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처음 보는 꽃을 마주했을 때 사진을 찍어 이름을 물을 수 있는 앱이 있다. 질문은 주로 청장년층이, 답변은 주로 노년층이 했다. 식물의 이름을 잘 아는 평범한 노인들을 전문가로 만들어주던 이 앱은 스마트렌즈가 출시돼 기계가 검색으로 답을 내려주기 전까지 꽤 인기였다. 종종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에서 쩔쩔매다 결국 주문을 못 하고 돌아서는 어르신들을 마주한다. 키오스크가 아닌 점원에게 직접 주문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의미를 알 수 없을 만큼 긴 커피 이름을 줄줄 읊으며 각종 옵션을 추가하는 이삼십대와 달리 노인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각 매장마다 다른 커피 이름 대신 가장 기본적인 커피 이름을, 또는 자신이 아는 이름을 대며 어렵게 주문한다. 한 패스트푸드 매장은 일반적이지 않은 구조에 영어 안내판, 키오스크와 무인의 조합으로 ‘NO..
올해 8월에도 일본 총리는 전범들의 신사에 공물을 바쳤다.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도 희생된 개인과 이웃 나라에 대한 사과도 없었다. 나는 8월을 보내며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상룡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이준형이다. 이제는, 안동 권문세가의 장자이자 지주였던 이상룡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제법 많아졌다. 이상룡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가산을 처분한 다음 집안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회영 형제와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도 그였고, ‘항일무장투쟁’을 네 번째 차례에 놓으려는 상해 임시정부의 강령을 첫 번째로 바꾸도록 한 것도 그였으며, 서로군정서를 조직한 것도 그였다.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번화한 도시 상해로 나가기를 거부한 채 노구를 이끌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서간도에서 항일무장 투쟁의 최전선을 지켰던 이상룡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젊은 투사들을 먼저 걱정하고 챙겼던 그는 누구보다 아끼고 믿었던 젊은 동지 오동진과 김도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둔 이상룡은 그와 더불어 싸워온 젊은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은 공로도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 쓰러져,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까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부디 여러분은 외세 앞에 스스로 힘을 잃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이 늙은이 죽을 때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게. 우리가 귀중하게 여길 것은 성실성뿐이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을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라를 되찾기 전까지는 자신을 유골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 이상룡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이준형은 그의 아들인 동시에 그의 참모였으며 동지였다. 그의 유언대로 아버지를 서간도의 가묘에 묻은 이준형은 아버지의 유골 대신 아버지가 남긴 유고를 안고 귀국했다. 이준형이 아버지의 피와 혼이 담긴 글을 정리하는 동안 일제는 끊임없이 변절과 배반을 강요했다. 반복되는 체포와 구금, 고문을 견디며 아버지 석주 이상룡의 문집 정리를 마친 다음 이준형은 스스로 목의 동맥을 끊었다. 67세 생일에 그는 그렇게 일제의 강요를 영원히 거부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 아들 이준형이 남긴 가슴 아픈 유서였다. 이런 아버지와 아들들이 지켜낸 도저한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일본의 가혹한 압제 속에서 많은 사람이 조국을 배반하고, 심지어는 밀정이 되어 동지를 일제에 팔아넘겼다. 독립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아들과 딸이 그 아버지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나란히 무릎 꿇고 사죄하기도 했다. 안중근의 결의 형제였던 엄인섭은 일제의 밀정이 되어 철혈광복단 단원들을 사형대에 세우기도 했다. 8월을 보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일본과 조국을 배반하고 그들에게 협력하고, 밀정이 되었던 자들과 함께 이상룡과 그의 아들 이준형의 장엄했던 삶이다.
영혼일까 코스모스 머리에 붙은 하얀 나비 바람이 불면 달아났다가도 파르르 떨며 자석처럼 돌아와 붙는다 꽃인 동안 꽃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자꾸 바람을 끌어와서 나비를 깨우는 거겠지
빚을 갚기 어려운 사업자의 부채를 최대 80%까지 정리해주는 채무조정 프로그램 ‘새출발기금’이 오는 10월부터 시행된다. 코로나19 피해 등으로 대출을 90일 이상 연체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순부채가 대상이다. 피폐해진 시장의 실정을 생각하면 미룰 수 없는 조치라는 사실에 공감하지만, 진작부터 ‘편법 수혜’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등 부작용에 대한 걱정이 깊다. 난맥상을 막을 철저한 보완책이 요구된다. 새출발기금 채무조정 최대한도는 15억 원이다. 금융위원회는 총 30조 원 규모의 이 기금을 통해 자영업자 40만 명이 채무조정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한다. 채무조정은 차주의 연체 상태와 채무 종류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선 1개 이상 채무에 3개월 이상 연체가 발생한 부실 차주가 보증부대출 또는 무담보(신용)대출에 대해..
