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없습니다. 옳음도 그름도 그러합니다. 생각 따라 다르고, 처지 따라 바뀝니다. 누군가에게는 절반이나 마셔버린 술병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절반이나 남은 술병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술병이 ‘벌써’가 되기도 하고 ‘아직’이 되기도 합니다. 말 역시 그러합니다. 뜻을 전하기 위한 게 말이지만, 되려 뜻을 왜곡하는 게 말이기도 합니다. 말이 말을 뒤집고 말이 말을 감춥니다. 뒤집고 감춘 건 말인데, 뒤집히고 멀어지는 건 사람입니다. 말을 아끼고 가려 할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사랑도 이별도 출발점은 말입니다. 전쟁과 평화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선전포고든 평화협정이든 말 아닌 게 없습니다. 말이 말을 낳고, 말이 말을 버립니다. 낳은 말도 버린 말도 사람의 것인데, 낳음과 버림의 끝에는 사람은 없고 말만 살아 날뜁니다. 날뛰는 말 뒤로 사람이 숨으면, 말은 흉기가 되고 세상은 난장판이 됩니다. 한 번 뱉은 말은 끝내 담을 수 없습니다. 아낄수록 좋은 게 말입니다. 진심은 말이기보다 침묵에 가깝습니다. 감정에도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사랑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끝내 붙잡아야 할 인연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놓아야 할 짐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랑이 ‘충만’이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행복 역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끼 밥상에서 웃음을 찾지만, 어떤 사람은 일확천금을 쥐고도 허기를 느낍니다. 우습게도, 누군가의 ‘간절’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입니다. 그리 보면, 행복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충분한가’의 문제일지 모릅니다. 삶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 또한 제각각입니다. 어떤 이는 울음으로 버티고, 또 다른 이는 침묵으로 견딥니다. 버티고 견디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남의 답을 들먹입니다. 들먹인다고 해서 그 답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세상살이에는 답이 없습니다. 없어서, 우리가 살아내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면서도, 답 없는 길을 저마다의 발걸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산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라 불리는 제도는 ‘정답 없음’을 인정한 체제입니다. 그런 이유로, 다수의 결정이 늘 옳을 수 없고, 소수의 결정이 언제나 그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답을 이해하려 애쓰는 게 미덕인 까닭도 그래서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옳음은 숫자가 아니라 방향에 있습니다. 나보다 우리를 먼저 살피는 마음에 있고, 혼자보다 함께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온갖 반칙과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원칙과 존중과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지극한 마음이랄까요. 그렇다고 틀림조차 인정하자는 건 아닙니다. 다름과 달리, 틀림은 전혀 별개의 것이어서 타협하거나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실수는 이해할 수 있어도 살인은 용서할 수 없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틀림의 뿌리는, 속이고 훔치고 때리고 빼앗는 모든 짓에 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게 도덕과 법률입니다. 도덕이 다름을 살피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법률은 틀림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다름과는 동행해도 틀림과는 함께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답 없는 길 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건 결국 사람입니다. 그것이 길을 길답게 만듭니다.
경기도민에게 버스를 기다리던 시간은 언제나 무자비하게 길다. 몇 분 남지 않았다는 표시가 전광판에 뜨지만, 체감 시간은 늘 그보다 길었다. 기다림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스마트폰에 몰두한다. 하지만 가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바라볼 때가 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날씨의 모습,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그냥 세상의 모습.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나는 오히려 멀리 떠나 있던 마음을 불러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기다림을 불필요한 시간, 낭비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하고, 다음 것을 하기 전의 공백. 빨리 결과를 보고 싶고, 계획이 당장 이루어지길 바라며 조급해한다. 그러나 기다림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주변을 살피며, 더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 단순한 사실이 점점 더 크게 다가온다. 기다림 속에서 작은 변화와 새로운 생각이 싹트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면서, 그 시간은 결코 허비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병원에서 번호표를 들고 차례를 기다릴 때, 전철역에서 출발을 기다릴 때, 혹은 커피가 다 내려오기를 기다릴 때. 이 시간들은 모두 사소하고 불필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를 단련시키는 힘이 숨어 있다. 기다림은 나를 멈추게 하고, 눈앞의 풍경을 다시 보게 한다. 내가 사는 세상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조금 더 천천히라는 목소리를 듣게 한다. 때로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숨을 고르고, 나만의 리듬을 찾게 해주는 고요한 시간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효율과 속도의 시대를 살고 있다. 더 빠른 인터넷, 더 신속한 배달, 더 빠른 학습법.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빠른 길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느리고 불확실한 길 위에서, 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한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지식을 건네준다. 때로는 그저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것들을 알아차리게 한다. 나는 이제 기다림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림 속에서 배운다. 불편함을 참는 법을 배우고,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곧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장 결과에 쫓기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기다림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사는 법을 다시 연습한다. 돌아보면, 내 삶의 중요한 순간들은 모두 기다림을 통과했다. 오디션의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공연의 막이 오르기 직전, 누군가의 답장을 기다리던 조용한 밤. 그 시간들은 길게만 느껴졌지만,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이렇게 믿는다. 기다림은 불필요한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바라본다면, 기다림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조금 더 성숙하게, 조금 더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이끌고 있다. 그러니 기다림 앞에서 조급해하지 말자. 기다림이란 삶이란 여정 속 어느 길목에서 맞이하는 필요한 시간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잡고, 세상을 새롭게 배우며, 내일을 준비한다. 기다림은 곧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공백의 시간이자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배움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을 충분히 경험할 때,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하게, 조금 더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다.
