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무원은 미안해하는 그들을 극진히 모시며 도화와 법담을 나누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에서도 부설의 법문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는 인물도 수려할 뿐만 아니라 풍채가 우람하고 변재가 무궁하여 말마다 기운이 넘쳤다. 그의 깊은 지혜가 구무원에겐 천길 만길이나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구무원은 내실에 들어갈 때마다 부인과 딸에게 부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따라서 날이 갈수록 부설에 관한 구무원 일가의 관심은 높아만 갔다. 구무원에게는 무남독녀인 묘화라는 딸이 있었다. 묘화는 부인의 태몽에 연못에 활짝 핀 연꽃을 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묘화는 때마침 열아홉 살의 묘령으로 미모가 뛰어난 절색일 뿐만 아니라 재덕을 겸비한 아가씨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게다가 마음씨가 곱고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며 겸손한 덕을 갖추어 어른을 대하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예의가 대단히 발라서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묘화의 나이 열아홉 살이 되자 혼기에 맞춰 시집을 보내려고 애를 썼으나 막상 당사자인 묘화가 모두 거절했다.(묘화는 원래 벙어리였는데 부설 스님이 고쳐주었다는 설도 있다.) “혼인은 일생을 좌우하는 큰일인데 어
“머잖아 서울 강남, 분당에서 수원으로 대거 옮겨올 것이라고”‘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정형(定型)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다. 교육만큼은 전방위 예산을 펼쳐 그 인프라 구축과 환경 여건 조성에 헌신하겠다는 다부진 각오다. 그 성과는 점차 가시화 추세다. 지역 인재의 역외 유출 현상이 눈에 띄게 줄고 있는 것이다. 되레 인근 타 시군에서 ‘자식 교육’을 위해 수원으로 전입하고 있다. ‘교육의 지존’. 이 ‘시정 방향’이 인구 110만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지자체, 수원을 끌고 나가는 힘이다. 수원시 김용서 시장의 제1 목표는 ‘대한민국의 교육 중심도시’ 이다. 8가지 실천 공약 가운데 으뜸으로 ‘교육’을 꼽는 것이다. 민선 3, 4기 현재까지 무려 757억원을 쏟아 부었다. 전국 지자체 가운데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입한 것으로 교육인적자원부의 평가도 받았다. 교육에 ‘올인’하는 이유는 ‘백년대계(百年大計)’ 때문이다. 그 도시의 삶과 비전은 오로지 ‘교육&rs
십 년 동안이나 쉬지 않고 용맹 정진하였으나 확철대오를 얻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공부를 지도하고 끈기를 돋궈줄 스승이나 오도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도량을 바꿔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너무 똑같은 수준의 사람들과 매일 같은 의문, 같은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다보면 자극이 부족하고 추진력이 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언어를 도구로 이용할 때에 사람은 단지 언어의 의사 소통 기능만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를 써온 그 민족의 역사와 전통, 사상까지도 전수받게 된다. 따라서 언어가 발달하지 않은 민족은 철학이나 사상이 발달하지 못한 민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부설을 비롯한 세 스님은 좀더 보편적인 상황이 필요했던 것 같다. 자연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계속 반복하여 보여주고 낮밤을 바꿔주는 것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스승이 필요하고 그 스승은 다이나믹하게 살아움직이는 진짜 생명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승, 아니 좀더 일반적인 상황, 삶이 약동하는 인간의 세상으로 떠나고자 했다. 마침내 그들은 문수보살의 영험이 자주 나타난다는 강원도 오대산으로 가서 기도와 참선 공
