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장이엽 꽃잎 아래 똬리 틀고 숨어도 네 음산함을 숨길 수는 없어 가늘게 흔들리는 꽃가지의 떨림이 땅 속으로 전해져 구름 조금 낮고 빗방울 흩뿌리던 어떤 날, 날름 한입에 빨려들던 어린 개똥지바귀의 날갯짓을 난 보았어 고 가느다란 두 눈에 하늘을 다 담는다고 네 마음이, 하늘이 되냐? -장이엽 시집 <삐뚤어질 테다>에서 童心이란 아이들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이들의 생각에는 어른들의 인생에 묻어있지 않아 그야말로 자연스럽고 천진할 것이다. 아이들은 그들이 그들의 나이에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미래의 꿈과 필요한 지식을 알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뱀을 바라보는 눈도 차이가 있다. 시인은 동심의 시각으로 뱀을 바라본 듯하다. 그러니까 약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 뱀은 호랑이어도 무방하고, 치-타여도 무방하다. 약자에 대한 잔혹한 살생이 악마의 얼굴로 다가온 것이다. 천성이 악한 자는 아무리 그 이빨과 발톱을 숨겨도 끝내는 정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늘을 닮는다고 하늘이 될 수 없는 존재들, 세상 곳곳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그들로 인해 세상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장종권 시인
自恨(자한) /이매창(李梅窓) 春冷補寒衣(춘냉보한의) : 봄날이 차서 겨울옷을 손질하는데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 사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비추어주네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 숙인 머리 손길 가는 대로 바늘을 맡기는데 珠淚滴針絲(주루적침사) :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네. 출처- 기생시집(문정희 역음) /도서출판 해냄, 등 참고 본명은 향금(香今), 부안(扶安)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이를 사랑한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그중 유희경과 사이가 매우 깊었는데 이 시는 매창이 유희경을 떠나보내며 읊은 시이다. 천민 출신으로 한성부윤까지 오른 이와 매창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을지 이 시를 보면 절절하다. 서른일곱에 요절한 매창의 애달픔과 한스러움 때문인지 방안에 서늘한 귀기가 서려온다.
하이패스 /임희구 외곽고속도로를 규정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속도가 많이 줄어든 것이다 속도를 버리니 가야 할 곳의 멀고 가까운 개념이 없어졌다 급한 것 다 버리고 살아야겠다 생각하며 달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버스가 내 앞을 가로질러 간다 꽁무니에 근조라고 써 붙인 황천 행 버스다 살아오는 동안도 숨 막히게 바빴을 것인데 싸늘한 시체가 된 고인의 세상 마지막 길을 급하게도 모셔간다 앞차들을 추월하여 톨게이트를 하이패스로 통과한다 사는 것만큼이나 저승길 문턱도 하이패스다 라고 빠르게 보여주며 달려간다 쌩쌩 출처 - 임희구 시집 『소주 한 병이 공짜 』- 2011년 문학의전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보면 달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리에 있기 위해 계속 달려야 하는 역설. 100여 년 전에 이미 그 책의 저자 루이스 캐럴은 우의적으로 현대인들의 속도에 관한 강박관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이패스는 톨게이트 앞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쌩쌩 달려온 속도가 잠시의 정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그것은 “살아오는 동안도 숨 막히게 바빴을 것인데” “저승길 문턱도 하이패스&rdqu