수원천 매세교~세천교 구간에서 어류가 집단 폐사하는 일이 발생해 놀라움을 주고 있다. 특히 이 현상의 원인이 인근의 한 업체에서 차량 도장 후 버린 페인트로 인한 하천수 오염 때문으로 추정돼 충격을 더 보탠다. 근년 기후 위기에 기인하는 생태계의 급변으로 발생하는 사례 말고 인재(人災) 형식의 긴급한 오염사고가 드물다는 점에서 이 현상은 허술히 취급할 일이 아니다. 일제 점검과 철저한 감시망을 통해 확산과 재발을 막아야 한다. 지난 19일 오후 수원시에 “수원천 매세교에서 세천교에 이르는 구간(260m)에 어류가 집단 폐사했다”는 민원이 접수됐다. 팔달구 당직 공무원은 즉시 현장에 도착해 상황을 확인한 후 시 수질하천과에 대응을 요청했다. 현장에 도착한 수질환경팀 공무원은 상황 파악 후 수질검사를 위한 채수를 진행했다. 이어서 이날 오전에는 폐사한 어류를 수거하고 사고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오염 물질이 배출된 곳 인근을 확인했다. 확인 결과 한 업체에서 도장 작업 후 남은 페인트 오염수를 인근 빗물받이에 버렸고 오염수가 수원천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해 현황을 보면, 이날 오후 1시 기준 피라미·잉어 등 500여 마리가 폐사한 것으로 파악돼 공무원들이 수거 작업을 완료했다. 시는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에 수질 검사를 의뢰해 폐사 원인을 분석 중이다. 또 오염 물질을 유출한 해당 업체 대표는 고발 조치할 예정이다. 수원의 하천에서 물고기가 폐사하는 현상은 그동안에도 이따금 발생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환경오염 이슈다. 만에 하나 하천이 독극물이나 폐기물 등에 오염되는 사고가 발생한다면 이는 곧바로 주민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만큼 아주 작은 문제라도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된다. 지난 2014년 10월 말 수원 원천리천 일대에서 피라미, 붕어, 떡붕어, 잉어 등 물고기 1만 마리 이상이 폐사하는 대형 환경오염 사건이 발생했었다. 조사 결과 인근 삼성전자 하청업체로부터 흘러나온 독성물질 때문으로 밝혀져 일파만파 큰 충격파를 던졌다. 당시 담당 공무원이 업체 방류수 성분분석을 의뢰하면서 유해 물질·중금속은 빼고 단순 항목만 포함하는 등 미숙한 일 처리로 시민단체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2017년 8월 초에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수원시는 팔달구 매교동 매교다리 아래 수원천에서 붕어와 피라미 등 물고기 500여 마리가 폐사했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았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죽은 물고기 사체의 청산염, 유기염소제류 등 9종의 약성분·독극물 성분을 조사했으나 어떤 약독물도 나오지 않았다.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이 조사한 하천수에서도 비소와 카드뮴 등 7가지 유해물질이 검출되지 않았고, 생화학적산소요구량(BOD), 부유물질(SS), 총질소, 총인, 화학적산소요구량(COD)도 모두 기준치 이내였다. 이 사고의 원인은 결국 ‘인근 하수관거 월류수 유출로 인한 용존산소 부족’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구촌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지만, 쉽사리 그 해답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업현장에서 유독물질을 함부로 배출하던 풍토는 크게 개선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무분별한 산업 폐기물 처리는 크게 개선됐다. 이런 변화는 법 규정 못지않게 국민의 인식이 크게 개선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차량 도장 후 버린 페인트가 하천수를 오염시켜 500여 마리의 물고기가 폐사한 일은 규모로 보아서는 큰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상으로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곧바로 회복 불능의 폐허가 된다. 철저한 분석과 완벽한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은 잠시도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 지금은 환경 보존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시절이다.
