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 장날 /윤희상 광식이네 소 팔러 가는 날입니다 서둘러서 아침밥을 먹고 우리는 광식이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모두 야단이었습니다 마당에서 광식이 엄마가 소의 고삐를 붙잡고 소에게 억지로 여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소는 더 먹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여물을 다 먹은 소는 마치 새끼를 밴 것처럼 배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제 강식이 아버지가 소를 이끌고 문을 나서는데 광식이 엄마가 소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길에는 아카시아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소는 오줌을 싸며 걷고 우리는 그 길을 뒤따라 걸었습니다 읍내에 이르러 광식이 아버지와 소는 우시장으로 가고 우리는 학교로 갔습니다 그날 광식이 아버지는 술에 취했습니다 우리는 아카시아꽃 향에 취했습니다 모두 흔들렸습니다 - 윤희상,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시인선 057 흰색 소형자동차는 꼬마 붕붕이같이 귀엽고 편한 존재였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혹은 출근하는 길에 해대는 푸념을 아무소리 없이 들어주던 자동차, 나의 작은 세계를 지켜주던 자동차를 은근히 사랑하였다. 남들이 가진 좋은 자동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십칠년 동안 나를 출퇴근시켜주고 간혹 다른 도시로
옛 향로 앞에서 /김광규 그때라고 지금과 달랐겠느냐 누구나 때깔 곱게 잘 빠진 예쁜 향로를 좋아하고 소중히 간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팔백년이 흘러간 뒤 그때의 구름과 연꽃을 보여 주는 것을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청자상감 유개향로가 아니다 굽다가 터지고 일그러져 향불 한번 못 피우고 어느 도공의 집 헛간에서 발길에 채이며 뒹굴었던 바로 이 못생긴 사각 향로 하나가 그 오랜 세월을 견디며 오늘까지 아 땅에 살아 남아 찌그러진 모습 속에 고려의 하늘을 담고 있구나 먼 거리를 운전하면서 필자의 운전속도는 100㎞를 달린다. 시대적인 문명은 시간과 거리의 단축을 이룩해 놓았다. 세월 뒤로 보면 교통문제로 거리에서 소비하는 시간이 지금보다 많았는데도 여유가 여전히 없다. 거리를 걷다가도 그윽한 색감을 보고, 환경을 마주하고 쉬는 여유가 있었다. 현실은 조용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바라보고 사색에 잠긴 일들이 어렵다. 시인이 완벽한 예술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고려청자 앞에서 많은 시간들을 같이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살아가다 보면 볼품없는 사물들이 돌연 나를 감동시킨다. 살아온 시간들은 무엇이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이 詩에서 살며시 묻고 있
종점다방 /권선희 그 다방 손님 열에 일곱은 아내가 열에 다섯은 아내와 이빨이 열에 셋은 아내와 이빨과 손가락 없이 비린내 나는 포구에 붙어 퇴화를 꿈꾸는 종점 -권선희시집 〈구룡포 간다 / 애지〉 구룡포 파도소리를 닮아 목소리가 걸걸한 시인이다. 같이 앉아 탁배기라도 놓고 있으면 내 가슴에 맺혔던 모든 말들이 스르르 물결에 녹아버릴 듯싶다. 쓸쓸한 시다. 이 고단한 삶들을 어쩔 것인가. 물고기가 들끓던 날들이 있었다. 만선의 기쁨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퇴락해 게딱지처럼 납작 엎드린 삶들이 커피 한잔에 의지하는 곳, 없는 아내와 빠진 이빨과 빈 손가락을 드나드는 바닷바람 막아주는 종점다방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다방이 아닐까. /조길성 시인
