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역사학과는 대개 인문계열에 소속되어 있다. 역사학을 인문학의 범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문사철을 떠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은 정말 인문학인가? 역사학자들이 인문대학 등 인문계열 소속으로 되어 있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굳어진 인식이다. 역사학을 인문학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역사에는 일관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대신에 인문학을 교양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교양인의 조건에 인문학과 예술은 필수이지만, 자연과학이 배제되는 건 우습다. 자연현상의 이치에 대해 무지하고도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학자나 철학자들이 기득권 보호 차원에서 인문학을 지배계급의 넓은 교양으로 간주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는 19세기 유럽의 분위기에서 등장한 실증사학의 영향이 크다. 역사를 단순히 사실의 집적과 나열로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학의 대상은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해 모여 살게 된 이후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학의 대상이 그러한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역사서의 대
철학은 모든 학문의 시원이다. 서양에서는 지혜의 사랑(Philosophy)이었고, 동양에서는 넓게 배우고(博學) 깊이 묻는(審問) 것이었다. 그 대상은 인간과 우주를 포함한 세상만사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철학은 형이상학, 즉 관념론 부분만 남았다. 학자들은 철학의 역사를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의 역사로 정리한다. 물론 과학의 견지에서는 유물론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자연과학의 성과와 발견을 바탕으로 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발전시켰다. 엥겔스는 ‘자연은 변증법의 증거’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론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관념론은 이성의 사유와 통찰과 상상이다.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했다. 물론 이성적 사유의 결과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상대성이론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러니 철학자는 관념적 사유의 결과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검증의 노력까지 해야 한다. 사실에 부합하는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주장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철학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19세기 산업사회 이후 수많은 분과학문들이 철학
인문학의 위기라는 담론이 지금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 것 같다. 한 세대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위기의 국면을 지나 존재감마저 희미해진 탓일까? 흔히 위기의 원인을 실용학문을 우대하는 세태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서울대학교 인문학 교수들이 전공의 영역을 벗어나 학제간 소통에 나섰다고 한다. 인문대 학장인 철학과 이석재 교수와 국문과 박진호 교수, 영문과 안지현 교수, 종교학과 김지현 교수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석재 학장은 이 소통이 좁은 의미의 한국학을 벗어나 융합적 보편성을 찾아보려는 도전이라고 했다.(교수신문, 20201년 9월 8일자) 그러나 인문학의 경계는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학자와 경제학자들과도 교류한다고 하지만 귀동냥 수준을 넘지 않을 것 같다. 대학교수들은 학과라는 웅덩이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렇게 가끔 문을 살짝 열고 이웃집과 대화하는 정도에 머문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종국에는 증발하고 황폐해진다. 이 분들이 진행한 워크숍에는 계몽주의라는 주제가 있다. 철학의 역사에서 계몽주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수학과 자연과학의 기초 위에 지어진
부산대학교는 8월 24일 조민 씨의 2015년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동양대 표창장과 입학서류 기재 경력이 주요 합격 요인이 아니라면서도 “당시 신입생 모집요강 중 지원자 유의사항에 제출 서류의 기재사항이 사실과 다른 경우 불합격 처리를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렌트(Hannah Arendt)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악의 평범성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임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아이히만은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유대인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던 것이다. 교육부의 지시에 순응해 거리낌 없이 행동에 옮긴 부산대 보직교수들은 아이히만과 다를까? 부산대는 당초 대법원 판결 이후 입학전형 공정관리위원회를 소집하려고 했으나 교육부의 압박에 따라 서둘러 결정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하나는 대학이 아무리 교육부에 재정을 의존한다 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지시에 따라야 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둘러 결정하더라도 사실관계를 떠나 여론에 휘둘리는 논리로 교육부가 주문하는 대로 입학취소 결정을 내려야 했느냐 하는 것이다
언론개혁의 타깃은 정치권력이 아닌 언론자본권력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허위조작보도를 남발하는 언론사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려는 데 대해 반대하는 언론노조 윤창현 위원장의 말이다. “권력 압제에 맞서 언론을 되찾아오는 게 개혁 본질이었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정권이 언론에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는 법안을 이렇게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 말에 대해 전북대 명예교수 강준만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을 꿰뚫는 명언”이라고 추켜세웠다.(UPI 뉴스) 또 이 말에 대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의 심석태 교수는 페이스북에서 “항상 일관성을 보여주시는 강준만 선생님 글. 언론중재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 라고 칭송했다. 1987년 6월 항쟁까지 언론의 문제는 독재정권에 부역하는 언론에 대한 정치투쟁이었다. 그러나 6월 항쟁으로 독재권력이 붕괴된 이후는 스스로 권력이 되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민주주의를 왜곡하기 시작한 언론권력에 대한 투쟁, 즉 언론개혁 시민운동으로 바뀌었다. 