라이즈 사업 시행이 본격화되었다. ‘라이즈(RISE)’는 2023년 교육부에 의해 발표된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를 의미한다. 대학 재정 지원을 위한 예산 집행 권한을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함으로써 지역 특성과 발전 전략에 기반해 대학혁신을 도모하도록 하는 새로운 체계이다. 저출생으로 인한 학령인구 및 노동인구 감소, 과학기술 발달로 인한 고등교육 및 산업구조 혁신 요구 등 지역과 대학이 당면한 공동위기를 극복하고 동반성장을 도모하도록 하는 대전환 계획이다. 지난 2년간 시범운영을 거쳐 기본계획과 대표 과제 및 추진 전략이 마련되었으며, 전국 각 시도별 행정부서 정비가 완료되었다. 지난해 12월에는 지역별 라이즈 사업 추진을 위한 2025년 국고 예산 총 2조 10억 원이 최종 확정되었다. 지방비 편성까지 포함하면 최종 사업비 규모는 2조 4천억 원에 달한다. 서울시도 지난 5월 라이즈 사업 추진 대학으로 35개 대학을 선정 발표하였고, 각 대학은 현재 지역-대학 간 동반성장을 위한 기반 구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라이즈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는 여러 측면에서 면밀히 다루어져야 하겠지만, 결국 지역 내 대학과 기업 간의 산학협력, 인재 유치 및 정주를 통한 취·창업 활성화, 지역 산업 특성화 및 경제 발전, 공교육 및 문화 발전을 통한 지역 정주 인구 증가 등이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이에 각 대학은 글로벌 인재 확보를 위해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 힘을 쏟고 있고, 지역의 기업들 역시 산업 인력 유치를 위해 외국인 근로자 유입을 도모하고 있다. 해외에서 유입된 우수 인재가 학업을 마친 후에도 한국에 머물며 직업을 갖고 삶의 터전을 구축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언어·문화적 지원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외국인을 위한 언어교육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반목적 언어교육과 직업이나 학문 등 특수한 상황에서 필요한 언어능력을 갖추게 하는 특수목적 언어교육으로 크게 나뉜다. 대학의 유학생이나 이주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교육은 후자에 속한다. 현재 각 대학은 언어교육센터, 한국어학당 등의 이름으로 어학연수생 대상 한국어교육을 확대하고 있고, 최근에는 외국인 전담학부나 특수대학원을 통해 유학생 유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산업체에서는 조선업, 건설업, 관광업,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IT, 의료·보건 분야의 외국인 근로자 유입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들의 학업 수행 능력과 산업 현장에서의 업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능력 신장이 필수적이다. 일반적인 의사소통능력뿐 아니라 전공 분야 및 직업 영역에 특화된 언어능력 향상을 위한 특수목적 교육이어야 한다. 한국의 대학이나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의 일정 수준을 취득해야 하지만 최근에는 이를 요구하지 않는 대학도 늘고 있다. 2005년부터 시행 중인 고용허가제에 따른 한국어능력시험(EPS-TOPIK)은 제조업 및 어업 등 특수한 분야의 산업 인력을 대상으로 한 장치이지만 이것만으로 이들의 언어능력을 담보할 수는 없다. 진입 이후의 맞춤형 교육이 더 중요하다. 지속가능한 동반성장을 위해서는 거시적인 비전도 중요하지만, 그 안의 구성원을 놓치지 않는 세심한 정책적 지원과 구체적 계획이 수반되어야 한다.