비문증 /전건호 소용돌이치는 내 마음을 파르르 떨며 들여다보는 비행체 가만히 들여다보면 방울새 같고 잊지 못할 눈동자 같은 거라 어느 가슴속에도 둥지 한 번 틀지 못하는 나를 뚫어져라 관찰하는 새야 가늠할 길 없는 마음속 어떤 기류를 기다리는 거니 가슴속 타오르는 불꽃 허공의 뭇별로 타전하는 새야 얼마나 속을 태워야 검댕이 슬어가는 늑골 아래 진흙집 올릴 수 있겠니 -전건호 시집 〈슬픈 묘지〉, 발견 비문증이란 시야에 작은 점 같은 것이 보여 마치 눈앞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지는 증상을 말한다. 경험상 매우 성가신 현상이다. 하지만 시인은 ‘소용돌이치는 내 마음을/ 파르르 떨며 들여다보는 비행체’로,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방울새’ 같다고, ‘잊지 못할 눈동자’ 같다고 말한다. 눈만 뜨면 내 눈 앞에서 뚫어져라 나를 관찰하는 새가 있다! 는 상상. 스스로 만들어낸 나의 새는 내 안의 무엇을 읽어내려는 것일까? 시인은 가슴속 타오르는 불꽃을 뭇별에게 타전함으로써 욕망하는 인간의 쓸쓸한 염원을 드러낸다. /이미산 시인
꿈속의 생시 /윤의섭 내가 이 해안에 있는 건 파도에 잠을 깬 수억 모래알 중 어느 한 알갱이가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듯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점점 선명해지는 수평선의 아련한 일몰 언젠가 여기 와봤던가 그 후로도 내게 생이 있었던가 내가 이 산길을 더듬어 오르는 건 흐드러진 저 유채꽃 어느 수줍은 처녀 같은 꽃술이 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처녀지를 밟는다 꿈에서 추방된 자들의 행렬이 산 아래로 보이기 시 작한다 문득 한적한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다는 계속해서 태양을 삼킨다 하루에도 밤은 두 번 올 수 있다 -시집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관계란 어디에서 오는가. 시인이 해안에 있는 이유는 수많은 모래 중 어느 한 알이 시인을 기억하기 때문이란다. 모래란 시인이 전생에 가졌던 영혼의 편린일 수 있고 손톱일 수 있고 사랑했던 한 사람의 이름일 수 있다. 이것을 계기로 바다와 바닷가와 해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시인은 모래 한 알이란 전생의 동굴로 들어가 전생을 반추한다. 현재와 미래, 사와 생이 하나로 통한다. 이것이 이 시인이 추구해 온 시세계이다. 우리가 모든 사물과 주위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모색하는 것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시집 〈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 사람과 사람사이에 섬이 있다고, 그 섬에 가고 싶다던 시인이 섬을 떠나 육지로 올라 온 모양이다. 이제 가슴 두근거리며 사람을 만나러 간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지니고 오나, 부서지기 쉬운 사람이며 그 갈피를 더듬어 온, 바람에 기대어 보고픈 사람이다. 시인은 아직도 사람과 섬 사이에 있다. 어마어마한 가능성은 남겨놓고 있으나 사람의 일생을 온전히 받아 안기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되묻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길성 시인
그리움 /문충성 언제였을까 내 눈물 속에 가시가 자라기 시작한 것은 그리움이 깊이에 꽂혀 가시는 치유할 수가 없는 병 만들고 눈물은 아프다 이미 대낮에도 흐린 해 가려 컴컴하구나 욕망이 가지 끝에서 흔들리는 바람이여 짭짤한 눈물 냄새를 맛보렴 눈물이 흔들리는 새벽 새소리도 죽어 있구나 어느새 가시는 자라나 나를 찌르는 절망이여 녹슨 칼이 된다 컴컴한 길이 된다 시인과 필자는 전화 인연이었다. 사람냄새가 나는 따스한 시인이다. 제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을 때이니 시간이 이렇게 유수하게 흘렀다. 아들의 싸움에서 패배한 현실과 추억을 더듬는 시이다. 불량배들로 보이는 이들에게, 아들의 아픈 눈을 보면서 부모로서 가시가 돋아난 듯 아픈 눈물이 많이 고였을 시인을 생각해본다. 잊지 못할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필자도 초등학교 때 싸움질로 인해 넘어져 병에 찔린 흔적이 너무 깊은 탓인지 지금도 추억을 울렁이게 한다. 입시라는 관문에서 허덕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불행이다. 가여운 일들이 어디 이뿐이랴 모두 우리 탓인데 누구를 탓하겠냐고 시인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박병두 시인·수원영화협회장
