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9 (월)

  • 구름많음동두천 26.5℃
  • 구름많음강릉 30.5℃
  • 서울 27.2℃
  • 구름많음대전 26.7℃
  • 맑음대구 26.4℃
  • 맑음울산 25.7℃
  • 구름많음광주 26.4℃
  • 구름조금부산 26.5℃
  • 맑음고창 26.6℃
  • 맑음제주 26.7℃
  • 구름많음강화 26.1℃
  • 구름많음보은 25.7℃
  • 맑음금산 24.3℃
  • 맑음강진군 24.6℃
  • 맑음경주시 27.4℃
  • 맑음거제 26.7℃
기상청 제공

“후배 성악인 지원하는 후원자가 꿈”

[백스테이지] 복서 출신 테너 조용갑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도 해보고 자신에게 맞는 직장도 찾는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전혀 다른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일 또한 거의 드문 일이다. 이처럼 한 분야에서도 최고가 되길 어려운 일을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해 최고가 된 인물이 있어 화제다.

 

바로 그 주인공은 복싱 선수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테너로 자리잡은 조용갑 테너. 2012년 대민민국 연주회를 빛낼 조용갑 테너를 만나 그동안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해 들었다.

복싱선수에서 테너로 외국에서는 이미 알려진 그지만 한국에서는 뒤늦게 테너로 자리잡은 복서출신 조용갑 테너는 몸집이 좋고 목소리도 성악가 답게 듬직하고 늠름한 모습에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기자와 만나 지난 12월 22일에 있었던 동감 콘서트에 대해 먼저 입을 열었다.

“동감 콘서트를 통해 어려운 사람을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의미있는 음악회 자리이고 저 또한 이 ‘동감콘서트’에 동참해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꿈을 주어 기분이 아주 좋다”면서 “앞으로도 소외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공연을 많이 하겠다”고 밝혔다.

테너 조용갑은 ‘복서’ 출신 ‘테너’로 이슈를 몰고다닌다.

복싱선수를 하게된 계기가 궁금했다.

“제가 서울의 모 공고 고등학교 다녔어요. 집안형편이 어려워 저를 지원해줄 형편이 안됐습니다. 권투를 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에 질 안 좋은 친구들이 내 짝을 괴롭혀서 괴롭히지 말라고 했는데 그 패거리들이 저를 학교 소각장으로 부르더라구요. 그래서 그 패거리 중 하나랑 싸워서 이기면 안 괴롭히기로 약속을 했는데, 제가 이겼어요.(웃음) 그랬더니 그 패거리들이 저를 집단으로 폭행 하더라구요. 너무 심하게 맞아서 그날 이후 제 짝과 권투 체육관을 찾아가 힘을 키우자는 막연한 생각에 권투를 시작 했습니다. 근데 이게 지금은 복싱현실이 돈도 안되고 해서 어려운 시기지만 그때는 대전료가 제법 좋았어요. 한 두 경기만 치르면 왠만한 샐러리맨 한달 월급 이니까요. 프로생활은 군대 제대하고 전향을 했어요. 그전까지는 아마추어로 활동하다가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도 하고요. 프로 자격시험을 KO로 이기고 프로가 됐는데, 그 이후 프로시합은 제가 참 체중조절을 못했어요. 그게 너무 어렵 더라구요. 아시는 분은 알거에요. 250g 빼기가 왜 그렇게 힘든지...열번 싸웠는데 프로전적은 반 이기고 반졌네요.

하지만 이제는 ‘복서’가 아닌 ‘테너’라고 하는 것이 더욱 잘 어울려 보인다.

이제는 ‘복서’가 아닌 ‘테너’로써 삶이 궁금했다.

“원래 제가 음악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기타를 칠줄 알았고, 시합이 끝나면 기타치고 노래부르는게 취미였어요. 그러다가 교회에서 성가대를 했는데 사람들이 하나같이 목소리가 너무좋다, 노래쪽에 재능이있는거 같다. 다들 해봐라, 이런식이였어요. 그래서 저도 내가 이쪽에 재능이있나? 생각해보고 ‘파바로티’ 테이프를 사서 매일 들었어요. 그렇게 매일 듣고 따라해보니 목소리도 비슷해지더라구요.”

청년 조용갑은 그렇게 27살의 나이로 권투를 접고 이탈리아로 떠나 14년간 머물면서 유럽의 성악 세계에서는 동양의 ‘파바로티’로 불렸다.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이탈리아 같은 유학 비용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조 테너는 “교회 목사님이 전 비용을 대 주셨다. 그분 말씀이 사람을 키워야 한다. 재능있는 사람을 키우자. 이러시면서 선뜻 저를 보내주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그가 떠난곳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이란 학교로 이탈리아 에서는 최고의 음악학교로 알려져 있다.

소프라노 조수미씨도 이곳 출신이다.

“1년간은 언어연수를 했고 그 이후에 테스트를 통과해서 들어갔어요. 테스트는 1년에 한 번만 있는데 기적이였어요. 아마 심사위원분들이 제 가능성을 봐주신거 같네요.”

자국민도 들어가기 힘든곳에 아무 연고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본인만 믿고 건너간 유학길에 쟁쟁한 예비 성악가들을 제치고 합격을 했다.

조용갑 테너는 2년뒤 국제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과 동시에 14년간 20여차례나 콩쿠르 대회에 정상에 올라서는 기록과도 같은 성적을 올리며 이탈리아를 비롯, 유럽에서는 유명한 테너로 알려졌다.

“외국에서는 유명 인사였지만 한국에서는 제가 정통 성악을 배우지 않았고 어디어디 학교 출신도 아니고 하니까 활동하기가 힘들더라구요. 한국에 소개 된적이 거의 없었어요. 한국에 섭섭함 보다는 원래 우리나라가 학연, 지연, 혈연이 강하니까요. 그냥 그러려니 이해했어요. 안타깝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리고 제 자신도 국내 활동에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저에게는 기반을 잡은 유럽과 이탈리아가 있다는 생각이였죠.”

진정한 테너로 자리 매김한 것을 국내 오페라 페스티벌을 하면서 였다.

그때부터 그의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내 오페라 페스티벌을 하게 되면서 알려지게 됐죠. 이슈가 되고 뉴스도 나오고 정명훈 선생님도 제 공연을 보고 인정을 해주시더리고요. 2002년 월드컵때는 이탈리아 국영 방송에 참가했는데 16강전때 무척큰 곤역을 치뤘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는 “재능 보다는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몰랐다”면서 노래가 너무 좋아서 시작했고 재능은 조금 있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더 노력했다”고 말랬다.

조용갑 테너는 후배에 대한 조언과 좋은 성악가를 만들기 위한 정책적인 면에 대해서도 말했다.

“성악은 돈이 많이 드는게 문제에요 계속 돈이 들어가니까, 잘하는 능력있고 재능있는 인재들이 못크는게 아쉬워요. 이탈리아의 티오피 아리티스트 학교단체를 만들어서 공짜로 레슨을 하고 키워서 정상을 올라가면 그때 생기는 수익을 가지는 구조를 갖고 있어요. 저도 인재를 양성하는 학원을 만들 예정이에요. 그래서 유학도 보내주고 성악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지원할 계획을 갖고 있어요. 정상까지 올라가데 현실은 너무 쓸데없는게 많아요. 저는 그부분을 없애고 필요한것만 가르치고 소외계층을 찾아가 공연도 벌일 예정입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이를때 조 테너는 “꿈은 현재의 상황 형편을 이길수 있다. 그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면 반드시 훌륭한 성악가가 될수 있다. 꿈은 이뤄진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