댑싸리 /송진권 어린순은 나물해 먹지 좀 자라면 파릇파릇 보기 좋지 더 크면 비잉 둘러서 울타리 하지 늙어 쇠면 베어 말려서 빗자루 매지 빗자루 매서 마당 쓸지 마당 쓸다 심심해지면 빗자루에 거미줄 걷어다 잠자리채로 쓰지 -송진권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 문학동네 2014 댑싸리는 쓰임새가 많은 식물이다. 봄의 어린순은 나물, 여름의 울타리는 연둣빛의 상쾌함, 가을이면 진분홍의 단풍, 그 시기를 지나면 빗자루, 마당 쓸다 심심해지면 거미줄 감아 잠자리채, 열매는 약용으로. 어디든 발아가 잘 되어 싹이 올라올 무렵에 잡초 취급을 받아 뽑혀나가기 십상이다. 앙증맞은 키의 가느다란 가지에 수많은 줄기를 달고 이파리가 많아 작은 숲을 이룬다. 외계의 신비한 느낌을 풍겨 관상용으로 그만이다. /이미산 시인
우리 /강상기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다 나는 우리 밖이 그립다 우리에 갇히겠느냐 우리에서 벗어나겠느냐 내가 그리는 무늬가 세상을 바꾼다 -강상기 시집 <콩의 변증법>에서 인간은 본래 약한 존재다. 특히 강자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약하다. 그래서 외로울 때나 다급한 환경에 처하면 여지없이 우리라는 이름의 거대한 힘을 찾고 싶어진다. 그러나 사실 깊숙이 파고들어가다 보면 이 우리도 껍데기일 경우가 많다. 더 다급해지면 결국 개인으로 달아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서 나오는 힘도 힘이겠으나 나에게서 나오는 힘이 결국은 세상을 끌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종권(시인)
남남 /서지월 그대가 만약 등 돌리신다면 나는 나는 찢어진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모란 그늘에 시드는 적적한 시간 커피를 마시겠어요 마음이 배고프면 머언 山도 포개어져 보이는 법 욕심없이 일정한 거리에서 그대와 나를 사수하는 저 나무의 새 소리를 그대로 있게 하는 하늘이여 그대가 만약 등 돌리신다면 밤은 일찍 찾아들어 서로 다른 집의 목소리 방향이 각각 다른 바람 맞으며 사막에서 혹은 숲 속에서 서로 다른 별을 올려다 보겠지요 시를 쓰고 읽고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고독의 산물이든 영혼에 불을 당기는 일이든 간에. 사실, 시만을 위해 살아온 시인의 시선에 애정이 간다. 다들 고도화된 도시문명 속 그나마 편리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세상인데 어쩌자고 아직 그런 문명된 속을 떠 밀려나 있는 것 같은 현실이니 돌아보면 아득히 먼 길이다. /박병두(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능금 /윤태수 천(千)의 바람 만(萬)의 물이 그 속을 알까 베짱이 귀뚜라미 이슬이 알까 시리도록 푸르른 저 무변(無邊)에 피멍울로 박혀있는 한 점의 순수 -윤태수 시집 <그대에게 주고 싶은 노트>에서 수천 줄기 바람이 비록 키웠다 해도 한 알 능금의 속은 바람이 알 리가 없다. 수만 물줄기가 비록 젖을 먹여 키웠다 해도 한 알 능금의 속을 물이 알 리가 없다. 땅과 하늘과 세월이 제아무리 생명을 키웠다 해도 그들이 생명의 신비를 알 리가 없다. 생명의 순수는 신비롭기 짝이 없다.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장종권 시인
신호등 /김연근 진지한 하루 살았느냐고 신호등의 빨간불이 나를 세워놓고 묻는다 하루를 살았다는 건 내 인생의 하루를 떠나보내는 일 얼마나 온 걸까 살아 온 날은 셈이 뚜렷한데 지워 나가야 할 날 단 하루도 장담 못하면서 회귀본능은 가로등 불빛처럼 찬란하다 아침이면 지워질 집으로 가는 또 다른 길 --김연근 시집 ‘소안도 달빛물고기’(열린출판사,2014) 한 해의 끄트머리쯤 오면 문득 달력은 삶의 신호등이 된다. 시인은 세상의 신호등을 보며 문득 우리의 삶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리고 묻는다. 인생의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그 하루를 떠나보낸 이별의 신호였음을, 살아야 할 날이 곧 지워야할 날인 것을 깨닫고 살고 있는지 묻고 있다. 우리는 잘 지워냄으로 잘 살아져 가는 것은 아닐까? 잘 멈춤으로 잘 사라져가는 것는 아닐까? 출근길 신호등에서 다시금 자신에게 자꾸 묻게 된다. -김윤환 시인
타인 /정호승 내가 나의 타인인 줄 몰랐다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공연히 나를 힐끔 노려보고 가는 당신이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내가 내리기도 전에 먼저 타는 당신이 산을 오를 때마다 나보다 먼저 올라가버리는 산길이 꽃을 보러 갈 때마다 피지도 않고 먼저 지는 꽃들이 전생에서부터 아이들을 낳고 한집에 살면서 단 한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말하는 당신이 나의 타인인 줄 알았으나 내가 바로 당신의 타인인 줄 몰랐다 해가 지도록 내가 바로 나의 타인인 줄 몰랐다 -정호승 시집 ‘밥값’ 중 “당신”이라는 익명성을 벗어나 ‘나’라고 스스로 부르는 존재자의 출현, 즉 존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순간에 만나는 주체의 출현이 있을 때, 그를 두고 진정한 “나”의 출현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주체는 언제나 존재 소유로 인해 존재를 하나의 짐으로 짊어지게 된다. “주체인 나보다 앞서가는 산길이, 피지도 않고 지는 꽃들이 단 한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말하는 당신은 언제나 지금인 ‘나’이기도 하다./권오영 시인
