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중 /성향숙 이 둥근 구조물 밖으로 빠져나오기 전 난 어머니 자궁 속에서 35억 년쯤 살았을 거네 최초의 아메바, 어디로든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었네 온몸으로 움직이는 수없는 헛발질 세포 분열을 서둘러 끝내고 어디든 정착하고 싶네 하지만 양수 속에서 눈도 뜨지 못하고 어둠만 손으로 더듬고 있네 세찬 파도에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지네 깨지고 부서질 때마다 허물이 한 겹씩 벗겨지네 벗겨질수록 조금씩 아주 느리게 커져 가는 내 이마 지하 어둠 속을, 깊은 바다 속을, 달빛 속을, 천왕성, 명왕성, 어딘지 모를 행성을, 넓고 넓은 우주공간을 마음대로 유영하고 싶네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수미산을 꽉 채운 나의 뼈마디 내 속의 내 속의 내 속의 내가 수없이 허물 벗은 껍데기, 자궁 속을 가득 채우네 우주 배꼽에 매달린 탯줄 움켜잡고 난 아직도 진화 중 문화 가 - 00224<일간> 2002년 6월 15일 창간 찰스 다윈은 ‘진화론’에서 모든 생명체는 ‘진화 중’이라고 정의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은 소우주라고도 한다. 인간의 오장육부를 들여다보면 우주의 조화를 엿볼 수 있고, 어머니 자궁…
洪福 /김보숙 엊그제 시켜먹은 군만두 접시에 새겨진 홍복은 언젠가 침을 잘못 맞아 앉은뱅이가 되었다는 그이와 이름이 같았는데 군만두 접시가 되어진 홍복과 홍복이 되어진 군만두 접시 위에는 가짜 브로콜리가 싱싱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씹어 먹는 장난을 위안삼아 소간을 씹어 먹는 오가네 셋째고모에게 싱싱한 브로콜리는 장난칠 수 없는 군만두 접시에 불과했는데 엊그제 시켜먹은 군만두 접시는 앉은 뒤로 일어서지 못한 홍복처럼 남의 집 담밑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데. -계간시와사상 가을호에서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며 살기는 힘이 든다. 인간은 어차피 본능적인 욕망에 갇혀 사는 존재이므로 더 그렇다. 항상 더 나은 행복과 더 나은 인생을 꿈꾼다. 그러다 보면 주변의 불행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 군만두 접시에 새겨진 洪福이라는 글자 하나를 바라보며 시인은 침을 잘못 맞아 앉은뱅이가 되었다는 홍복이라는 인물을 떠올린다. 이름이 홍복이면서도 洪福에서 이미 멀어진 안타까운 존재다. 불특정 다수에게 날리는 洪福이라는 축원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식별할 수 없는 그림일 수도 있겠고, 누군가에게는 더 뼈아픈 상처일 수도 있겠다./장종권시인
詩/우대식 시는 나를 일찍 떠난 어머니였으며 왜소했던 아버지의 그림자였으며 쓸쓸한 내 성기를 쓰다듬어 주던 늙은 창녀였으며 머리에 흐르던 고름을 짜주던 시골 보건소 선생이었다 시는 마당가에 날리는 재灰였으며 길을 잃고 강물 따라 흐르는 밀짚모자였다 폭풍전야, 풀을 뜯는 개였으며 탱자나무 가시 아래 모인 새이기도 하였다 늘 피가 모자라 어지러워하던 한 소년이 주먹을 힘껏 모았다 피면 가늘게 떨리는 정맥 그 곳에 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현대시학 2013 8월호 그러고 보면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아니면 있었던 어머니 아버지와 날리는 먼지, 어슬렁거리는 개, 땡볕의 밀짚모자, 탱자나무 가시 사이의 새, 젊은 환자의 푸른 정맥 등등 누구나 목격하고 누구나 느끼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흔한 것들이 시다. 그러나 시인은 누구나이면서 또 누구나가 아니다. 흔히 목격되는 사물이나 풍경들의 흔함을 특별함으로 조직하는 힘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흔한 사물이나 풍경에 자신의 무한한 상상력을 첨가하는 사람이다. 그 상상력에 조형적 질서를 부여하고 우주의 근원적 질서를 포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는, 시인은 특별함이 있다. 아니 특별하다./성향숙 시인