빈집 /김은아 뿔뿔이 흩어진 주인 떠난 흔적만이 무성하게 마당에서 자란다 웅크린 채 졸고 있는 시간들 옆에 돌담 옆 감나무 꽃 필 날 기다리고 이파리에 걸린 바람 한 줌 살랑살랑 흔들린다 우직하게 자리 지키던 빈 바지랑대 위에 빨래처럼 거미줄만 햇볕에 말라가고 해질녘의 하늘은 시리도록 퍼렇다 -김은아 시집 〈흔들리는 햇살〉에서 농촌이 비어가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도시로 줄지어 떠나는 바람에 고향마을은 빈집 투성이가 되어가고 시골학교는 학생 수가 줄다 못해 폐교되는 사례도 많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잡초가 무성하고 거미줄로 가득하다. 벽체는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지붕 역시 천천히 꺼져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들의 고향이 무너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바라보려면 시골 마을을 한번만 돌아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성싶다. 그래도 빈집 마당의 감나무에는 변함없이 꽃이 피어서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 언젠가는 우리들의 고향도 새로운 모습으로 소생이 가능하리라. /장종권 시인
은행나무 /박형권 사람 안 들기 시작한 방에 낙엽이 수북하다 나는 밥할 줄 모르고, 낙엽 한 줌 쥐여주면 햄버거 한개 주는 세상은 왜 오지 않나 낙엽 한 잎 잘 말려서 그녀에게 보내면 없는 나에게 시집도 온다는데 낙엽 주고 밥 달라고 하면 왜 뺨 맞나 낙엽 쓸어담아 은행 가서 낙엽통장 만들어달라 해야겠다 내년에는 이자가 붙어 눈도 펑펑 내리겠지 그러니까 젠장, 이 깔깔한 돈 세상에는 처음부터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낙엽 주워 핸드백에 넣는 네 손 참 곱다 밥 사먹어라 -시집 ‘전당포는 항구다’(창비, 2013)에서 곧 가을이 오겠지요. 그러면 거리거리 온통 은행나무 잎으로 노랗게 뒤덮이겠지요. 나뭇잎이 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세속적일까요. 하지만 세상은 가혹합니다. 돈이 없으면 굶기 일쑤고 나아가 돈 없이 밥 달라면 뺨을 맞을 겁니다. 세상이치가 그렇지요. 그런데 시인은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네요. 은행나무 잎을 주고 끼니를 때우고 은행나무 잎을 건네고 사랑을 이루었지 않느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시절이 있었나요? 아주 오래됐지만 함께 먹거리를 나누고 돈보다는 사람 됨됨이를 보고 가족을 이루
멍에 /김재기 콩에서 태어나 넝쿨로 뻗지 못하고 머리로 하루를 여는 콩나물 같은 당신에게 세상은 콩나물시루다 켜켜이 눌러앉은 시루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꼿꼿하게 위로만 솟아오르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는 당신은 타고난 극단주의 신봉자다 발 디딜 틈 없는 콩나물버스를 타고 아침을 여는 여린 콩나물이 빳빳한 콩나물 사이에 끼여 허리가 부러졌다 티격태격 밀고 당기며 지내는 어둡고 빽빽한 시루 서로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틴다 꺾지 못하는 허리가 무겁다. -계간 〈시와 사람〉 2014년 봄호 콩나물시루 속 같은 현대인의 삶, 넝쿨을 뻗지 못하고 허리가 부러질 듯 위로만 솟아오르는, 콩나물 하나로 비유되는 우리의 삶은 멍에인지 모른다. 존엄한 인간의 자존심에 손상되는.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삶’의 신봉자이므로 거뜬히 이겨낼 준비가 되어있다. 두 팔을 씩씩하게 뻗으며 힘찬 하루를 시작한다. ‘재미없는 천국’의 무료함 대신 ‘재미있는 지옥’을 기꺼이 선택할 것이므로. /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