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란 공습을 일컬어 혹자는 ‘최초의 AI 전쟁’이라 부른다. 정보 평가부터 목표물 식별, 전장 시뮬레이션까지 킬체인을 실시간에 가깝게 단축하는 AI가 그 어느 때보다 전면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에서도 AI는 쓰였고, 그 이전에도 크고 작은 AI 솔루션이 전쟁에 동원되었으니 ‘최초’라는 타이틀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이번 전쟁에서 AI가 유독 주목받는 데는 지난 1월 있었던 미국 정부의 AI 가속화 전략 발표 그리고 전쟁 발발 후 드러난 워싱턴과 실리콘밸리 사이의 서늘한 긴장감이 자리한다. 그 긴장감의 중심에 앤트로픽이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앤트로픽은 미국 전쟁부와 밀월 관계를 누렸다. AI 모델 클로드는 전쟁에 적극 동원되었고,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부부 체포 작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 규모만 2억 달러, 약 2800억 원에 달했다. AI 기술 경쟁력을 국가 주권으로 이해하는 '소버린 AI' 시대, 기업과 국가는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다. 이들 간 관계가 공고해 보였던 만큼, 균열의 충격은 컸다. 예기치 않았던 균열은 앤트로픽이 조건을 내걸면서 시작됐다. 자국민 감시나 완전히 자동화된 살상 결정에는 클로드 모델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반발하며 AI를 ‘모든 적법한 목적’에 무제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앤트로픽을 압박했다.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자, 트럼프 대통령은 앤트로픽을 “급진 좌파 워크 기업”이라고 비난하며 ‘공급망 위험 기업’으로 지정했다. 앤트로픽은 트럼프 정부의 조치가 정당한 절차를 무시한 직권남용일 뿐 아니라,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하는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한 행위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앤트로픽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지정은 이념을 이유로 한 제재에 해당하며, 국가가 기업의 자율적 윤리 기준까지 통제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기업이 AI의 윤리 기준을 국가의 요구에 맞추는 순간, 기업의 자정 능력은 의미를 잃는다. 기업 구성원들의 성찰 역시 불필요해지며, 국가 명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율규제의 이상은 허상이 된다. 기업의 윤리적 의사 결정권을 박탈하는 것은 기술을 다루는 이들이 도덕적 책임을 질 권리까지 빼앗는 일이다. 제미나이, 챗GPT, 그록 등 빅테크의 주요 AI 모델들이 빠르게 군사 시스템의 대변환을 이루고 있는 지금, 빅테크는 단순한 도구 공급자를 넘어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설계자가 되고 있다. 앤트로픽 역시 새로운 모델 ‘클로드 미토스’를 계기로 다시 미국 정부에 납품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소송과 별개로 정부와 앤트로픽 간 밀월관계는 앞으로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부디 이번 소송이 단순한 힘겨루기를 넘어 국가와 기업이 기술을 대하는 태도를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국가가 기업의 윤리적 성찰을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봉쇄할 때, 기술의 안전은 누가 책임지는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기술 기업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선은 무엇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기술의 권력화에 맞설 강력한 윤리적 질문이다.
세상사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결정적 선거’라는 말이 있다. 기존의 정치적 쟁점과 지역적 권력 기반·정당의 전통적 이념 토대가 무너지고 새로운 물갈이를 통해 승기를 잡는 선거를 말한다. 미국 정치학자 월터 버넘이 “미국에서는 가끔 선거 혁명이 일어나 정치와 사회의 기본 체질을 결정적으로 쇄신한다”며 도입한 용어다. 1960년 존 F 케네디·1980년 로널드 레이건·2008년 버락 오바마·2016년 도널드 트럼프 당선이 좋은 예다. 이런 점은 6·3 지방선거 공천에서 여야 주요 광역단체장 대진표를 보면 새 인물 중심의 더불어민주당 후보 면면이 두드러진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통령과 당 지도부를 축으로 외연 확장과 조직 결집을 동시에 추진하는 모습인 반면, 국민의힘은 장동혁 대표의 방미 행보를 둘러싼 ‘미스터리’ 속에서 지지층 결집 전략에 허점을 노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은 16곳의 시·도 광역단체장 후보를 모두 확정했다. 민주당은 조기 후보 확정을 통해 ‘컨벤션 효과’와 조직 정비를 동시에 노리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20일 11곳의 공천을 확정했지만 대부분 현직이다. ‘새 얼굴’이 적다 보니 쇄신과 거리가 멀다. 