성은 마 씨고 이름은 승미다. 더하면 마승미가 되는데, 나는 그녀의 이름을 쉬 부르지 못하고 입안에서 머금고 있다가 잃어버리기 일쑤다. 하기는 우물쭈물하다가 잃어버리는 것이 어디 이름뿐일까. 무심한 척 웃어넘기지만, 내 속은 갈치 꼬랑지마냥 좁아터져서 그녀의 눈길 하나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담아냄이란 담을 것 보다 크고 넓어야 가능한 일인데, 담을 수 없음을 빤히 알면서도 내밀 수밖에 없는 그릇은 얼마나 옹색한가. 그러함에도, 어쩌지 못하고 그녀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까닭은 그곳에 뒷마당이 있기 때문이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그녀의 집 뒷마당에만 서면 오금이 저려 쩔쩔매고 만다. 그녀의 집 뒷마당은, 그러니까 마승미가 사는 집의 뒷마당은 마당 자체로 산이다. 그 산을 사람들은 두륜산(頭輪山)이라 부른다. 듣자마자 떠올리는 그 산이 틀림없다. 대흥사(大興寺)와 일지암(一枝庵), 초의(草衣)와 다산(茶山)을 품고 있는 바로 그 산이다. 산이 내어준 것은 동쪽 끄트머리의 숲과 계곡과 오솔길인데, 그녀는 산이 내어준 경이로움을 집 뒷마당의 차밭에 오롯이 담아냈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집 뒷마당은 마당 자체가 산이다. 뒷마당에 일군 만 오천 평의 녹차밭 역시 밭이라기보다 산에 가깝다. 굳이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하자면, 산은 서쪽 바다를 향해 누운 소와 같은데, 그 소의 꼬리가 그녀 가족이 일군 집의 뒷마당인 셈이다. 그녀의 집에 들어설 때면, 내 숨결은 밀물을 타는 바닷고기의 지느러미 같다. 강진과 장흥과 완도 앞바다에서 펄럭이다 해남 땅을 향해 나부끼는 하늬바람 같다. 바다남쪽에서 떠올라 산으로 밀려드는 뭉게구름 같다. 첫 휴가를 나온 이등병의 군화 끈 같다. 애인의 손 편지를 받아든 열 개의 손가락 같다. 같은 마음으로, 바다를 향해 누운 두륜산이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가지런하게 늘어선 두륜산 줄기와 계곡들이 그녀의 집 뒷마당에 멈추며 내게 악수를 청한다. 산이 내미는 손을 마주잡고 서면, 비로소 내가 왜 이곳을 그리워하였던지 깨닫게 된다. 산이 전하는 푸르른 온기. 그것은 온전히 마승미 그녀의 것이다. 마승미는 소리꾼이다. 두륜산 계곡을 타고 넘실대는 바람처럼 그녀는 판소리를 한다. 해남 땅을 끼고 도는 바닷길처럼 그녀는 판소리를 한다. 마승미의 판소리에는 산이 있고 바다가 있다. 나무를 닮아 아늑하고 차(茶)를 닮아 포근하다. 그녀의 판소리에는, 어미 같은 아득함과 누이 같은 애틋함이 있다. 그녀의 집 뒷마당에 설 때마다 오금이 저려 쩔쩔맬 수밖에 없는 까닭도 그래서다. 녹차밭을 배경으로 차와 소리를 함께 접하다 보면 누구든 감동하여 오금저리지 않을 수 없다. ‘설아다원’은 소리꾼 마승미의 집이다. 설아다원은 차(茶)를 마시는 카페이고, 언제든 하룻밤 묵었다 갈 수 있는 한옥스테이다. 땅끝이 해남(海南)의 전부가 아니다. 나는, 소리꾼 마승미에게서 바다남쪽(海南)을 듣고, 설아다원에서 바다남쪽(海南)을 느낀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아베 개인을 찬양하고자 함이 아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아베가 이룬 업적을 평가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잠시 민족적 감정을 뒤로 하고 객관적으로 아베를 바라보도록 노력해 보자. 아베는 일본 평화헌법의 개정과 안보 강화에 노력한 정치가로서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아베의 업적은 국내정치 분야보다 국제정치 분야에서 더 두드러진다. 아베는 일본의 지경·지정학적 위상을 재구축함으로써 일본의 대외 영향력 향상에 기여하였다. 회자되는 대표적 사례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쿼드 및 인도-태평양 비전이다. 아베는 CPTPP의 침몰 위기를 극복한 선장이다. 2017년 미국의 일방적으로 탈퇴로 인하여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리더십을 발휘하여 CPTPP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다...
