 솟아 오르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한 해의 건강과 안녕, 소망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올해 남북관계는 지난 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북한은 2021년 제8차 노동당 대회 결정사항을 관철하기 위한 고집스러운 집착을 올 해에도 보여줄 모양이다. 지난해 연말에 있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북한은 ‘강대강’의 입장에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자체 힘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자하는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다. 윤석열정부 출범 2년차인 2023년은 북한에게는 정권수립 75주년으로 김정은 통치 성과를 과시해 보고자 하는 기대를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사회주의 강성국가 실현을 위한 기대는 싫든 좋든 윤정부와의 소통과 협력을 통해 가능..
지난달 29일 경기도 과천시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방음터널에서 발생한 화재는 우리가 무심히 여기는 환경에 얼마나 끔찍한 위험 요소들이 숨어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 뜻밖의 사고로 5명이나 되는 귀중한 생명이 스러졌다는 사실은 어이가 없다. 유사한 방음시설이 경기도에만 무려 70개가 있다니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방음터널에 대한 화재방지 공법 도입과 안전 강화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 알고도 바로 고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중죄다. 이날 오후 1시 49분께 방음터널을 지나던 한 화물 트럭에서 난 불이 방음터널 벽으로 옮겨붙으며 큰불로 번졌다. 이 불로 인해 방음터널 830m 중 600m 구간이 모두 탔다. 5명 사망 이외에도 안면부 화상 등 중상 3명, 단순 연기 흡입 등 경상 38명 등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마른하늘 날벼락을 맞은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횡액이 나와 가족 중 누구라도 맥없이 당할 수 있는 일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경기도에서의 방음터널 내 화재 사고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20년 8월 수원 광교신도시에서 용인 구성구로 연결되는 하동IC 고가도로에 설치된 방음터널에서 승용차에 난 불이 번지며 터널 일부를 태우는 사고가 난 바 있다. 사고 발생 시각이 새벽이라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이 불로 내부 50m가 소실됐다. 말하자면, 당시의 사고는 방음터널 화재의 위험성에 대한 분명한 경고였던 셈이다. 감사원은 이 사고를 계기로 지난 2021년 말 터널 방음시설의 화재 안전기준 보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국토부에 제시했다. 국토부도 이를 받아들여 지난해 7월부터 터널형 방음시설의 화재안전기준 보강을 위한 용역을 진행하는 등 관련 조치에 나섰으나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이번 대형 사고가 터진 것이다. 경기도와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현재 경기도를 가로지르는 도로 위에 70개의 방음터널이 있다. 이 중 29개(일반국도 7개, 고속국도 8개, 민자고속도로 14개)는 국토부에서 관리하는 시설이며, 41개는 도내 14개 지자체에서 각각 관리한다. 위험천만한 것은 이 같은 방음터널들 역시 벽과 천장이 폴리카보네이트(PC), 폴리메타크릴산 메틸(PMMA) 등 플라스틱으로 구성돼 대형 화재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재발 방지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현재의 시설을 전면적으로 강화유리 등 불연재로 교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보완시공에 필요한 엄청난 소요 예산이 난제다. 전문가들은 “10m 또는 100m마다 불에 잘 타지 않는 재질을 섞어 방음벽을 설치해 불이 급격하게 번지는 현상을 차단하는 것도 하나의 대책”이라고 조언한다. 소화전이나 스프링클러 등 안전설비 설치도 의무화해야 한다. 대형 사고가 터져야만 비로소 들여다보는 법·규정 미비는 고질적이다. 화재 위험이 있음에도 방음터널은 일반터널로도 분류되지 않는다. ‘시설물안전관리법’ 상 안전관리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고, 소방법·화재예방법에도 대상 시설물이 아니다. 미적거릴 이유가 전혀 없다. 경고음이 울렸는데도 아무것도 안 한 무사안일 행정은 확실하게 시정해야 한다. 소를 잃었어도 외양간은 튼튼하게 고치는 게 지혜다.