지방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 선거가 기초단체장, 광역·기초의회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주는 ‘줄투표 현상’을 보인다. 투표율과 중도층의 향배가 관건이지만, 지금 판세가 유지되면 민주당은 입법·행정 권력에 이어 지방 권력까지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높은 지지율을 누리는 것은 국민의힘의 지리멸렬에 따른 반사이익 덕분이다. 오죽하면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역대급 야당 복을 누린다’는 평가까지 나오겠는가. 손양(孫陽)은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다. 말(馬)의 관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서 말을 보면 성질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있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소금 수레를 끌고 가는 말을 만났다. 천하를 누벼도 시원치 않을 천리마가 일개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그가 다가가 자기 옷을 벗어 말의 등에 덮어 주자 말은 머리를 들고 소리 내어 울었다 한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손양을 일컬어 ‘백락(伯樂)’이라고 불렀다. 본래 백락은 천마(天馬)를 다스린다는 별의 이름이다. ‘백락이 있은 연후에야 천리마가 있다’는 고사의 유래다. 어느 땅·어느 사회·어느 조직엔들 쓸 만한 사람이 없을까. 사람을 알아보는 눈과 기르는 노력이 부족할 뿐이다. 사실 인재를 얻는다는 것은 비단 한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국가를 생각할 때 굉장히 중요한 과제다. 그럼 누구를 위한 인재여야 할까. 중국 전국시대에 인재를 골라 쓰는 일에 골몰하는 제나라 선왕에게 간언한 맹자의 간언을 들어 보자.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이고 다음은 사직이며 임금은 이보다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요즘 말로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물을 먼저 뽑고, 국익과 권력자에 대한 충성도 순서로 정하라는 의미다. 전문성과 도덕성·미래 비전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 지선은 선진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분기점이다.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선진 문화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정신을 충족하는 선거가 돼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켜야 할 기회다.
다른 지역의 벼·쌀을 구매해 경기지역 특산물인 것처럼 판매하는 행위가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충격이다. 이른바 경기미(京畿米)라는 이름으로 각인된 경기도 지역의 쌀은 예로부터 높은 품질을 자랑해왔다. 옛날 임금에게 진상했던 쌀이라고 하여 유명세를 탔고, 한때 이를 노린 ‘가짜 경기미’ 소동도 여러 차례 일어났었다. 생산량이 달린다고 하여 외지에서 생산되는 벼·쌀을 경기지역에서 도정해 소비자를 우롱하는 일은 강력히 통제돼야 한다. 경기신문 취재에 의하면 다른 지역의 벼·쌀을 구매해 경기지역 특산물인 것처럼 포장 판매하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수원시의 한 대형마트에는 경기도 외 다른 시도에서 생산된 쌀 중에 특정 지역명을 제품명으로 사용한 두 제품이 발견됐다. 원산지 표시는 ‘국내산’과 ‘경기도’로 표시돼 있었다. 쌀의 원산지는 국내산과 시도, 시군구로 나눠 표시할 수 있다. 단지 경기도 내 유명 미곡처리장에서 처리됐다는 이유로 경기미 유명세를 이용한 쌀 제품이 소비자들을 현혹하고 있는 셈이다. 특정 지역명을 제품명으로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섞어 유통하는 방식이라는 얘기인데, 현행 법령이 명확하지 않아 이러한 행위를 모두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일부 판매자들이 지역의 대표 특산물 이미지를 내세워 쌀을 판매하면서 정작 해당 지역 생산량이 부족해지면 다른 지역 벼·쌀을 들여와 물량을 충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특정 지역명을 사용하는 한 브랜드 미곡처리장의 경우 벼 공급이 부족한 시기에는 다른 지역에서 들여온 벼와 쌀을 가공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곡처리장은 벼 반입·건조·도정·판매 등 미곡 전 과정을 처리하는 시설이다. 이와 관련해 해당 브랜드 미곡처리장 관계자는 “각 지역마다 일 년 내내 생산되는 물량이 부족하면 다른 지역에서 벼를 사서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산지를 경기도로 표기한다고 해도 같은 품종의 벼가 충청도에서 생산된다면 이를 구매해서 쓴다”고 실토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측은 이 같은 행위에 대해 원산지 혼동 우려 표시에 따른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정 지역명이 들어간 ‘00쌀’이라는 제품명과 같이 지역명과 농산물 명을 함께 사용할 경우 해당 지역에서만 재배된 쌀을 사용해야 한다. 