음지 /윤승천 이따금 개들이 지나가면서 오줌을 갈기고 또 개 같은 사람들이 배설하고 지나가는 혹은 피해가는, 햇빛이 잘 안들고 습한곳 빈익빈(貧益貧)으로 뒤틀린 잡풀 몇포기 옹송거리고 있는 어떤 희망이나 꿈, 사랑일지라도 기약없이 더럽게 썩는 곳, 음지는 늘 음지가 될 수밖에 없는, 상대적 빈곤과 피폐함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밖에 없는 불의와 불평등, 기만과 권모술수로 가득찬 이즈음의 사회. 가진자의 논리는 항상 못가진 자의 논리보다 앞서가고, 지위가 높거나 기득권이 많은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고달픔을 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악한 사회구조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 정의롭고 청렴한 사람들, 순박하고 법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마음놓고 잘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돼야한다./박병두(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그가 사라졌다 /김영근 이제 그를 무어라 부를까 부를 일 없는데 고요가 오금을 찌르면 뒹구는 나뭇잎 이라 부를까 벤치의 휘파람소리 라 부를까 불현 듯 노을이 덮치면 붉은새발자국 이라고 반짝이며흘러가는물비늘 이라 부를 것인가 묶인 적 없는데 묶은 자들은 오리 끝에서 봄볕 달랑 길어낸다 그 속에 채워지지 않는 설렘 있어 부를 일 없지만 혹, 짓궂은눈빛 이라 불러도 좋을까 고요했지만천둥* 이라 불러도 될까 *아메리칸 인디언의 이름들 중 하나인 ‘고요한천둥’의 변형 -김영근 시집 ‘호퍼의 일상’/시와 세계 죽음은 대지에 우뚝 발 디딘 그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대체로 우울이거나 슬픔이거나 권태이거나 허무이거나 빈공간이거나 흘러간 강물이다. 시간의 흐름에 죽음의 두께는 얇아지고 삶에 충실하다보면 잠깐씩 잊히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고요해지면 ‘뒹구는 낙엽’ 속에 ‘휘파람 소리’에 ‘노을’ 속에 ‘바다 물비늘’ 결에 ‘짓궂은 눈빛’으로 살아난다. ‘채워지지 않는 설
그네가 그네를 탄다 /김길나 그네가 혼자서 그네를 탄다 아이가 그네에서 내렸으나 그네는 아이를 내려놓지 않는다 그네가 붙든 아이의 온기와 환한 기억으로 그네가 그네를 탄다 아이가 풀어놓은 푸른 바람에 실려 그네가 그네를 탄다 아이가 구름을 걷어놓고 간 해 아래서 햇발 동아줄을 잡고 그네가 그네를 탄다 동서남북의 분별을 떠난 그넷줄 사이를 새가 통과해 날아간다 시계추가 멈춘 시계에서 시간이 가고 있다 - 2014년 황금알 시인선 김길나 시집 <일탈의 순간>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이 떠난 놀이터마다 낙엽들이 친구들과 그네에 앉아 있다. 나는 모른 척 지나가지만 그들만의 은밀한 수다가 들린다. 친구가 없는 심심한 낙엽 한 잎이 그네를 타고 있다. 그 옆의 그네는 혼자 그네를 타고 그네는 그네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아이가 앉았던 「온기와 환한 기억으로 그네가 그네를 」탄다. 아이가 그네를 내려놓아도 그네는 여전히 아이를 태우고 흔들린다. 아이인 나는 그네를 타고 그네의 시간은 멈춰 있고 새는 날아가고 시간은 가고 있다. /김명은 시인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최근 이문재 시인이 발간한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을 읽고 있으면 이육사의 시 ‘절정’이 떠오를 때가 많다. 위태로운 백척간두에 혈혈단신으로 서서 사력을 다해 온갖 비바람을 막고 서 있는 투사 혹은 선지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나무’의 모든 것이 끝에서 비롯됐듯이 ‘끝이 시작’이라고 말한다. ‘끝’은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절망은 희망의, 슬픔은 기쁨의, 죽음은 삶의 도플갱어이다. 그래서 모든 끝에는 추락이 아닌 비상이 살고 있다. 그러니 문명과 자본의 아수라장을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여기’와 ‘정면&rs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