서두른 천국행/백우선 시어머니는 여든이 넘었고 처녀 적부터 성당엘 다녔다. 재혼해 들어온 며느리는 교회에 열심이었고 비신자였던 아들도 처를 부지런히 따랐다. 시어머니가 다리가 아파 거동이 어렵자 며느리가 성당엘 차로 모셨으나 얼마 뒤부터는 교회로 태우고 다녔다. 시아버지 제사도 지내지 않자 형제들은 발걸음을 끊었고 친척들도 그 집에 갈 일이 없어졌다. 시어머니는 어느 날 유서도 없이 서둘러 천국으로 떠나버렸다. -계간 리토피아 가을호에서 사는 곳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 사는 날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 여기는 천국이 아니다. 인간은 사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생명을 취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라도 천국으로 가고 싶어 한다. 다음 생에는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 생은 다음 생이고, 이승에서 천국처럼 살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챙기는 천국은 여기에는 없는 것일까. 자기 방식으로 살아주기를 원하는 것은 일종의 강요와 다르지 않다. 상대방의 방식을 이해하고 따라주는 일만 조금 더 늘려주어도 이 땅은 바로 천국이 될 터이다.…
꽃잎 지는 소리 /정명희 지상 저편으로 날아가는 일들 그 속에 흐느껴 떨어지는 비파소리 윤회적 낙하에서 비상을 본다 피는 것보다 지는 것이 더 아름다운 서걱 거리는 몸짓 이별의 그 밤 꽃잎 지는 소리 함께 들린다 문화 가 - 00224<일간> 2002년 6월 15일 창간 시인은 수원의 정자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대외협력위원장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이 피면 꽃이 지게 마련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소생과 사멸을 맞는다. 대자연의 이 이치를 거스르지 못하는 법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소생할 때보다 사멸할 때 그 아름다움이 더 커지는 것은 왜일까? 꽃은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워 보이며, 해는 뜰 때보다 노을로 질 때 더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는 사멸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한편 아름다움도 느낀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한순간의 사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 세상 만물이 윤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야 한다. 아름다움이 또다시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고 슬픔의 눈물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꽃잎이 지는 순간 다시 꽃잎이 피어나기
아들의 머리를 잘라주면서 /김명수 어느새 자라난 아들의 머리를 뒷마당에 나와서 잘라주고 있다 헌 신문지로 목둘레를 여미고 눈을 덮는 긴 머리를 잘라주고 있다 무엇이든지 잘 잘리는 어머니 쓰시던 큼직한 가위 머리숱도 자라면 눈을 가리고 옆머리도 자라면 귀를 덮는데 내가 서투르게 가위질을 하면 아들은 심통으로 눈물 흘리고 나는 우스워 미소짓는다 시집 <하급반교과서/1983년 창작과 비평> 아들의 머리를 잘라주고 있는 아버지와 앉아서 머리를 맡기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정겹다. 아마 어머니가 쓰시던 큼직한 가위로 시인의 머리도 잘려나갔으리라. 서투른 가위질에 심통도 났겠지만 이발소에 가지 못하는 속상한 마음에 눈물 흘렸으리라.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의 따뜻하고도 아픈 한때를 빛바랜 사진처럼 보여주고 있다. /조길성 시인
