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 겨울이니 있을 법한 매서운 추위와 폭설, 불어대는 바람이 엎친데 더해 코로나19 팬데믹까지 덮쳐 그야말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하나 둘 두꺼운 옷을 벗고 봄 마중에 나설 때가 되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하지만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 봄을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겠지만 누구에게나 봄이 똑같이 찾아오진 않나보다. 이리저리 휘둘러보아도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괜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하며 에둘러 봐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저 날씨나 코로나, 시끄러운 세상 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곧 다가올 것이 분명한 봄 마중과 꽃소식에도 마음 편치 않음은 무슨 까닭일까? 사계는 순리대로 지나치는 법이지만 그 따르는 몸과 마음이 곤해 있음을 여실히 느낀다.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예..
한탄강은 50만년 세월이 빚은 자연생태와 역사가 흐르는 강이다. 지난해 7월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네스코(UNESCO) 제209차 집행이사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곳은 한탄강이 흐르는 경기도 포천시 유역, 연천군 유역, 강원도 철원군 유역의 화적연, 비둘기낭 폭포, 아우라지베개용암, 재인폭포, 직탕폭포, 고석정, 철원 용암대지 등 총 26곳의 지질·문화 명소들이다. 지난 2010년 10월 제주도 전체, 2017년 5월 경북 청송군, 2018년 4월 광주 무등산권에 이어 우리나라 네 번째 세계지질공원이 됐다. 유네스코 지질공원은 미적 가치, 과학적 중요성과 고고학ㆍ문화ㆍ생태학ㆍ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곳을 지정한다. 세계(문화·자연)유산, 세계생물권보전지역과 함께 유네스코의 3대 보호제도다. 보호..
코로나19로 인한 실물 경제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사회적경제기업의 재정 여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지난해 3월 기재부가 발표한 제4차 협동조합 실태조사에서 따르면, 협동조합 3곳 가운데 2곳의 자본금은 채 1억 원에도 미치지 않은 것으로 조사 된 바 있다. 자금 조달 방법도 10곳 가운데 8곳이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증자 외에는 묘안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경제기업의 버팀목이 되어야 할 사회적금융 활성화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대차대조표와 담보를 중심으로 한 민간 금융 평가 방식을 들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경제기업에 대한 외부 투자자나 금융기관의 불신은 사회적금융 활성화를 위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과제다. 예컨대 협동조합의 조합원 출자금은 협동조합기본법상 ‘자본’으로 인..
가슴이 답답하고 속으로 열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깊이 못자고 3,4시간마다 깬다. 검사상 우울과 불안 그리고 적대감을 보인다. 화병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의 이 젊은 아가씨는 엄마와 마주할 때 심해진다. 자신의 증상은 엄하게 많이 때리면서 키운 폭력적인 엄마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도 여전히 엄마는 본인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쓸데없이 예민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여러 치료 들을 거치면서 엄마의 지나친 통제와 폭력이 원인일 수 있지만 엄마도 또 부모에게서 대대로 물려받은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대에서라도 이런 대물림을 끊으려고 노력중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한의원에 내원하게 되었다. 가능할까? 심리상담의 한 분야에 가족치료라는 분야가 있다. 한 개인은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
