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878억여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용산 영빈관’ 건립을 추진하려다가 논란 끝에 중단된 일은 결코 유야무야 흘려넘길 사건이 아니다. 아무런 공론화 과정도 없이 기획재정부가 대통령실 수석들조차 모르게 국유재산관리기금 예산안에 슬쩍 끼웠다니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실의 정무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비서나 관료들의 국민 공감 능력이 마비됐다는 증거다. 어물쩍 넘길 생각 말고 책임소재를 따져서 고장 난 의사결정 매커니즘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제2, 제3의 국정 난맥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대통령실은 기재부가 새 영빈관 건립에 878억여 원 예산을 편성한 데 대해 “국익을 높이고 국격에 걸맞게 내외빈을 영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용산 시대에 걸맞은 영빈관의 필요성..
“뚜 뚜 뚜우, 오후 1시입니다. HLKA 방송입니다.” 라디오 방송을 듣다 보면 아나운서는 수시로 현재 시각과 방송국의 무선호출부호를 알려준다. 어린 시절 이같은 시보(時報)와 함께 알려주는 HLKA와 같은 방송국의 알파벳은 무심히 들었던 것이지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오랫동안 궁금증을 더하였다. HL은 방송국이 사용하는 무선국의 국가 식별부호이다. 그렇지만 나라마다 사용하는 무선국의 식별부호라고 해서 각국 정부가 마음대로 정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이라는 국제기구가 전파를 사용하는 각 국가에 국가식별부호를 부여하여 국가별로 구분하여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47년 미국에서 열린 ITU회의에서 HL을 부여받았다. 당시 미군정이 신청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으며, 각 방송국은 HL이라는 접두어에 방송국마다 부여된 알파벳을 사용하게 된다. HLKA, HL은 한국의 무선국을 의미하고 KA는 KBS의 제1라디오라는 뜻이어서 언제든 다른 방송국과 식별할 수 있는 기능을 한다. 일종의 고유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HL은 한국의 미디어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디오방송이 1947년 처음 시작된 해라는 것일까. 한반도에서 라디오방송 전파가 최초로 발사된 것은 1927년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송국이 사용한 전파로서 JODK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하였다. JO는 일본의 식별부호로 도쿄(JOAK), 오사카(JOBK), 나고야(JOCK)에 이어 개국한 조선총독부 관할의 방송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의 국가무선식별부호로 방송을 시작하지 못한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광복이 되면서 미군정이 HL을 국제기구로부터 부여받고 대한민국이 전해 받아 사용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JO라는 일본의 국가식별부호를 사용하여 방송되었던 일제강점기의 라디오방송은 막을 내리게 되고, HL이라는 한국의 국가식별부호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전파 영역에서도 주권 국가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는 미디어 역사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1950년대 등장했던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의 이름은 HLKZ-TV였다. 방송국의 무선호출부호를 방송국명으로 그대로 사용하여 선보였던 예이다. 아쉽게도 이 방송국은 전쟁 직후인 1950년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방송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방송은 1961년 개국하는 KBS에 채널 9번을 넘기고 폐국하게 된다. 이후에 개국하는 방송국들은 이러한 무선호출부호를 채널명이나 방송국명으로 사용하기 보다 KBS라든지 MBC라는 영문자를 사용하는 경향이다.
윤석열 후보 시절 공염불 수사(Rhetoric), 제1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수사(Investigation). 정치권은 내전 중이다. 국민이 보기엔 수사(修辭)와 수사(搜査)는 정치가 아닌데 말이다. 문제는 경제이건만, 정치는 ‘문제 그 이상’이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의 ‘외교 참사’는 국내 기업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가져다 줬다. 무능한 정치는 국익 손상과 직결된다는 것. 확실하게 드러났다. 지난 5월,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은 우리나라에 내방해 삼성(반도체)과 현대(전기차)의 ‘대미 투자’ 실익을 챙겼다. 얼마 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발효되면서 현대의 전기차는 보조금 지급서 제외됐다. 미국은 IRA(Inflation Reduction Act)뿐만 아니라 반도체, 바이오에 관해서도 미국 내 연구와 제조를 강제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방침에 따라 한국의 미래에 위기가 닥쳤다. 기회는 있었다. 