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오늘은, 남과 북의 최고지도자가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 만나 손을 맞잡은 역사적인 날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측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에 갔다. 김 위원장이 순안공항으로 나와 직접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영접했다. 두 정상은 2박3일 동안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정착,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남북간 교류와 협력 등 광범위한 사안을 논의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상회담의 성과물로 이른바 6·15공동선언문을 채택한다. 6·15공동선언문은 남북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8·15 광복절에 즈음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등을 골자로 한 것으로서 남과 북의 냉전과 대결 구도 종식, 그리고 화해, 협력의 역사적인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가 한창이던 2002년 오늘, 경기 양주시 광적면 지방도로에서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 양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두 학생은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기 위해 길을 걷다 참변을 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월드컵축구대회와 제16대 대통령선거의 열기에 묻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던 중 두 여자 중학생을 추모하는 뜻으로 촛불시위를 하자는 제안이 네티즌들 사이에 확산돼 마침내 같은 해 11월 초 서울 광화문 앞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촛불시위가 열린다. 더욱이 미국이 사고의 직접 책임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촛불시위는 전국적인 반미시위로까지 확대되고 한때 한국과 미국 사이의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한다.
1950년 오늘, 한국은행이 정식 발족했다. 한국은행은 강력한 권한과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중앙은행으로서 화폐발행과 통화신용정책, 은행감독업무 등을 수행하게 됐다. 일제 때에는 1909년 10월 구 한국은행이 설립됐고 1911년 8월 조선은행으로 개칭돼 8·15광복 때까지 존속했었다. 한국은행은 창립 13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전쟁비용을 조달하고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데 업무의 역점을 두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경제 재건을 위한 금융자금을 원활하게 지원하는 데 전력했다.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은행 본관건물은 전쟁으로 내부가 불타거나 파손됐다가 1956년 원상태로 복구해 현재에 이른다.
1991년 오늘 소련 러시아공화국의 첫 직선 대통령선거가 실시됐다. 개표 결과 보리스 옐친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당선됐다. 1985년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한 옐친은 급진개혁정책만이 정체된 소련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두 달 뒤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즉각 반(反)쿠데타 세력의 선봉에 서서 60시간 만에 쿠데타를 물리쳤다. 그 후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맹렬히 비판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을 참여시켜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한다.
찬마루 지나 건넌방, 자다 깨도 달안개 이슥한 곳에서 나는 매일 밤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할머니 귀신이 자꾸 좇아와 뒷간도 못 가겠어 하면, 가만 아랫배를 쓸어주시던 할머니 뒷간엔 허깨비가 사능 겨 니가 올려다보면 고놈은 산만 해지고 내려다보면 고만 퇴끼 똥만 해지지 아래턱에 힘주고 뒷간에 걸터앉으면 누군가 속삭였습니다. 나는 사람이 더 무셔 보면, 아래에는 내 똥, 위에는 내 그림자 언제부턴가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 이하 시집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 2012년/실천문학 어릴 적, 화장실에 관해 난무하던 온갖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귀신’으로 통칭되던 두려움의 대상들. 할머니는 배를 쓸어주며 타이른다. 뒷간에 허깨비가 산다고, 그 허깨비는 네가 생각하기에 따라 산만 해지기도 하고 토끼 똥만 해지기도 한다고. 그러나 허깨비는 뒷간이 아니라 내 속에 숨어 살았던 것. 