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뜨거웠다. 군부쿠테타로 정권을 찬탈한 반민주 세력에 대항하여 광주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시민들의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적 염원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결국 자국민을 향한 무차별 발포를 진행했고, 이는 우리나라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상처가 곪고 터져 나가도록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외침을 아직도 우리는 정치적 논쟁거리로 만들며 그들의 상처를 보다듬어 주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피해자는 나왔으나 가해자는 나오지 않은 부끄러운 현실...법정기념일까지 지..
택시 안에서 오랜만에 가곡 ‘비목’을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처연한 가락, 시 같은 노랫말에 끌려 즐겼던(?) 노래인데 지어진 사연을 알고 쉽게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됐다. 1960년대, DMZ 주변을 수색하던 육군 소위가 무덤 하나를 발견한다. 돌무덤 앞, 나뭇가지로 세운 비(碑) 위에 녹슨 철모가 걸려있었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 스러진 한 청춘이 첩첩산골 잡초 속, 이름도 없이 비목으로 남은 것을 보고 가슴 아팠던 소위. 훗날 방송국 음악 PD로 재직 중 그때의 심정을 떠올려 노랫말을 만든다. 비목 작사가 한명희(82) 전 국립국악원장 이야기다. 전쟁과 무명용사 애사(哀史)가 우리나라에만 있었겠는가. 비목을 떠올리게 하는 월드뮤직이 몇 곡 있는데 ‘백학’(Cranes)이 대표적이다.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 하는 육성 섞인 전주를 들으면 중년 이상 세대..
지난 40여 년간 일본의 최고액권 지폐인 일만엔권의 초상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일본의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서양문명의 도입을 선도한 후쿠자와 유키치를 일본인들은 지금도 근대화의 아버지로 숭앙한다. ‘하늘은 사람 위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그의 저술 '학문의 권장'의 첫 문장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70년대에 발표한 이 책이 22만 부가 팔렸다고 주장했다. 인쇄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학문의 권장'이 실제 그만큼 팔렸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일본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할복자살도 마다하지 않는 사무라이 문화를 향해 통렬한 비판의 포문을 연 것도 그였다. 정부가 국민에게 베푸는 시혜는 정부가 해야 할 당연한 책임이므로 국민이 고마워하며 복..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기습해오자 고대 로마인들이 더욱 놀랐던 것은 코끼리 군단이었다. 말들이 두려워 날뛰자 로마의 기마병들은 어찌 되었겠는가? 소총부대 앞에 난데없이 탱크여단이 나타난 격이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코끼리를 어떻게 길들인 것일까? 기둥에 매어 단다고 해도 기둥 채 뽑아버리는 건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 - 코끼리를 조련하는 방법 인도의 오래된 이야기라고 한다. 어린 코끼리를 굵고 튼튼한 줄로 발을 묶어 말뚝에 매어 놓는다. 아무리 기를 써도 말뚝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해버리면 점차 코끼리는 밧줄을 이길 수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이렇게 자라난 코끼리는 발에 줄을 “묶기만 해도” 그 큰 몸집이 뿜어내는 힘을 알아서 포기해버린다고 한다. 조작된 의식은 행동을 통제하고 본래의 능력까지 제압해버릴 수 있다. 한국 전쟁의 비극과 분단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은 최인훈의 작품 ‘광장’의 주인공은 이명준이다. 이어 쓴 ‘회색인’의 주인공은 같은 “준”자로 끝나는 독고준이 주역이다. 준(俊)은 뛰어났다는 뜻도 있고 6월을 의미하는 June이기도 하다. 6.25 한국전쟁의 서사가 박힌 명명(命名)이다. 따지고 보면 이 나라 전체가 아직도 “준”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는 역사에 속해 있다. 독고준이 한국사를 환상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가 ‘회색인’의 속편 ‘서유기’에 담겨 있다. 서유기(西遊記)라는 제목은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이 거쳐간 정신사의 유랑을 빗댄 은유라고 할까. 그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요괴들과 마주쳤는가? 독고준도 요괴에게 붙잡힌다. 이미 해방이 되었는데도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던 것이다. 