다만 이는 농수산물 품질관리법에 따른 유권해석일 뿐이며, 실제 처벌은 원산지 표시 단속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법에 구체적인 처벌 기준을 마련하면 (소비자 기만행위 예방에) 도움이 되겠지만, 현재는 이를 반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다만 소비자 요구에 의해 과거와 달리 원산지 표시 기준과 관련 처벌 조치가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과거 ‘가짜 경기미’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소동을 겪었던 경기지역에서는 이런 편법적 유통질서 문란을 간과할 수는 없다. 20여 년 전 서울에서는 저가의 쌀을 도정한 뒤 비싼 경기미로 속여 팔아온 농협 조합장 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경기도 화성에 차려놓은 정미소에서 도정한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의 쌀 380억 원어치를 경기미로 속여 대형 할인마트와 식당 등에 납품해 30억여 원의 부당이득을 챙겼었다. 10여 년 전 부산에서도 공무원을 앞세워 일반 쌀을 명품 경기미인 것처럼 속이고 전국에 유통한 일당이 적발됐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구매한 일반 쌀을 ‘경기도지사 인증 명품 쌀’이라고 적힌 포대에 담아 전국에 조직적으로 유통해 부당이득 17억 5000만 원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었다. ‘경기미’는 경기도 농업을 견인하는 대표적인 농산품이다. 경기도 땅에서 재배한 벼가 아닌데, 단지 경기도에서 도정했다고 지역 특산품인 것처럼 판매하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행위는 허용돼선 안 된다. 이는 나아가 ‘경기미’의 명성을 뿌리째 좀먹는 근시안적인 상혼일 따름이다. 강력한 감시 시스템 작동은 물론, 미비한 관련 법규 보완에도 적극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 재계가 ‘저출산 해법’을 찾고자 머리를 맞댄다고 한다. 양국은 지난 13일 ‘한일 저출산 대책 교류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저출산 정책 및 연구를 공유한다고 밝혔다. 한국 측 위원장은 SK그룹 회장인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일본 측은 고바야시 캔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인구가 현 수준을 유지하려면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2.1명이 되어야 하며, 이보다 낮으면 저출산이라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7명에 그쳤다. 일본은 1.15명이지만 9년 연속 하락세였다. 저출산은 결국 노동력 부족, 경제 규모 축소, 국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기에 산업계의 우려가 클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저출산이 유럽과 북미 등에서 발생하는 문제였으나 점차 세계 여러 나라의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저출산으로 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나라마다 다양한 정책과 지원책들을 내놓았다. 우리나라보다 앞서 저출산 위기를 겪었던 일본은 지난 30여 년간 다양한 정책들을 추진해 왔다. 육아휴직제도 도입, 보육 서비스 확대, 일 가정 양립을 위한 노동환경 개선에 이어 아동수당 확대, 다자녀 가구 대학 등록금 무상화, 남성 육아휴직급여 실질 보전, 유연근무 확대 등으로 지원책의 강도를 높여왔다. 이런 지원책들은 우리나라에도 시행되었다. 작년에 만들어진 민간단체인 일본생산성본부의 ‘미래를 선택하는 회의’는 지난달 27일 발간한 「인구문제백서」를 통해 일본 정부에 보다 근본적인 정책 전환을 요구하였다. 단편적인 지원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저출산 문제를 노동, 주거, 교육, 지역 정책과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출산 문제는 정부, 기업, 사회 전체가 대응책을 찾아가야 하는 구조적 문제이지만 이를 개인의 삶과 직결된 문제로 생각하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인 시각을 갖고 긴 호흡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 인구정책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서울여대를 설립, 초대 학장을 맡았던 故 바롬 고황경 박사다. 그녀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출발점으로 1958년에 대한어머니회를 창립하였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모자보건사업이었다. 베이비 붐 영향도 있었지만, 당시 가정 당 자녀 수는 6, 7명이 보통이었다. 대한어머니회는 어머니들이 깨달아 자신의 소명과 꿈을 갖도록 하며, 여성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가족계획사업을 추진했다. 정부에 적극 촉구하여 가족계획협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울여대 제자들로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발간한 「고황경 평전」(신영숙, 박에스더, 배선영, 2025)에 그녀가 구상한 ‘깨달은 어머니 정신’에 관한 대목이 나온다. “아기 요람을 흔드는 것을 제일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기를 가장 만족하게 해줄 수 있는 정도로 잘 흔들어 주는 사람은 어머니뿐이다. 강한 국가도 깨달은 어머니가 없으면 안 되고 세계를 개조하는 일도 어머니의 손이 없으면 안된다.” 산아제한을 위한 가족계획사업을 했던 대한어머니회가 작년에는 대전, 대구, 광주, 전남 지역을 대상으로 저출산 극복을 위한 교육사업을 시행했다. 새로운 ‘깨달은 어머니’ 교육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긴 호흡으로 이어감으로써 저출산 극복의 길을 함께 열어갈 수 있기 바란다.