펠로시(Nancy Pelosi) 미 하원 의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펠로시를 상대로 노력했어야 했다. 정부 역할이다.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국정원, 외교부와 주미 대사관,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부처의 총체적 안이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 위협에 대비해 예방 정책을 풀가동했어야 했다. 변명과 책임 회피는 기업과 국민에 대한 기만이다.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바이오산업은 미래 먹거리 산업이다. AI, 신재생에너지, 방산·우주산업 등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젖줄이다. 삼성, SK, 현대, LG, 한화, 두산 등 재벌그룹이 주력하고 있는 업종이다. 물론 기업지배구조 등으로 인해 재벌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의 ‘외교 무능’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대기업집단에게 국민은 동정심마저 보일 태세다. 바라건대, 정부는 법인세 경감 정책 대신에 기업이 맘 놓고 활동할 수 있는 무역의 조건들을 만들어줘야 한다. 북미의 캐나다, 남미의 멕시코와 브라질, 중국과 일본, 인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과 다자 외교 정책을 분리, 혹은 통합적으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기술 및 산업 능력 발전(북미, 남미, 유럽 등), 국경적 협력(중국, 일본), 자원공급 사슬·금융·신용 유지(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측면의 발전적 상호작용을 안배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전기차와 배터리산업 분야는 2030년 무렵이면 반도체산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산업 환경이 녹록치 않다는 방증이다. 정부는 리튬, 희토류 등 원자재 확보를 위한 외교 전략 재점검은 물론이고, 국가 간 협력조약 체결에도 나서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회장이 멕시코로, 캐나다로 뛰기 이전에 정부가 사전 조율에 나섬으로써, 산업의 미래에 안정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수사(搜査)에 목숨을 걸고 있을 때, 삼성전자는 늦었지만 ‘RE100(기업의 사용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 가입을 선언했다. 글로벌 트렌드에 합류했다. 정부가 ‘원전 올인’을 주창하고 있을 때, ICT 초일류기업 삼성전자는 ‘탄소중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익’을 넘어선 ‘가치’의 추구… 기업 환경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삼성을 보면서 경제는 물론이고, 미래의 정치와 권력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후원금 의혹'으로 시끄러운 성남FC를 바라보는 구단주 신상진 성남시장의 시선은 곱지 않다. 신시장은 불법 후원금 비리의혹에 더해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 성남FC의 구단주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비리의 대명사’, ‘혈세를 먹는 하마’로 전락한 ‘혁신의 대상’이라며 냉랭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기업에 매각하거나 어떤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개선 의지도 없고 꼴찌만 하고 시민들의 혈세를 먹는 구단을 계속 갖고 가는 것은 성남시민들에 대한 배임”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성남FC는 최근 5년간 계속 강등권에 머물러 있다. 2부리기로 강등된 적도 있었다. 계속되는 성적부진에 얼마 전엔 김남일 감독이 사퇴했다. 상황이 이러니 성남FC는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성남구단 프런트, 선수는 물론 서포터들도 구..
트럼프와 달리 바이든 대통령 시대가 열리면서 미국은 자국 이익만 중시하는 것이 아닌 국제질서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했다. 실제로 바이든은 집권 초기 트럼프가 탈퇴한 파리기후협약과 세계보건기구에 재가입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와 기후변화 위기에 지도력을 발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트럼프와 다름없는 미국 우선주의, 미국 제일주의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이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사인함으로써 내년부터 판매되는 차량은 모두 미국 내에서 생산된 부품만을 사용해야만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법규화 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9일과 12일에는 새로운 ‘바이 아메리칸법’에 서명하였다. 미국 내에 건설하는 반도체 생산시설에 거액의 보조금을 주는 ‘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그리고 국내 개발과 생산을 우대하는 ‘국가 생명공학 및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NBBI)’ 행정명령을 승인한 것이다. 