무너진 상자 /김상미 얼마 동안 상자 안에 갇혀 있었을까? 상자 안에 갇혀 있었을 땐 오랫동안 빛을 쬐지 못해 아직도 세상이 캄캄한 줄 알았다. 그래서 누가 내게 먹이를 주는 것만으로도 최대의 축복으로 여겼다. 그러다 나는 보았다. 결코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말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낮게 낮게 조용조용 춤추는 푸른빛! 나는 손을 뻗어 그 푸른빛 하나를 땄다. 십자형의 네잎클로버! 그러자 상자 안 여기저기 균열이 생기면서 상자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너진 상자를 넘어 네잎클로버를 가슴에 품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달빛도 밝아졌다. 달빛이 점점 밝아질수록 내 가슴에 품은 네잎클로버도 쑥쑥 자라났다. 나는 달리고 또 달리면서 네잎클로버가 내뿜는 향기를 맡았다. 희망의 향기! 그 향기를 맡으며 나는 나를 상자 안에 가두고 내 자유를 빼앗고 내게 먹이만을 준 그들을 하나하나 떨쳐냈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달리는 이 길 위에서 붙들지 못하리라. 누구도 붙들 수 없으리라. -2012년 시와 경계에서 발췌- 일명 스타 시인 중 한명인 김상미 시인의 시는 발랄하면서도 시가 품고 있는 의미는 갓 갈아낸 낫의 날을 가지고 있다. 상자란 제도권이란…
해남 가는 길 해남은 해외 남쪽인가 해남 가는 길 푸르던 내 마음 붉은 꽃으로 피어난다 아니면 바다의 남쪽인가 해남 가는 길 소금꽃 끝없이 피어나는 가슴 낙타등 같은 하루를 두드리며 해남 가는 길 발바닥에 물집 잡히듯 잡히는 그리움 해남 가는 길 가면 갈수록 끝없이 목마른 그 길 -박병두 시집, 『해남 가는 길』 고요아침, 2013 ‘땅끝마을 해남’이라고 했던가? 누구나 마음의 끝자락에는 고향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시인의 고향길을 읽는다. ‘해남 가는 길’은 닿을 듯 닿지 않는 끝이며, 피어난 듯 다 피지 못한 화원이었고, 그리움이 만든 아물지 않는 물집이기도 하다. 10여년 만에 펴낸 박병두 시인의 시집 전편에는 세상이라는 염전에 피어난 소금꽃 같은 어머니의 젖가슴이 보이고, 낙타 등 같은 굴곡 많은 가족사가 머언 길처럼 펼쳐져 있다. 시인의 푸른 마음이 붉은 꽃으로 피어나는 데는 어쩌면 못 다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걸어왔던 목마른 시간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해남 가는 길이 어찌 시인 한 사람만의 고향길이겠는가? 이제 우리는 ‘해남 가는 길’에서 시인의 어머니와 사랑과 한 시절의 아픔
픽션보다 /하재연 웃음을 떠올렸던 순간은 순식간에 일어난 듯 바뀌어서 사라진다.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들 아침 햇빛이 이상하게 비춘다. 꿈속에서 나는 아주 여러 번 살아왔다. 내가 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하재연 시집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문학과 지성사 영화에서는 인간의 삶이 메트릭스라 한다. 장자의 호접몽은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건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건지 모른다고도 한다. 환상이랑 허구는 분명 다른 개념이지만 때론 우리의 삶이 환상인지 허구인지 혼란스러운 순간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가령 매일 같은 공간이었지만 잠에서 문득 깼을 때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거나 처음 와 보는 곳인데 혹시 이곳에서 살았던 것 같은 데자뷰. 순간순간 보이는 헛것들. 매일 밤마다 꾸는 꿈들… 이 불가사의한 것들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해석이 불가능해 보일 때가 많다. 어디 그것뿐이랴. 삶의 속성을 들여다보면 현대인들의 삶은 소설보다 훨씬 더 픽션 같은 경우가 흔하디흔하다. 그러니 시인은 ‘내가 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도 그렇다.