일단 시작은 좋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14일 윤제균 감독 등 영화인들과의 간담회를 가진 것은 시장에 긍정적 시그널을 줬다. 최 장관은 한국 영화계의 생태계 복원을 약속했으며 제작을 지원하고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구체적 방안이 마련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영화계 아젠다를 재설정하고 지원 투자 금액의 규모를 설정하는데 있어서의 당위성, 필요성 등이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논쟁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장관이라는 정무직 인사가 영화계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고쳐 나갈 의지가 있음을 보여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초 장관이 임명될 당시 영화계 내 일부에서는 그를 가리켜 플랫폼 사업자 출신이라며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했다. 현재는 그런 볼멘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계 거버넌스의 최고 책임자와 영화인들이 일치된 행동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신호이다. 좋은 일이다. 기획개발비라는 게 있다. 영화 아이템이 시나리오로 나오기까지, 캐스팅과 프리(pre) 프로덕션이 이루어지기까지 돈이 들어간다. 밥도 먹어야 하고 회의도 여러 차례 진행돼야 하며 로케이션 헌팅 (촬영지가 될 곳에 미리 가 보는 것)도 해야 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 이 돈이 현재 전혀 지급되지 않는다. 굶어 가며 시나리오를 쓴다 한들 투자사나 제작사에서 채택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좋은 작품의 원안이 나오기가 힘들다. 민간 투자자들이 사전 투자를 꺼리고 있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기획개발펀드를 만들어서 지원해야 한다. 물론 엄정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 펀드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50~100편의 시나리오 혹은 드라마 대본이 나올 수 있다. 기획개발비 지원이 하루가 급한 이유이다.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한국 영화산업이 이렇게까지 ‘고꾸라지게’ 된 것은 작품을 못 만들어서이다. 이른바 퀄리티 컨트롤이 되지 않아서이다. 관객들이 도저히 볼만한 영화가 없다는 불만이 극에 달해 있다. 그러나 사실 퀄리티(품질)는 콴터티(양)를 기반으로 한다. 적어도 한 해 국산 장편 상업영화가 60~80편 정도 만들어져야 좋은 작품, 재밌는 작품, 의미 있는 작품들을 골라낼 수 있다. 흥행 산업을 끌어가는 것은 그중 5~10편이다. 판이 커져야 한다. 판이 쪼그라들었으면(한 해 25편 수준) 그 판을 다시 의도적으로 키워 내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는 돈이 필요하고 비교적 막대한 예산이 투입돼야 한다. 영화계에서는 신임 정부의 5천억 원 조성에 민간자본의 5천억 원 매칭으로 총 1조 원 구성을 바라고 있다. 여기에 손실 충당을 5대5 구조로만 하더라도 산업은 금세 활기를 띨 수 있을 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 예컨대 누군가 50억 원 예산의 작품을 만들 때 민간 투자자가 25억 원, 정부가 25억 원을 내는 구조를 만든 후 손해가 날 경우, 민간 자금 25억 원부터 변제해준다는 얘기이다. 이건 적선이나 구호가 아니다. 영화산업은 K팝의 원천이다. 기본이 망가지면 전체가 망가진다. 시급하다. 신임 장관이 그걸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다행스러운 일이다.
경기도가 마련한 폭우·폭염·산사태 등 각종 기후재난 관련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기후플랫폼이 주목을 받고 있다. 수도권에서도 기후재난은 이제 어쩌다 일어나는 변수가 아니라 언제든지 발생이 가능한 상수가 되었다. 주민 안전을 위한 대비책을 만드는 일은 지방정부의 으뜸 존재 이유로 등장했다. ‘경기기후플랫폼’을 중심으로 완성된 기후 자료와 실사를 바탕으로 예측에서 피난 체계구축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재해 예방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지난달 28일 서비스를 시작한 ‘경기기후플랫폼’은 항공 라이다(LiDAR), 위성 영상,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기술을 활용해 구축된 온라인 기후·환경·에너지 종합 정보 플랫폼이다. 플랫폼 내에는 극한호우, 산사태, 폭염 등의 재난 발생 가능성을 등급화해 지도로 제공하는 ‘경기기후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여름철 집중호우, 태풍, 산사태 등 돌발성 재난 발생 시 주민이 신속히 대피하거나 대비할 수 있도록 대피소 위치와 재난 위험등급을 지도로 구현하고 있다. 특보가 내려지면 극한 호우 대피시설 현황을 지도에서 확인해 대피할 수 있다. 