독고준은 ‘이 자가 일본이 손든 걸 모르는 모양이군’,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 해방된 조선 땅의 일본 헌병 졸병이 보고한다. “수상한 놈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상관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 자식아, 조선놈을 잡았는데 수상하면 어떻구 아니면 어떻다는 거야? 조선놈이면 그만이야, 알았나? 조선놈이면 나쁜 놈이야. 조선놈이기 때문에 수상한 거야. 증거가 있어서 수상한 게 아니란 말이야. 조선놈이기 때문에 증거가 있을 터이고, 그 증거는 수상한 게 틀림 없단 말이야, 알겠나? 조선놈이니까... 에익, 이 밥통 같으니라고. 졸지에 죄인이 된 독고준은 뼈저리게 느낀다. 해방이 되었어도 변한 건 없구나! 그러나 그건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실제로 몸은 조선사람이나 그 머리는 일본 헌병인 자들이 1945년 8월 15일 이후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 후예들이 지금까지도 어떻게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다. '서유기'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조선 땅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제국의 첩자들은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들이 내보내는 비밀 단파방송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식민지 당국이 극력 인멸코자 했던 종족적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열등의식의 방향으로 유도했던 국학이 점차 자신을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제국이 절대 이권을 주장해야 할 조선반도가 이같이 방자한 자유인이 될 때 그 같은 이웃을 가진 제국은 질식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일말의 희망은 남아 있었다. 제국의 방송은 다음 대목에 들어가면서 목소리를 잠시 낮추었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서 마치 비밀을 누설하는 분위기다. “조선의 노예들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난 날의 그리웠던 발길질과 뺨맞기, 바가야로와 센징 하던 그 그리운 낱말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 “덴노 헤이까 반자이!”의 밧줄 아니나 다를까, 관동군 출신의 한 조선인 장교가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일본제국이 밀어붙인 만주국 프로젝트를 고스란히 관철시키자 “덴노 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수준의 찬양이 나라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자가 일본 헌병과 피를 나눈 동지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지고 “수상한 조선놈들”을 잡아 족치고 죽이고 남몰래 매장했다는 사실도 쉬쉬했다. 지난 날의 그리웠던 발길질과 뺨맞기였다. 바가야로와 센징 하던 그 그리운 낱말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코끼리들의 순종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밧줄의 기억은 어찌 그리도 질기고 질긴지 세대를 넘어 지금도 위력을 발휘한다. 수상한 놈들 싹 다 잡아들여! 증거가 있어서 수상한 게 아니라니까. 조선 놈이면 나쁜 놈이야. 이 밥통 같은.... 해방이 된 지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일본 헌병의 난폭한 통치는 여기저기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거짓말로 모략하고 함부로 감시, 사찰하고 잔혹하게 이런 저런 폭력을 휘두르고 아무나 수상하다고 찍으면 잡아넣고 그래서 절세의 영웅 칭호까지 받는 세상은 해방된 조국이 아니다.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아닐세, 고개를 가로 젖기만 하면 알아서 감춰주고 변론해주는 언론은 하나 둘이 아니다. 요즘 갑자기 ‘덴노 헤이까 반자이!’ 찬가가 또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어린 코끼리의 발에 오래 전부터 밧줄을 묶어둔 자들의 음흉한 기획이다. 그런데 돌격! 하면 무조건 돌격하는 코끼리 떼가 되어버린, 코가 길어 슬픈 짐승들은 결국 패잔병이 되고 만다. 이긴 것은 한니발이 아니라 로마의 스키피오였다. “코끼리들의 반란”, '서유기 2'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으로 LH는 물론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게다가 LH 일부 직원들이 투기 의혹을 비판하는 국민들을 조롱하는가 하면 개인정보 조회를 거부해 분노를 키우고 있다. 정부가 3기 신도시 땅투기 의혹에 대한 전수조사에 들어간 가운데 1차 조사 대상인 국토교통부 공무원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 일부가 조사에 필요한 개인정보 이용에 불응한 것이다. 또 투기 항의집회가 열리자 LH 직원으로 추정되는 누리꾼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저희 본부에는 동자동 재개발 반대 시위함. 근데 28층이라 하나도 안 들림”이라는 글을 올렸다.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기가 막히다. 반면 LH 고위 간부가 “책임을 통감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코로나19와 겹쳐 서민..