지난 2009년 8월, 목포대학교에서 한ㆍ일 씨알사상 포럼이 열렸다. 나는 그 학술행사의 기획위원장이었다. 그 때 가장 인상적인 발표자는 오가와 하루히사(당시 동경대학 철학과 교수)였다. 그는 특히 다석 유영모(1890-1981)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는 " 선생의 '생각의 고결함'과 '생활의 검소함'은 21세기 생태위기를 구할 수 있는 심오한 사상"이라며, "죽을 때까지 한국의 다석 유영모를 연구하겠다", 고 엄숙히 선언했다. 뭉클했다. 다석은 심지어 백 리 먼 길도 걸어다녔다. 선생은 51세부터 91세에 죽을 때까지 1일1식을 했으며, 부인과는 '해혼(解婚)'이라 하여 각방을 썼다. 평소 "인류의 모든 문제는 '食'과 '色'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실천한 것이다. 선생은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사색과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코로나-19는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재앙이다. 과식, 과소비, 과속을 특징으로 하는 인류사회는 지난 200년간 난폭하게 자연을 파괴하여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급속한 자멸의 과정이다. 어느 진보적인 환경론자는 이 바이러스 재앙 이전에 지구의 수명은 25년 남았다고 단정했다. 하루에 한 끼의 식사를 하고서도 아흔 살 넘게 산 다석 선생의 독특한 양생법을 현대의학은 그다지 탁월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수제자 함석헌도 스승을 따라서 성실하게 하루 한 끼를 실천했다. 스승들이 세상을 떠나고 긴 세월이 지난 후, 나는 회복식을 포함하여 50일 단식을 했다. 다석 선생처럼 나도 평생 1일1식 하려고 시도했으나, 두 달만에 멈췄다.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석사상 연구자들은 "食事는 葬事"라는 어록에 특별히 주목한다. 인간이 살기 위하여 먹는 음식은 예외 없이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을 죽인 것이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타자를 섭취하여 연명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식사는 그 희생의 제물들을 위하여 장사를 지내는 제사여야 옳다. 그의 1일1식은 최소한의 살생을 실천한 것이다. 그 '생각의 고결함'과 '생활의 검소함'을 동서양의 그 어떤 철학자에게서도 볼 수 없고, 오직 유영모에게만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 녹색당이 지난 1986년 이태리에서 시작된 '슬로우 푸드 운동'을 유럽 전역을 넘어 글로벌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운동의 핵심목표는 이른 바 '패스트 푸드' 산업의 악마성에 대항하고, 그 반대가치를 실천하는 '슬로우 푸드' 운동의 국제연대 활동 강화다. 국내에도 지부가 있다. 나는 다석사상이 '슬로우 푸드' 운동의 바탕철학으로 매우 적합하다고 본다. 국내 운동가들이 다석사상을 공부하면 좋을 거다. 나는 활동가는 아니지만, 실천하며 산다. 이 글이 그 분들께 알려져서 자연스럽게 소통과 회합이 이뤄지면 좋겠다. 'fast'와 'slow'의 대결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높은 철학이 끝내 천한 장사치를 이긴다.
윤석열 검찰 총장이 다시금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민주당의 중대범죄수사청 설립 추진 덕분이다. 검찰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검찰에 지나치게 힘이 쏠렸었고, 힘이 넘치면 어떤 존재이든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사권 조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권력 분산을 통한 상호 견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힘의 분산”이 아니라, “힘의 박탈”인 것 같아 걱정스럽다. 박탈된 힘은 다시 어디론가 “전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이된 힘”을 소유하게 된 존재는 다시금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지난 자유당 정권 시절, 경찰이 부패와 문제의 근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런 예견은 충분히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권력이 선(善)하면” 그런 문제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들이 신도시 예정 지역인 광명·시흥에 100억원대의 땅 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총리실 지휘아래 3기 신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LH뿐 아니라 국토부, 관계 공공기관에 걸쳐 발본색원, 전수조사를 지시한 것도 그만큼 사안이 엄중함을 의미한다. 