향후 자동차산업과 반도체 그리고 바이오산업까지 모두 미국 내 생산시설과 제품생산을 유도함으로써 일자리 창출을 하겠다는 꿈을 실현하는 내용들이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응하겠다는 논리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산업을 경쟁 없이 미국에서 생산하고 미국산만을 사라는 정책이다. 2016년 대선에서 공화당에 패배한 민주당은 왜 미국인은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친 트럼프에게 열광하는가를 분석했다. 특히 현 정부의 국가안보 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은 당시의 패배를 중국에 생산을 의존하는 방식의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은 미국 중산층의 실망에 있다고 판단하고 첨단기술의 강화와 해외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미국의 강력한 외교력을 이용하자는 안을 구상하였다. 즉,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타국의 주요산업 생산시설을 모두 미국 내로 옮겨 생산케 하는 정교한 미국 제일주의의 실천이었다.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 생명 바이오산업 등 향후 미래 최고의 부가가치가 창출될 수 있는 영역들을 모두 미국이 가져가겠다는 이 바이든 정부의 구상은 트럼프 시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더 철저한 아메리카 퍼스트이다. 다른 국가에서 힘들여 개발해 놓은 산업들을 우격다짐으로 자국 내에 몰아넣겠다는 발상의 오만함은 깡패국가(rogue state)의 모습 그 자체이다. 벌써 미국 내에서도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1920년 상선법을 제정해 미국 내에서 상품유통의 배를 모두 미국 상선으로 제한하자 오히려 해상이용이 줄었다는 사례를 들면서 경쟁을 통한 기술개발과 혁신만이 일자리와 생산성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지적하고 있다. 동맹을 배신하고 자신들의 배만 부리겠다는 심보로는 결코 세계의 지도 국가가 될 수 없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혼자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며 함께 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역설했다. 누가 일갈을 해 주어야 하는데 마침 윤 대통령이 미국을 간다니 제발 대국다운 자세를 보이라고 큰소리 좀 치고 올 수 없을까.
세기의 장례, ‘유해’는 뭐고 ‘운구’는 또 뭐지? ... 여왕의 유해를 운구차로 옮기는 것은 밸모럴 영지의 사냥터지기들이 맡았다. (뉴시스) ... 여왕 유해 보러 2만 명 밤샘, 조문에 최대 35시간 줄 (국민일보) ... BBC에 따르면 이날 오전 여왕의 운구를 영구차에 실으며 장례가 시작된다. (이데일리) 언론의 기사다. ‘여왕의 遺骸(유해)’는 금방 사망한 주검이 아니다. 추려진 뼈도 크게 보아 주검이라고? 억지다. 유해는 ‘남은 뼈’ 유골(遺骨)이다. 骸(해)의 뼈 골(骨)자를 보라. 다 안 적어서 그렇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유해’들이 언론에 떴다. 뉴스1 조선일보 중앙일보... ‘여왕의 운구’를 영구차에 싣는다고 했다. 운구가 뭘까? 높은 사람 주검의 이름일까? 아마 ‘시체 넣은 관(棺·柩)의 운반’을 뜻하는 운구(運柩)를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주검=운구’가 된 것이다. 맞나? 틀렸다. 개념어(槪念語)의 활용, 서툴거나 어색한 것 까지는 ‘새로운 언어적 시도’라고 짐짓 못 본체 한다고 치자. 그러나 잘못된 단어가 공공(公共)의 위치에 놓이면 곤란하다. 사람들이 보고 배운다. 기우(杞憂)일까? 언론 종사자들이 BBC를 인용할 정도로 영어는 잘 하면서, 우리 말글 실력은 그런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점도 걱정이다. 점점 언론인을 포함한 우리 지식인들의 (한국어) 어휘(語彙)가 빈약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점을 지켜보고 있다. 외국어 공부도 바탕인 한국어가 튼실해야 잘 한다. 상식이다. 언론의 언어는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 말글의 ‘약속으로서의 뜻’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언어의 작은 차이 또는 잘못이 큰 피해를 부를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우고는 금방 잊었을까? 구두점만 잘못 찍어도 전체의 뜻 달라진다, 따위 사례를 다시 기억해내자. 죽은 몸이 주검이고 송장이다. 천한 말 같아서일까, 송장은 저런 장례의 용어로 잘 쓰지 않는다. 둘 다 우리말이다. 다행히 주검은 그런 편견 없어 자연스럽게 쓰이는 듯하다. 한자말도 시체(屍體) 사체(死體) 등은 느낌이 ‘별로’여서인지, 이번 세기의 장례 기사에서는 좀 꺼리는 것 같다. 시신(屍身)은 좀 나은가? 우리 생활문화에서 장례(葬禮)는 기피 또는 휘(諱 꺼림)의 대상인 듯하다. 공동묘지가 유명 관광지인 유럽의 경우와 비교된다.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사는 것인가? 미워하나? 생(生)과 사(死), 생명현상의 (동전의) 앞면과 뒷면 아닌가. 죽음의 이름들이 낯설고 유장(悠長)한 느낌을 주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다. 종교의 죽음의 이름들은 상징적으로 더 경건하다. 왜 그래야 하느냐 물을 필요는 없다. ‘메멘토 모리’와 같은 뜻, 죽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로 삼으면 의미 있으리. 인생의 깊이일 터. 그러나 언론 등 공공의 언어는,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윤석열 정권의 교육홀대가 수인한도를 넘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한국교육이 갈 길을 잃고 병증이 깊어지게 생겼다. 