김중배 선언은 그러한 현실의 변화를 정확하게 짚어낸 진짜 ‘명언’이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는 5월 16일부터 6월 17일까지 온라인 플랫폼에서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위한 국민참여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는 교사, 학생, 학부모, 일반시민 등 10만 1214명이 참여했으며, 개정 교육과정 총론에 반영될 것이라고 한다. 하나만 보자. ‘초·중·고등학교 교육에서 현재보다 더 강화되어야 할 교육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성 교육’이 36.3%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글쓰기, 독서, 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 교육’ 20.3%, ‘진로, 직업 교육’ 9.3%,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교육’ 9.0%, ‘기후변화 등 생태전환 교육’ 5.6%, ‘민주시민교육’ 5.1%, ‘수학, 과학 교육’ 4.9%, ‘안전, 건강 관련 교육’ 4.2%,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디지털 소양교육)’ 3.8%의 순으로 나타났다. 독자들께서도 한번 골라 보시라. 설문의 보기 중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육에서 현재보다 더 강화되어야 할 교육은 무엇일까? 도대체 인성 교육이란 게 무엇일까? 인성 교육은 ‘글쓰기, 독서, 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 교육’과 어떻게 다를까? 민주시민교육이나 과학교육과도 구분되는 다
‘국가교육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 7월 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가교육위원회는 교육비전, 중장기 정책방향, 학제 · 교원정책 · 대입 · 학급당 적정 학생 수 등 10년 단위의 국가교육발전계획 수립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위원회가 백년지대계의 교육을 담당하기로 하고 잉태된 셈이다.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다음 정부에서 출범시키기로 했으니 내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7월 중에는 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성과 중립성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국가교육회의 이광호 기획단장은 2020년 11월 24일 개최한 ‘국가교육위원회 설립 방안 정책토론회’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기존의 교육 전문가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학부모 등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공론화과정을 통해 국가교육 발전계획에 대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에 대한 우려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의 구성과 국민 참여에 의한 치열한 토론과 합의 도출의 과정으로 해소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교육회의는 국가교육위원회가 설립되면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미래교육 개혁을 준비할 것이라고 했
대학생 박성민이 청와대 청년비서관이 되었다고 해서 잠시 소란이 있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나 고려대 재학생이 개설했다는 박탈감닷컴 따위를 보면, 대학 졸업도 않고 취업 노력도 없는데 9급 공무원 시험이나 행정고시 등 공정한 경쟁도 치르지 않고 단박에 1급 공무원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시기와 불만이 대부분이다. 각설하고, 일각의 대학 졸업 운운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한다. 11년 전 한 학생이 대학을 그만둔다며 자퇴를 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은 2010년 3월 10일 고려대 정문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오늘 저는 대학을 그만둡니다.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이기에’라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를 했다. 김예슬은 고등학생이던 2005년부터 대학생나눔문화에서 고전을 배우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는 현장을 익히고, 농촌활동을 하며 세상을 알아갔다. 학이시습의 과정에서 훌쩍 커버린 김예슬이 경험한 대학은 죽은 대학이었다. 김예슬은 현재 박노해 시인이 설립한 시민단체 나눔문화의 사무처장이다. 박성민 비서관은 이미 정치인이다. 박성민은 공개 오디션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민주당 청년대변인이 되
미디어 환경의 변화니 커뮤니케이션 혁명이니 하는 말들이 무성했던 세월이 족히 반세기는 된 것 같다. 근래에는 미디어 환경 대신에 생태계 변화라는 말로 바뀌었다.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그 변화가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어서 그런지 요즘은 이런 호들갑이 뜸해지고 연구자와 언론사, 기자들 모두 각자도생 하느라 바쁘다. 연구자는 본질을 놓치고 현상을 좇느라 여념이 없고, 언론사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듯 절실하고, 기자들은 ‘단독’을 만들어내느라 분주하다. 일컬어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 하던가. 후기 자본주의, 탈 산업사회, 포스트모더니즘 등 포스트주의가 유행하던 때도 있었다. 일리도 있고, 정보사회론의 대두와 미시담론의 발견 등 공(功)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주의를 앞세우며 진실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진실은 상대적이며, 절대적 진실은 없다는 것. 탈진실의 시대를 설명하는 구호다. 그 결과 대학은 진리 탐구의 전당에서 취업학원으로 전락했고, 언론(저널리즘)은 객관보도의 원칙을 폐기하고 상업적 선정주의에 빠졌다. 그리고 기자는 기레기가 되었다. 오래 전부터 대학의 언론관련 학과에서는 저널리즘의 역사와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따라
대학이 위기라고 한다. 원인은 학령인구의 감소로 인해 신입생 충원이 안 된다는 것. 13년 동안 등록금 동결로 인한 재정 위기도 한 몫 한다고 한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현실화 될 것이라는 지방대학의 위기는 지방 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하여 교육부가 팔을 걷고 나섰다. 재정 지원을 통해 정원 감축을 유도하되 회생이 어려울 정도로 부실한 대학은 폐교시키기로 했다. 교수노조와 대학노조 등 7개 관련단체들은 이에 대해 5월 24일 기자회견에서, 대학에 대한 정부 교육 재정의 대폭 확충 및 뒷받침과 대학운영자금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대학 위기가 오래된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고질적 문제들을 해소하고 교육체제를 바꾸는 기회일 수 있다”며 “고등교육 정책의 대전환을 이루기 위한 중장기 실질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대학의 공영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학 설립 허가와 학생 증원을 남발하는 과정에서 개방형 산업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전환한 광주대, 탐라대 등은 2009년에 학과 신설이나 정원 증원이 자유롭게 풀렸다. 그 해에는 전문대학도 총장 명의의 졸업장을 수여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이미 단과대학 2~3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