우리 공직사회의 도덕적 해이는 오랜 역사와 뿌리를 갖고 있다. 권력형 게이트는 물론 세무비리, 각종 뇌물, 특혜성 비상장주식 보유, 자녀 입시·취업 특혜, 성상납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TI)는 2020년 한국의 국가청렴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가운데 23위로 발표했다. 전년보다 4계단 올랐지만 여전히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왜 그럴까. 우리 사회의 구조를 보자. 우선 이번 사건을 맡는 정부의 전담팀은 도마위에 오른 LH 직원은 물론 국토부와 관계 기관 등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것이다. 그런데 조사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제대로 이뤄질까. 역대 정부에서 보면 관료 집단 이기주의로 조사 과정에 보호막이 쳐지고, 설령 비위 사실이 더 드러나도 정권에 부담이 될 수 있어 축소지향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조사가 이뤄져 관련자들을 수사 의뢰하고 법정에 간다고 치자. 여기서는 유전무죄의 법칙이 작동한다.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를 내세우면 얼마든지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시간이 흘러 국민의 관심에서 비켜나면 공직자에 대한 처벌 수위는 후퇴하고 제도개혁은 허공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잠시 움추렸던 공직사회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비리를 저지르는 공직자나 그것을 다스려야 하는 또다른 공직자, 법적인 심판자, 국회 등 제도개선의 주체들, 모두 그동안 국민들에게 투영된 모습을 보라. 국가청렴도를 높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문제의 본질이다. 부·명예·정보로 구축된 고위·특권층의 성채(城砦)는 스스로 문을 열고 내려오지 않는 한 외부에서 허물기가 쉽지 않다. 이번 LH 직원들의 도덕적 또는 법적 일탈 의혹은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빙산의 일각이라 할 수 있다. 그 완결판은 역대 고위 공직자(후보)들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런 그들이 공공기관 직원들의 얼굴이었다. 이번만큼은 조사·수사가 제대로 이뤄져야 하고 그러리라 믿는다. 혹시라도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어느 일각에서 축소·은폐하려 한다면 현 정부를 더 힘들게 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고위공직자의 다주택 문제처럼 머뭇거리면 더 이상 국정 동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여러 재발방지 대책이 필요하겠지만 이번 기회에 공공기관의 중·하위직 재산 공개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그것도 공직자가 실거주하는 행정복지센터(옛 동사무소)에 열람하도록 해 상시 주민 감시 체제를 구축하자. 차기 대선 주자들에게 간곡히 요청한다. 철옹성처럼 구축돼 있는 한국사회의 부패구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인사청문회를 더욱 엄격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이 공약만 지켜도 역사에 남을 것이다.
내 방에는 아직도 예전의 카세트테이프들로 가득하다. 그 시절 돈이 모이는 대로 레코드 가게에 달려가 하나둘씩 사서 듣고 모았던 보물 같은 것들이, 이제는 먼지 쌓인 골동품이 되었다. 가끔 옛날 생각날 때 한 번씩 듣고 싶어도, 플레이어가 없어 이내 다시 내려놓게 된다. 차에서 들어볼까 하다가도, 요새 카 오디오는 카세트는커녕 CD 플레이어마저도 없는 게 대부분이라 또다시 포기하고 스트리밍 앱을 켠다. CD가 나왔을 때 일부 마니아들은 아날로그 방식의 LP에 비해 절대 음질이 떨어지기에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관리와 운용의 용이성 덕분에 CD는 LP를 누르며 차세대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고, 나름 오랫동안을 음악을 담는 중요 매체로 살아남았다. 그 후 대안으로 MD가 나왔지만 실패하게 되고, MP3의 등장 이후 그 무형의 파..