우선 교육부 장관의 장기 공석상태부터 해결해야 한다. 사회부총리를 겸하는 중요부처 장관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지금의 정권상황은 전례 없는 일이다. 그래도 교육전문성이 없는 교육부 장관은 안 된다. 가까스로 한 달 재임했던 박순애 장관은 행정학 교수 출신이었다. 교육비전문가답게 매우 예민한 초등학교 입학연령 단축 안을 불쑥 내놨다가 교육계와 여론의 호된 뭇매를 맞고 사실상 인책 사퇴했다. 박순애 장관과 짝을 이뤘던 첫 교육부차관도 교육비전문가 행정관료 출신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무슨 심보로 비전문가 장차관에게 교육부를 맡겼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오만과 독선이 첫 장관경질사태를 초래하며 정권운영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전문가의 교육부장차관 임명을 두고 교육부 해체를 염두에 둔 의도적 인사조치라는 정권엄호 해석도 없지 않았다. 유초중등교육을 시도교육감에게 넘기고 국가교육위에 국가공통 기본교육과정을 넘겼으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등교육을 독립위원회에 넘겨주는 방식으로 교육부를 사실상 해체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헛소리다. 헌법이 요구하는 교육의 전문성은 교원의 전문성은 물론이고 교육당국의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육전문성이 없는 교육부장차관의 임명은 그 자체로 위헌적 요소가 강하다. 윤석열 정권이 교육부해체 구상을 갖고 있었다면 질서 있게 공론화과정을 거쳐야지 교육부와 인연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비전문가를 함부로 장차관으로 임명할 게 아니었다. 비전문가에 의한 교육부 신탁통치는 교육부 모독을 넘어 교육 모독이고 위험한 도박을 넘어 위헌적 만용이다. 그뿐 아니다. 지난 9월 3일 국가교육위원회를 위원장 포함 총 31명의 초미니 중앙행정기관으로 출범시키겠다는 직제령 안이 입법 예고된 사실도 윤석열 정권의 교육홀대의지를 더할 나위 없이 보여준다. 국가교육위는 백년대계 교육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에 토대를 두고 신설됐다. 중장기 교육발전계획과 국가교육과정 수립, 그리고 교육쟁점에 대한 공론화과정 진행과 사회적합의 증진이 주요업무다. 국가교육위의 초정권적 특성에 맞춰 위원구성에서도 최대한 정치색을 빼고 다양한 교육 당사자와 관계자들이 고르게 대표되도록 설계됐다. 비상임위원을 18인이나 두게 된 이유다. 윤석열 정권은 위원장과 상임위원 2인, 비상임위원 18인으로 구성된 국가교육위에 사무처장을 포함해서 28명의 사무처직원을 배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나마 기관운영 사무를 맡을 일반행정직이 17명이고 교육관련 업무를 수행할 교육전문직은 11명에 지나지 않는다. 윤석열 정권은 한마디로 국가교육위 안락사 직제령 안을 내놨다. 나는 20년 전 초대국가인권위원 시절 신생 국가인권위원회의 직제요구안을 놓고 당시 행자부와 힘겹게 줄다리기했던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사무처 28명 직제예고안을 접하고는 너무나 충격이 커서 할 말을 잃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명색이 대통령소속 독립 합의제중앙행정기관인데 사무처직원은 28명이 전부다. 교육의 미래설계와 사회적 합의라는 중대업무를 맡긴 신생 합의제중앙행정기관이 국 하나 없이 과만 셋이 있는 직원 28명의 초미니 사무처조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사무처직원이 28명이라면 서울교육청의 초등교육과 직원 수보다도 적고 대통령자문기구에 지나지 않던 국가교육회의 직원 수보다도 적다. 이런 초미니 대통령소속 합의제중앙행정기관은 일찍이 없었다. 단언컨대 직원 28명의 초소형 사무처조직으로는 국가교육위가 본격적으로 출범해도 어떤 일도 시늉내기 이상으로 하기 어렵다. 위원장과 상임위원이 고도의 사명감과 전문역량을 갖고 있더라도 사무처의 보좌와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업무수행이 크게 제한될 것이다. 18인의 비상임위원 중에도 적극적 활동의지를 가진 이가 더러 있겠지만 회의와 표결 참여 외에 어떤 일도 벌일 수 없을 것이다. 입법 예고된 총31명 직제령이 확정될 경우 국가교육위는 누구도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유명무실한 유령기관이 될 수밖에 없다. 실은 이것이 윤석열 정권이 속으로 바라마지 않는 국가교육위의 모습일 것이다. 국힘당 입장에서 국가교육위는 공수처와 더불어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귀태 국가기관이기 때문이다. 국가교육위를 최악의 상황에서 건지기 위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나? 당장 시급한 건 교수단체, 교사단체, 학부모단체, 학생단체, 교육감 등 교육주체들이 힘을 합쳐 현재의 국가교육위 고사 직제 안에 반대하는 여론의 압력을 조직하는 일이다. 이에 힘입어 곧 구성될 국가교육위가 첫 회의에서 합리적인 정원증원 요구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해서 대통령과 행안부 장관에게 제출하면 효과적일 것이다. 시일이 촉박한 걸 감안할 때 지금으로서는 국가교육위법을 제정한 국회와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나서 줘야 한다. 