4월이 되면 어떤 날짜를 떠올리게 된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이름은 여전히 또렷하다. 우리는 그날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날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인간은 각자 다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고,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마음에 닿는 깊이가 다르다. 상상력과 공감의 범위 역시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작은 고통에는 민감하면서도, 타인의 거대한 고통 앞에서는 쉽게 감각을 잃는다. 특히 규모가 큰 참사일수록 그렇다. 숫자가 커질수록, 그 안에 담긴 개별의 얼굴과 목소리는 오히려 흐릿해지는 것 같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늘 어떤 비슷한 지점에서 생각을 멈춘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 것인지 자신이 없다. 뉴스로 접하고, 기록을 통해 알고, 여러 해를 지나며 나름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당사자의 감정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애초에 닿을 수 없는 거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다. 이 일을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낼 자격이 있는가 같은 생각들이 앞섰다.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있다. 공감한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까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얼마나 깊이 공감하고 있는가를 따지는 문제 이전에, 내가 다른 누군가와 이 일을 다루지 않는 상태가 되어가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감히 다가갈 수 없다는 이유로,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편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공감은 완벽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그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떠올려 보는 것.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그래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 그래서 나는 거창한 무언가 대신, 단순한 태도를 가지려 한다. 하루에 한 번,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그날을 생각해 보는 일.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었을 그 하루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생각한다. 기억한다는 말은 때로 너무 쉽게 사용된다. 그러나 기억은, 꺼내어 보지 않으면 금세 흐려진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그 시간을 불러와야 한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끝내 다 닿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잊혀진다는 것과 다르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떠올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떠올림을 멈추지 않는 것.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날 하루만큼은, 조금 더 또렷하게 그날을 생각해 보려 한다.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여야 기업 발전과 고용 창출 등을 통해 국익 신장이 가능하다. 오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규제 혁파가 시급하다. 노동·조세·규제 분야를 유연하게 운영해야 한다. 주요 국제 평가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 유연성과 채용·해고 관련 제도는 해외에 비해 경직돼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주요 경쟁국인 싱가포르와 비교하면 격차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측 가능성이 낮은 조세제도와 과도한 데이터 산업 규제 개선 필요성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통상 국가'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국제 경쟁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첨단산업 분야 등에서 '네거티브' 방식으로 규제 시스템 전환을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규제를 정리하고, 규제 시스템을 국제 표준에 맞춰가야 한다. 