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선운사 /박해미 살면서 악착같이 울어본 적이 없다. 선운사 입구, 한눈팔다 잠깐 아득해질 때 어느 쪽으로 들어서야 할지 가늠하지 못할 때 매미가 쩌렁쩌렁 울어댄다. 나 저렇듯 매미처럼 울어본 적이 없다. 선운사에 와서 알겠다. 펑펑 피어나는 동백꽃도 때 되면 그냥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파리마다 잉걸 같은 햇빛들 불러 모아 푸르디푸르게 타오르다 그 울음 어쩌지 못했을 때 비로소 꽃으로 쏟아져 붉게 피어난다. -박해미 시집 ‘꽃등을 밝히다’에서 문화 가 - 00224<일간> 2002년 6월 15일 창간 참고 참다가 터지는 울음도 일종의 절정이다. 울음은 참는 법도 중요하고 때에 맞춰 터뜨리는 것도 중요하다. 울고 싶을 때에는 울어야 하는 것이 맞다. 또한 참고 참다가 기어이 터지는 울음을 통해 우리는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희망을 키우기도 한다. 한여름 매미소리만이 극한의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뽕잎을 갉아먹는 누에 군단도 가만히 들어보면 비록 울음소리는 아니지만 거대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우주와 자연 속의 모든 생명체는 우리가 그 소리를 듣던 못 듣던 끊임없이 울고 있을 수 있다. 일종의 생명 에너지 작용이다. 한겨
수국, 지다 /박은율 링거병 매달고 집에 온 지 하루 너는 다시 실려 나가고 수국꽃 이울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증식되는 불안 시간이 느리게 발효되는 항아리들 묵직하게 늘어선 장독대 쐐기풀 무성한 마당, 온종일 네 그림자 어른거린다 이따금 다급히 울다 제풀에 잦아드는 전화벨 소리 낡은 처마 밑 왕거미줄에 맹렬히 파들거리던 한 마리 나비 마침내 고요해진다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여닫히는 대문 썰물 지듯 빠져나가는 저녁놀 -박은율 시집 『절반의 침묵』/민음사 이른 아침 부산한 어른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잠에서 깼을 때 할아버지는 병원차에 실려 갔다. 막연하게 불안은 증식하고 하루 종일 할아버지의 그림자는 눈앞을 왔다갔다 어른거렸다. 간간이 시내에 다녀온 동네 어른들이 할아버지 소식을 물어오고 전화벨이 울려 누군가 검은 수화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이후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간 집에 혼자 남아 할아버지 소식보다는 엄마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한데 그 잦아들던 전화벨 소리가 할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전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영영 집안에 발 들이지 않았다. 새총을 만들어주고 바람개비 만들어 입김으로 돌려주던 할아버지의 죽음이 그렇게 고요했다. /
기다린다는 생각 /송재학 오래 벗어논 신발을 다시 신을 때 너가 벌써 와서 먼저 떠났다는 느낌 머문 시간 동안 좀씀바귀 노란색 기다림이 신발 밑창을 뚫고 한쪽 눈에 진물이 날 때까지 꽃피곤 했다 흔하디흔한 노랑이긴 하지만 저 꽃 아래 무엇과 다를 바 없는 무엇과 비교 못할 숨쉬기가 있다 기다림이기 전에 너가 나 대신 떠난다는 것이다 텅 빈 허공이 생겨서 좀씀바귀마다 꽃피우게 하고 흔들리는 불빛의 手話를 구겨넣고 떠난다는 것이다 점점 작아지지만 더욱 분명해지는 불빛들 -송재학 시집 ‘기억들’/세계사 기다린다는 것은 공기처럼 보이진 않지만 살아 숨쉬게 하는 어떤 것이다. ‘진물이 날 때까지’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생각은 누구나에게 있다. ‘머문 시간’은 머물렀던 시간만큼의 ‘떠남’을 예감한다. ‘텅 빈 허공’은 늘 기다림으로 무언가를 채우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또 보내고 맞이한다. 어제가 그렇고 오늘이 그렇다. 그래서 흔들린다. /권오영 시인