2021년에 이어 이어 지난해 두 번째로 치러진 대학입시에서 고등학교 이과 학생들이 문과계열 학과에 대거 지원한 것을 두고 ‘침공’이란 어휘까지 등장했다. 국어에서는 ‘화법과 작문’ 대신에 ‘언어와 매체’, 수학에서는 ‘확률과 통계’ 대신에 ‘미적분’을 선택한 이과출신들이 훨씬 유리한 점수로 인문계열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에서는 그 비율이 80~90%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로기 상태의 인문학에 결정타를 날리는 형국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등학교 문·이과 통합교육을 폐기해야 하나? 자기 점수를 가지고 예측할 수 있는 통계 데이터를 제공하는 등 미세하게 보완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개혁의 차원에서 보다 근원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지난 해 수능 지원 결과를 보면, 표준점수에서 유리한 국어의 ‘언어와..
유년시절은 홀로 서러웠고 혼자라서 두려웠다. 나이 든 지금 나는 다시 그 마음과 두려움으로 살고 있다. 인내와 성실과 용기만으로는 안 통하는 사회의 현실 앞에서 이제는 조금 서러워도 괜찮을 것이요. 내 운명의 주어는 ‘슬픔과 그 에너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 아침 깨끗하고 따스한 바람이 불면 어머니가 보내준 바람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정월의 따스한 햇살이 악수하듯 손목으로 내리면 먼저 간 여인의 체온 같다는 생각도 했다. 2015년 일이다. 8월 『사람과 수필 이야기』라는 수필집을 엮으면서 표지화 또한 내 필력으로 그렸다. 문인화로서 커다란 나무 아래 갓 쓰고 수염이 긴 초췌한 노인이 거목을 우러러보는 이미지의 그림이었다. 문학과 예술을 거목으로, 노인을 나 자신으로 비유한 의미화였다. 이 그림을 산뜻한 우편엽서로 만들었다. 출..
‘생각하는 언어’가 삶의 슬기, 철학적 구도(求道)의 전제조건이다. 말이 뜻을 잃거나 잊으면 그 슬기는 허망하게 망가진다. 포털에 오른 ZDNet Korea(제이디넷 코리아) 신문 12월 25일 기사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삼성 서울 서초사옥 인근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집회로... 집회소음이 도(道)를 넘어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침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견이 많다. 업계에 따르면...》 업계의 ‘말’로 주민 생활을 핑계 댔다. ‘한국의 최고 권력’인 삼성이 굽어 살펴 주시기를 갈망하는 탄원서 아닌가. 머리 좋은 삼성이 어떤 속셈을 이렇게 어설프게 표현했을 리 없다. 언론도 기사도 공론(公論)이다. 기자는 공공(公共)을 위하는 자(者)다. 삼성에게도 칭찬 들을 수 없는 글이 기사로 실렸다. ‘눈치껏 하라.’는 핀잔 피할 수 없으리. 이 신문을 갈구려고 이런 서두를 꺼낸 것 아니다. 도를 넘는 무지의 언어가 ‘공론의 장’에 오르고, 누구도 이런 언어현상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상황을 저어하는 것이다. 집회소음은, 그게 심하다면, ‘道(도)를 넘는 것’이 아니고 ‘度(도)를 넘는 것’이다. 무지(無知)를 넘어 ‘아는 체’까지도 지나쳤다. 참을 수 있는 한도(限度)를 벗어난 정도(degree)를 말하고자 했으리라. 아니면, 유교(儒敎) 또는 유학의, 공자님 말씀의 道를 가리킨 것일까? 사람의 뜻은 생각이다. 생각은 말이 바탕이다. 그 말이 어그러진다면 생각도 비틀릴 것이다. 그 사람은 ‘어떤 뜻’을 기준삼아 실존(實存)하고 있을까? 이 시리즈 제목인 심우도(尋牛圖)의 ‘도’는 길 道도, 기량 度도 아닌 그림 圖다. 소(牛)를 찾는(尋) 그림이다. 일(事 사)이나 물건(物 물) 즉 사물의 이름은 정확하고 적확(的確)해야 한다. 바르면서 과녁(的) 맞추듯 (경우에) 딱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公論인 언론과 그 생산물인 기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기준을 갖추지 못한 공론은 없는 것만 못하다. 언론, 그걸 보고 배우는 이도 있다. 공론의 주인인 독자(수용자)가 가가대소(呵呵大笑)를 넘어 자못 모욕감까지 느껴야 한다면, 사람보다 개가 먼저인 것처럼, 세상이 뒤바뀐 것이다. 어서 내려오라. 요즘은 뜸하지만, 전에 길 걷다보면 “도를 아십니까?”라며 소매 붙잡는 ’거리의 도인‘들이 있었다. 道는, 度나 圖도 그렇지만 그렇게 파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그 글자의 뜻(이미지)이 없으면, 차라리 아는 체 말라. 아이들 볼라. 입 다물면 중간이라도 간다. 보이스피싱도 피할 수 있는 삶의 지혜다. 소를 찾고 보니, 나도 내 아집(我執)의 과녁인 소도, 일체(一切)가 없더라는 불교설화 심우도의 슬기다. 그 말 ‘소’의 이미지만 남았다. 언어의 모습이며 존재이유다.
