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른 사람과 미리 정하여 두는 일을 약속이라고 한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크든 작든 대부분의 일은 이미 약속에 따라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약속을 저버리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사람 관계가 험악해진다. 사람이나 조직체 사이에 서로 지켜야 할 의무를 글로 명시하여 법률로 책임을 지도록 한 계약은 지켜야 하고 그렇지 아니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만연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약속은 인격을 담보로 하는 것이고 계약은 법률적 강제를 담보로 한 것이다.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법률적 책임만 지면 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인격의 훼손을 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잠시도 멈춘 적이 없는 여야 정치권의 ‘무한 정쟁’ 형국이 갈수록 태산이다. 도무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집권당이나 정치를 사뭇 전쟁터로 몰아가는 다수 야당의 무책임한 정치행태가 가뜩이나 깊어지는 국민 불안을 하염없이 덧내고 있다. 고환율·고물가·고금리 등 3고(高) 경제위기 쓰나미 앞에서 숨넘어가고 있는 가계와 기업들의 애환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실종된 정치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사회·안보 등 전 분야에 있어서 복잡한 난제들이 동시다발로 불거지는 총체적 난국으로 몰려가고 있다. 특히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는 평마저 나오는 세계 경제 회오리의 여파로 민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울한 시련 속으로 빠져드는 중이다. 각자도생의 처절한 수난 속에서 아시아에서 제2의 외..
인간은 고독해질수록 항상 자신을 부르고 있는 신의 목소리가 잘 들린다. 오로지 침묵하고 감추어라 너의 감정도, 꿈까지도! 네 영혼 깊이 그것을 키우고 심화하라.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그것을 사랑하며 침묵하라!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누가 이해하랴 네 마음을 누가 이해하랴 네 생명을 언어는 사상을 속이는 것을 샘물은 흐림을 꺼리는 것을 오직 침묵하고 헤아려라! 이젠 고독을 배울지어다 네 마음에는 한없는 만다라의 세계가 펼쳐지거늘 떠들썩함은 마음의 귀를 빼앗고 드러난 빛은 눈을 빼앗도다. 침묵 속에 마음의 노래를 들어라. (추체프) 좋은 의도도 입 밖에 내어 말해버리면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나 청년 시절에 선을 지향하려고 분발한 감정을 입밖에 표현하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훨씬 시간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아직 제대로 피지도 않을 꽃을 기다리지 못하고 꺾었다가, 얼마 후 그것이 땅 위에서 짓밟혀 있는 모습을 볼 때처럼 후회하게 된다. 인생의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고독하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역사는 결코 남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연출되는 드라마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독백 또는 오히려 우리와 신의, 즉 우리의 양심과의 진지한 대화이다. (아미엘) 파스칼은 말한다. 사람은 혼자서 죽어야 한다고,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또 혼자서 살아야 한다. 인생의 중대한 문제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고독하다. 즉 사람들과 함께가 아니라 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남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 자신은 남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죄가 많은 사람은 인생에서 항상 다른 사람들과 연관을 맺고 있지만, 죄가 깊을수록 마음속의 고독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와는 반대로 선량하고 총명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도 가끔 고독을 느끼지만, 그 대신 고독하게 있었도 끊임없는 인류와의 일치를 의식한다. 