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너의 노동은 0원. 너의 노동은 자원봉사. 너는 과로하는 백수” 나의 실상이다. 나는 ‘무급’ 마을활동가이다. 그 시작은 이랬다. ‘아이 셋을 데리고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없을까?’ 세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과 병행하면서 점차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 마을공동체 영역으로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그러다보니 아이를 데리고서 하려던 일은 아이를 데리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돌봄교실에 알아봤더니 자녀를 맡기려면 ‘맞벌이 부부’라야 한단다. 일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재직 증명서’와 ‘의료보험 납부 확인서’를 제출하라는데. 그건 뼈 빠지게 일해도 내가 만들어낼 수 없는 문서였다. 그때 처음 무급으로 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돈으로 노동의 가치를 매기는 사회에서 돈을 받지 않는 노동에 ‘공권력’이 발부하는 성적표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에 대한 증명서와 확인서였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이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마을활동은 육아와 가사노동과 함께 대표적인 그림자 노동에 속하고 나는 주구장창 그림자 노동을 해왔다. 임금노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노동, 그것도 아니면 열정을 구실로 강요된 저임금 무임금 노동착취인 열정 페이(熱情Pay) 그 언저리쯤으로 간주되는 노동자였다. 하지만 나는 내 노동이 이렇게만 정의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을활동은 임금노동과는 다르다. 고되기만 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우리 꿈과 대립하지도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만큼,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혹독한 삶과 극한 경쟁에 균열을 내고 느슨한 연대와 느린 속도와 느긋한 태도로 숨 쉴 틈을 만드는 작업이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공공(公共)의 행복을 이루고자 하는 활동이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마을 활동은 노동보다 인도 “카르마 요가”에 가깝다. 카르마 요가란 자신의 삶에서 실천적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가다듬어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요가의 갈래이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공동체에 헌신하는 수행의 방법이다. 공적(公的) 임무에 집중하되 보상에서 멀리 떨어진 활동이다. 《깊이 생각할 것》, 《순수한 동기로 할 것》, 《의무를 다할 것》, 《최선을 다할 것》, 《결과는 잊을 것》, 《봉사일 것》, 《모두를 위한 일일 것》, 《학습이 따를 것》이 원칙이다.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 길을 잃고, 기우뚱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요가의 본질 아닐까. 중심을 잡으려 애쓰며, 여기까지인가 싶다가도 ‘딱 한 걸음만 더!’ 가다보면 새로운 나날들과 미래의 약속에 다다를 것이다. 카르마, 그러니까 내가 사는 날까지 나도 모르게 쌓여가는 ‘선한 업(業)에 대한 믿음, 나를 만들어가는 감사가 거기에 스며 있다.
넷플릭스의 오스트리아 6부작 드라마 ‘우먼 오브 더 데드’의 주인공 블룸(안나 마리아 뮈에)은 직업이 장의사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하도 시체를 많이 봐서인지 살면서 그리 무서운 것이 없다. 성격도 냉랭한 편이다. 말하는 것도 남을 배려하거나 하지 않는다. 도무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지만 오직 한 사람, 곧 남편 마르크(막시밀리안크라수스)에게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마르크는 아침 출근길에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 광경을 블룸은 두 눈 뜨고 지켜보게 된다. 블룸은 차차 남편의 사고가 의도적이었으며 누군가, 어떤 집단이 남편을 살해했음을 알게 된다. 블룸의 가혹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원래 이런 류의 자경단(自警團) 영화는 (그 이름도 추억에 젖게 만드는) 찰스 브론슨의‘데스 위시’ 시리즈가 원조였다. 아내를 살해하고 딸을 강간해 죽인 범인들을 찾아 일일이 응징하고 죽이는 중년 남자 폴 커시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형편없었으며 찰스 브론슨의 대표작 ‘빗속의 방문객’, ‘원쓰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황야의 7인’ 등에 비해 그의 명성을 몇 단계 떨어뜨리는 작품이었지만 오히려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찰스 브론슨은 이 영화로 일약 세계적 인지도의 대 스타가 됐다. 사람들은 그의 복수에 열광했다. (특히 남자는 뉴욕의 전형적인 화이트 칼라였다는 것이 환호의 이유가 됐다.)이 영화의 인기는 1편이 1974년에 만들어진 후 5편이 만들어지는 1994년까지 20년간 계속됐다. 찰스 브론슨은 그 10년 후인 2003년에 죽었다. ‘데스 위시’ 시리즈의 명성은 2018년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을 정도다. 공권력의 행사, 엄정한 법 집행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들의 얘기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은다는 것은 거꾸로 그 사회의 내부가 심히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적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데다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신을 사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시즌 드라마 ‘우먼 오브 더 데드’의 주인공 블룸도 경찰을 향해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한다. 당신들 수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며 소리 지르고 힐난하기 일쑤다. 실제로 경찰은 별반 미동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남편은 경찰이었다. 블룸짐작으로 남편은 어떤 조직적인 범죄의 뒤를 쫓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먼 인 더 데드’에서 보이는 블룸의 복수극은 기이한 특징을 지닌다.