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칫날 /이경호 수건 쓰고 뙤약볕 기어 다니는 아낙들은 스스로를 수건벌레라 불렀다 오늘은 분 찍어 바르고 꽃이 되었다 이 꽃과 저 꽃 사이 쟁반날개 퍼덕이며 날아다니는 수벌들 목소리가 굵다 -이경호 시집 <비탈>에서 세상은 변한다. 그런데 이 변화가 발전적일 것인지, 비극적일 것인지는 사실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 해도 발전이 좋아 보이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사 영농기구가 기계화되어 옛날처럼 농부들이 고생을 심하게 하지는 않아 보인다. 수건 뒤집어쓰고, 뙤약볕을 기어 다니던 수건벌레들, 그들이 우리들의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대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호미가 되어버린 손이나, 햇볕에 그을러 숯검뎅이가 되어버린 얼굴이 그들의 일상적인 얼굴이었다. 그랬으니 동네 잔칫날이 오면 분 바르고 새 옷 입고, 꽃잔치 오죽하겠는가. 남정네들도 덩달아 가슴 설레었으니 그게 우리들의 옛 잔칫날이었다./장종권 시인
하느님이 보낸 간첩 /박광배 요 근래 추운 줄도 더운 줄도 모르고 살았다. 대뜸 화장실 문을 열고 똥 누는 마누라 주댕이에 쪽 하니 입을 맞추자 한마디가 날아온다. “미친눔.” 그러자 건넌방 막 사춘기에 접어든 딸년이 한마디 한다. “아침부터 욕먹고 싶나.” 나는 하느님이 무심코 던진 짱돌이란 걸 요새 알았다. -박광배 시집 <나는 둥그런 게 좋다/시인학교 2013> 짱돌은 짱돌을 알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런데 짱돌이 스스로를 알아버렸다. 삼십년이다. 불도 뚫고 왔다. 바위도 깨부수고 왔다. 지긋지긋한 세월을 정면으로 살아왔다. 쇠를 씹어 삼켜도 보았다. 골계미가 빛나는 시집이다. 새로 이사한 넓은 집에서 시인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김수영이 살아서 보았다면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듯이,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돌렸지 않았을까. 큰일 났다. 짱돌이 짱돌을 알아버렸으니. /조길성 시인
마음 시소 /정현정 버스 정거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보따리 들어드릴까 말까 지하철 입구에 엎드린 아저씨 빈 바구니 과자 살 돈 넣을까 말까 비 오는 날 심술부리던 내 짝 우산 받쳐 줄까 말까 마음 시소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정현정 동시집 ‘씨앗 마중’ / 21문학과 문화 당신은 하루에 몇 번 마음시소를 타는가? 삶의 모퉁이마다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비가 오네 약속장소에 나갈까 말까’, ‘지인이 상喪을 당했군 위로하러 갈까 말까’, ‘아프리카에 가뭄이 심하다는데 후원금 낼까 말까’, ……. 개인의 생활습관에서 기인하거나 사회와 인류의 질서와 안녕에 관련되는 공익적 참여까지, 선택의 양상은 다양하다. 당장 나의 이익과 상반되는, 그러나 공동의 미래가 담보된 선택일 때 갈등한다. 지금의 선택들이 모여 십 년 혹은 백 년 후 자손들의 삶을 결정하기도 한다. 나는 믿는다. 사람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한 선善함을. 삶은 함께 어우러져야 아름답다는 사실을./이미산 시인