도는 또 31개 시군을 대상으로 홍수 위험 요인·노출도·취약성을 종합적으로 산출한 극한호우 위험도 순위, 노후 시설물 등 극한호우 발생시 안전에 취약한 시설 현황, 과거 극한호우나 태풍으로 인해 침수가 발생한 지역에 대한 ‘침수 흔적 지도’ 등 호우 관련 정보를 참고해 호우로 인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플랫폼은 AI 예측 모형을 적용해 산사태 위험도를 5등급으로 나눠 지도에 구현해놓고 있다. ‘폭염 대응’ 메뉴에서는 기온, 습도, 풍속, 태양복사열 등을 종합해 산출한 열 쾌적성 지표를 10단계로 등급화한 폭염 등급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서 주소를 검색하거나 지도에서 알고 싶은 동네를 찾으면 폭염 취약지역과 함께 폭염 대피를 위한 무더위쉼터와 의료시설, 응급시설 현황도 한눈에 볼 수 있다. 경기기후플랫폼의 기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당 건물과 지역의 폭염·산사태·호우 특성을 파악하고 재난에 대비한 시설물 점검, 근로자 안전 대비 등 안전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경기기후플랫폼’을 입력해 누리집에 접속하면 회원가입 없이 해당 정보 확인이 가능하다. 최근 가장 뚜렷해지고 있는 현상 중 하나가 수도권 기후재난의 상습화다. 이제는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태풍과 홍수 등 천재지변에 해안가나 산악지대에서나 피해를 입곤 하던 전통적인 재해 개념이 완전히 깨어졌다. 기후재해는 이제 전국 특정 지역에서만 발생하는 재난이 아니다. 이번 여름 수도권에서는 걸핏하면 시간당 100mm가 넘는 폭우가 수도권을 관통하면서 극심한 물난리를 일으켜 재산피해는 물론 귀중한 인명피해까지 유발하는 사례가 많았다. 결국, 기후재해는 시기와 지역을 막론하고, 어디라도 무시로 닥칠 수 있음이 여실히 입증된 셈이다.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은 경기도는 다른 시·도가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과 생활 조건을 모두 다 갖고 있다. 지역민들의 주거환경 또한 다층다양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제는 모든 경우에 모든 준비를 장만하여 대응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경기기후플랫폼’을 중심으로 도시와 산악, 농어촌지역민이 누구랄 것도 없이 슬기롭게 대처하는 게 맞다. 그러나 기후재난 ‘제로’ 달성을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태부족하다. 위험도가 높은 지역의 사전 대응 매뉴얼을 정밀화해야 한다. 재난대응은 아무리 과도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동안 적용되던 기준을 모두 업그레이드해 대처하는 게 맞다. 행여라도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니 도민들이 알아서 활용할 것’이라는 안일한 방심이 스며들어서는 안 된다. 취약지역 민관은 대피 훈련까지 검토하는 게 맞다. ‘경기기후플랫폼’ 활용은 경기도의 완벽한 기후재난 대응을 위한 유비무환의 시작점이어야 한다.
중세 유럽에서 노동은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신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행위였다. ‘기도하라, 일하라’(ora et labora). 베네딕트 수도회의 이 모토는 중세 기독교 노동윤리의 핵심을 보여준다. 수도사들은 하루의 절반을 노동에 바쳤다. 그들의 일은 세속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훈련과 공동체 봉사의 한 방식이었다. 노동은 죄 많은 육체를 단련하고, 겸손을 기르는 수련이었다. 반면, 수도원 밖 세속 세계의 노동은 또 다른 질서를 형성했다. 중세 도시의 장인들은 길드(guild)라는 조직을 통해 노동을 사회적 계약으로 만들어냈다. 수련생 → 도제 → 장인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구조 속에서 기술은 세습되었고, 노동은 곧 정체성과 계급의 표식이 되었다. 길드는 기술 보호와 가격 통제뿐 아니라, 공동체 윤리를 보장하는 자치적 조직이었다. 이들은 도시민의 자부심이었고,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의 씨앗이기도 했다. 수도원의 노동이 신과의 관계를 위한 내면적 수련이라면, 길드의 노동은 시장과의 계약을 위한 외면적 실천이었다. 둘 다 노동을 숭고한 행위로 보았지만, 목표와 방식은 달랐다. 하나는 은둔을, 다른 하나는 도시적 삶을 지향했다. 중세의 노동은 이처럼 종교성과 세속성 사이에서 이중 구조를 이뤘다. 그런데 중세의 이중 구조는 이후의 노동 개념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수도원의 ‘소명으로서의 노동’은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로 발전했고, 길드의 직능 중심 노동은 산업혁명 이후 조합과 직업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중세는 노동의 의미를 단순한 생계가 아닌, 정신적・사회적 기반으로 격상시킨 시기였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을 자아실현이나 경제활동으로 이해하지만, 중세는 노동을 곧 존재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수도사의 노동은 말을 아끼는 기도였고, 장인의 노동은 손끝에 새기는 신앙이었다. 기계화 이전, 인간의 손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던 시대에, 노동은 인간 그 자체를 증명하는 행위였다. 그 흔적은 오늘날에도 ‘소명’이라는 단어 속에 살아 있다. 중세는 노동을 영혼과 결합시킨 시대였다. 그것은 육체의 수고만이 아니라, 의미를 향한 실천이었다. 기계 이전의 노동은 더 느리고 불완전했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이었다. 