네거티브 규제 방식은 금지해야 하는 사항들만 법이나 규정에 명시하고 나머지를 전부 허용하는 방식이다. 과거에는 규제가 경제 주체들로부터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하거나 비효율을 초래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지금의 규제는 현장의 필요보다는 규제 당국의 필요에 의한 측면이 많은 게 사실이다. 과거 산업 발전 단계가 낮을 때에는 그 사회에서 가장 똑똑한 집단인 관료들이 뭘 할지를 정해주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공공이 민간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됐기에 규제 시스템을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꾸는 게 온당하다. 차제에 정부 여당은 국내외 기업인들이 ‘심한 규제’라고 느끼고 있는 법안의 개정에 나서길 바란다. 예컨대 중대재해처벌법은 처벌 규정이 과도하다는 지적이 있다. 기업주들이 모호한 규정이 많아 처벌 위험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고 호소하고 있는 이유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법 2·3조를 개정한 것으로 불법 파업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약하고 있다. 경제단체들의 반대에도 국회를 통과해 시행되고 있다. 불법 쟁의행위에 대한 손배 문제의 상당 부분이 사업장 점거 관행에서 비롯되고 있는데도 개선 내용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로 인해 제도 시행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2차 상법 개정안은 일부 상장회사에 대한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이다. 소수 주주를 보호하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지배주주 측에서 회사 지배력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를 강행 규정화함으로써 규제 형평성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는 현실을 도외시한 규제가 심하기에 더딘 성장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주요국과의 격차 변화 속에서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2003년 한국이 대만을 추월한 이후 오랜 기간 유지되던 흐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대만과 한국의 성장률 차이에는 산업 구조, 글로벌 경기, 정책 환경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임금 수준만으로 이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경쟁력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한편 우리는 노동 정책과 관련해 생산성과 연계된 임금 체계와 노사 관계의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사업장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임금 인상 요구나 갈등 중심의 노사 관행은 경제 전반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이 세계적 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질 좋은 고용을 창출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과감한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 과도한 산업 규제·기업인에 대한 형사처벌·리스크 높은 노동 경직성 등의 문제를 해소하는 게 급선무다. 예컨대 한국의 노동 유연성과 채용·해고 관련 제도가 해외에 비해 경직돼 있다는 점은 지속적으로 제기돼 온 과제다. 주요 경쟁국과 비교하면 개선 여지가 크다. 지금은 미래 먹거리를 대비해야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글로벌 표준에 맞는 규제 개혁에 나서야 한다. 시장 자율이 근간이다. 시장 원리가 작동하지 않게 되면 나라 경제도 침체의 늪에 빠진다.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규제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 제고, 글로벌 기준과의 정합성 강화, 노동시장 유연성, 공정한 시장 접근 보장 등이 주요 개선 과제다. 아울러 기업 역시 책임 있는 경영과 투명성 제고를 통해 사회적 신뢰를 높여야 한다는 점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