2022년의 아쉬움을 달래고 2023년 희망찬 시작을 알리는 새해맞이 제야의 타종행사가 2022년 12월 31일 23시 45분부터 2023년 1월 1일 0시 20분까지 수원시 행궁동 화성행궁 광장 앞 여민각에서 열렸다. 약 5천명의 시민들은 지난해를 돌아보며 새해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제야 타종에 앞서 음악공연이 열렸고 자정부터는 사랑을 만드는 사람들 봉사회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뜨끈한 떡국도 나눠줘 시민들의 마음까지 푸근하게 만들었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모두 만사여의(萬事如意)하고 형통(亨通)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종교계에서도 신년사를 통해 새해 덕담과 함께 염원을 발표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은 “오늘날 지구촌 중생들 서로 간의 균열과 파열음이 곳곳에서 들려온다”면서 “창과 칼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드는..
20대 초반 나이의 후배와 마포에 있는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루프탑 카페가 보여 들어갔는데 이름이 ‘헤이, 쥬드’다. 주인에게 ‘헤이, 쥬드’ 노래를 청해 흐르게 하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에게 헤이, 쥬드는 프라하의 봄이야’ MZ세대인 후배, 못 알아 듣는다. 꼰대 소리 듣지 않을 선까지 내 암호같은 말을 해명한다. 영화 ‘프라하의 봄(1989 개봉작)’에 비틀즈의 노래 ‘헤이 쥬드(Hey Jude)’가 나온다. 비틀즈의 목소리가 아닌, 체코 가수 마르타 쿠비쇼바(Marta Kubisova/1942년생)가 자국어로 바꿔 불렀다. 비틀즈가 불렀을 때는 우울한 한 아이를 위한 ‘응원가’였는데 마르타 쿠비쇼바는 국민개혁가요로 바꿔 불렀다. 존 레논의 5세 장남 줄리안 레논이 자주 벌어진 부모의 싸움 때문에 어두워진 것을 본 폴 매카트니가 삼촌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줄리안의 애칭이 주드) 1968년, 발표되어 ‘예스터데이’와 함께 비틀즈 최고 명곡이 된 이 노래는 그해 체코 ‘프라하의 봄’ 속에서는 민중 개혁가로 퍼진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나치 독일 점령 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구원이 되어준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지배자로 둔갑한다. 1948년, 공산당이 전권을 장악하면서 일당독재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갔고 1960년, 사회주의 헌법 채택,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국명 변경하며 국민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을 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68년 1월 출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민주 자유화 노선을 채택한 알렉산더 두브체크의 개혁은 민주 시민들의 환호를 불렀다. 그러나 동토를 녹일 것으로 기대했던 프라하의 봄은, 민주화 물결이 이웃 동구권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소련의 군홧발 아래 짓이겨진다. 68년 8월, 바츨라프 광장의 시민 평화 시위는 소련군이 밀고 들어온 탱크와 총성에 의해 피로 물들며 좌초된다. 체코 국민 작가 밀란 쿤데라의 명작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좌절된 체코 민주화 운동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 체코 젊은이들의 사랑이야기다. 미국 감독 필립 카우프먼은 이 소설을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국민 가수 마르타 쿠비쇼바는 68년, 프라하의 봄에 이어 89년, 벨벳 혁명 때도 헤이, 쥬드를 민주주의를 꿈꾸는 개혁의 노래로 불렀다. 쿠비쇼바의 목소리, 체코어로 불린 ‘헤이, 쥬드’는 영화 ‘프라하의 봄’에도 나와 영화의 세계적 히트와 함께 체코인의 민주화 염원을 세상에 알렸다. ‘삶은 내게 너무 무거운데 당신에게는 너무 가볍군요’라는 영화 주인공 테레사의 명대사를 떠올리며 노래를 듣는다. 헤이, 쥬드는 겨울을 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옛날 노래만은 아니다.
