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路平安(일로평안)을 희구하면서 시작된 2021년도 결코 평안하지 못한 한 해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금세 잡힐 듯했던 코로나는 변이가 변이를 낳으면서 위기에 위기를 겹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무역에서 시작된 강대국 간의 사활을 건 패권경쟁은 전방위로 전선을 넓혀가고 있다. 첨단 기술과 자원이 국제사회 헤게모니를 좌우하는 주요 요인으로 부상하면서, ‘기술냉전’ ‘기술패권’ ‘기술주권’ ‘디지털 냉전’ 등이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되어가고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미·중 기술패권경쟁은 점입가경이다. 미국은 어떤 비용을 부담하더라도 ‘디지털 만리장성’을 쌓아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봉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중국도 ‘반도체전문대학’도 설립하는 등 반도체의 설계, 제조, 조립, 시험 중 길목이 되는 기술..
첫아이 소풍 도시락을 호들갑 떨며 싸던 때가 있었다. 새 모이 마냥 밥 몇 숟갈 먹는 아이인데 잔칫상 차리듯 준비했다. 쪽잠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재료를 손질했다. 오색 꼬마 김밥, 별 모양 소고기 주먹밥, 메추리알로 만든 병아리, 햄과 채소를 꽃잎처럼 오려낸 샐러드를 담았다. 내 아이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도시락이었다. 엄마가 처음이라 그게 최선의 모성애인 줄 알았다. 그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나는 병설유치원 특수학급에서 일했다. 공교롭게도 첫애와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을 맡았다. 그래서인지 내 눈에는 덩치만 컸지 아직 아기들로 보였다. 엄마 품을 떠나 규범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게 짠하고 뭉클하고 안타깝고 대견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교사라기보다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해 봄날 아이들과 소풍을 갔다. 점심이 되어 각자 집..
코로나19 팬데믹이 잦아들기는커녕 새로운 변종 오미크론 출현으로 폭발적인 위세를 떨치고 있다. K-방역을 자랑하던 정부도 번지는 바이러스 태풍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 대선 레이스에 돌입한 여야 정치권이 자영업자 손실보상금을 놓고 ‘하느냐’, ‘마느냐’ 다투던 끝에 이번에는 ‘함께 하자, 말자’ 전쟁을 벌이고 있다. 경각에 다다라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자영업자들 사정을 진정으로 헤아린다면 치졸한 ‘선거 셈법’을 멈추고 당장 머리를 맞대는 게 옳다. 608조 원에 이르는 내년 예산이 국회를 통과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정치권이 ‘100조 원’ 추경을 거론하는 일종의 ‘추경 중독증’ 문제는 워낙 사정이 급박한 만큼 일단 논외로 치자.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와 여당은 애초 25조 원을 투입해 연내에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
1980년 5월 21일 서울 변두리 여관방, 며칠 전 광주 도청 앞 시위로 검거대상 1호로 지목된 전남대 교수 몇 사람이 피신 중이었다. TV에는 ‘폭도들이 광주를 폭도에 장악했고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가 뒤덮었다. 광주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 피비린내가 진동할 때, 뉴스를 보던 송기숙 선생이 벌떡 일어섰다. “갑시다. 광주사람들이 다 죽는다는데 우리만 여기서 이럴 수는 없소. 살아있더라도 평생 부끄러운 삶일 것이오. 차라리 가서 같이 싸우고 같이 죽읍시다. 내려갑시다.” 그 길로 3명의 전남대 교수는 전라선 막차를 타고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갔다. 시민수습위를 조직하고 활동하다 계엄군에 체포되어 보안사의 모진 고문을 겪어야만 했다. ‘내란죄 중요임무종사’라는 죄명이었다. 소설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 선생이 며칠 전..
전직이든 현직이든 교사가 모이면 두 집단이 입을 모아서 하는 말이 ‘학교는 참 변하지 않는다’이다. 몇십 년 전과 지금의 교실의 풍경을 사진 찍어서 놓고 비교해보면 전자제품들이 들어와 있는 것 빼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는 칠판 앞에 서 있고 학생들은 책상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 놓고 앉아있다. 수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별 활동이나 학생 중심 활동 같은 게 생겨서 예전처럼 책상에 앉아만 있는 건 아니지만 큰 틀에선 달라진 게 없다. 학교의 모습 중 정말 한치의 변화도 없는 것 중의 한 가지가 교과서와 관련된 풍경들이다. 교과서 배부 및 수령 방식은 1970년대나 2000년대나 2021년이나 똑같다. 학생들은 학기 말이나 학기 초에 열 권이 넘는 교과서를 한꺼번에 지급받고, 그걸 가방에 미어져라 쑤셔 넣은 채 집에 간다. 교과서 지급받는 날 부모님이 교..