‘찰스 브론스 시절’에는 상대가 아무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계산과 고려가 앞세워졌다. 주인공이 상대를 죽이기까지, 그 개연성, 그러니까 주인공이 벌이는 또 다른 살인의 이유와 명분을 앞자락에 이렇게 저렇게 많이 깔아 놓는다. 그런데 ‘우먼 인 더 데드’는 그렇지가 않다. 그게 이 드라마의 유별난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블룸의 복수극은 실로 가차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일말의 고려가 없다. 고민 따위는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 응징을 당하는 인간들이 정말 나쁜 놈일까, 그런 놈들의 수장 급에 해당할까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들 정도다. 특히 동네 신부에게 휘발유를 들이붓고 그를 불태워 죽이는 장면은 여주인공 블룸이 나가도 조금 너무 나가는 가 아닌 가 싶을 정도다. 그런데 찰스 브론슨의 영화가 197,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이 드라마 역시 요즘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모양이다. 유럽에서나 한국에서나, 세계 그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있다는 얘기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삶에 내몰리고 있다. 끝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과 원칙, 공정한 사회란 구호만 앞세우는 건 실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얘기이며 법과 원칙은 일부 소수의 권력자들 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조사는 무슨 얼어 죽을 조사. 사람들이 듣는 것은 그저 몰랐다 아니면 (내 책임이) 아니다는 말 뿐이다. 이러니 유가족들이 피를 토할 수밖에. 게다가 유가족들의 뒤에서는, 심지어 정면에 대고 ‘자식의 시체팔이를 해서 보상금을 벌려고 한다’며 미치광이 집단이 야유까지 보내고 있는 마당이다. 유가족들의 마음속에서는 응징과 복수의 마음이 싹틀 것이다. 얼마나 그들을 죽이고 싶겠는가. 예전의 폴 커시나 지금의 블룸처럼 그들에게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댕기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그럴 유혈극을 (바라는 대중들의 마음을) 영화나 드라마가 달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수극의 아이러니이지 역설이다. 좀 적당히들 하자. 행안부 장관도 이제 적당히 물러나고 대통령도 이제 적당히 진심 어린 사과를 하자. 아이들 죽은 걸 두고 자존심 싸움을 내세울 때인가. 일국의 지도자가 그러면 되겠는가.
작년 말부터 2023년 벽두까지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들은 올 한 해에 대한 여러 예측을 쏟아내고 있다. 대체로 낙관적인 예측보다 비관적인 예측이 더 우세하다. ‘위기’ 또한 가장 인기 있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위기’는 옮음과 그름, 삶 혹은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등을 의미했지만, 근대에서 위기는 선택조차 쉽지 않은 위기의 일상화 시대로 변모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도와 타이완의 위기, 식량 불안 위기, 경기침체 위기,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부채 위기, 이란 핵문제, 기후변화 악화 등은 단골이거나 중첩되는 위기 속 예측 소재들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은 거의 상수로 자리 잡아 국제정세 예측의 기본 축이 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예측에 한반도가 빠질 수 없다. 북한의 무인기 기습과 군의 허술한 대응 모습은 계축년의 한반도가 더 격랑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임을 시사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본 적이 없는 지각변동’이 한반도에도 밀어닥치고 있음을 예고한다. 김정은 정권은 그간의 북한이 구사해온 對남한 전략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핵무기와 미사일의 고도화가 거의 달성되었다는 나름의 자신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변침점(way point)에 놓여 있는 것이다. 변침점은 선박이나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여행하면서 중간에 항로를 변경하는 지점을 말한다. 문제는 김정은 정권의 철저한 ‘모호성 전략’ ‘속내 감추기 전략’으로 그 진정한 음모를 선제적으로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 부시 대통령 시절 국방장관을 역임한 도널드 럼스펠드의 표현을 빌리면 ‘unknown unknowns’이다. 즉 모르는 것은 모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미 정보기관이 중요한 국제적 사건에 대해 사전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자 이에 대응하여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 정보기관은 럼스펠드의 자조적 단어를 수용하면 안 된다. 김정은 정권은 기발하고도 효험 있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2008년 연평도 기습 포격 사건으로 상당한 재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슬로건 앞에 상당수 국민들은 중국 송나라식 굴종적 평화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김정은 정권에게 크나큰 자신감을 부여했을 것이다. 따라서 대북강경노선을 표방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기를 꺾기 위해,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술책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공격 방법과 상징적 장소, 시기를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정보기관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무력화 내지는 ‘동네 국정원’으로 전락한 오명을 이번 정부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 길은 ‘위기 대응능력’과 ‘예측 능력’ 및 ‘상상력’을 보여주는 길 밖에 없다. 미국 펜실베니아대 마틴 셀리그만 교수가 언급한, 인간은 예측하는 동물 즉 ‘호모 프로스펙투스(Homo Prospectus)’임을 국가정보기관이 먼저 실증해 보이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강해야만 전쟁터가 되지 않는다”는 대만 차이잉원 총통의 말은 우리에게도 딱 부합한다.