저학년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모르는 게 있어도 힘차게 손을 들고 발표한다. 발표할 때 친구들이 나를 주목하는 그 순간이 기분 좋으니까 신나서 손을 든다. 정답과 전혀 상관없이 엉뚱하게 틀린 답을 말할지라도, 그게 맞는지 틀린 지 나도 모르고 옆에 애들도 모르니까 부끄러울 게 전혀 없다. 저학년 친구들은 모두가 발표시켜달라고 애절한 눈빛을 발사한다. 어린이들은 선생님이 발표를 안 시켜줬을 때 기분이 상하지, 틀린 답을 말했다고 주눅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 지 4~5년이 지나고 고학년이 되면 상황이 급변한다. 이제 아이들은 친구들이 발표하는 나를 주목하는 게 부담스럽고, 모두 앞에서 틀린 답을 말할까 봐 걱정스럽다. 나보다 공부 잘하고 많이 아는 친구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답을 말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학생이 발표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교사만 떠드는 조용한 교실이 되어간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발표 시간에 눈치를 보다가 결국 포기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두 과목이 있다. 범인은 영어, 수학이다. 둘 다 선행학습이 만연하기로 유명한 과목들이다. 미취학 시기에 영어 유치원이라고 이름 붙어있는 영어 학원에 다니는 건 흔한 일이고, 소수의 아이는 그때부터 수학 학원에 다닌다. 수능을 대비한 선행학습의 시작이다. 지금 학년보다 높은 학년의 수업을 들으면서 얼마나 선행이 빠른가를 따지는 건 옛날 옛적 유행이다. 이제 유명한 학원에 입학하는 것 자체로 자랑이 된다. 특정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레벨 테스트를 쳐야하고, 레벨 테스트를 위한 과외 수업이 따로 있는 건 흔히 알고 있는 풍문이다. 새로운 풍경은 그 레벨 테스트 치기 위해 응시권을 온라인 선착순으로 받아야 하고, 선착순인 응시권을 잡아주는 전문 업체가 성행하는 모습이다. 요지경이 따로 없다. 이러다 보니 수학, 영어는 교과서를 처음 펼쳤을 때 내용을 모르는 아이가 반에서 적은 수가 되어버렸다. 국어나 사회 같은 과목이 교과서를 미리 읽고 오거나 배경지식이 있는 아이가 아예 없거나 한, 두 명 남짓인 것과 비교하면 더 극적이다. 이제 대부분이 영, 수 선행학습을 하자 사교육이 극심한 지역에서는 더 나아가 과학 중 일부 과목도 초등 저학년 때부터 선행학습을 시킨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 내용을 처음 배우는 건 당연한 일이고, 당연함을 넘어서 학생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여야 별다른 부작용이 없다. 대다수가 핵심 목표를 미리 알고 몇 명만 모르는 상태에서 수업을 진행하면 문제가 생긴다. 다른 과목은 내용을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무지한 내가 부끄럽지 않은데 영어랑 수학만큼은 모르는 게 부끄러워진다. 선행을 많이 한 다른 친구들은 이미 교과서 문제를 다 풀어놓고 딴짓을 하고 있는데, 오늘 처음 내용을 배운 아이들은 쩔쩔매면서 문제와 씨름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발표는커녕 특정 과목 수업 시간 내내 땀을 흘리면서 시선이 불안한 채로 굳어버리는 아이도 생긴다. 아이들끼리는 쉬는 시간에 중학 수학 문제집이나 토익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으로 누가 어디까지 선행학습을 했는지 서로서로 알고 있다. 학원에서 진도를 어디까지 나갔는지 확인하고 선망하는 분위기가 느껴질 때 몹시 당황스럽다. 선행학습이 학습 성취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선행학습을 한 학생의 성적이 좋아 보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과목에 쏟은 절대적인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 학교에서 나가고 있는 진도의 예습, 복습을 선행에 들이는 시간만큼 사용하면 선행한 학생보다 더 큰 성취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사교육비를 절약하고 학습 성취 기준에 도달하는 데 충분하다. 진리는 대부분 단순하고 명쾌하다.