봄날은 보란듯이 /윤제림 학질이나 그런 몹쓸 병까진 아니더라도 한 열흘 된통 보란 듯이 몸살이나 앓다가 아직은 섬뜩한 바람 속, 허청허청 삼천리호 자전거를 끌고 고산자 김정호처럼 꺼벅꺼벅 걸어서 길 좋은 이화령 두고 문경새재 넘어서 남행 남행하다가 어지간히 다사로운 햇살 만나면 볕 바른 양지쪽 골라 한나절 따뜻한 똥을 누고 싶네, 겨우내 참아온 불똥을 누고 싶네 큼직하게 한 무더기 보란 듯이 보란 듯이 좋은 봄날 - 윤제림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문학동네, 1997) 집 앞에 목련이 한창 봉우리를 맺고 있습니다. 등이 하나씩 켜지는 것 같습니다. 봄이란 그런 것일까요. 겨우내 욱신욱신했던 답답한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어보고 싶고 서먹했던 사람도 만나보고 싶고 환하게 웃고 싶은 봄입니다. 그리고 시원하게 소리도 지르고 싶은 봄입니다. 젊은 벗들의 시절이 환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중랑천에 나가 쭉 걸어보고 싶은 봄입니다. 아쉬운 것은 여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제가 아쉬울 뿐입니다. 짧은 봄처럼. /유현아 시인
아니스 Anise와 별 /김영찬 너를 만나기 1세기 전부터 내리던 비가 너를 만나기 1초 직전에 쿵! 멈춘다 속눈썹 난간에 일렁이는 물결 1세기 동안 축적된 빗방울이 모여든 네 눈동자는 근원이 된다 물미역 냄새 풀썩풀썩 우리는 소행성 너머로 출정준비 나팔을 불고 북반구의 별들 일제히 입맛을 시작한다 -김영찬 시집 『투투섬에 안간 이유』/시안 1세기 전부터 내리던 비는 눈물이 되기 위해 너를 만나기 1초 전에 멈춘다. 아니스라는 식물의 열매를 보면 별 모양 속에 단단한 눈물 한 방울씩 들어있다. 그 눈물은 ‘너를 만나기 1세기 전부터 내리던 비’였다. 아니 1세기라는 시간이 경과된 비가 눈물이 되었다. 1세기 동안 축적된 그리움의 눈물이다. 눈물은 아무 때나 흐르지 않는다. 눈물 한 방울 흘리기 위해 온 바다를 끌어와야 한다. 그러므로 네 눈동자는 모든 물이 모여드는 ‘물의 근원’이고 눈물 한 방울이 바다라는 큰물의 줄기가 된다. 눈물은 그래서 별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운 것이다./성향숙 시인
시인 /김성규 죽은 물고기를 삼키는 두루미 목을 부르르 떤다 부리에서 삐져나온 푸른 낚싯줄 흘러내리는 핏물 목구멍에 걸린 바늘을 토해내려 날개를 터는 소리 한번 삼킨 것을 토해내기 위해 얇은 발자국 늪지에 남기며 걸어가는 길 살을 파고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두루미가 운다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창비, 2013)에서 시인을 두루미에 갖다 놓았네요. ‘학(鶴)’이라 부르지 않고 ‘두루미’라 했으니 시인은 왠지 고고해 보이지 않습니다. 보들레르는 시 <알바트로스>에서 시인을 ‘신천옹(信天翁)’이라 했습니다. 거대한 몸짓으로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이 신선처럼 보여 뱃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시인도 그 바닷새의 천성을 닮아 하늘과 바다를 유유히 날아갈 때는 더 없이 고귀하고 위대하지만 지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시(詩)는 아마 목구멍에 걸린 낚시 바늘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계륵과 같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처럼 기쁨보다는 슬픔을,환희보다는 고통을 삼킨 시인의 운명 앞에 숙연합니다. 시인은 다름
또 근황 /황지우 한 이레 죽어라 아프고 나니 내 몸이 한 일흔 살아버린 것 같다 온몸이 텅텅 비어 있다 따뜻한 툇마루에 쭈구려 앉아 마당을 본다 아내가 한 평 남짓 꽃밭에 뿌려둔 어린 깨꽃 풀잎새가 시궁창 곁에 잘못 떨어져, 무위로, 생생하게 흔들린다 왜 저런 게 눈에 비쳤을까 나은 몸으로 다시 대하니 이렇게 다행하고 비로소 세상의 배후가 보인다 -황지우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5월이다. “나무”로부터 “나무”에게로 가는 그 길 위에 씨앗들이 눈 뜨고 있는 봄날, 시인의 시선은 “흔들리는” “깨꽃”에 머물러 있다. “생생”하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살아있으니 흔들리는 것이다. 아프고 난 후, 모든 것을 “텅텅” 비우고 난 후에야 다시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마음의 “꽃밭”에 뿌려둔 씨앗들이다. 그 씨앗들이 발아할 때, 그 “무위”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맘껏 “생생하게” 흔들리는 봄이 겨울로부터 왔다. /권오