기업 실적발표 시즌을 맞아 삼성전자를 필두로 국가산업의 대표주자급 기업들의 잇따른 ‘어닝쇼크(예상보다 저조한 실적발표)’가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전 산업계의 실적 부진 결과가 수치로 증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현실 앞에서도 권력다툼에만 혈안이 돼 도무지 범국가적 경제위기 탈출구를 모색하지 않는 정치권은 큰 문제다. 기업과 정치권이 가용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해법을 찾아야 할 때다. 시즌 첫 주자였던 삼성전자의 실적은 놀라움 그 자체다. 삼성전자의 작년 4분기 영업이익은 연간 매출 300조 원 돌파라는 신기록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동기 대비 69%나 감소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LG전자의 영업이익은 무려 91.2%나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최악의 반도체 업황에 SK하이닉스는 흑자는커녕 적자 전..
가장 멀리 간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데 있다, 가슴 속에
새해 첫날 들었던 생각이다.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굳이 안다면, 그 어떤 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나는’과 ‘모른다’ 사이의 괄호에 어떤 단어를 적어 넣어도 무방하다. 나는 (구름을) 모른다. 나는 (바람을) 모른다. 나는 (햇살을) 모른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모르는 내가 사람과 도시와 세상을 알 턱이 없다. 사람은 고사하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를테면 미움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바름이라든지 그름 같은 것을 모른다.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안다고 끄덕였던 적도 있었는데 부끄러운 고갯짓이었다. 교과서 몇 권 읽었다고 안다고 믿는 건 착각이다. 앎이란, 그렇게 하자는 인간의 약속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니까.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하물며 새가 왜 우는지조차 나는 모른다. 우는지, 웃는지, 부르는지, 화내는지, 노래하는지,..
경기도가 도정 최초로 실시한 ‘2023 기회 경기 워크숍’이 화제다. 김동연 지사를 비롯해 부지사, 실국장급, 산하기관장 등 80여 명 참여한 정책 대토론회는 집단토의방식으로 정책을 도출하는 실험적 행사였다. 이번 워크숍은 참석자들은 물론 전국 공직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것으로 평가된다. 모든 정책의 입안과 수행과정에서 ‘집단 지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는 방식으로 공직 수행 프로세스가 혁신되길 기대한다. ‘울트라 마라톤’급 토론 시간 외에도 이번 워크숍에서 눈길을 끈 것은 사전 자료·스마트폰·시간제한이 없는 ‘3무(無)’ 조건부터 특이했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말고, 계급장 떼고 아이디어를 내보자”는 김 지사의 제안에 간부들이 응하면서 토론이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김 지사가 워크숍에 앞서 강조한 기득권·세계관·관성..
‘희망찬 새해’란 새해인사는 우리 모두가 좋아하지만 특별히 국가차원에서 희망이 넘치는 새해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는 너무나 다르게 암울하다. 지난 3년간 지속되어온 코로나19와 러-우크 전쟁, 미-중 갈등상황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경제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 듯하다. 거기다 북한의 지속적인 미사일 도발로 불안감은 배가되고 나아가 정치권의 극한대립은 ‘희망찬 새해’란 말을 무색해한다. 하늘의 도움을 기대하며 희망을 펼치고 꿈과 비전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희망이 바람이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본다. 집값상승을 막기 위해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것이 불과 9개월 전인데 이젠 집값하락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제정책의 한계를 본다. 금년의 경제상황이 호전되길 기대하나 정부의 대책도 그리 희망적이진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희망찬 한 해를 보낼 수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분열상황을 통합의 길로 바꾸어 그 응집된 힘으로 희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분야, 바로 남북관계다. 남북관계의 재개는 불안을 벗어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관계회복에 따른 대외 이미지 제고, 개성공단의 재개와 대북투자의 활성화, 그리고 코로나19의 완화에 따른 중국관광객의 서울-금강산 연계 관광으로 폭발적 관광수요가 기대되는 여러 방면의 경제적 후과로 우리의 경제성장 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악화일로의 남북관계를 어떻게 해야 새롭게 바꿀 수 있을까. 무엇보다 북한을 바라보는 기본 인식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발만을 일삼는 악마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갖고 그들 나름 행복한 삶을 꿈꾸는 정치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면 현 남북관계 상황의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고 문제해결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6·25 전쟁 시 맥아더의 핵공격계획. 1958년의 전술핵 남한배치, 90년 초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한 극도의 안보불안, 미국의 북미수교 거절과 대북적대시정책의 지속, 1,2차 핵위기에서 보여준 미국의 기만(2003년 북한 경수로 건설지원사업의 공정률은 40%에 못 미쳤다), 2018년의 남북,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희망과 2019년 하노이 회담에서의 배신 등에서 불신의 늪은 계속해서 깊어졌고 안보불안에서 벗어날 길은 핵 보유 정책의 지속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들 표현대로 안보가 담보된다면 핵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 선 핵 포기는 죽음이라고 인식하는 자존감, 하노이 회담에서 주장했던 대북제재의 완화 해제를 통한 경제성장 발전의 길 모색 등 북한의 속내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북한의 변화된 자세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정책전환의 의지를 보이고 진정성 있는 대화 제의를 한다면 희망찬 새해의 첫걸음을 내디딜 것이라 확신한다.