지난 2년간 매달 두 건씩 저널리즘 비평을 썼다. 아직 비평할 주제가 없어 고민한 적은 없다. 유사한 주제가 반복될 때, ‘또 다뤄야 하나?’를 고민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만큼 한국언론의 그릇된 관행이 고쳐지기 어렵다. 한 일간신문의 논설실장을 지낸 선배가 “한국만큼 미디어비평 거리가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저널리즘 비평의 성격상 비판적 관점에서 모든 칼럼을 썼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번 칼럼은 칭찬할 것들을 찾기로 했다. 성찰하는 기자를 보면 고맙다. 지난주 한겨레신문 전광준 기자의 《‘법조기자단’에 있다는 것》이란 칼럼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잘못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는 언론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검찰조직 못지않은 법조기자단의 폐쇄성과 선민의식이 검찰과 언론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입사 5년이 안 된 젊은 기자의 문제의식이라 더 반가웠다. 대한민국을 1년 넘게 뒤흔든 대장동 사건의 주범 김만배는 법조기자로 쌓은 인맥을 연결고리로 활용했다. 법조 권력의 감시자였어야 할 기자가 외려 법조 비호자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언론 보도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언론학자 글을 접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6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언론전문지 ‘신문과방송’ 12월호에 실린 홍원식 동덕여대 교수의 미디어비평이 그렇다. 정치권의 물타기 억지 주장을 받아쓰고 객관주의라고 변명하는 언론 보도를 설득력 있게 꼬집었다. 취재원의 주장이 억지인 줄 알면서도 따옴표 형식을 빌어 기사에 그대로 반영한다. 균형을 맞췄다고 강변한다. 언론이 어떻게 ‘객관’과 ‘균형’을 왜곡하고 취재원에 이용당하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극소수 언론이 선도하고 있는 한글표기 캠페인도 반갑다. 혹평하면 언론의 우리말 사랑은 한글날 하루에 그친다. 신문은 이즈음에 한글 관련 행사나 세미나를 기사화하고, 방송은 텔레비전 수상기 오른쪽 상단에 표시되는 KBS, MBC를 ‘한국방송’. ‘문화방송’ 정도로 바꿔 표기한다. 광주문화방송이 이런 관행을 과감하게 떨쳐냈다. 올해 말까지 한글표기를 해오고 있다. 이게 그렇게 주목받을 일인가라고 반문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로쓰기가 우리 언론계에 정착되는 과정을 돌아보면, 광주문화방송이 큰일을 했다. 1976년 한창기 선생은 잡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하면서 가로쓰기를 했다. 당시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면서 일간신문의 가로쓰기가 처음 시작됐고, 1995에 중앙일보가 뒤를 따르면서 일반화됐다. 칭찬할 일이 세 사례만이겠는가. 클릭수에 매몰된 언론환경에서도 언론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심층취재들, 외래어를 우리말로 고쳐쓰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경기신문도 있다. 이런 언론과 언론인들이 쏘아 올린 작은 공들이 모여 신뢰가 쌓일 때, 독자와 시청자는 돌아온다. 언론인 여러분, 금년 한 해 수고 많았습니다.
지난 11월 2일 세계 제2위 암호화폐거래소 FTX가 파산하고 최근 세계 1위인 바이낸스까지 여러 의혹에 휩싸이면서 테라·루나 사태로 인하여 암호화폐 시장에 낀 먹구름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 먹구름의 가장자리에 한 줄기 햇살이 비치고 있다. 11월 4일 뉴욕연방은행의 고위책임자는 ‘싱가포르 핀테크페스티벌’에서 주목할만한 발언을 하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은행 간 지급결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를 개발하고 있다.” 12월 8일 국내 가상화폐거래소들은 거짓 공시를 이유로 위믹스를 ‘자율적으로’ 상장 폐지하였다. 디지털화폐를 연구하고 있는 중앙은행의 숫자는 2020년 35개에서 2022년 114개로 3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 배경에는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있다. 코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