4월이 오면 /최화숙 봄비 타고 꽃바람 몰고서 싱그러운 4월이 목련 가지 끝에 오면, 잔솔가지 너머엔 먼저 온 봄이 물결을 반짝이며 흐르고 아이가 냇물에 발벗고 들어서면 낯간지러운 조약돌이 흩어지는 봄날 개나리 움트는 소리는 나른한 춘곤을 밀어낸다. 4월은 날씨가 맑고 밝은 ‘청명’과 봄비가 내려 백곡이 윤택하다는 ‘곡우’에 이르는 절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시인인 T. S.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시인들이 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잔인한 봄을 노래했다. 그가 살던 유럽 사회는 자본주의가 만연하기 시작한 현대사회였고, 그 과정에서 삶의 소중한 가치들이 훼손되었다. 그는 이러한 현대성을 나타내고자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시는 4월의 아름다움을 한껏 담아내고 있다. 싱그러운 공기를 머금고 내리는 봄비와 잔솔가지에 맺힌 빗방울들을 보노라면 세상살이의 각박함을 훌훌 털어버리게 한다. 봄이 오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세파에 얼어붙은 마
땅 /우대식 참 좋다 오줌도 똥도 다 없어진다 사람도 땅에 누우면 사라진다 미래도 녹인다 부처도 녹인다 땅 깊은 속에는 불이 끓고 있다 끓는 불 속으로 손을 쏙 집어넣어본다 그 안에 똥도 오줌도 사람도 딱딱한 별이 되어 하늘에 걸려 있다 별들이 많다 땅은 지상의 쓰레기를 모아 별을 만들고 있다 -우대식 시집 <설산국경>에서- 음양의 논리로 보면 땅은 모성의 상징이다. 모든 것을 품에 안아주는 넉넉한 존재이며 동시에 창조적 생산의 상징이다. 대지가 아니고서는 생명을 이어갈 자가 없으며, 그 존재를 이어갈 수조차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터전인 대지는 그러나 고요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대지 위의 모든 것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들을 자라게 하고, 또한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아마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땅은 뜨겁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펄펄 끓고 있는 마치 용광로이다. 대지 위에 무엇이 존재하였던 간에 대지는 다시 그들을 모아 밤하늘에 번쩍이는 영원한 별을 만든다. 이것이 대지의 숭고함이다.
안경점에서 / 임병호 잃어버린 내 안경들 어디에 있을까 술집에서, 喪家에서 택시 안에서 기억 없는 곳에서 나와 헤어진 안경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어두운 세상 밝게 보려던 흐려진 가슴 맑게 보려던 내 안경들은 지금 도시 어디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산 속 어디서 새소리 바라보고 있을까 이승 어디서 저승을 바라보고 있을까 늙었는가, 옛날 옛일이 자꾸 생각나는데 나를 떠난 추억들이 분신처럼 그리워진다. 절묘한 아픔들이 시인의 생의 이면들로 가득하다. 그 아픔들의 회상은 숨기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이승과 저승을 먼저 불러놓고 기억하다니… 분명 시인의 기쁨이 곡주 한 잔의 맑은 샘이 아니다. 잃어버린 몇 개의 고독한 시를 담았을까. 시인의 뒷모습, 강산은 유수하게 지났건만 시인은 여전히 소년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 고독의 향수와 냉정한 바람 속 그리움이거나 변주곡 같은 사념들이 밀려온다. 번지 없는 주막에서 시절을 불러내고, 울고 넘는 박달재의 서곡은 애절한 추억들을 내놓은 깊은 밤, 시인의 미소에 어느 날 보니 주름이 깊게 지고 천진난만한 동심의 사연들은 그리움들로 반전된다. 긴 대화가 어느 길에서 끊어지고 차창 밖으로 기대선 시인의 꿈은 어디로 갔
동안에 /한영옥 네 얼굴에 먹구름 흘러가기를 순하게 기다리는 동안에 네 얼굴이 말갛게 드러나기를 천천히 기다리는 동안에 많은 것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때를 놓친 것은 아니다 지나갈 것들 지나갔을 뿐이다 잡아뒀으면 까마중 열매라도 됐을까 네 참 얼굴을 기다리는 동안에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 출처- 시와시 <2012년 겨울호> 푸른사상 어린 시절 시냇가에서 샘을 파보면 흙탕물이 흘러나온다. 나중엔 모래들이 걸쭉하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파던 손을 멈추고 잠시 앉아있으면 흘러갈 것들은 다 흘러가고 맑은 조약돌 반짝이는 작은 시내가 또 하나 생긴다. 그 물에 손을 씻고, 얼굴을 씻고, 한 모금 떠 마시고 그리고도 아까워 차마 두고 돌아서지 못했던 기억, ‘지나갈 것들 지나갔을 뿐이다.’ 그것은 기다려 본 사람의 말이다. 보낼 것은 보내고 잊을 것은 잊어본 사람의 말이다. 삶을 통틀어 재단해본 사람의 말이다. ‘아무 것도 지나가지 않았다’ 단언할 수 있는 시인의 성숙함을 까마득히 올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