입법 예고된 직제령이 과연 국가교육위 입법취지에 맞는지를 관련 상임위에서 대통령실과 행안부 장관을 상대로 추궁하며 사무처직제 수정을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 공수처에 이어 국가교육위마저 유야무야한 군더더기로 전락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현인은 자신의 현재의 처지를 굳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의 법칙, 즉 사랑의 법칙의 수행은 어떠한 상태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군자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모든 것을 남에게서 찾는다. (공자) 나는 내 운명을 한탄하거나 핑계 삼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번, 신발이 없는데 그것을 살 돈마저 없었을 때, 나도 모르게 불평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무거운 마음으로 쿠파의 한 커다란 이슬람 회당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나는 발이 없는 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신발이 없을 뿐 멀쩡한 두 발을 가진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했다. 현자는 마음속에 하늘의 섭리를 의식하고 있어서, 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다. 멀리 가면 갈수록 정말 아는 것은 적어진다. 그러므로 현자는 여행을 하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은 알고, 사물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며, 직접 뛰어들지 않고도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노자) 자신의 처지에 불만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두 가지 방법으로 바꿀 수 있다. 즉 자신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개선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고 할 수 없지만 뒤의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에머슨) 자신의 사상은 손님처럼 대하고 자신의 욕망은 어린애처럼 대하라. (중국 속담) 인간은 종종 자신의 내부에 아무리 애써도 시간의 흐름 속에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불행할 때가 있다. (칼라일) 우리가 자신의 불완전한 사상이나 자신만만한 판단에서 잠시 떠나, 신 자신이 우리 마음속에서 얘기하는 목소리에 마음을 비우고 귀 기울이며, 말없는 가운데 오로지 신의 의지만 따를 수 있도록, 자신의 내부에 입과 마음의 완전한 침묵에 의한 정적의 세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롱펠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주위의 사정에 불만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면 느낄수록 예지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우리 불행의 근본 원인은 우리 자신을 모른 것입니다.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우리 자신을 업신여겼습니다. 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철학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관, 세계관이 없고, 있다면 남의 것을 빌려온 것이니 우리말로 발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던 글자도 잊어버렸고, 다시 필요를 느껴서 새로 지은 것이 겨우 지금부터 겨우 500년 전입니다. 물론 문화란 것은 서로 오가는 것이요, 완전한 의미의 고유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남의 것을 받아들여도 그 중심되는 것은 비교적 영구한 성격을 띠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삼고, 모든 것이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함석헌)/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1. 현대인의 별명 가운데 ‘10만분의 1초 휴먼(nano second human)이란 게 있습니다. 사물과 사건에 대한 집중력이 그만큼 단속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이 커뮤니케이션 과잉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legacy) 미디어와 디지털 미디어를 포함한 대중매체의 폭발적 증가와 정보 홍수가 일상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주위에 흘러넘치는 정보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생각하거나 이해관계가 큰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것이 그 때문이지요. 이걸 커뮤니케이션학에서는 선택적 주목(selective attention)이라 부릅니다. 선택적 주목이 가장 강한 대상이 광고입니다. 가격이 아주 낮거나 성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거나 또는 눈에 번쩍 띄는 아이디어가 없으면 주목 자체를 하지 않는 거지요. 광고 표현에서 충격성(impact)과 극단성(extremeness)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금기를 노골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주목을 이끌어내는 광고.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일부러 강한 흥미를 자극시키는 콘텐츠를 보통 쇼킹광고(shocking advertisement)라 부릅니다. 