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 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어두운 북항,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탕아의 눈 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 안도현 시집 ‘북항’ /2012년 / 문학동네 올해로 등단 28년을 맞은 시인 안도현이 4년 만에 시 63편을 묶어 10번째 시집 ‘북항’(문학동네)을 내
바위산 아래 산다, 바위산인 줄 알면서. 그래도 밭에 씨를 뿌리고 지붕을 단단히 묶고 아이들을 놀게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밤이면 잠자리에 든다. 어느 여름 저녁 어쩌면 긴 낫자루에 기대 바위산이 있다는 쪽으로 얼핏 눈길을 주게 되리라 혹은 어쩌면 어느 밤 잠에서 깨어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를 세우리라. 그러니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 해도 미처 몰랐다고 할 순 없으리. 그래도 일어나 바위산 아래 푸른 밭을 치우러 나갈 것이다 생이 지속되는 동안은. - 하우게 시집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 2008년 / 실천문학 노르웨이의 시인 하우게의 시에는 인물이 등장하거나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시인이 세계와 홀로 대면한 결과물인 그의 시는 장작 쌓아올리듯이 단어를 쌓아올려 이파리움막과 눈집 같은 언어의 집을 짓는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침엽수림과 바위산, 강과 호수들이 말없이 걸어 들어온다. 이 시는 ‘바위산 아래’ 살면서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 해도’ ‘푸른 밭을 치우러 나갈’ 우리의 일상이 담담하게 잘 그려져 있다. 시지프스처럼 비장한 느낌이…
2004년 오늘, 미국이 이라크에 주권을 넘겨줬다. 바그다드 중심부 ‘그린 존’의 옛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IGC) 본부 내 한 사무실에서 열린 이양식에는 폴 브레머 전 미군정 최고행정관과 셰지크 가지 알 야와르 이라크 대통령, 이야드 알라위 총리, 마크 키미트 이라크 주둔 미군 대변인 등이 참석했다. 이라크 주권 이양식은 너무도 단촐하게 약 5분만에 끝나 버렸다. 브레머 전 최고 행정관이 주권 이양문서를 낭독한 뒤 미드하트 알 마모디 이라크 대법원장에게 이양서류를 넘겨줌으로써 1년2개월19일만에 이라크 주권은 연합군 임시행정처(CPA)에서 이라크로 넘어갔다.
1954년 오늘, 한국 대표로서 제네바정치협상회담에 참석하고 서울 여의도 공항으로 돌아온 변영태 외무부장관. 귀국과 동시에 제5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이로써 외무부장관직과 국무총리직을 겸임하게 됐다. 사흘 뒤인 7월 1일 변영태 총리와 신임 5부 장관에 대한 임명식이 거행됐다. 그는 총리직을 같은 해 11월 말까지, 외무장관직은 이듬해까지 수행했다. 변 총리는 외국에 다녀올 때 여비를 남겨와 국고에 반납할 정도로 청렴하고 지조가 굳었다.
1995년 오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됐다. 기초의회 의원과 단체장, 그리고 광역의회 의원과 단체장을 동시에 뽑는 4대 지방선거를 동시에 치름으로써 우리 나라는 진정한 의미의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이 선거를 통해 해당 지역의 살림을 책임질 광역자치단체장 15명과 기초단체장 236명, 의회의원 5천여명 등 모두 5천768명이 선출됐다. 민자당과 민주당, 자민련의 3당 체제로 치러진 6·29선거에서 시·도지사의 경우 민자당 5명, 민주당 4명, 자민련 4명, 그리고 무소속 2명이 당선돼 여당인 참패로 판가름났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민자당의 정원식 전 총리, 민주당의 조순 전 부총리, 무소속의 박찬종 전 의원이 이른바 빅3로 불리며 접전을 벌인 끝에 민주당의 조순 후보가 승리했다.