어릴 적엔 보이지 않던 내 속의 허깨비들이 보이는 나이가 되면 ‘나는 내가 더 무셔’라고 혼자 중얼거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똥과 그림자 사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설희 시인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 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시선집 ‘기억이 나를 본다’ /들녘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반짝 눈이 떠지는 싱그러운 아침이 있다. 창문을 활짝 열거나 현관문을 열었을 때 눈에 가득 들어온 뼈대 앙상했던 나무 가지에 어느새 푸른 잎들 가득 뒤덮여 있다. 지구를 기억의 행성이라고 한 어느 시인과도 일맥상통하는, 저 푸른 녹음은 기억이라는 물질의 덩어리이다. 기억의 DNA에 의해 작년의 그 자리, 어제의 그것과 같은 모양의 나뭇잎들 촘촘히 뱉어낸다. 나뭇잎은 바람과 햇살에 의해 시시각각 배경 속으로 녹아들고 기억의 숨소리는 언제나 새롭다. 똑같은 반복 또한 새롭다. 그 숨결로 기억은 더욱 더 푸르러진다. 내 바깥에 또 하나의 푸른 뇌를 가지고 있어 기억은 한층 내밀해진다. /성향숙 시인
아이가 힘겹게 뒤집기를 시작하면서 이 철없는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마흔 넘어 찾아온 아이가 외로 자기 시작하면서 이 외로운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바람에 뒤집히는 감잎 한 장 엉덩이를 치켜들고 전진하는 애벌레 한 마리도 여기 이 세상의 어여쁜 주인이시다 힘겹고 외로워도 가야하는 세상이 저기 있다 살아가는 이유가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절대적인 이유들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관계 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들. 관계하는 것들 사이에 놓여 있는 길 위에서 겪는 우여곡절은 어제와 같지 않다. 오늘이 내일과 같지 않은 것처럼 ‘다르다’라는 이유와 무관하게 ‘전진’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다. 길 위에서 우린 모두 주인이다. /권오영 시인
모기는 잘 안다 몸집은 작지만 식인 야수 그러나 결국 배만 잔뜩 부르면 그만, 피를 은행에 저장하지는 않는다 - D. H. 로렌스 시집 ‘피아노’/ 1988년 / 민음사 그렇다. 모기는 그때, 그때 배만 부르면 그만이다! 시를 읽으면서 새삼 저장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가까운 예로 먹거리만 해도 그렇다. 그다지 멀지 않은 날에 우리는 냉장고 없이도 잘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냉장고에 냉동고 심지어는 와인 냉장고까지 있는 집이 있다 한다. 그러고도 용량은 갈수록 더 커져간다. 사람들은 자주 여행을 떠나고 외식은 점점 더 늘어나는데 왜 저장해야 할 것들은 그렇게 많아지는지? 은행에 돈을 맡기고 집을 몇 채씩 사고 땅을 사고 건물을 사서 자자손손 먹고 쓸 것들을 비축하느라 전전긍긍인 사람들이 많다. 인간이 저장을 시작하면서 갈등과 고통이 심화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시 모기의 계절이다. 여러 사람 중에서 나만 모기에 물렸다면 내 피가 모기의 야수성, 그러니까 모기의 입맛에 가장 적합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다행히도 모기는 피를 저장하지는 않으니까. 문득 모기가 부럽다. 그 단순함과 단출함이 자유다. 모기한테는 날개가 있다
사랑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가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 이상국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2005년/창비 사랑 시가 세상에 참 많다. 그런 시 중에 이 시는 단연 돋보인다. 사랑은 견딜 수 없는 대상이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쪽으로 고개를 들어 곧장 가려는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랑만큼 모든 죄의 근원이자 또 모든 희망과 행복의 원천인 것이 없다. 그만큼 양면성을 가졌기에 사랑은 힘들다. 힘든 만큼 아름답다. 남쪽은 누구나 자기 영혼의 고향이 있는 곳이란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사랑은 남쪽으로 오라 재촉하는 모든 길을 또 쉽게 달려갈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을 향해 그 모든 아픔으로 그 모든 상처의 힘으로 생명의 용트림을 한
곽재구는 남도에서 성장해 삶의 가난을 체험했다. 그런 체험에서 비롯된 그의 시에는 슬픔, 분노, 절망, 그리고 그것들을 넘어서려는 사랑과 그리움 등이 담겨 있다. 아픔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언가 결핍된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사평역에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각자에게는 결핍된 것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넘어서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있다. 삶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다. 시인이 느끼는 우리의 삶은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시는, 슬픔을 넘어서는 사랑하는 삶이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지는 시인은, 아름다운 삶을 지양하고 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