이런 유형의 크리에이티브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0년대부터입니다. 베네통(Benetton) 광고가 원조(元祖)지요. 패션 브랜드 베네통은 1955년 이탈리아 트레비소에서 태어났습니다. 루치아노 베네통이 동생들과 소규모 의류장사를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지요. 10년 후 벨루노에서 첫 번째 정식 매장을 오픈하고, 1969년이 되면 파리에서 첫 해외매장을 엽니다. 그리고 1979년이 되면 미국으로까지 진출하게 되지요. 오늘날 베네통은 전 세계 120여 개국 8000개 이상 매장에서 패션, 향수, 악세사리, 시계, 스포츠용품, 화장품을 판매하는 토탈 패션 브랜드입니다. 베네통을 지금 위치로 성장시킨 원동력은 시대를 앞서가는 다국적 마케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무기가 광고였지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로 토스카니(Oliviero Toscani)《그림 1》가 주역입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 광고인이었던 그는 광고인으로 불리는 것을 평생 거부했습니다. 자기는 예술을 추구하는 사진가라는 거지요. 실제로 토스카니의 창조 영역은 광고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1993년 베네통 그룹 안에 ‘파브리카(Fabrica)’라는 연구센터를 설립한 후 사진, 출판, TV 프로그램과 영화 제작 등의 폭넓은 활동을 펼쳤지요. 그 밖에도 자기 이름을 딴 와인회사, 올리브농장, 목장을 운영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세상에 깊이 각인시킨 것은 역시 광고였습니다. 2. 토스카니는 1942년 이탈리아 밀라노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신문에서 일하던 사진기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영국신문 '가디언(Guardian)'과 인터뷰에서 그는 “언제부터 사진에 관심이 생겼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태어날 때부터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예술가였어요. 누가 물어도 이렇게 대답하죠. 제 아버지가 일간지 사진기자였으니 저의 재능이 거기서 비롯됐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제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하죠. 저는 찍고 싶은 사진들을 찍어 왔어요. 원하는 세계에서 살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살았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으니까요.” 1965년 취리히미술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엘르', 'GQ' 등의 유명 잡지에 사진을 게재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립니다. 그가 세계적 주목을 끌게 된 출발점은 1984년부터 시작된 베네통의 광고 캠페인이었지요. 설립자 루치아노 베네통은 토스카니를 이탈리아 패션업계의 실력자 엘리오 피오루치(Elio Fiorucci)를 통해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캠페인의 구체적 전개와 내용을 일임해버립니다. 그만큼 믿었던 거지요. 토스카니는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상업적 광고를 만들면서도 한사코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처합니다. 그를 고용한 베네통 일가와의 관계를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관계에 비유했으니까요. 자기는 그저 예술을 추구할 뿐이고, 광고주는 그에 대한 비용을 광고를 통해 지불한다는 거였지요. 다음의 발언을 들어보세요. “역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예술작품이 결국 광고였어요. 이데올로기나 제품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모두 교황을 위해 일했어요. 그런 방식으로 교황은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나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말을 했다고 이 남자를 그저 철없는 예술 지상주의자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발언의 배후에 광고의 본질에 대한 정교한 관점이 숨어있기 때문이지요. 토스카니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스웨터의 소매는 두 개고, 울(wool)은 그냥 울이다. 제품은 대동소이하다. 차이는 커뮤니케이션이다.” 효능과 가격이 비슷비슷한 제품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현대 자본주의 시장. 이때 브랜드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제품력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광고를 통해 해당 브랜드의 독특하고 고유한 이미지를 창조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는 거지요. 3. 토스카니가 만든 첫 번째 베네통 광고는 아동복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첫 작품에서부터 벌써 독창성이 반짝반짝합니다. 아동복 광고인데도 아이 모델을 쓰지 않은 겁니다. 