우리는 다시 그 인간다움을 돌아보아야 한다. 노동은 기도였다. 중세의 노동은 단지 활동이 아닌, 존재의 방식이었다. 일은 신 앞에서의 태도였고, 공동체 속에서의 책임이었다. 오늘날의 노동이 종종 소외된 행위로 전락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의미와 연결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수도사와 장인은 각기 다른 삶의 방식 속에서도 노동을 신념과 결합시켰다. 우리는 기술의 진보와 효율을 자랑하지만, 인간다움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노동이 다시 삶의 중심이 되기 위해선, 그 안에 담긴 철학과 인간적 가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중세는 노동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성찰했던 시대였다. 노동은 단지 생산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었고, 공동체를 잇는 신념의 다리였다. 그 정서는 오늘날의 노동에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노동은 곧 신앙 속에 나를 반영시키는 믿음의 길이었다.
1970년대 후반 미국 영화 스타워즈에 로봇 R2-D2, C-3PO가 등장하여 인기가 많았다. 그 후 휴머노이드 로봇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단골 주제로 다룰 만큼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미국이 연구개발을 주도해왔다. 미국의 간판 로봇 기업인 보스턴다이내믹스는 구글, 소프트뱅크를 거쳐 현대차그룹의 자회사가 되었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4족보행 로봇 스팟 등을 개발하였으며 연구개발 능력이 강점이다. 테슬라는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를 올해 5,000대 생산할 예정이었으나 차질을 빚고 있다. 아마존은 배달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 중이며, 오픈AI와 메타도 휴머노이드 로봇산업에 참여했다. 스타트업 피규어 AI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연간 최대 12,000대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구축했다. 엔비디아 젠슨 황은 “인공지능(AI)과 로봇공학이 엔비디아의 성장 기회”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골드만삭스는 2035년 휴머노이드 로봇의 세계시장 규모를 380억 달러로 전망했다.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업체들의 기술 경쟁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중국 표준화 2035’ 계획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을 9대 미래산업으로 지정했다. 중국 로봇업체들은 마라톤, 축구, 권투 등 각종 운동경기에 로봇을 참여시켜 눈길을 끌고 있다. 중국기업의 경쟁력은 제조기술, 가성비, 조기 상용화이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중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발 빠르게 대중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세그웨이는 한때 전동스쿠터 시장의 최고 강자였다. 그러나 중국 나인봇이 세그웨이의 1/10 가격으로 제품을 출시하여 시장을 접수했다. 가격파괴 전략이 성공했으며, 나인봇은 2015년 경쟁사 세그웨이를 인수했다. 이것이 중국업체의 전략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산업에서도 중국기업들은 혁신적인 가격파괴로 외국 경쟁업체들을 압도하고 있다. 유니트리는 최근 5,900달러 휴머노이드 로봇 R1을 공개하였다. 이 가격은 테슬라 옵티머스의 약 1/3, 보스턴다이내믹스 아틀라스의 약 1/20에 해당하는 파격적인 가격이다. 유비테크, 애지봇, 유니트리 등은 올해 1,000대 이상 대량생산을 목표로 삼고 있다. 유니트리 CEO 왕싱싱은 “빠르면 3년 내 휴머노이드 로봇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라면서 “중국과 미국의 강점은 각각 하드웨어, AI 소프트웨어 생태계이다”라고 주장한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미래핵심 산업이다. 이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합작품이다. 로봇 두뇌는 AI가 담당할 것이며, 피지컬 AI 반도체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하고 물건을 배달하며, 가정에서 집사 역할을 하는 시대가 곧 온다. 미래에는 사람 대신 전쟁에도 참여할 것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뛰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이 휴머노이드 로봇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창과 방패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내 대기업은 물론 스타트업이 미래 전략산업인 휴머노이드 로봇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정부도 국가 주력산업으로 육성하여 휴머노이드 로봇산업의 경쟁력을 제고시켜야 할 것이다.