표현된 것은 힘을 잃는다 솟구치기 전, 튀어나가기 전 가장 센 힘은 표현되기 직전(直前)에 모여 있다 쿠데타군의 총칼 앞에 서서 미얀마 여인이 그릇을 두드린다 총알이 날아오면 피를 흘리며 찌그러질 얇디 얇은 자신을 치고 있다 공포와 원망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기 직전, 그렁그렁한 눈 통곡이 터지기 직전, 울먹이며 깨문 입술 수많은 사람들의 두개골이 부서지고 내장이 흩어진 살육의 거리에서 울음을 참고 쿠데타군의 총칼 앞에 우뚝 선 미얀마 여인 달려나가지 못하는 순간 울어도 울지 못하는 순간 고통을 터트리지 못하는,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선 극한의 순간에 울 수 없는 자신을 당당당당 당당당당 두드린다 총알이 날아오기 직전 눈물의 직전에 몸의 예감을 따라 흘러온 인류는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변화의 직전에 서서 인간의 고유한 사랑을 최대한 끌어올려..
1. "어차피 한 두 달이 지나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서 물 흐르듯이 지나가겠지". 일파만파로 충격이 확산되고 있는 LH 땅투기 사건에 대해서, 해당 회사의 직원이 올렸다는 글이다. 이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이 조직의 구성원이 오랜 역사를 통해 체화(體化)시킨 일종의 확신이다. 해방 되기 4년 전인 1941년 ‘조선주택영단’에서 출발했다. 이후 ‘대한주택영단’으로 개명했다가 ‘대한주택공사’, ‘토지금고’, ‘한국토지개발공사’, ‘한국토지공사’ 그리고 2009년부터 현재의 LH(한국토지주택공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러한 80여년이 흐르는 동안 국토교통부 산하 공공기관인 이 조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민간 토지를 수용하고 그것을 건설업체에 불하하거나 직접 주택을 지어 공급하면서, 배후권력인 국토교통부의 힘을 빌린 한국 토..
군 쿠데타로 빚어진 미얀마의 정정이 혼미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시민들의 불복종 시위 확산에 대해 군부 정권이 무차별 유혈 진압에 나서며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3일에는 하루에만 시민 4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하고 소년들을 쇠사슬로 고문하며 시민들은 절규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이 들끓자 군정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국제 로비스트를 고용했다. 그리고 미얀마의 민간정부를 이끌었고 민주화의 상징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중국과 가까워져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라는 고도의 심리전까지 펼치고 있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는 지난 1962년 군 쿠데타 이후 2015년 총선에서 민주화 세력이 승리하기까지 50여년간 군부 독재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천명이 희..
한국 주요 일간지의 발행부수는 극비였다. ‘어쩌다’ 조선일보 등의 신문발행부수 조작 사실이 드러났다. 사실 주요 일간지들은 지난 수십 년 간 유료부수 조작이라는 ‘사기행각’을 지속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권력과 유착을 넘어 권력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문의 발행부수는 단순한 사세 과시 수단만은 아니다. 이번에 부수 조작사실은 발행부수 인증기관인 ABC협회에 근무하는 직원의 ‘양심선언’으로 드러났다. 문화부의 유가부수 실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지난해 ABC협회는 ‘1등 신문’ ‘조선일보’의 유가 부수를 116만 2953부라고 공개했는데, 표본 실사 결과 그 절반 수준인 58만 부에 불과했다. 73만 3254부라고 공개한 '동아'와 19만 2853부라고 공개한 ‘한겨레’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발행부수는 광고단가 산정을 포..
안전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방구석1열 모니터엔 드론이 공유해주는 낯설고 설레이는 영상들이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아진다 들떠, 끼니도 거른 채 내 무릎 뼈는 상기된 듯 파르르 책상 의자가 마치 이코노믹 좌석처럼 불편하지만 와인 잔에 쏟아 붓던 다양한 불안들을 마신다 허기진 천 리 길, 시큰한 발목으로 찍어놓은 나라 밖 스탬프 남아있는 빈칸들이 긴 탄식을 한다 낯선 곳의 새벽녘 공기를 여닫던 문들이 신기루처럼 떠오르고 영상들은 세계의 아름다운 곳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유혹을 한다 일상의 바람이 벼랑 아래로 매번 고꾸라지고 모국어를 남발하는 불법 체류자처럼 수시로 넘보고 있는 이국의 땅 집 밖은 우한의 바람이 미친 듯 불고 손톱 아래 요거트가 끈적거린다 소비하지 못한 화장품을 치덕치덕 바르고 유리 발판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찝찝한 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