그 대신 테디베어(Teddy Bear) 인형을 등장시켜 독자의 주목과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상식의 허를 찌르는 아이디어의 귀재였습니다. 무엇보다 카피를 극도로 줄이고 비주얼 중심의 임팩트를 고집한 것이 특징입니다(사진가 출신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십 몇 년 동안 베네통 캠페인에 등장한 언어적 요소는 “United Colors of Benetton”이란 슬로건 딱 하나 뿐이었습니다. 인종과 종교 갈등, 차별과 폭력 같은 반목을 이겨내고 인류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오직 비주얼을 통해 풀어낸 거지요. 그가 사진으로만 승부를 건 것에는 마케팅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베네통 모(母) 회사의 자금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를 무대로 다국적 광고 캠페인을 펼쳐야 했지요. 이를 돌파할 유일한 방법이 사진을 통한 이미지 광고였던 겁니다. 언어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비주얼은 만국공통으로 이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토스카니가 국적과 언어를 불문하고 누가 봐도 쉽게 이해가 되는 쇼킹한 비주얼 스캔들(visual scandal)을 구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주목되는 건 그동안 어떤 광고에서도 쓰지 않던(못하던), 사회적 금기를 과감히 깨어 부시는 행보였습니다. 왜 이런 도전적 시도를 했을까요. 패션의류의 경우 비싸든 싸든 간에 옷의 본질적 기능은 동일합니다. 소비자들이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입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여러분도 그렇지요?) 토스카니는 ‘베네통’이 차별적이고 강력한 이미지를 지니지 못하면 쟁쟁한 경쟁 패션 브랜드를 제치고 세계 시장에 뿌리를 내리기 힘들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쇼킹광고 시리즈인 겁니다. 그는 한다하면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한번 방향을 결정하자 무섭게 밀어붙입니다. 4. 그러면 1990년대를 강타한 베네통 광고 캠페인을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할까요. 먼저 《그림 2》는 1991년 집행된 작품입니다. 침대 위에서 죽어가는 남자 주위에 가족들이 모여 슬퍼하고 있습니다. 설정이 아닙니다. 실제 장면을 사진에 담은 겁니다. 사회운동가였던 에이즈(AIDS) 환자 데이비드 커비(David Kirby)의 임종 직전 모습을 광고에 그대로 사용한 거지요.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인간의 죽음을 상업주의 도구로 삼았다는 점에서 특히 기독교계가 강한 분노와 비판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토스카니는 이런 반발을 대놓고 조롱합니다. 이듬해인 1992년 (보란 듯이) 종교적 금기를 더욱 파괴하는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이번에는 신부와 수녀가 키스를 하는 장면을 광고로 내보낸 겁니다《그림 3》.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한 반발이 터져나온 것은 당연한 일. 이 남자는 오히려 그 같은 논란을 즐깁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예술가니까. 세상의 상투적 규범을 깨트리는 예술행위를 하고 있는 건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거기에 덤으로 베네통 브랜드에 대한 관심과 주목을 극대화시키고 있는데 금상첨화가 따로 없지,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림 4》는 1992년의 보스니아 내전 시기에 나온 광고입니다. 전쟁터에서 총을 맞고 숨진 병사의 셔츠를 광고사진으로 그대로 옮긴 겁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계 주민 포함)와 세르비아 간 전쟁은 최대 30만 명이 숨진 20세기 후반 최악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했던지 보스니아에 ‘유럽의 킬링필드’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입니다. 그런 비극을 광고에 이용하다니! 다시 폭발하는 분노의 목소리에 토스카니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 작품은 보편적 인권 문제에 대한 대대적 환기를 위한 것이다!”설명이 그럴듯하지요? 문제는 아무리 광고라 해도 형식과 내용이 완전히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겁니다. 겉보기에 목적이 그럴싸해도 표현이 이정도 수준이면 불쾌감을 자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피를 쏟으며 죽어간 젊은 병사의 죽음을 악용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운 거지요. 5. 토스카니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극과 일탈을 즐기지만 언제까지나 그 런 충격을 감내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마약의 효과를 보세요. 처음에는 짜릿하고 자극적입니다. 하지만 내성이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자꾸 더 많은 양을 투약해야 합니다. 광고가 주는 자극도 다를 바가 없는 거지요. 상궤(常軌)를 벗어난 베네통의 크리에이티브가 일시적 주목을 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고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지요. 