이따끔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자신 속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것은, 육체에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영혼의 양식이다./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사랑, 내 누이/꿈꾸어보렴 거기서/단 둘이 사는 달콤한 행복을! 한가로이 사랑하며/사랑하며 죽을 것을/너를 닮은 그 나라에서!(...)/ 그곳은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호사, 고요 그리고 쾌락(...). 잠자던 로망을 불타오르게 하는 시다. 너를 닮은 그곳에서 단 둘이 달콤한 행복을! 깊어가는 가을 몽상 속에 풍덩 빠지게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여행에의 초대.’ 시인은 애인과 함께 이상의 나라 네덜란드로 떠나 살고파 했다. 감각을 승화시키고 절대적 진실을 찾아 헤맸던 보들레르. 그는 파리 오뜨푀이(Hautefeuille)거리 13번지에서 태어났다. 스물여섯의 처녀 카롤린 뒤파이는 육십이 넘은 조제프-프랑수아와 결혼해 보들레르를 낳았다. 아버지는 그가 겨우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어린 보들레르는 어머니와 함께 행복했다. 어머니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함께 나눴고 이는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됐다. 자전적 시, ‘하얀집’에서 그는 여름날 어머니와 함께 보낸 뇌이쉬르센을 회상했다. 그런 어머니는 재혼했고 그때부터 보들레르의 인생은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대학 대신 시인의 길을 걸으면서 의붓아버지와 싸웠고, 결국 보들레르는 친아버지가 남긴 거금의 유산을 챙겨 그와 결별했다. 유년의 추억 때문이었을까. 보들레르는 평생 파리를 사랑했다. 파리는 그의 삶의 터전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특히 생루이섬을 좋아했다. 이 섬에 있는 퐁 마리(마리다리)는 센 강의 좌안과 우안으로 인도한다. 보들레르는 이곳 산책을 즐기며 골목 카페에 앉아 시를 썼다. 이 생활은 20년간 지속됐다. 스물세 살 작가초년병 시절에는 아예 이곳에 정주하며 그 유명한 ‘악의 꽃’의 초기작품들을 썼다. 그는 벽이 매우 높고 센 강의 경치가 훤히 보이는 넓은 창문 집을 좋아했다. 애인 잔 뒤발(Jeanne Duval)과 여기에 살면서 라 뚜르 다르장에서 점심을 먹고 집 근처에 있는 골동품상에서 물건을 사고, 저녁나절에는 피모당 호텔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보들레르가 좋아한 생루이섬. 이곳은 원래 방목장이었던 암소섬과 노트르담섬 두 개로 이루어졌다. 이 두 섬은 17세기 초 다리를 놓아 연결됐다. 이곳의 건축물과 분위기는 세월이 흘러도 거의 변함이 없다. 왜 보들레르가 이 섬에 굴복당했는지 짐작이 간다. 대시인이 떠난 지 어언 150년. 이 섬은 오늘도 찬란한 빛을 발사하고 있다. 파리를 여행한다면 라틴가(街)를 들러 고풍스런 대학가들을 둘러보고, 노트르담 대성당 꼭대기에 올라 파리전경을 바라본 후, 퐁 마리를 건너 생 루이 섬으로 들어가 보라. 파리지만 파리가 아닌, 왠지 에그조틱한 분위기를 금방 느낄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시 ‘악의 꽃’을 탄생시킨 생루이섬. 파리여행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바로 여기다.
“깨져 버린 바이든의 밀어”, “미국의 전기차 ‘뒤통수’에 ‘허둥지둥’”, “‘실망 안 시키겠다’던 바이든이 '현대차의 꿈' 깼다”, “14조 선물 고맙다더니, 미국 이익만 챙기는 ‘중국 견제’”, “이게 한·미 경제동맹이냐” 등등은 최근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유독 현대·기아자동차만 전기차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사건에 대한 신문 표제들이다. 필자는 2022년 6월 30일 자 칼럼 “지경학적 분열의 시대,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서, “기업 경영자는 ‘탈통합’에 선제적으로 앞장설 필요는 없다. 기존의 글로벌 ‘통합’의 이익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서서히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긴 호흡 경영 전략이 필요하다. 강대국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 맞추어 대응하여도 늦지 않다.”라고 조언한 바 있다. 바이든의 행위는 2016년 트럼프가..