1965년 오늘, 미국의 한 신부가 흑백분규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모리스 울레트(Maurice Oulette) 신부가 인종차별이 심한 앨라배마주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이용하는 가톨릭교회를 설립했다. 이에 대해 많은 백인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 교회의 개장으로 앨라배마주의 인종갈등이 악화되자 해당 가톨릭 교구청은 울레트 신부를 다른 교구로 보내고 만다. 인권운동가들은 울레트 신부에 대한 교구청의 전임 결정이 비겁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흙 묻은 자갈이 낮잠 자는 옛길 새로 만든 도시의 사람 드문 골목길 강둑 기슭에는 꽃을 내려놓고 푸르게 움돋는 개나리 잎 뺏길 뻔하다 겨우 살아남은 언덕길 나는 자랑같이 자전거를 타고 머리카락 좀 흩날리면서 돌아오지 않을 강물과 인사도 나누다가 거슬러 거슬러 입에서 터지는 대로 거슬러 거슬러 가슴에 담은 정이 묵은 대나무처럼 솟구치도록. - 고운기 시집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2008년/랜덤하우스코리아 시인은 모처럼 도시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교외로 나가 자전거를 탔나 보네요. “자랑같이 자전거를 타고 머리카락 좀 흩날리면서” 달리는 시인의 뒤태가 소년처럼 애틋하네요. 덩달아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자전거 산책을 나가보면 어떨까요? 내친 김에 엉덩이를 살짝 들고 페달을 힘껏 밟아 먼지만 뽀얀 거기가 거기인 아파트단지들을 “거슬러 거슬러” 우리를 이렇게 낯설게 만든 폭력적인 시간을 “거슬러 거슬러” 키 큰 아카시아 새하얀 꽃잎이 향기를 휘날리는 유년의 먼 신작로를 따라 하-아-아-아-환성이 “입에서 터지는 대로 가슴에 담은 정이 묵은 대나
밤하늘 호숫가엔 한 가족이 앉아 있었다 평화스럽게 보이었다 가족 하나하나가 뒤로 자빠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인형 같은 시체들이다 횟가루가 묻어 있었다 언니가 동생 이름을 부르고 있다 모기 소리만하게 아우슈비츠 라게르.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이 삶이라는데, 아무리 멀리 떨어져서 보아도 비극인 삶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겪는 삶의 비극 중의 최고는 전쟁이 아닐까요. 역사상 숱한 전쟁이 있었고, 내전이 벌어지는 나라가 지금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전쟁이 아니라도 안전이 보장되는 곳에서 먹고 자고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이라는 약속은 어쩌면 언제 어느 때 부서질지 모를 연약한 유리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전쟁을, 전쟁과 다를 바 없는 삶을 겪어야 한다면 저는 인간답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집이, 직장이 그리고 끝내는 생명이 파괴될지도 모를 상황에 놓였을 때 지금까지의 품위를 지키고 사고할 수 있을까요. 총탄과 폭약이 난무하는 전장이 아니고도 막다른 삶을 전쟁 치르듯 치르며 희미하기 짝이 없는 희망에 매달린 사람들이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친구가 필요합니다. 언니가 모기 소리 만하게 동생의 이름
들꽃 여관에 가 묵고 싶다.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 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三月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中心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 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 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보내리. 아침에 눈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박완호 시집 ‘아내의 문신’ / 2008년 /문학의 전당 우리도 언젠가 여인숙이나 여관에 들른 적이 있다. 숙박계에 이름을 적어 넣고 밤새 창밖에 내리는 눈의 고요를 자장가 삼아 포근한 잠 속으로 찾아들던 아니면 연탄가스 냄새 떠도는 방에서 일박의 밤을 보내며 길고 긴 편지를…
그대, 그렇게 오셨습니다 화살촉에 묻은 독약처럼 내 가슴에 박히셨습니다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어 서서히 서서히 나의 힘을 빼놓으시고 눈을 가물거리게 하시고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죽음까지도 다 가지셨습니다 - 박상천 시집 ‘말 없이 보낸 겨울 하루’ / 1988년 / 둥지 누구든 젊어 한 때 독약을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것이 이념이었건 사랑이었건 노래였건 간에 일상적인 삶에 치명타를 입혔다면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독약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독 묻은 화살에 젊은 심장을 찔려 피 흘리던 순정을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과거형으로 분류해 청춘의 무모한 열정이었노라 말하는 사람 또한 있으리라. 그러나 시인은 그 대상(詩가 아니었을까?)에게 죽음까지도 다 가지셨다 했으니 그는 아주 소생 불가능한 독약을 마셨고 여전히 그 고통은 진행형일 것이다. 시인이여 부디 회복되지 말아라. 독약에 중독돼 서서히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드디어 빛나는 문장 한 줄 초여름 녹음 속을 가르는 순백의 나비처럼! /최기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