하지 /박현수 해가 가장 길게 혀를 빼어 지상을 오래 핥는 날 상처에 닿을 때마다 붉어지는 혓바늘 하염없이 핥아주는 것밖에 해줄 것이 없는 늙은 암캐의 혓바닥처럼 서러운 온기에 온 머리가 젖어 꿈이 맑아진 풀잎들 치유는 핥을 수 있는 따스한 거리에 있어 핥을 수 없는 곳마다 덧나는 상처들 혓바닥이 지난 곳마다 매미가 자라고 사슴의 뿔이 떨어진다 사람의 눈동자가 지상에서 가장 먼 곳에 올라 맑게 씻기는 날 월간 『현대시』2008/ 10 농촌에선 절기 별로 해야 할 일들을 정해놓고 때맞춰 농사일을 했다. 농촌이 도시화 하면서 잊어버린 절기들 하지, 지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부터 볕이 내리는 날 새삼 마음 따뜻한 온기가 전해온다.가난한 농가의 어머니들은 칭얼거리는 어린것을 달래려 무명 앞치마 위에 앉히고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는 일밖에 달리 수가 없었다. 산딸기가 익으면, 이라든가 텃밭 가장자리 개복숭아가 익으면 따주겠다던가 아득한 약속을 하며 긴긴 여름 해를 넘겼다.그러나 치유는 먼 곳이 아닌 핥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혓바닥이 지나간 자리에서 매미가 자라고 사슴의 묵은 뿔이 떨어지고./최기순 시인
더 이상 큰 아름다움은 없다 /김영환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강보에 쌓여서 절대순수의 그 입으로 울음을 토할 때, 지상의 모든 소리는 몸을 낮추고 주춤주춤 물러서는 것이었다 동인시집 <겨레와 시/1995년 정경출판사>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라 하신 그 말씀이 늘 잊히지 않는다.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은 자기만의 울음을 가지고 있다. 그 울음 중에서도 태어나는 순간의 울음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건 자기 선언인 것이다.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아름다움은 세상에 정말 없을 것이다. /조길성 시인
걷다 보면 산을 탄다 /허정희 흔들흔들 올라갔다 내려갔다 땅바닥에 닿았다가 하늘에 솟구치다가 움직이는 산에 대하여, 걸어가는 나에 대하여 그림자가 너울너울 산등성을 타고 정해진 그림자 속에 발을 담그었다가 지나쳤다가, 또 다가서다가 그렇게 알 수 없는 걸음을 놓으며 산을 탄다 다가가면 빛은 밝아 오고, 멀어지면 등 뒤에서 빛나는 등 돌려 별들을 지나치다 보면 어두워서 더 검게 보이는 나뭇잎 뒷골목 세상에서 유유히 속풀이하듯 시원타 웃어제낀다 오늘은 어디서 잠시 쉬었다 갈 수 있을까 멀어지는 불빛을 향해, 다가오는 검붉은 산을 향해 누군가 불러 돌아보면 걱정하는 척 그만 가라 하지만 지나치는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닌데 걷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닌데 그렇게 산을 타다 보면 땀이 비가 되어 떨어지고 한 걸음도 내딛기가 버거울 정도로 다리가 휘청거릴 때 숨소리 가슴 터지게 가파오를 때, 그때 그곳에서 벗어 나오는 이 아프고도 짜릿한 기분 느낄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기억으로 산을 만들고 추억으로 길을 만든다 걷다 보면 그런 웅장한 산이 만들어지고 가야 할 산도 만들어지고 가지 못할 산도 나도 모르게 만들어 어디로 어디로부터 그렇게 정해진 그 길을 따라 산을 탄다 문화
물방울 렌즈 /홍순영 누가 밤새 저 감나무 잎새마다 카메라 매달아 놓았다 바람 흔들어대도 연방 셔터 눌러대는, 설핏 비친 겹벚꽃 겨드랑이 속살과 ‘피아노 모텔’ 나서는 연인, 재빨리 줌-인해 찍고는 구름의 느릿한 발걸음과 바람의 뒤통수도 한 컷 쓰레기봉투 후벼놓고 지하계단으로 잠적한 고양이 꼬리, 고층 베란다에서 까치발 들고 새를 부르는 여자까지 대롱대롱 담고 있는 물방울 렌즈 새 한 마리 햇살 쪼며 날아오르자 수십 장의 풍경들, 사방으로 흩어지고 배터리 잃어가던 물방울 카메라 서둘러 감나무의 속사정, 연사로 찍어댄다 얼결에 빨려든 하늘 감나무의 배경이 시퍼렇다 홍순영 시집『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문학의 전당 긴 장마, 온 천지에 ‘물방울 렌즈’ 투성이다. 알알이 맺힌 물방울은 거울처럼 주변의 풍경을 찍는다. 물방울의 크기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담는다. 줄줄이 생겼다 줄줄이 떨어지고 또 줄줄이 생긴다. 마치 폴라로이드처럼 한번 찍은 장면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다시 또 풍경을 끌어당기며 양껏 몸집을 키운다. 떨어진 그것들은 그것들끼리 모여 어디론가 흘러가고 흘러가는 동안 그것들대로 또 다른 풍경을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