섣부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궁지에 몰린 푸틴이 또다시 핵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푸틴이 진정 핵을 사용하고 이로 인해 핵전쟁의 길목으로 들어설 것인지 모두가 우려스런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핵무기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라는 80여년 간의 타부가 깨어지고 서서히 “사용가능한 핵무기”로 패러다임이 shift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푸틴의 핵위협이 ‘선언적 사용’ 단계였다면, 이번 핵사용 위협은 ‘실제적 사용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기에 그 어느 때 보다 엄중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암울한 ‘핵무기 사용 협박’ 에 편승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정은이다. 조만간 실시될 7차 핵실험은 ‘핵무기가 협박용이 아닌 실전용’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한편, 지난 9월 7일 제7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발표한 핵독트린은 ‘핵실전 사용’ 가능성이 결코 망상적 시나리오가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는 북한이 사실상 핵선제 불사용을 폐기하였음을 시사하면서, 6조는 북한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언급했다. 김정은의 핵시계가 매우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엄혹한 핵환경 하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연일 한미동맹 강화와 핵우산 보장이란 미국의 다짐이 되풀이 되고 있지만, 어쩐지 미덥지가 않다. IRA(인플레 감축법)에서 동맹인 한국을 고려하지 않은 미국의 자국이기주의 태도가 핵전쟁 국면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말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바이든이 바뀌고 새로운 미국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이전 정부의 약속을 이행한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여론을 의식하는 미국 정치역학으로 볼 때 미국민이 손상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상황에서도 한국을 무작정 도우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더욱 한심한 일은 엄혹한 국제정세를 목도하면서도 여전히 망상적 ‘환경놀음’에 빠져 원자력 활성화를 방해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원자력은 이미 에너지 안보의 필수가 되어 가고 있고, 향후 핵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원자력 생태계를 복원해야 하는데,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혀 ‘신한울 1호기’ 가동에 제동을 거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작태는 분노를 치밀게 한다. 우리 국민들의 핵무장 여론이 90%가까이 된다는 사실은 원안위의 행태가 상식과 국가미래를 등한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전개될 핵공포 상황은 지도자들 간의 강심장 대결이자 국민여론 결집도가 핵심 키가 될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 못한다. 이는 내가 스스로 살 수 있는 사람을 일어날 수 있도록 한 것뿐이다(越人非能生死人也 此自當生者 越人能使之起耳).” 편작(월인은 편작의 이름)의 창공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상황이든 손쓸 수 없는 경지에 이르면 그땐 어떤 처방도 효험이 없다는 뜻이다. 여야를 떠나 지배세력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중국의 최대 담수호인 포양호 수위가 역대급 가뭄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바닥이 드러난 양쯔강에서는 6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반면에 파키스탄은 6월부터 시작된 초장기 홍수에다 고산의 빙하가 녹아 내리며 국토 3분의 1 이상이 물에 잠겼다. 이로인해 1000명 이상이 숨지고,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고 한다. 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점점 기후재난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국도 올해 수도권 물난리와 북상하면서 강도가 더 세진 ‘괴물’ 태풍 힌남노로 포항 등에서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지구 반대편이나 바다건너 남의 일처럼 여겨졌던 지구온난화의 재앙이 우리나라와 국민 개개인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국립수산과학원(수과원)에 따르면 한국 해역은 산업사회로 속도를 내던 1968년..
전쟁의 모든 참화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의 가장 큰 악의 하나는 인간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는 것이다. 군대가 존재하고 군사비가 지출되는 것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하는데,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이성이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 건너편에 살고 있고, 그의 황제가 내 황제와 싸우고 있다는 이유로 그와 나 사이에 무슨 나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에게 나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얘기가 또 있을까? (파스칼) 사람들이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4세기 전에 피사와 루카의 주민들은 서로 맹렬하게 미워했는데, 마치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피사의 짐꾼까지도 신분이 높은 루카 시민에게 뭔가 신세를 지는 것을 피사에 대한 수치스러운 배신이라고 여겼다. 지금 그 적개심의 흔적이 어디엔가 남아 있을까? 마찬가지로 현재의 프러시아인의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에는 장차 무엇이 남을까? 그러한 감정이 장차 우리의 자손에게, 마치 아테네인의 스파르타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피사의 주민의 루카 주민에 대한 증오심과 마찬가지로 보일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사람들은 이윽고 자신들에게는 서로를 공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 자신들의 공통의 적은 빈곤과 무지와 질병이고, 그러한 무서운 불행과 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자신들의 불행한 인류 형제와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샤를 리세)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는 천삼백 억의 빚을 안고 있으며, 그 가운데 약 천백억은 지난 1세기 동안 진 것이다. 이 막대한 빚은 모두 오로지 군비 조달을 위한 것이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 정부는 평시에도 400만 명 이상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고, 전시가 되면 1900만 명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 그 정부 예산의 3분지 2는 빚의 이자와 육해군의 유지에 충당되고 있다. (몰리나르) 만약 어떤 여행자가 어떤 외딴 섬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을 탄환이 장전된 대포로 지키고, 주위를 밤낮없이 파수꾼들이 오가면서 경비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도 그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종교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도 미미하다니! 또한 우리가 종교에서 이토록 멀어져 있다니! (리히텐베르크) 전쟁 또는 군인계급이라는 존재를 시인하지도 부인하지도 말라. 명백한 나쁜 일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논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을 왜곡시킨다./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철도기관사 직종은 매년 건강검진에 더해 청력 특수검진을 받아야 한다. 20년 이상 근무한 고참 기관사 중에는 유독 난청이 많다. 시끄러운 디젤기관차의 소음공해 때문이다. 그런 동료들에게 물어봤다. “이 새끼들이 승인 안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이 말이 어떻게 들리냐고? 난청인 고참기관사나 이제 막 들어온 신입 부기관사나 ‘바이든’을 ‘날리면’으로 듣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그랬다. 청력검사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지금처럼 ‘삐’소리가 나면 버튼을 누르는게 아니라 ‘바이든’과 ‘날리면’ 소리를 틀어주고 구별하게 해야 한다나? 청력검사를 그렇게 바꾸면 아마 20% 정도는 “날리면 난청”으로 나올지도..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대통령의 언행에서..