이준석 전 대표에 대한 윤리위 징계 소동으로 된서리를 맞고 있는 여당 국민의힘의 내홍 사태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법원의 가처분신청 인용 결정 이후 국민의힘은 장장 5시간 마라톤 의원총회를 열고 당헌·당규를 정비한 다음 새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정당사상 초유의 분란 속에서 반성도 쇄신도 없는 ‘오기 다툼’뿐이어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대체 어쩌자는 건가. 코로나19 재유행 공포 속 혹독한 경제난 먹구름까지 겹치는데, 막중한 여당의 사명을 아주 망각한 것인가. 입법부에 속한 정당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의 판단에 예속된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다. 사법부의 판결 요지는 ‘당내에 비대위를 출범시킬 비상 상황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당헌·당규를 무리하게 해석해 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사르데뉴왕국(현재의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 니스 남서쪽 190킬로 지점에 있는 그의 고향 제노바. 지중해의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과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곳 부두의 하역인부였던 안토니오 파가니니(Antonio Paganini)는 가난한 여인 테레사 보시아르도(Teresa Bocciardo)를 만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낳았다. 칠삭둥이였던 파가니니. 병치레가 많고 허약했지만 아버지의 만돌린 소리를 들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니콜로가 다섯 살이 되면서 음악에 큰 재능을 보이자 안토니오는 그에게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아들의 음악교육에 큰 열정을 보였던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 지오반니 세르베토(Giovanni Cervetto)에게 아들을 보내 레슨을 받게 했다. 여덟 살이 되면서 파가니니는 소나타를 작곡했고, 열한 살이 되면서 성당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했다. 파가니니가 대중의 주목을 받은 건 그의 나이 열세 살 때. 1795년 여름 연 콘서트가 성공했다. 여기서 번 돈으로 파가니니의 아버지는 아들을 파르마로 보내 알렉상드로 롤라(Alessandro Rolla)에게 지도를 받게 했다. 당대 가장 유명했던 롤라 선생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더 이상 지도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비범했던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새로운 프레이징을 발명해 모든 코드에 혁명을 일으켰고,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와의 사랑을 ‘24개의 카프리치오’로 작곡해 최고의 걸작이란 찬사를 받았다. 천재 음악가 쇼팽과 리스트도 이 악마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런데 왜 그는 악마일까. 1836년 니스의 영주였던 세솔(Cessole) 백작은 파가니니를 초대했다. 세솔은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로 파가니니의 광팬이었다. 파가니니는 세솔의 집에 머물면서 콘서트를 열었다. 그러나 곧 구베른느망(Gouvernement) 가(街) 23번지로 이사해 눌러 살게 됐다. 파가니니는 밤새껏 활주법으로 피치카토 등 음계를 연습했다. 이웃들은 불안해했고 심지어 두려워했다. 장작처럼 마른 몸에 못생긴 얼굴, 목구멍의 질환으로 말을 할 때면 코를 튕기는 버릇. 주민들은 오싹해 했고, 그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파가니니가 살다간 니스. 그곳은 오늘날 비외 니스(Vieux-Nice) 지역이다. 구 도시인만큼 왕국의 위상을 뿜어내는 많은 문화유산과 전통이 살아 숨 쉰다. 동쪽에 니스의 찬란한 밤바다와 야경을 볼 수 있는 콜린성, 남쪽에 미국외무성에서 영국인 산책로로 이어지는 푸른 해변의 포물선이 환상적이다. 서쪽으로 잠시 눈을 돌리면 하얀 석회암의 알프스 해안을 따라 비취의 파이옹 강이 도도히 흐른다. 그 위에 마세나 광장과 국립극장, 오페라극장이 웅장히 서 있다. 감성적인 파가니니가 홀딱 반할만 하다. 수려한 해안에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그곳. 니스에 관광객이 끊임없이 모여드는 이유다.