西神梅<서신매> /허형만 때때로 사람됨이 얼마나 힘겨운지 은은한 향기로 빛살을 이루는 서신매 휜 꽃 한 송이 앞에서도 허물어져 내리는 영혼을 본다. 아픔 탓이다 세상은 빛이어야 하고 날아야 하고 용서받지 못한 엉겅퀴 비늘같은 삶이 있을지래도 오직 사랑의 노래 순수의 튼튼한 희망은 고와야 하는 것을 하여, 비바람 섯거쳐도 꺽이지 않는 의지의 꽃대로 솟고 슬픔을 거슬러 죽음도 거슬러 빛나는 믿음으로 눈이 부시도록 처억 피어야 하는 것을 때때로 사는 법 하나 간직하기 근심으로 가늘게 떨고 섰는 서신매 강물 닮은 숨결 앞에서도 얼마나 목마른지 가슴 아린지 함께 떨며 위로하는 영혼을 본다 얼마 전 시인과 행사장에서 정담을 가졌다. 대학의 교수직을 은퇴한 시인의 일상은 蘭과 함께 한다. 여유가 있는 사람처럼 난을 손질하고 마주 대하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산다는 회의감이 오고, 갈등과 삶의 억장이 무너지는 심사를 접하고 보면 난처럼 위로가 되는 일도 없다. 간절함은 전혀 사치스럽지 않더라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감은 곧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일반적인 감정일 것이다. 난에 대한 많은 애호가들이 있지만 난을 세상과 힘겨운 싸움의 위로를 찾는 이들이 더 많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1-유예 /박현수 좀처럼 오지 않던 154번 버스 같은 우리의 이별은 한 번은 무너지는 탑처럼 어깨를 치리라 그 해 겨울, 유예를 계산하던 나의 관습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는 나의 손금에서 불안을 읽어내고 있었다 도깨비 풀처럼 몸에 붙는 백야의 그 지리한 대화를 우리는 몰래 털어내고 싶어했지 그 때 뿔뿔이 떠난 우리들의 사색이 다다른 곳은 어디였을까 그 해 겨울, 우리 사랑은 길가 도랑에 쓰러진 채 기억의 헛바퀴만 굴리고 있었으니 사랑이 더 이상 생을 감당하지 못 할 때 154번 버스는 떠나가는 것이다 -박현수 시집-위험한 독서에서' 버스는 꿈의 이동수단이다. 그리움이란 승객이 타고 다닌다. 버스는 바퀴를 굴려 계절을 싣고 오기도 한다. 낡은 계절을 싣고 멀어지기도 한다. 154번 버스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난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버스는 일상의 희로애락을 싣고 오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늦게 도착하고 고장이 나고 하여도 154번의 노선을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 154번 버스를 타고 이별도 오고 이별이 떠나가 주기도 할 것이다. 종말의 사랑을 싣고 떠나기도 할 것이다. 154번 버스는 도피의 입구이자 귀환의 수단이기도
송곳니 /이영혜 컴컴한 목젖 다 열어 놓고 잠든 초로의 사내를 본다 성글어진 갈기와 거친 수염 이마에 찍힌 王 자 주름 또렷하다 살기등등하던 뾰족한 치관(齒冠)은 사라져 버렸어도 긴 치근(齒根)은 여전히 성성하게 남아 생피 냄새를 쫓고 있다 석회동굴처럼 깊고 푸른 입속에서 가끔씩 늙은 맹수의 목쉰 포효가 새어 나오는 걸 보면 그는 지금 아마 눈발 휘날리는 아무르 강가나 시베리아의 벌판을 내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 천년의 시작 인간의 송곳니는 분명 필요에 의해 생겼을 터인데, 식습관의 변화 때문일까. 현대는 쓰임새가 주도적이지 않다. 송곳니는 퇴화 중인지 모른다. 송곳니를 육식의 흔적으로 추적하는 발상이 재미있다. 목젖을 열어놓고 잠든 사내의 거친 수염과 성글어진 갈기와 이마에 찍힌 굵직한 주름. 가끔씩 거친 숨소리라도 흘러나올 때면 영락없는 원시인간의 모습이다. 벌어진 입속은 사냥을 마치고 잠시 휴식하는 동굴과 흡사하다. 눈발 휘날리는 아무르 강가나 시베리아의 벌판을 내달렸을 인간의 조상들이 애틋해진다. 그 거친 삶이 있었기에 여기 편안한 방에서 읽는 시 한 편이 행복하다. /이미산 시인
동체(同體)되기 /정승열 몸 밖으로 새어나가는 살의殺意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매화나무를 찾은 박새 부부가 의심 없이 다가서게 하려면 나무처럼 서서 바람에 살랑살랑 옷자락이 흔들리게 두어야 한다. 몸속에 맴도는 사냥이란 본능이 완전히 사그러들 때까지 애증愛憎도 호흡도 가다듬고. -아라문학 겨울호에서 사람이 사람끼리 살의를 느끼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적의를 느끼는 정도로도 사실은 소름이 돋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다르다.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존재다. 거기에는 생명을 앗아가는 일도 포함이 된다. 그래서 자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살의로 가득 찬 존재이고, 그래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자체가 살기로 감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평화로운 자연의 얼굴과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인간이 최대한 적의나 살의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 꼭 욕심을 줄인다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과의 동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정신은 인류의 영원한 미래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장종권 시인