경기도와 경기도의회가 약 2년 동안 멈췄던 여야정협치위원회를 최근 다시 가동한 일은 박수를 보낼 일이다. 여야정협치위 회복은 수년 여간 ‘협치 러브콜’을 보낸 도의회의 요청을 도가 받아들이면서 성사됐다. 두 기관이 도내 현안 해결과 도민 민생 안정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앞으로의 순항이 기대된다. 경기도 여야정협치위가 극한대결 늪에 빠진 중앙정치에 예속되지 않고, 진정 ‘지역민을 위하는 정치’의 모범을 펼쳐가기를 소망해 마지않는다.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경기도의회 김진경 의장, 최종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원, 백현종 국민의힘 대표, 고영인 도 경제부지사 등은 지난 13일 수원 도담소에서 ‘여야정협치위원회 공동 협약식’을 가졌다. 도와 도의회는 이번 협약으로 ‘여야정협치위원회 위원 구성’, ‘여야정협치위원회 협의 사항 반영·산하 분과위원회 신설’, ‘실무협의기구인 여야정 실무회의 개최’, ‘여야정협치위원회 분기별 진행 및 수시 개최’ 등을 이행하기로 합의했다. 여야정협치위원은 도 소속으로 도지사와 경제부지사, 협치수석, 기획조정실장, 균형발전기획실장 등 5명이 활동하며, 도의회에서는 의장과 여야 교섭단체 대표, 총괄수석부대표, 정책위원장, 수석대변인 등 9명이 참여해 위원회는 총 14명으로 구성됐다. 위원회 의장은 도의회 여야 대표들과 도 경제부지사가 공동으로 맡게 된다. 도와 도의회는 여야정협치위 산하의 분과 기구를 만들고 주요 조례안, 예산안, 쟁점, 정책·전략사업 등 위원회에서 협의된 현안을 적극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여야정협치위원들이 정책 현안을 협의하기에 앞서 제반 업무 수행 방안 등을 논의하는 실무협의기구를 마련해 도의회 정례회·임시회에서 상정을 앞둔 안건 협의와 협의 사항 실행 점검 등을 수행한다. 여야정협치위는 분기별 1회씩, 연 4회로 개최하고, 긴급한 현안이 발생할 시 수시 개최가 가능하도록 합의해 향후 위원회가 열리지 않아서 일을 못 하는 불합리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로 했다. 협약식에서 김동연 지사는 “도와 도의회가 다시 한번 힘을 합쳐 도의 발전을 위해 힘 모으자는 의미로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김진경 의장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김동연 지사와 멋지고 아름다운 도를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다. 정파를 넘어서 협치를 추구하는 경기도 정치는 전국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자랑스러운 특징이다. 소아(小我)를 버리고 국민을 위해 기꺼이 대의를 좇을 줄 아는 정치인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삭막한 정치풍토 속에서 전국 팔도 출신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연정(聯政), 협치, 상생의 정치 지향은 매우 소중한 지혜다. 지난 2014년 당시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제안으로 시작된 연정은 무한 반목의 껍질을 깨는 상징적인 시도였다. 남경필의 경기도 연정 성과를 놓고 견해는 갈릴 수 있지만, 협치를 지향하려는 정신 자체를 폄훼할 이유는 없다. 김동연 지사도 지난 2022년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직후 전직 도지사들을 잇달아 만나면서 “협치의 목적과 의미는 경기도와 경기도민을 위한 일에 여와 야가 어딨고, 진영과 이념 논쟁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무릇, 정치란 ‘양보와 타협의 예술’이다. 수년래 대한민국 중앙정치 돌아가는 모습은 진정한 위민정치의 틀을 잘 지켜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 정치인들이 중앙정치에 예속된 꼭두각시놀음에 온전히 빠지지 않고 진정한 애민정치를 실현한다면 대단한 감동일 것이다. 지난 2023년 2기 여야정협치위위원를 구성하고도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 못했던 경기도가 이번엔 정말 달라야 한다. 위원회 재가동에 즈음하여 내놓은 최종현 도의회 민주당 대표의 “함께 상생할 것”이라는 약속과 백현종 도의회 국민의힘 대표가 밝힌 “이번엔 꼭 성과물이 나왔으면 한다”는 소원의 진정성을 믿는다.