잔디 구장에는 서로 잇대어 설치한 천막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잔칫날의 풍경이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스피커에서는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조금 늦게 도착한 바람에 점심 식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사람보다 막걸리 냄새가 먼저 다가와 코를 비틀어 놓았다. 김치와 여러 가지 음식들이 뒤섞인 냄새에 허기가 밀려왔다. 나를 초대한 지인은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내게 내밀었다. 삼십여 개가 넘는 마을이 모여 면민의 날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남자들은 막걸리 몇 잔으로 벌써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에는 흥이 넘쳤다. 바람에 현수막이 펄럭이고 하늘에는 만국기가 펄럭였다. 옛날의 가을 운동회가 생각났다. 내 앞에 앉은 할머니는 안부를 묻는 이장님을 향해 갑자기 옷을 들치더니 허리에 두른 복대를 보여 주었다. 아마도 허리 수술을 하신 모양이었다. 얼떨결에 드러난 복대는 할머니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지만, 내 마음 한 곳을 조이고 있던 무언가는 잠시 헐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방식이 살가웠다. 천막 앞에서 여자들의 승부차기가 시작되었다. 마을 주민 중에서도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이 경기에 참여했는데, 아무리 힘껏 차도 공은 생각만큼 굴러가지 않았다. 그마저도 바람이 거들어야 겨우 움직였다. 마을별로 경기 참가자들을 불러 모으느라 마이크가 쉴 새 없이 삑삑거리는데, 그 소리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풍선 터트리기가 시작되었다. 2인 1조로 구성된 마을 대표들이 참가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출발하는 팀이 속출했고, 사회자는 반칙하면 탈락시키겠다는 경고를 했다. 다시 호루라기가 울리자, 이번에는 반환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중간에서 풍선을 터트리는 팀들이 나왔다. 반칙을 말리는 사회자의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보는 이들은 여기저기서 폭소를 터트렸다. 둘이 부둥켜안고 터트려야 할 풍선을 손으로 꼬집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을 따라 웃다가 저렇게 즐거운 반칙이 어디에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모이니 더 이상 규칙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 번도 울어보지 않은 사람들처럼 모두 크게 웃었다. 노래자랑을 곧 시작할 거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참가자는 무대 앞으로 빨리 나오라는 사회자의 재촉이 계속되었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점차 흐려지던 하늘에서는 당장이라고 비가 쏟아질 듯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노래자랑이 시작되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보지 못한 채 돌아서는 발걸음이 아쉬웠다. 참가자들의 선곡에는 어떤 삶이 녹아 있을까. 누군가는 몇 소절도 채 넘기지 못하고 ‘땡’ 소리에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그 웃음들이 궁금해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픈데도 복대를 두르고 지팡이를 짚고 나온 어르신들의 봄나들이가 보기에 좋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웃고,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애써 피운 꽃잎들 이제 곧 비에 질텐데 아까웠다. 조금만 더 오래 피어 있기를 바랐다.
2023년 6월 13일 「평화경제특별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2023년 12월 14일부터 시행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통일경제특구”로 출발하여 기나긴 여정 끝에 입법에 성공한 사례다. 이 법은 남북 간 경제적 교류와 상호보완성 증대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 실현을 입법목적으로 하고 있다. 대상 지역은 북한 인접지역(경기도 파주, 김포, 연천, 인천광역시 강화, 옹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과 남북 경제협력 등 지리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시행령으로 정한 지역(경기도 고양, 동두천, 양주, 포천, 가평, 강원특별자치도 춘천, 속초)이다. 17개 접경지역 시․군이다. 특히 가평군과 속초시는 2025년 우여곡절 끝에 접경지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평화경제특구 지정 대상 지역으로 된 곳이다. 이 평화경제특구 입주기업은 지방세 및 임대료 감면, 의료·교육·주택 등 지원시설과 기반시설 설치비 지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승인절차 간소화 특례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남북 교역·경제협력 시행 기업과 연관기업, 입주기업과 융복합을 통한 고도화 가능 기업 등이 입주할 수 있다. 이런 평화경제특구는 접경지역 어느 곳에 지정될까? 초미의 관심 사항이다. 