지난 22일 수원시 팔달구 덕영대로895번길 9-14에 문화 공간이 개관됐다. 이 건물의 이름은 시민들과 이어지는 공간, 어두웠던 과거와 밝은 미래를 잇는다는 뜻을 가진 ‘기억공간 잇-다’다. 기억공간 잇-다는 연면적 84.23㎡, 단층 건물로 전시 공간과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한다. 이 지역은 수원역 동쪽 성매매집결지였다. 빛과 단절된 어둠의 장소였던 구 수원역성매매집결지가 60년 넘게 이곳에 있었다. 잇-다는 지난 해 5월 31일 밤 모든 성매매업소가 자진 폐쇄한 후 도로 개설구간 내 잔여지에 있던 성매매업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 개관과 함께 첫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다. 기획전 ‘집결지의 기억, 도시의 미래를 잇다’는 22일부터 10월 21일까지 열리는데 1900년부터 2022년까지 집결지 형성·변천 과정을 볼 수 있는 근대도시 수원과 수원역 성..
소년은 통창 앞 의자에 혼자 앉아있다. 책을 떨군 것도 모른 채 한 시간 넘도록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창 너머 하늘을 찌르고 선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무 사이에 걸린 구름일까, 나무들 뒤 주차장을 오가는 차와 사람들일까. 소년의 시선을 이끈 것은 마음, 영혼, 무의식같은 그의 내면일 것이다. 어린 날, 그가 점령했던 왕국의 일용할 양식이던 것들. 웃음소리와 고집과 도발로 융성했던 그 아름다운 나라를 찬탈한 이는 누구였을까. 소년은 최근 자퇴한 고교 2년생이었던 내 아들이다. ‘멍 때리고 있던 아들’ 그 아들의 뒷모습에 감동해 ‘멍 때리고 있던 나’, 모자(母子)의 생경한 모습은 어제 헤이리 내 작업실에서의 실황이고. 입시지옥에 영육이 말라가는 것을 보다 못한 남편의 권유가 시작이었고 아들의 빠른 수용으로 일사천리 결정된 자퇴 후, 한 달이 지났다. 아들은 다시 깔깔 웃기 시작했고, 말이 많아졌고, 없었던 애교(?)까지 부린다. 숙제와 시험에서 해방돼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아들 뒤에서 난데없이(물론 동의했지만) 그의 삼시세끼 해결이라는 숙제와 시험을 받은 나는......소리도 못내는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키우며 한숨과 함께 튀어나오곤 했던 말이 더 잦아졌다. ‘아,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덴마크 같은 나라’ 할 때 제일 먼저 ‘국민 행복지수 세계 최고’를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덴마크를 상징하는 바이킹, 레고, 동화 작가 안데르센 등이 행복나라에 환상을 더한다. 아이 둘 키우면서 인간성장에 고민이 깊었던 나는, 덴마크하면 그룬투비(N.F.S Grundtvig)를 빼놓을 수 없다. 시험 없고, 학원 없고, 입시지옥 없다는, 그 꿈같은 덴마크 학교의 초석을 놓은 이가 그룬투비다. 그룬투비가 덴마크 교육에 혁신을 일으킨 시기는 안데르센이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썼던 시기다. 19세기의 덴마크는 실제 소년, 소녀들이 학교는커녕 빵 값을 벌기 위해 거리를 떠돌던, 전국민이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다.(성냥팔이 소녀의 모델은 안데르센 어머니다) 목사였던 그룬투비는 암울한 덴마크를 일으켜 세울 힘은 교육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선택된 소수만 다닐 수 있었던 학교 제도 , 그 교육도 ‘교사의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라는 것이 반기를 들고 ‘폴케호이스콜레’라는 신교육기관을 만들었다. 우리 말로 ‘평민대학‘ ’자유학교’ 정도의 의미인 폴케호이스콜레에는 성별, 연령, 계급, 종교에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게 했고 경쟁과 이기심을 부르는 시험을 없애고 공동체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경쟁보다는 협동’ ‘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행복’을 중요시한 폴케호이스콜레의 교육철학은 그대로 이어져 오늘의 덴마크 공교육을 꽃피우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오늘 아침도 도서관에 간다는 아들을 위해 두 개의 도시락을 싸면서 부모에게 이 고생을 시키지 않는 덴마크 교육을 부러워한다. 아니, 질투한다. 기막히다. 이 와중에 월드뮤직 채널에서 덴마크 작곡가 자콥 게이드(Jacob Gade) 작곡의 탱고곡 ‘Jealousy(질투)’가 흐른다. 이런 걸 동시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의 과한 감정이입인가.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