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이 버려진 맷돌 구멍에 민들레 홀로 앉아 하얗게 웃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 어머니와 온 가족 서로 맞잡고 무거운 삶을 돌리던 어처구니 한상에 둘러앉아 콩국수 먹던 부모형제들 다 어디 갔을까 어처구니 없는 세상 쭈그렁 밤탱이 홀로 남아 지은 죄 속죄를 빌며 잃어버린 어처구니를 찾는다. 시인 소개 : 경기 강화 출생 <한국문인>으로 등단
죽음도 마다않고 절개를 지키려던 고결한 백제의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으로 가는 길 아픈 역사를 품은 오늘의 부소산성엔 빛고운 꽃잎의 춤사위 낙화로 흩뿌리며 시설을 설명 하나 때 맞춰 연등이 꽃송이로 매달린 사찰에서 펴져가는 그윽한 염불 가슴으로 스미어 입고 먹고 숨쉬는 속에 지은 죄 뉘 없으랴 뉘우치라 하고 이제도 옛 혼을 달래는 고란사 맑고 찬 샘물은 숨 가삐 찾은 마른 목 줄기 적선으로 적시는데 유유할뿐인 백마강엔 반짝이는 빛살마저 맴도는 바람결에 휘감아 흐르고 흐르는 시간조차 갈앉느니. 시인 소개 : 충남 당진 출생. <문예사조> 로 등단 시집 <불켜기> 외
이른 새벽 수돗물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음식 냄새와 잘 어우러져 이른 아침을 노래하고 조그마한 내 삶을 빈자리에 앉힌다. 오늘 이웃집 아침은 큰 잔치상이 되리라. 상상으로 그려지는 향기속에 쪼로록 꼬로록 설거지 소리가 들린다. 수돗물 소리가 요란하다. 김순덕 시인소개 : 강원 영월 출생 <순수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빚쟁이야>
아직까지 무얼 감추고 놓지 못할 자존심 있어 명치끝이 아픈 슬픔이라도 밤송이 마냥 가시를 세운 건 모르는 결에 속병을 키워 온 거예요. 슬픈 계절엔 아예 슬퍼해요. 낙엽이 지다 못해 뭇 발길에 부서져 노을 비낀 허공을 맴도는 처절한 그림 속 실제 주인공으로 눈물은 많을수록 좋겠어요 옷깃 거칠게 뒤흔드는 바람에 심하게 휘청거려 모 걸음 치며 힐끗거리는 눈길 있다손 개의치 말아요 슬픈 계절엔 된통 슬퍼 버리는 게 나아요. 시인 소개 : 충남 당진 출생. <문예사조> 로 등단 시집 <불켜기> 외
가도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가도 無人之境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시인 소개 : 1 930. 1월~1993.4월 1993년 4월 28일 학력서울대학교 수학 데뷔 1949년 문예 ‘갈매기’ 등단 수상 2003년 은관문화훈장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시인 소개 : 1947년 5월 25일 (전라남도 보성) 소속 고려대학교 (교수) 서울여대대학원 현대문학 박사 데뷔 1969년 월간문학 시 불면, ‘하늘’ 당선 수상 2008년 예술평론가협 올해 최우수 예술가 문학부문상
우람과 햇빛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나뭇잎의 물살을 보아라 사랑하는 이여 그대 스란치마의 물살이 어지러운 내 머리에 닿아 노래처럼 풀려가는 근심 그도 그런 것인가 사랑은 만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 물거품이 한없이 일고 그리고 한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더라도 아름다운 이여 저 흔들리는 나무의 빛나는 사랑을 빼면 이 세상엔 너무나 할 일이 없네. 시인 소개 : 고려대학교 국문학(1933~1997) 현대문학 ‘정적’ 등단 수상 1987년 제2회 평화문학상 중앙시조대상 경력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청명과 입하 사이 곡비는 제 배설물을 빈 쌀독에 가득 채웠다 찰찰 찰거머리였다 눈과 코와 입이 까만, 몸 없는 바닥과 한 몸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다랑이 논을 갈고 있었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몸 삭은 작대기 같지만 마음은 빗물 따라 회전 중이다 저 뭉클한 땅의 맛 그때 나는 계곡을 휘돌아 나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였다 누가 저 물의 중심에 구멍을 내었을까 어떤 하루가 온몸으로 낸 뜨거운 사랑 또 하나의 길을 본다 누군가 구름 한 차 부려놓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또 다른 봄날이었다 시인 소개 : 1960년 충청북도 영동 출생. 명지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데뷔 1989년 한국문학 등단 경력 시에 편집인 대전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날개 접은 백로가 진저리치다 휘적 휘적 날아간 자리엔 원형탈모증에 걸린 민둥가지만 퀘퀘한 눈물을 달고 산다 사철 푸르리라던 소나무는 수액조차 줄어드는 기근에 온몸에 녹이 슬어가고 아는 지 모르는지 긴모가지에 레이더 삼아 순항하던 백로는 낙낙장송의 싹을 발톱으로 쥐어 뜯으며 안착하고 있다. 우 아 하 게 시인 소개 : 충남 아산 출생, <문학세계>로 등단 저서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대를 두고도>
세월따라 저 강물도 말없이 흘러간다. 내 영혼이 여기 잠시 머무르고 육신을 저 흐르는 강물위로 흘려 보내고 싶다. 어디쯤 갔을까 어디에 머무르든 그저 하얀 추억속으로 흘려 보내고 싶다 그리움과 슬픔은 오늘은 보이지 않으리라 부서졌다 살아나는 저 물거품처럼 잠에서 깨어난 듯이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리라 시인 소개 : 강원 영월 출생 <순수문학>으로 등단.시집 <사랑은 빚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