창밖에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고흐가 생 뽈(Saint Paul) 정신병동에 들어간 1889년 어느 여름날, “그가 본” 바깥 풍경이었다. 고흐가 화실로 썼던 방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남아 있는 이곳은 본래 11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이었다. 1605년 프랜시스코 교단의 한 수도자가 여기에 정신병동을 세우자 아예 그렇게 역할이 바뀐 지 오래였다. 별이 빛나는 밤, 그 탄생 빈 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태어난 자리는 “침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그림 바로 옆 작은 방이었다. 고흐에게 특별히 주어진 화실이었다. 생 뽈 시절은 기묘하게도 고흐에게 가장 많은 작품들이 그려진 시기였다. 그의 정신은 뭔가에 감전된 듯 폭발 상태였다. 고흐에게 힘겨웠던 건 밤에 본 풍경을 낮에 되살려 그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마을은 근처 생 레미(Saint Remy)를 떠올렸다.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출생지로 유명해 사람들이 법석거리는 이곳을 그는 조용한 시골동네로 바꾸어 그렸다. 한 켠에는 사이프러스(Cypress)라고 불리는 측백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높다랗게 서 있다. 12세기에 세워진 생 마르탱(Saint Martin) 성당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고 주변 언덕은 출렁이는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그림이다. 역시 “별이 빛나는 밤”에서 압권은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달과 함께,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밤하늘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무엇과 만날까?” 돈 맥클린의 “빈센트” 돈 맥클린(Don McLean)이 1971년 빈센트 반 고흐를 위해 부른 노래 “빈센트, 별이 빛나는 밤(Vincent, Starry starry night)”은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올라 전 세계에 퍼져나간 노래다. 돈 맥클린은 고흐의 전기(傳記)를 읽다가 그가 미친 게 아니었고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했을 뿐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노래 가사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어느 여름 날의 풍경을 내다 보렴, 내 영혼의 어느 자리인가에 어둠이 깔려 있다는 걸 깨우친 시선으로 말일세...이제야 빈센트 당신이 무슨 말을 그리도 애써 내게 하려 했는지 알아듣겠어. 얼마나 고통스럽게 자신의 영혼을 도닥거리며 일으켜 세우려 했는지. 그래서 그 영혼이 자유함을 얻게 하려 했는지. 하지만 세상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어. 그래도 이제는 들으려 할지 몰라.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밤이여.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ry, Starry night”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강렬하게 남긴 인상은 색감의 선택이었다. 고흐의 세계에서 색은 온통 격렬하게 춤을 춘다. 감당하기 어려운 파도다. 나의 감상평은 이런 것이었다. 그림 앞에 서다 “내게는 밤하늘에 폭풍이 몰아치는 게 보인단다. 별은 그렇게 폭풍 속에서 태어나는 게 아닐지? 때로 자기 인생에 거센 바람이 몰아쳐 오는 것 같은 날이면 두려워말고 내 안에서 별이 태어나는구나, 하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 순간 이 그림은 청춘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부터 이 그림 앞에 설 때 이들이 만나게 되는 건 때로 자신의 삶이 겪어내는 고통과 그걸 넘어서 보게 되는 새로운 미래이면 싶다. 이게 빈센트가 정작 하려던 이야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흐의 영혼을 뒤흔든 빛의 소용돌이는 정물화가 아니었다. 살아움직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다. 다시 그림을 본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묘목이었을 사이프러스가 어디까지 자라는 걸까? 고흐의 영혼의 키는 그렇게 높았다. 생 레미 마을 중심에는 생 마르탱 성당이 서 있다고 했다. 고흐 곁에는 그를 돌봐주는 프레데릭 살르(Frédéric Salles)라는 개신교 목사가 있었다. 생 뽈 병원은 수도원의 풍채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백년 된 사원(寺院)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젊은 날 신학생이었고 선교사의 경력까지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신세계를 말해준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고흐는 탄광의 광부를 비롯해서 최하층 빈민들에게 다가가 열정적인 선교를 했던 바 있다. “성직자 고흐”, 상상하기 어렵다. 굴곡 많은 인생사였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서 사원이 무너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늘까지 닿아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생 마르탱 성당으로 표현된 성소(聖所)는 그가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던 정신의 열망과 거처였다. 시대와 불화했던 한 빈곤한 천재화가의 고독을 치유해줄 유일한 보루였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별들, 그 빙빙 돌아치는 광선의 환영에서 예기치 않은 천체의 무도곡(舞蹈曲)을 듣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신탁(信託)에 귀가 열린 자에게 허락된 은총이다. 신탁의 힘과 소크라테스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polis) 정치”를 발명했다. 도시 국가의 운명을 치열한 이성의 논쟁으로 풀어나가는 작업은 “로고스(logos)의 건축가”들을 출몰하게 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연 선두다. 