통일부의 제1차 평화경제특구 기본계획(2026~2035)에 의하면, 평화경제특구는 “정치·경제 복합형 특구”, “접경지역 중심 균형발전형 특구”, “선(先) 법제화형 특구”를 지향하고 있다. 1차적으로 2026년 말 1개 특구를 시범 지정하고, 2027년에는 2개 특구를 추가 지정하며, 2029년~2030년 평화경제특구 개발사업을 본격 착수하여, 2031년~2035년 평화경제특구 개발 완공 및 기업 입주를 목표하고 있다. 특구 개발 유형으로는 산단형(산업·농림어업·R&D 등 특정 업종 집적), 관광·문화형(평화통일 테마의 관광·문화·교육 중심), 복합형(산단형과 관광·문화형을 결합한 특구)으로, 9개 사업 산업 모듈(안)을 제시하고 있다. (모듈 1)은 첨단산업 및 AI 단지, (모듈 2)는 지식정보 및 R&D 단지, (모듈 3)은 섬유 및 가구 산업단지, (모듈 4)는 농수산식품 산업단지, (모듈 5)는 관광 및 생태환경 복합단지, (모듈 6)은 해양경제 특화 단지, (모듈 7)은 물류․서비스 단지, (모듈 8)은 교육·문화단지, (모듈 9)는 공공, 국제협력 단지 등으로 구체적 산업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중앙정부의 방침에 따라 접경지역 17개 해당 시군에서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경기도는 2026년 3월 30일 파주시, 연천군, 포천시를 평화경제특구 후보지로 발표했다. 물론 통일부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실제 개발계획수립에서 변경이 있겠지만, 파주시는 첨단산업단지를, 연천군은 “평화정원”을 중심으로, 포천시는 “한탄강”을 중심으로 농업+관광+경공업 융합형 단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결같이 접경지역 발전과 한반도 평화공존을 동시에 지향하는 방향으로 평화경제특구 조성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어느 지역에 평화경제특구가 조성되더라도 남북한 경제공동체 실현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물가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중동전쟁 지속 여파로 지난달 에너지에 이어 공업제품 물가지수까지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외 공급망 불안(지정학적 리스크), 에너지 및 식료품 가격 상승, 고환율로 인한 수입 물가 상승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웃도는 식료품 물가와 에너지가 상승, 원자재 가격 불안정이 주원인이며,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을 위해 고금리 기조를 유지 중이나 내수 회복은 더딘 상황이다.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2%로, 연초부터 2%대의 불안정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식품 및 비주류 음료 가격이 OECD 국가 중 최상위 수준으로, 서민 경제 부담이 크다. 민간 소비 위축과 실질 구매력 저하로 나타나고 있다. 에너지 물가 고공행진은 공업제품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업제품 물가지수 상승은 석유류(140.55·9.9%)가 주도했고 가공식품 등 다른 항목의 고공행진도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액화천연가스(LNG) 등의 공급 부족으로 산업현장이 멈춰 서고 있다. 포장재·합성고무·플라스틱 부품 등의 부족으로 식품·약품 등 생필품은 물론 건설 등 내수산업, 자동차·반도체 등 수출산업까지 전방위적인 생산 차질이 우려된다. 작금 원·달러 환율이 1500 원을 돌파하는 등 고환율·고물가·고금리의 3고(高) 복합 위기로 존폐 위기에 놓인 중소기업들이 늘고 있다. 고물가는 서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민간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켜 경기 반등 불씨마저 꺼트릴 수 있다. 올 전망도 밝지 않다. OECD는 올해 물가 상승 전망치를 2.7%로 끌어올려 작년(2.1%)보다 껑충 뛸 것으로 봤다. 지난달 말 기준 주요 투자은행(IB) 8곳의 평균 전망치도 2.4%로 높아졌다. JP모건은 중동 상황이 실질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5∼9월에는 3%를 웃돌 것으로 예상했다. 호르무즈해협의 봉쇄 여파는 가장 먼저 에너지 가격 폭등을 이끌었지만, 앞으로 운송·물류, 공산품·가공식품·농축수산물, 외식 서비스까지 도미노식 파장이 우려된다. 당장 이달부터 시작된 유류할증료 인상에 따른 국제 항공료 급등은 숙박·외식 등에 전가돼 서비스 물가 전반의 상승을 이끌 수 있다. 운송비가 오르면 소매 상품의 가격도 밀어 올리고, 생산 위축으로 이어진다. 건설업계에선 고유가 여파에 레미콘에 필수인 석유 부산물의 가격 인상이 겹치면서 ‘4월 대란설’이 나돌고 있다. 비료의 공급 차질은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 우려를 키운다. 국제 비료 해상운송의 3분의 1가량이 호르무즈를 통과하는데, 카타르와 이란은 전쟁 후 비료 생산을 크게 줄였다. 중국은 비료 수출 통제에 나섰다. 비료의 핵심 원료인 천연가스 가격까지 폭등해 글로벌 곡물 생산 감소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당장 2분기 국제 곡물 선물 가격지수는 전기 대비 6.4% 급등이 전망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오는 7월 말까지 국내 비료 공급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가격 인상 전망에 사재기가 고개 들고 있다는 전언이다. 