제 꿈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임경묵 이 많은 쇠똥을 어디에 쓰게요? 44살의 아버지가 쇠똥을 나르면, 11살의 나는 쇠똥을 쌓고요 54살의 아버지가 쇠똥을 나르면, 21살의 나는 쇠똥을 쌓고요 64살의 아버지가 쇠똥을 나르면, 31살의 나는 쇠똥을 쌓고요 74살의 아버지가 쇠똥을 나르면, 41살의 나는 쇠똥을 쌓고요 고욤나무 꽃그늘이 제법 묵직해졌어요 아버지, 쇠똥을 나르느라 새참도 거르셨나 봐 팝콘처럼 쏟아지는 고욤 꽃을 참 맛있게 드시네 아버지, 이제 쇠똥 속으로 들어갈 시간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소는 제가 키울게요 -임경묵, 2014 『시와경계』 2014, 봄호 이 시를 감상하노라면 한 폭의 고향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선한 아버지와 순한 아들의 정담(情談)이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가 날라준 쇠똥으로 쇠똥을 쌓는 일은 아버지가 날라준 사랑으로 아들이 꿈을 쌓고, 그 사랑의 세월만큼 고욤나무 꽃그늘도 무게를 더하고 있다. 사랑의 유전(遺傳)이 이루어지는 신비한 시간이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꿈을 키울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랑을 나르고 아들은 꿈을 쌓는 이 시의 풍경은 참으로 매우 따뜻하고도 향기로운 시간의 풍경화다, 오늘도 사랑과 희망을…
탈상 /허수경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허수경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 1988> 내일 탈상인데 오늘 고추모를 옮기는 심사는 무언가? 어린모를 어루만지듯 흔들어주는 바람은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내려온다. 아랫도리를 서로 묶었으니 얼마나 잘 쓰러질 것인가.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썩을 것이다. 썩어 거름이 된 슬픔들이 붉은 고추가 되어 가을볕에 다시 일어선다. 삶은 계속된다. 이렇게 울음도 없이 슬픔은 나직하고 깊어 그 붉음으로 더욱 뜨겁다. /조길성시인
춘설(春雪)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동네 뒷산 모락이 눈만 내리면 서슬 푸른 이마를 자랑하던 겨울이 물러가나 보다. 하얀 눈 이마에 얹고 점잔 빼며 앉아서 멀리 남쪽으로 달아나는 자동차 꼬리를 물며 해찰한다. 해 저물고 동동 떠오른 달을 맞이하는 일상을 닳은 무릎으로 절절하게 버티고 있다. 모질어질까 마음부터 단단해지던 겨울날들이 물러가고 물씬물씬 거리며 봄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흰빛으로 날카롭던 이마는 점점이 연초록으로 물들어갈 부푼 꿈에 얼마나 들썩일 것인지. 진즉 열려버린 봄의 입구, 우수절(雨水節)도 지나갔는데 폭설이 봄의 아이 몇을 업고 달아났다. 상처를 덮고 아릿한 봄맛 혀끝에 굴리며 심장이 뛰기는 할 것인지. 무거운 어깨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춘절(春節) 오기는 온 것인지. 마음은 자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