차별적 브랜드 이미지를 획득하려고 시작한 캠페인이 거꾸로 브랜드 이미지 자체를 경박하고 부담스럽게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네 글자가 딱 어울리는 상황이 된 거지요. 결정타는 2000년 1월에 터집니다. 잔혹한 범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실제 살인범의 얼굴을 버젓이 광고에 실은 겁니다《그림 5》. 도발과 금기 파괴에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계속, 일부러 넘어서면 평범한 사람들도 분노하게 됩니다. 유례를 찾기 힘든 비난이 터집니다. 미국을 시작으로 거센 불매 운동이 시작된 거지요. 사태가 걷잡을 수없이 확산되고 드디어는 치명상을 입히는 수준으로 발전합니다. 베네통 브랜드 전체 품목의 매출이 급격히 추락한 겁니다. 토스카니는 회사 안팎에서 궁지에 몰립니다. 결국 베네통 경영진이 결단을 내립니다. 캠페인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고 말이지요. 6. 토스카니가 퇴장하고 21세기가 시작된 후에도 베네통은 여전히 쇼킹 콘셉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출신 전설적 크리에이터 존 헤가티가 제작한 2012년 캠페인을 보실까요. ‘언헤이트(Unhate)' 즉 미워하지 말자, 라는 시리즈 광고입니다. 국가와 집단 간에 쌓인 증오를 풀고 하나가 되자는 슬로건이지요. 《그림 6》의 광고를 보십시오. 두 남자가 키스를 하고 있군요. 당시 남북한을 대표하던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입니다. 물론 현실의 모습은 아니고 포토샵으로 합성한 가상의 장면이지요. 베네통은 이밖에도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메르켈 독일 총리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이슬람 지도자 아흐메드 모하메드 엘 타예브,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와 이스라엘 수상 베냐민 네타냐후 등 오랜 앙숙 관계 지도자들이 키스하는 장면을 연속으로 내보냅니다.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쏟은 거지요. ‘Unhate’ 캠페인은 많은 국제광고제에서 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비자 정서에 불쾌한 낙인이 찍힌 브랜드는 회복이 어려운 거지요. 베네통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저가 싸구려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인지도라도 높았지만, 이제는 그것까지 잃은 상태로 말이지요. 엽기에 가까운 비주얼 쇼크로 주목을 이끌어낸 베네통 캠페인은 1990년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폭발적 주목에 비해 긍정적 브랜드 자산(brand equity) 획득에는 실패했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에 가까운 방식으로 브랜드를 알리는 데는 성공했지요. 문제는 소비자의 심리적 수용 한계를 넘어서면서 그것이 오히려 부정적 인지(認知)로 귀착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토스카니는 베네통 캠페인에서 손을 뗀 후에도 상호 관계를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설립자 루치아노 베네통이 82세의 나이로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토스카니도 다시 베네통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흘러간 강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그가 1990년대에 누리던 명성을 다시 되찾기는 어려웠지요. 귀환한 토스카니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베네통은 여전히 독특한 아우라가 부재한 그저 평범한 브랜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체계적 전략 없이 눈길 끄는 단발적 주목에만 의존한 베네통 광고의 비극을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이나 광고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과하면 무너지기 쉽다는 생생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미국의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시장 예상치를 웃돌며 미국발 금융 초긴축 움직임이 세계경제를 또다시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유럽의 최대 경제국인 독일의 경제장관은 지난 13일 중국을 겨냥해 무역의존도를 줄이겠다며 강경노선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글로벌 환경이 현란하게 돌아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오는 18일부터 영국(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참석)과 미국(유엔총회 등), 캐나다를 방문한다. 이번 해외일정은 지난 6월 스페인 나토 정상회의에 이어 두 번째다. 윤 대통령 앞에는 북핵 문제를 비롯해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한일간 강제동원 문제 등 굵직한 현안들이 즐비하다. 대통령실과 정부 관계자들은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국익 극대화와 의전 등에서 한치의 빈틈이 있어선 안된다. 글로벌 파장으로 국내 상황이 어느 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