파종 시기를 맞아 농업용 비닐의 수급 우려도 커졌다. 정부는 공급은 물론이고 수요관리(절약)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비료를 과다 투입하는 관행도 이 기회에 고쳐야 한다. 고물가에 소비와 성장마저 둔화하면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화할 수 있는 비상 상황이다. 민생대책에서 물가안정이 우선순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정부가 서민 생계 보호 측면에서 물가 안정에 정책적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공공요금 억제·생필품 가격 관리와 같은 미시 대책으로 외부 충격을 완화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통화·재정 등 거시정책의 큰 틀에서 물가를 자극하지 않고 경기회복의 불씨를 살릴 수 있는 복합처방이 필요하다. 정치권도 민생 살리기에 힘쓰길 촉구한다. 이 어려운 때 정치가 본령을 회복해 할 일을 해야 한다.
미국 뉴욕에서 손님이 왔다. 맨해튼 북부 할렘 지역에 소재한 데모크라시 프렙 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우리 한성대학교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언어와 문화를 교류하는 체험 활동을 하루 동안 진행했다. ‘고맙습니다’, ‘이거 얼마예요’, ‘떡볶이가 맛있어요’, 교실에서만 배우던 한국어를 서울에서 실제로 사용하고 소통한다는 것에 학생들은 내내 흥분한 모습이었다. 낙산공원, 혜화동, 대학로 일대를 누비며 다이소에서 선물도 고르고, 인생네컷 사진도 찍고,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타고, 교내 식당에서 양념치킨도 먹고, 서툰 한국어로 말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가며 연신 설레는 모습이었다. 이번 프로그램은 지난해에 이어 우리 대학에서 두 번째로 운영한 행사였는데, 미국 고등학생과 한국 대학생, 두 나라 학생들의 만남을 지켜보며, 이렇게 또 씨앗 하나가 어딘가에 심어졌구나 싶은 마음에 보람이 느껴졌다. 뉴욕의 공립 차터스쿨인 데모크라시 프렙 고등학교는 한국어를 필수 과목으로 채택하고 한국식 교육철학을 접목해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도모한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학교다. 이들에게 한국어는 단순한 외국어 과목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이끄는 매개가 되고 있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문화와 가치관을 접하고,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며 미래를 설계하는 힘을 기른다. 한국 방문 프로그램을 통해 교실 밖에서 언어를 사용하고 또래와 교류하며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장하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 해외 초·중·고등학교에서의 한국어교육 규모는 두 배 이상 성장했다. 2024년 기준 46개국 2,526개 학교에서 약 22만 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1999년 정부의 해외 현지 한국어반 개설 지원사업이 미국에서 시작된 이래로 2004년 호주, 캐나다로 확대되었으며, 2011년 태국, 2017년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한국어교원 파견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2021년부터 3개년간 인도 중고등학교 한국어 교재 개발 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해외 현지에서의 한국어 채택이 이처럼 증가하고 있음에도 핵심 인프라는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접근 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단순한 언어 보급이 아닌 미래 인재 양성 전략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데모크라시 프렙 사례가 보여주듯, 한국어는 학습 동기와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교육적 자산이다. 현지 학교와의 파트너십을 강화하여 정규 교육과정 내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단기 프로그램이나 이벤트성 지원을 넘어, 교사 양성·파견, 교육과정·교재 개발, 평가 체계 구축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생태계가 필요하다. 또한 현장 경험 중심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 한국 방문 연수, 온라인 공동 수업, 또래 간 프로젝트 학습 등은 언어 학습 효과를 극대화할 뿐 아니라 문화적 공감 능력을 키운다. 이는 단순한 국제교류를 넘어 장기적인 국가 간 신뢰 자산으로 축적된다. 우리는 흔히 한국어 확산을 한류의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반대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형성된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더 깊고 지속적인 관심을 만들어낸다. 교실에서 시작된 작은 언어 하나가 한 개인의 삶을 바꾸고,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