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촌 /김영롱 삼촌이 돌아가실 적에 나는 엉엉 울었다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울길래 따라 울었다 그러나 숟갈을 놓을 적에 일곱 개를 놓다가 여섯 개를 놓으니 가슴 속에서 눈물이 왈칵 나왔다 -국어시간에 시 읽기<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나라말> 아마 초등학생 아이의 글인 모양이다.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따라 울다가 잠시 생각을 해 보았으리라. 진짜 누가 죽었지? 죽는다는 건 무얼까? 어린 마음에 잔치 집이라 흥성거리는 많은 사람 틈에서 기분이 좋아 돌아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장례 끝나고 친척들도 모두 돌아간 어느 아침 문득 찾아들었을 빈자리에 슬픔이 북받쳐 왔을 것이다. 숟가락 고마운 줄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어본다. /조길성 시인
화폭 /양규남 오! 임이여 내 배 풍만하고, 흥나면 불리우는 임이여 내 외로울 적에도 생각키우는 임이여 그러나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기억같이 아득한 임이여 저만치 안개밭 속에 숨어있는 희미한 그림자 같은 임이여 오! 임이여 그리운 임이여 보랏빛 머금은 설화(雪花)속에서 피어나는 봄 같은 임이여 그대 가슴에 장미 한 아름 안겨주고 싶음이여 내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부르다가 갈, 임이여- 사람이 살아가면서 욕심을 가지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 오만과 욕심이 불타던 지난 시간들도 있었고, 고요한 긴 여운을 지내면서 아침에 보는 또 다른 일상을 보는 일들은 어제 오늘이 아니면서도 화폭에 담겨진 사색은 놀랍다. 글과 그림은 세월이 지나도 발전하지만 늙음과 젊음을 견주어 균형을 잡는 것은 예외다. 누군가 늙어서 난 무얼할까? 걱정이라고 말하면 그림을 권하기도 하고 서예를 권한다. 그림으로 말하면 활발하고 기교가 뀌어난 그림을 그리는 젊음에서, 나이가 들면 읽히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고 한다. 지금 가는 길, 어디에서 더 험난한 이정표를 만나 조우하게 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에 머리가 아닌 가슴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병두 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호마이카상 /김태정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모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하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 김명은 시인 / 김태정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시선 2004년) 서울 토박이 김태정 시인은 2004년『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첫 시집을 내고 서울을 떠났다. 홀로 해남 땅
볼록볼록 /신현정 과연 이 시각 안내견을 앞장세워 맹인 하나 어김없이 지나가는 이 시각 이 길을 발 디딜 때마다 해가 볼록볼록 달이 볼록볼록 별들이 볼록볼록 그리고 꽃송아리들이 볼록볼록 올라오는 보도블록으로 교체해주셨으면 한고 존경하는 시장님 갓 구워내 말랑말랑한 빵도 한 번쯤은 밟고 지나가게 해주셨으면 하고 시장님. - 신현정 <현대시학>』2009년 4월 며칠 전 어느 젊은 시각장애인이 용산역 전철승강장에서 철길로 떨어지는 사고가 났다. 3분동안이나 시간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혼자 불안에 떨다 결국 전동차에 치였다. 하루종일 눈 깜빡임도 없이 돌아가는 감시카메라가 있었지만 그것을 들여다 볼 눈이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지고 있던 그는 하반신 마비의 장애까지 안고 살아야 될지도 모른다. 볼록볼록하고 말랑말랑한 안전장치가 있었다면 그 젊은이는 불행한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는 곳곳이 안전하지 않은 것 투성이다. 경제가치만 최상의 덕목으로 내세워 사람들의 안전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아도 불안전한 것 투성이다. /이명희 시인
기습 /이경 간밤에 도둑이 들었다 칼로 가슴을 찌르고 잠을 몽땅 훔쳐 갔다 잡힐 놈이 아니다 어디 깊은 절간으로 숨어들어 석남꽃이나 피우고 있겠지 가을이다 -계간 <시와 시학> 2011년 가을호 중 해마다 나타나, 모르는 사이에 소중한 것들을 훔쳐 가는 도둑이 있다, 가장 귀한 보물을 가져가는데 잡힌 적 없다, 생활에 쫓겨 정신없이 살다보면 잃어버린 것이 무언지도 깨닫지 못한다, 어느 날 문득 텅 빈 가방들을 보며 잃어버린 목록을 작성해 본다. 생각나는 것보다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때 쯤 다시 나타나는 도둑, 그렇게 한 해를 야금야금 잃다보면 어느 날 남은 것이 없을 것인데, 누구한테 신고해야하나, 늘 한 수 위인 도둑을. /신명옥 시인