미움을 받든 소 /박흥식 정든 소가 되고 싶다 한낮 한복판 술 뙤약에 익어 흩어지거나 발이 네 개나 되어서 한번씩 쓰러졌으면 좋겠다 바람이 불고 많은 것이 떠나갔고 다시 바람속에 나 있을 것이므로 들판을 오롯이 버티다가 미운 소가 되고 싶다 너무 많이 그리워했으니 어쩌면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을 사람을 많이 잃어버리고도 외롭지는 않게 미움을 받든 소가 되고 싶다 -박흥식 시집 <아흐레 민박집/창작과 비평> 해설을 신경숙 소설가의 글로 대신한다. 〈어떤 사람이 이 시를 전화로 읽어주었다. 다 듣고 내가 한 번 더 읽어보라 하였다. 얼마나 많이 그리워해야 잃어버리고 잃어버려도 외롭지 않게 될 수 있을까. 누추함을, 상실을, 소외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많이 살아온 사람…. 이 이제 미움까지도 받들며 눈물겨움을 지나가고 있다./신경숙〉 /조길성 시인
깨달음의 깨달음 /박재화 걸핏하면 무얼 깨달았다는 사람들 두렵다 무언가 알아냈다고 목청 높이는 사람들 무섭다 나는 깨달은 적이 없는데 어떡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닫기로 말하면 대체 무엇을 깨닫지? 이것인 듯하다가 저것인 것 같은 생의 한복판에서 깨달음까진 몰라도 바람 흘러가는 쪽이나 좀 알았으면… 유난히 긴 밤 잠 못 들면서도 깨달음은 아니 오고 깨달음은 왜 나만 비켜갈까 나의 깨달음은 대체 언제일까 깨달음의 깨달음에 매달리는 밤… -박재화 시집 〈먼지가 아름답다〉에서 유한한 생명체로 이 세계에 온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는 어디론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늘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산다. 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큰 깨달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쉽게 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진정 깨달을 수나 있을지도 장담할 수가 없다. 깨달았다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는 정체불명이다. 정작 내가 깨닫지 않고서는 그들의 깨달음에 대해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밤새 이 깨달음을 위해 전력투구해 보지만 가당치도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
의자 /권순자 어떤 이가 앉더라도 다리에 힘주고 때로는 힘에 버거워도 입 앙다물고 버티곤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 의자 덮개는 낡아 해지고 다 드러난 판자 조각은 비바람에 빛이 바래고 부서져 앙상하고 초라하다 안개 자욱한 들길에 꿈속의 꿈길 같은 길에 흙 묻은 낡은 의자가 편히 쉬고 있다 -권순자 시집, ‘붉은 꽃에 대한 명상’ /문학의 전당 의자는 누군가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운명을 타고 났다. 비명소리 내지 않는다고 의자가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자. 의자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남의 고통에 대해 쉽게 말하지 말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대했던 것처럼, 당연히 치루는 몫이라고 가볍게 밀쳐두었던 부채들, 어느 날 문득 그들의 앙상한 어깨를 발견했을 때, 나도 모르게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느낄 때,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고통 속에서 묵묵히 살아내는 사람들의 숨결과 눈빛과 살빛에 대해 한 번쯤은 내 몸처럼 들여다보자. 그들의 영혼에 따뜻한 손길 내밀어보자./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