로고스는 이성의 정점에 있는 사유의 원리다. 인류 역사 최고의 지성 플라톤에게도 넘을 수 없는 스승이 있었다. 그 스승은 그리스의 정신을 혼란케 한 죄목으로 독배를 마시는 사형에 처하고 만다. 왜 그런 처형을 당했던 것일까? 당연한 것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질문하는 소크라테스는 답이 궁색해지는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했다. 결국 미움을 샀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성의 건축가들을 기른 이와 신탁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그러나 신전은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중심이다. 정신의 절대적 거점은 시민들의 광장 아고라가 아니었다. 신전을 거쳐 아고라이지, 아고라의 변두리에 신전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이 신의 음성에 의심을 품는다. 그럴 리 없다는 겸허한 자의 본능이다. 신탁은 그에게 정치조직 민회로 가지 말고 시민들의 삶으로 들어가라고 이른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시작되는 현장이었다. 질문받는 자들의 무지가 드러나고 폭로되는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이런 소크라테스가 대다수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질서 위에서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반가울 까닭이 없다. 이른바 자만 또는 오만으로 번역되는 “휴브리스(hubris/hybris)”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도전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쫓아도 계속 들러붙는 ‘등에(gadfly)’같은 존재였다. 영구적 추방이 필요했다. 신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 한 죄가 그에게 씌워졌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심판한 재판을 도리어 유죄로 판결한다. 신탁을 왜곡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이었다. 휴브리스와 사원 고대 그리스가 신화와 신전의 도시라는 것을 잊으면 철학의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성을 초월하는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이가 이성의 머릿돌을 놓는다. 어느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칸트가 모든 윤리적 사유의 기본인 양심을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신의 목소리”라고 한 것도 그런 각도에서 깊게 짚어볼 바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좋다. 심층의 육성, 그걸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는 현실의 소란스러운 아우성과는 다른 소리가 들린다. 정신의 깊이를 깨우치는 힘을 가진 존재가 세상을 바로 잡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사원이 사라진 시대와 도시, 그리고 역사는 이성으로 가장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주장의 난투극에 빠질 뿐이다. 그래서 매일 혼탁한 구정물로 시작하고 그걸 서로 내뱉고 마시면서 하루를 끝낸다. 아고라만 번창한 폴리스는 허물어져가는 신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뻐기는 휴브리스의 지배가 판을 칠 뿐이다. 그건 강하나 의롭지 못하다. 그래서 악이다. 이런 곳에는 사이프러스의 키가 자라나는 마을도 없고 성당의 종소리는 폐기된 지 오래이며 휘몰아치는 별들의 춤에 눈뜨는 이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이 의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구나.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지켜라. 오갈 데 없는 고아와 과부를 보살펴라.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려 들지 말라.” 신탁을 받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다. 모든 사원은 인간의 불의한 오만을 거부한다. 그리고 자비를 귀하게 여긴다. 폭풍이 몰아쳐 오고 있어도 별이 태어나는 걸 보지 못하는 시대는 봄에도 춥다. 모두가 고독해지고 우울한 싸움에 나날이 지쳐갈 뿐이다. 정신의 역병에 맥을 못 추게 된다. 자기 집보다 먼저 사원을 세워야 할 일이다. 그래야 집을 제대로 지을 수 있다. 정신의 거점이 무너진 처지에 무엇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열린 사원이 있는 도시가 보고 싶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워한다면. 더는 빈센트를 외롭게 할 수 없다. 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 또한.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여자배구 국가 대표 선수 등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 폭력 문제로 떠들썩하다. 그들이 10여 년 전 초중고 시절에 벌인 일들은 끔찍해 입에 담기조차 힘들다. 스포츠 선수들의 과거 폭력을 현재화해 엄벌에 처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전근대성을 벗어나고 있다는 하나의 조짐으로 읽힌다. 폭력은 단순히 나쁘다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타자를 굴복시켜 주종 관계를 일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기득권층의 무기이자 숨겨진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의 역사가 이를 증언한다. 멀리 갈 것 없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합법을 가장한 제도적 폭력이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기득권층이 자신들을 특권화하는 수단으로 가하는 이 수직적 폭력을 보통 사람들이 내재화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