집단상담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한 20대 여성이 자신이 마약중독임을 밝힌다. 그녀는 8년 전 남자친구의 권유로 마약을 시작했다. 여러 번 끊을 시도 했고 그 횟수만큼 고통스럽게도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정신병원에 수차례 입원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순간 정말 다시는 안 하겠다 굳게 결심하지만 지속되지 않았다.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마약을 끊고 이 상담에 참여했다. 그녀는 마약을 우연히 접하였다가 삶의 수렁에 빠진 사람의 회복을 돕는 마약중독재활치료사가 되길 바란다.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만 반갑다. 삶의 속성으로 따라오는 고통에 대해 우리는 기분을 전환해 주어 일시적으로 고통에서 이탈하게 해 주는 어떤 것들을 때때로 선택한다. 맛있는 저녁식사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일을 끝마친 후 치킨과 맥주일 수도 있다. 속상하다고 훌쩍 밖으로 나가 피우는 담배 한 가치는 건강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한 부분일 수 있다. 문제는 물질중독, 사용장애이다. 여기서 물질은 뇌에 영향을 미쳐 의식이나 마음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물질 사용에 장애가 되는 경우는 △물질 사용을 통제할 수 없거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물질 사용으로 인해 훼손되거나 △신체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물질을 사용하거나. △사용 및/ 또는 의존성의 신체적 징후를 보이는 경우의 크게 네 가지 범주에서 평가하여 진단한다. 마약은 처음에 접할 때 얼마나 건강과 삶을 망가뜨리는지 그녀와 같이 모르기 마련이어서 문제가 된다. 오랫동안 마약과의 전쟁을 벌여온 미국이지만 마약거리라 불리는 필라델피아 켄싱턴 에비뉴의 보도영상은 충격적이다. 거리에는 합성마약인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들이 배회한다. 고개를 숙이고 구부정하게 혹은 비틀린 좀비 같은 자세로 느리게 움직이거나 정지해 있다. 2020년-2021년 미국 18~49세 청장년층의 사망자가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다. 미국의 마약성진통제 중독자는 1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펜타닐은 금단증상으로 신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한 번 의존하고 나면 그 약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약을 끊지 못하고, 결국에는 양을 늘리다 보면 호흡 마비까지 오게 되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인류가 개발한 마약성 진통제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호기심에서라도 절대 손을 안 대면 안된다. 국내에서도 펜타닐을 포함한 마약중독자가 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마약 투약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0년 이후 마약 투약의 주요 연령대는 20대가 되었다. 최근 19세 이하 청소년 마약 사범의 증가세도 가팔라지고 있다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처벌보다는 치료와 재활에 집중해야 한다. 마약중독은 단약과 치료, 사회 복귀에 이르는 전 과정에 포괄적 개입이 필요한 질환이기 때문이다. 치료가 되지 않는 병은 반드시 재발하기 마련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의 예비 소집이 시작됐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감이 교차한다. 그런데 일부지방 학교에서는 신입생이 0명이어서 입학식조차 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 전국 지방 소재 초등학교 수십 곳에서 입학생이 단 한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의 경우 초등학교 예비 소집이 마무리됐지만 청주 내수읍 수성초 구성분교와 미원초 금관분교 등 6곳은 취학 아동이 없어 신입생을 받지 못할 것 같다. 전북에서도 신입생이 1명도 없는 초등학교가 군산 어청도초, 신시도초야미도분교, 임실 신덕초, 부안 위도초식도분교 등 4개교나 된다. 학생이 1명도 없어 현재 휴교 상태인 곳도 있다. 학교 소멸이 현실화하고 있음은 지난해에만 전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