누군가 “최고로 가치 있는 자유는?”이라고 물으면, ‘언론 자유’라고 할 테다. “언론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는 사회를 정의롭게 한다. 세상을 진보케 한다. 언론이 난세를 성토할 때면, 옳지 않은 것이 바른 곳으로 간다. ‘가짜뉴스’만 아니라면,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어디서나, 보장돼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다. 언론 자유, 언론 보도, 언론 책임… 지난 20일, 유엔서 열린 바이든의 기금모금 행사에서 사단이 났다.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 윤 대통령의 ‘막말’이 있었다. 살다보면, 욕 할 수도 있다. 인간의 모습 중 하나다. 하지만 국제외교무대였다. 대통령의 언어로는 부적절했다. 사과하면 끝날 일일 수도 있다. 문제는 ‘진실’ 왜곡.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란다. 나아가 ‘언론 탓’이란다. 보도로 인해 국익이 훼손됐단다. 본질은 대통령의 태도다. 국익은 국가의 이익일까. 혹은, 국민의 이익일까.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국익은 권력자들의 특수한 이익”이라고 했다. 살피건대, 국익은 ‘자유’의 상위 개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진실 보도에 국익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것은 다름 아닌 ‘검열’이다. 외국과의 관계에서 국익엔, 동맹엔, 품격이 전제돼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알게 모르게 ‘자유’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윤 대통령은 자유를 입에 달고 산다. 대통령이 되기 전엔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자유가 개인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한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 한다”고 했다. 광복절 연설에선 자유를 33번,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선 21번 언급했다. 그때의 자유는 무엇이고, ‘막말’ 사단이 난 이후의 자유는 무엇인가. 국민은 생각한다. 그저 자유란 “직장의 틀에서, 생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 작은 소망이자, 평생의 고민이다. 범부들은 직장을, 직업을 관두려 하다가도, 막상 직장에서 ‘짤린다’고 하면 자유의 꿈을 접는다. 사업을 접으려다가 다시 이어간다. 눈앞에서 자유가 현실이 되면, 자유를 회피한다. 일반인이 갖는 ‘자유의 개념’이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이를 ‘욕망에 의한 자유’라고 했다. 한편, 공인의 자유는 다르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면 자유는 환상이자 웃음거리”라고 했다. 자유무역주의 주창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자유란 상대적 평등의 조건 아래서만 기능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철학 교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자유란 공적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이렇듯 공인인 대통령의 발언은 공적 영역에 존재하는 자유에 속한다. 자유의 개념은 고대 로마시대에서 시작돼 자유방임주의, 독점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진화했다. 이젠 해묵은 트렌드다. 기후와 불평등이 최대 관심사인 글로벌 시대에 자유의 반복 언급은 고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비속어까지. ‘문화’를 강조했으면 좋을 뻔 했다. 대한민국은 K-문화강국 아니던가. ‘거짓말’ 할 때 아니다. 정야정(政也正). 정치란 ‘바른 생각의 실현’이다. 진실 보도, 언론의 자유를 위협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