권선구는 올 3월 ‘현수막 실명제’를 발표했다. 전국 첫 시행이었다. 보다 강력하고 세련된 불법 현수막 철거 작전을 위한 발판 마련이자 불법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자정 운동’ 이었다. 불법 현수막을 적발해도 그 ‘행위자’를 모를 땐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원인자’를 가리지 않는 한 ‘떼고 붙이고 또 떼고 다시 붙이는’ 풍차 놀이는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단계 ‘상륙 작전’ 인 셈이다. 현수막 제작업체 상호, 제작자 이름, 등록번호를 표기토록 했다. 구청은 즉각 현수막을 제작하는 지역의 312곳의 광고물 업체와 광고업자 모임인 광고사업협회 수원시지회에 이 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바라는 공문을 일제히 발송했다. 실명제 표기 요령은 현수막 한쪽 모퉁이에 육안으로 식별이 쉽도록 표기토록 했다. 현수막 제작업체와 광고 사업주에게는 지난 1993년 ‘금융 실명제’ 에 버금가는 치명적인 ‘행정 긴급조치’ 였다. 조치 발표 후 첫 이행은 지난 4월18일 이뤄졌다. 그러나
1176년 1월 15일은 할당이 입적하기로 한 예정일이었다. 그날이 되자 절은 인근의 주민과 멀리서 구경 온 사람으로 붐볐다. 깨달은 스님의 열반상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할당은 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재도 손수 드렸다. 재를 마치자 군중들은 모두 방장으로 몰려가 할당의 임종을 기다렸다. 어떤 이는 흥분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최후 설법이라는 보기 드문 진짜 설법을 초조하게 기대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 어떤 제자는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물어야겠다고 비수같은 질문을 준비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 설법을 할 것이라는 할당 본인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궁금해진 몇 사람이 할당의 방문을 살며시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방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할당은 보이지 않고 다만 그가 기르던 검은 원숭이가 두루마리 편지 한 통을 들고 서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할당은 탑 위에서 이미 입적을 마친 뒤였다. 원숭이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엔 할당의 사세송이 적혀 있었다. 사세송이란 세상을 떠나면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적은
할당은 그 말을 듣자 막혔던 가슴이 활짝 열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장 휘를 찾아가 깨달음을 진술했다. 휘는 됐다는 평을 했으나 할당 자신은 뭔가 석연찮은 곳이 있어 원오 극근(圓悟克勤;1063-1135)을 찾아갔다. 마침 극근은 대중에게 설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할당도 대중들 틈에 끼어 극근의 설법을 경청했다. 방(龐) 거사가 마조에게 물었다.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마조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서강(西江)의 강물을 한 입에 다 마신다면 알려주겠다.” 그때 갑자기 할당이 까무라치면서 벌렁 자빠졌다. 설법이 중단되고 술렁거리는 사이에 할당은 스님들의 부축을 받고 법당을 나갔다. 모두들 중풍 기가 동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당은 스님들에게 업혀나가면서도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꿈을 깼다!” 그날 밤 극근을 찾아가 문답을 청했다. “저는 발가벗듯 아무 것도 없습니다. 뼈가 드러날 듯 가난합니다. 돈은 한 푼도 없고 집은 허물어져 집 안이 망했습니다. 화상께서는 도와주시지요?” “칠진팔보를 잡으렴.&