현대 우리나라 화장장 건립계획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어디나 “문화”와 “공원”에다 “체육시설” 중에 하나 이상의 키워드는 꼭 포함된다. 1986년 준공한 서울시립 장제장(현, 승화원)부터 최근에 부지를 확정한 평택시 화장장까지. 참 그럴듯하고, 좋게 들린다. 일단 화장장이라는 최고 기피 시설에다 선호 시설 추가는 주민 호응을 끌어내는 좋은 방안이라는 데 절대 동의한다. 하지만 먼저 그 부지 안에 그런 시설 공간을 더하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크기론 화장장 등 장사시설 배치하면 알맞을 것으로 본다. 부지를 좀 넓게 잡은 곳은, 이미 투자 적격 심사 과정에서 과도하다는 지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하나 입지들이 생활권과 떨어져 접근성이 나쁘다는 점이다. 일부러 화장장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 문화나 체육 활동 등을 누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기서 깊이 생각할 게 화장장이라는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보통 3일장을 치르고 화장장에 도착하면, 심신이 지쳐 있다. 그들이 2시간 남짓 머무르면서 공원을 산책하고 문화예술을 접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관련 경험이 좀 있는 이들은 그럴듯하기만 한 이상의 실현이 어려울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1985년 서울시립 장제장 건립에서는 그냥 장내 공원화를 들고나왔다. 오랫동안 나무 심고 공들여 가꾸어 왔지만, 주차장만 눈에 들어올 뿐 공원과는 좀 거리가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나, 2001년 서울시 제2화장장인 서울추모공원 건립계획이 발표된다. 여기서는 예술품 수준의 친환경적인 추모 문화 시설과 아름다운 시민 휴식・문화공원으로 조성한다고 강조했다. 2025년 오늘날, 서울추모공원에서 이런 모습을 얼마나 찾을 수가 있을까? 시민 없는 시민공원만 덜렁 남아 있지는 않은가? 유족들로부터 관심을 끌지도 못하는 여러 조형물과 갤러리가 장소만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화성시에 있는 함백산 추모공원은 애초 미국의 거대 공원묘지에나 붙이는 “메모리얼 파크”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었다. 찬반 논쟁으로 뜨겁던 2015년 4월, 화성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전 면적의 3분의 2를 공원, 산책로, 정원, 녹지 등으로 꾸미고 국내 최고의 조경 전문가를 초빙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웨덴의 ‘우드랜드’ 화장장처럼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하겠다”라고 밝혔다. 게다가 “문화체육예술인 묘역을 조성해 매년 기념 음악회나 전시회, 추모행사를 열어 주민과 함께하는 문화・관광시설로 조성하겠다”라는 헛된 청사진도 내놓았다. 하지만 국토부 허가 과정에 면적이 36만 3천여㎡에서 14만 8천여㎡나 대폭 줄어든 채로 승인되었고, 그 결과 화장장 등 장사시설만 남은 채 2021년 7월 준공했다. 수원 연화장은 2000년 개원 직후 잘 가꾸어진 공원과 뛰어난 건축 등 전국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장례부터 화장 및 봉안 수요 증가에 따라 빼곡하게 시설 증축이 잇따르면서 공원으로서의 쾌적성이 줄어들고 말았다. 공원 기능이 준 배경에는 시가지로부터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반면에 인천가족공원은 원래 시민들이 접근을 꺼리던 부평 공동묘지와 화장장이었다. 2007년부터 3단계로 나눠 공동묘지 개발과 공원화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노력은 기대를 뛰어넘는 효과를 거두어, 아이들의 소풍부터 시민 산책과 등산 등 도시녹지 휴식공원 기능까지 역할을 넓혀 가고 있다. 도심에 가까운 지리적인 이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앞 사례들은 화장장과 주민 선호시설 병설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아직 일반의 정서상 화장장이라는 곳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체육 활동을 하는 걸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민 인센티브 사업이 요란하기만 할 뿐 이행하기 어렵고,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면 民도 官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화장장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는 시설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