다섯살 월식 /박명숙 누군가 달빛을 조이고 있나 보다 엄마 등에 업혀 가던 다섯 살 그 달빛을 누군가 달빛을 감아 어린 목을 조이나 보다 시냇물 닮은 가늘디가는 그 밤의 엄마 목을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죽을 듯 매달리던 누군가 달빛에 묶어 먹어치우고 있나 보다 - 박명숙 시집‘은빛 소나기’(책만드는집) 중 다섯 살의 기억은 싸늘한 달빛에서 시작되었고 엄마 목을 죽어라 끌어안고 가던 그 밤은 여전히 화자 곁에 살아있다. 하지만 이런 기억은 오히려 따스한 이불처럼 몸을 감싸줄 지도 모른다. 왠지 고요한 밤엔 엄마를 떠올리며 잠을 청해도 좋겠다. /김휴 시인
낙화 /한분순 바람 하늬로 불어 점점이 묻어오는 것 온통 하늘을 가리고 마음을 덮는다 그 언제 뿌려둔 아픔을 다시 밟고 가는가.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겨울이 오고 있다. 머리를 맑게 하는 계절이 가을이다. 까마득 잊었던 사람, 오랫동안 챙기지 않던 많은 기억들이 달려온다. 사람의 일생도 씻은 듯 맑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어려운 것이다. 해마다 맞이하는 가을이지만 똑같은 가을은 되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은 더욱 깊고 생각은 더욱 짙다. 세상을 아름답게 간직하려 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가을이 가져다 준 선물이 바람 탓인가. 비록 무성한 잎을 떨구는 바람이더라도 그 바람으로 하여 설레는 가슴을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은 유난히 가을을 사랑한다. 언제 맞아도 반가울 수밖에 없는 가을, 길지 않은 삶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교훈이 되어 들려오는 듯하다. 가을이 저물고 있다 계획했던 일들을 그려본다./박병두 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멍게 /성윤석 멍게는 다 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 버린다. 어물전에선 머리 따윈 필요 없어. 중도매인 박 씨는 견습인 내 안경을 가리키고 나는 바다를 마시고 바다를 버리는 멍게의 입수공과 출수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지난 일이여, 나를 가만두지 말길. 거대한 입들이여. 허나 지금은 조용하길. 일몰인 지금은 좌판에 앉아 멍게를 파는 여자가 고무장갑을 벗고 저녁노을을 손바닥에 가만히 받아보는 시간 -성윤석 시집 ‘멍게’ / 문학과 지성사 반복되는 일상의 세상처럼 바다의 출렁임도 깊이도 알 수 없다. 바다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김이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그저 출렁일 뿐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관계들은, 그 속에서 끝없이 입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면서 각자 쏟아낸 말들 속에 섞여 버린다. 멍게의 몸이 물살을 견디느라 울퉁불퉁해진 표면을 가진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갛고 영롱한 속살을 내면에 오롯이 품고 있는 것처럼 가끔은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 볼 일이다. /권오영시인
가을 치악산 /정치산 오늘은 마음 잡아당기는 가을 속으로 주섬주섬 떠나지 못한 것들을 챙겨 한껏 가을 속에 안겨 봅니다. 가속 붙은 시간을 쫓아 허우적거리며 지나온 답답했던 시간들을 불어오는 바람에 실어 보내고, 당신께 보내는 마음 한 자락 물봉선으로 피워 가을 치악에 걸어둡니다. 다가올 듯 다가오지 못하고, 다가갈 듯 다가가지 못하는 그 행간에서 당신께 보내는 안부, 행여 지나는 길에 보았다면 보름달로 커져가는 궁금증을 그믐달로 화답해주길, 작은 몸짓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바람으로 화답해주길, 다가서지도 다가가지도 못해 좁혀질 수 없는 거기에 오늘은 눈부시게 파란 하늘만 시리게 빛나고 있습니다. -정치산 시집 〈바람난 치악산〉에서 화려한 여름을 지나 혹독한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 가을이 있다. 계절이 성장하다가 주춤거리며 조락하는 시기라서 스산하다. 추수의 계절로 이해하면 풍성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열매를 맺는 시기라서 정리하는 느낌이 강한 계절이다. 내리막길 인생이 처연하게 보이게 된다. 미처 주지 못한 정이 안타깝고 다가서지 못한 바보스러움이 후회로 밀려온다. 누군가에게라도 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물봉선처럼 피어오른다. 그믐달 만큼의 신호라도 있으면야…
이름뒤에 숨은 것들 /최광임 그러므로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헤어짐에도 제목이 없다 오다가다 만난 것들끼리는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다행이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에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피고 꽃지고, 수런수런 밤을 건너는 지금 -최광임시집 『도요새 요리』(현대시시인선/북인, 2013) 이름은 ‘이르다’의 명사형이다. 즉 이름에는 이미 어디엔가 닿을 목적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만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인은 만남에도 헤어짐에도 어떤 목적이나 제목도 달지 않아야함을 노래한다. 하늘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