곡예는 완성된 기술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훈련 머리카락 위를 전차처럼 전진하는 마음 바늘 끝에 선 낙타가 세계를 긴장시킨다 슬픔을 쌓아 도달한 높이에 본 적 없는 우아한 자세를 전시한다 길에서 길을 뽑아 촘촘한 안전망을 허공에 설치하는 곡예는 신에게 드리는 경배 실핏줄처럼 번진 수많은 갈래 중에 고난을 걸어간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기울어지고 냉정해지기 위해 불을 삼킨다 한 발도 놓치지 않고 칼날 위에 대평원을 건설하는 중이다. 곡예는
더불어민주당에서 내년 3월 대선과 함께 실시되는 국회의원 재보선의 무공천론이 검토되고 있다. 재보선 지역은 서울 종로(이낙연 전 민주당 의원), 서초갑(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 경기 안성(이규민 전 민주당 의원), 대구 중·남구(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 충북 청주 상당구(정정순 전 민주당 의원) 등 5곳이다. 이 가운데 넓은 의미로 해석해 민주당 귀책사유 지역은 종로와 안성, 청주 상당 등 3곳이다. 종로의 경우 이낙연 전 대표가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의원직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안성 및 청주 상당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을 받았다. 그간 시민사회 등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비리 등으로 재보선의 사유를 제공한 책임이 있는 정당은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왔지만 정치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민주당은 지난 4·7 서울..
국회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 미디어 제도개혁을 위해 다시 움직이고 있다. 지난 9월 29일 여당과 야당은 언론중재법 개정안(허위조작정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놓고 크게 충돌한 후, 언론중재법과 방송법을 포함하여 국회에 제출된 미디어 관련법 개정안을 통합 논의하기 위해 국회 내에 언론‧미디어 제도개선 특별위원회(언론특위)를 오는 12월 31일까지 운영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여야는 언론특위 구성에 합의한 후 48일이 지난 11월 15일 전체회의를 열어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했고, 이어 11월 25일에는 문화부 장관과 방송통신위원장을 불러 미디어법 개정안과 관련하여 의견을 경청했다. 12월 2일에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관련 세미나를 열었고, 6일에는 가짜뉴스 규제와 국민추천위원회 구성을 통한 공영방..
축제 끝난 이른 아침을 기억하는가. 광란의 밤이 훑고 간 취기 남은 몽롱한 눈앞에 펼쳐지는 일상이 갑자기 낯설다. 어깨 비듬을 털며 지하도로 내려가는 사람들, 상가 셔터를 올리고 째지게 하품하는 상인들, 도로를 메워가는 자동차들...... 꿈이었던가. 지난밤이 전생인 듯 하다. 그 생경한 아침의 감정을 말과 글로 풀면 반이나 전할까. 그럴 때 도와주는 음악이 있다. 영화 흑인 오르페(Black Orpheus)의 주제곡 ‘카니발의 아침’. 인생에서 몇 번 안 될 그 생경한 순간의 감정을 넘치게 표현해준다. 영화 ‘흑인 오르페(감독 마르셀 까뮈)’는 1959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는 60년대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로 모든 영화,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겠지만) 80년대 청춘을 보낸 나는, 지난 영화는 볼 수가 없어 심..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 옳지 못한 짓 하고 엉뚱한 수작으로 남을 속이려 한다는 속담이다. 매끈한 얼굴과 날씬한 몸매, 능숙한 말솜씨의 ‘AI윤석열’은 느닷없는 오리발처럼 낯설고 당혹스럽다. AI은 인공지능이다. 신기술 AI가 매만진 저 윤석열은 윤 후보가 아니다. 이준석 대표의 젊은 비단주머니가 너무 나갔나, 저건 사기(詐欺)다. 날조(捏造)다. 신기술 따위 제목 이전에 상식으로 보라. 젊은 여자들을 암소로 ‘출연시킨’, 더러운 서울우유 광고처럼 국민 속이는 짓이다. 그 ‘암소여자 광고’처럼 사과하고 바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어떤가. 바카야로(馬鹿野郎 마록야랑)는 ‘바보야’하는 일본의 욕이다. 원래는 중국산(産)이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는 요즘 말로 가짜뉴스(fake news)로 풀 수 있다. 사슴을 가리켜(指) 말이라 한다(爲)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