도교육청은 올해 ‘학교도서관 활성화’를 위해 사서인건비 및 도서구입비를 지원, 설치 리모델링 등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학생들의 창의적·자율적 인재양성과 자기 주도적 학습 및 수준별 학습 등 ‘학교도서관 활성화 종합계획’의 5년차 사업인 것이다. 지난 2003년부터 지속 추진해온 ‘학교도서관 활성화 종합5개년 계획’을 통해 전담인력 및 도서지원 2천100여개교, 설치·리모델링 지원 900여개교등 모두 740여억원을 투입했다. 그 결과 도내 초·중·고교 중 94%인 약 1천840개교에(전체 학교수 1천960개교) 도서관을 설치, 학생1인당 장서수도 5.54권에서 8.74권으로 향상되는 등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학교도서관의 물적기반 조성을 위한 마지막해인 올해에 학생 1인당 장서수 10권을 목표로 인프라구축에 노력하고 학교도서관 활용 프로그램의 개발 보급에도 주력하고 있다. 자료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학교도서관디지털시스템(DLS)을 확장하고 활용을 적극 유도할 하는 등 도 교육청에서 추진하는 학교도서관 활성화 사업에 대해 알아보
‘신풍의 뿌리’ 후손에 영원히~ -신풍초교가 도내 최초의 초등학교인지. ▲신풍초교가 도내 공립으론 최초이고, 사립으론 인천 영화초교(1892년)이다. 1895년(고종 32년) 7월19일, 칙령 145호에 의해 ‘소학교령’이 공포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기초적 초등학교 설립법이 마련됐다. 공포 직후 ‘한국 최초의 관립 소학교가 수하동 장동 정동 제동 소학교가 설치됐고, 뒤이어 수원(신풍) 공주 충주 광주 전주 진주 대구 춘천 평양 영변 해주 함흥 경성에 공립 소학교가 1교씩 개교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풍은 개교 연도에 따른 정확한 고증자료가 없어 그 보다 1년 뒤(1896년)로 했다. 1896년 관보 제241호에 “수원군 북부면 신풍동 옛 화성유수부 관아의 객사 건물인 우화관(于華觀)을 차용해 ’수원군 공립소학교‘를 개교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개교 기념일 2월10일에 대한 명확한 고증도 아직 밝히지 못했다. 다만 신풍초교 최초의 교원인 이필구(작고)의 발령 날짜에 기준한 것이다. 그래서 올해 개교 111주년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 등 파란만장한 역사 때문에 교명도 많이 바뀌었을텐데. ▲최초 교명은 수원군공립소학교(개
열세 살에 입산하여 경론을 익혔다. 눈이 멀었다는 뜻의 할(?)을 쓴 것으로 보아 눈이 안보였거나, 비유적으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운암사에 있을 때 휘(徽)에게 처음으로 선문답을 신청했다. “문수보살은 칠불의 스승이라고 하는데 문수보살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문수보살이 일곱 부처를 가르쳐 부처가 되게 했다면 그 문수보살은 누가 가르쳤냐는 이야기다. 이론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를 비롯한 과거 일곱 부처보다 더 지혜가 뛰어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불교적 관념을 벗어나면 가능하겠지만 불가에서는 그 이상은 분명 내세울 존재가 없다. 그러자 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금사계(金沙溪)의 마 씨 집 며느리이다.” 뜰 앞의 잣나무나 마른 똥막대기와 같은 유의 대답이다. 할당은 알아듣지 못하고 2년 동안 그 말귀만 가지고 참구하였다. 어느 날 할당이 정좌하고 있을 때 어떤 스님이 지나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두드렸다. “사대(四大)를 빌어서 몸을 이루고 육진(六塵)을 인연으로 마음이 생기니 육진이 없을 때는 무엇으로 마음을 삼을 것인가?” 사대는 흙, 물, 불, 바람으로 형상을 이루는 우주의
최근 유명 취업 포털사가 직장인 1천400여명을 대상으로 최고경영자(CEO)로 가장 모시고 싶은 역사적 인물 유형을 설문 조사한 결과, 22.4%가 합리적 의사 소통을 지닌 ‘정조대왕形’ 을 꼽았다. 새로운 세계와 이상향을 실현해나가는 ‘광개토대왕形’(19.7%), 인재 문화경영의 표본인 ‘세종대왕形’(15.5%), 통합과 상생의 지도자 ‘주몽形’(13.5%), 의리와 충절을 지킨 ‘이순신장군形‘(12.4%) 보다 한층 앞선 결과였다. ‘뛰어난 국가 경영자’로서 현군 ‘정조대왕’의 사상과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고장이 수원시다. 그 110만 수원시(시장 김용서)가 ‘정조대왕의 꿈’을 ‘열린시정 일류행정’으로 바통을 받아 재도약에 나선 것이다. 민선 4기의 지난 14개월 시정은 교육 환경 경제 문화 환경 복지 교통 광역 등 전 분야에서 단단한 초석을 다졌으며 이중 몇몇 분야는 가시적으로 획기적인 성과를 보였다. 행복한 스포츠 도시, 교육의 전폭적 지원, 국제 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