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안도현 젖은 길과 마른 지붕, 우는 말과 울지 않는 바퀴, 쓰러지는 나무와 일어서는 눈보라, 취하는 술과 취하지 않는 비탈, 납작한 빵과 두꺼운 가난, 아픈 동생과 아프지 않은 약, 가까운 하느님과 먼 총소리, 있는 군인과 없는 국경, 없는 아버지 산 너머 아버지를 넘어, 가는 소년 - 안도현 시집 <북항/문학동네 2012> 쓸쓸하다. 동생은 아픈데 약은 아무 표정이 없다. 병원에 가 본 사람은 알지 그 무표정한 운명들이 제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있는 모습을, 아프다. 세계 도처에서 총소리는 떠들썩한데 책임지는 놈은 없고 무기는 다 어디서 조달되는지 말은 가자고 우는데 바퀴는 울지 않는 참담한 괴리, 소년은 넘어서 가지만 아버지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만 무성한 언덕이 잇닿아 있을 뿐 가도 가도 끝없는 젖은 길과 마른 지붕들, 슬프다 같이 걷고 있는 우리네 자화상이다. /조길성 시인
무제無題 /김용균 하늘과 바다가 처음 만나 수평선을 이루었다. 하늘도 바다도 끝없는 쪽빛이다. 하늘의 설레임이 바다를 물들였는가. 바다의 수줍음이 하늘로 번졌는가. 이보다 더 뜨거운 포옹이 세상에 또 있으랴. - 김용균 시집 <낙타의 눈>에서 이율곡의 ‘화석정’이라는 시에 이런 시구가 보인다.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멀리 강물은 하늘과 이어져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좇아 붉고나. 바다 끝이 하늘과 만나면 하늘처럼 푸르다. 이럴 경우에 수평선은 분리선이 아니라 만나는 곳이 된다. 하늘과 바다의 만남이 보통의 만남이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이 만남을 남녀 간의 뜨거운 만남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늘은 바다라는 여인을 만나 가슴이 마냥 설렌다. 바다는 하늘이라는 사내를 만나 수줍기 짝이 없다. 그래서 수평선은 차가운 분리선이 아니라 뜨거운 만남의 장인 것이다. 결국 하나 되는 자연의 합일이 아름다운 세계를 연출해낸다는 것이다. /장종권 시인
기일忌日 /정운희 12월의 억새는 바람에 잠들었다 강가에 박힌 돌에선 별 냄새가 난다 아무도 다녀간 흔적이 없는 평면의 바닥 강 건너 묶여 있는 배 한 척 그 풍경 속으로 건너갈 수 없어 돌멩이만 만지작거린다 네모지거나 굽이쳤거나 옛집을 떠돌던 혼령의 이빨들 노래할 수 없는 시간을 물고 있다 물의 주름이 잡힌다. 고요는 또 다른 풍경으로 곁을 내준다 나의 안부를 전하고 싶어 큰 돌멩이 힘껏 던져본다 빈 가지를 지키고 있던 새들이 날아오른다 제상에 소복했던 흰밥에 새 발자국 난다 정박한 배 내부 속으로 흐르는 달빛 그곳에도 그리운 것들이 있어 별처럼 쏟아지는 노을을 쥐었다 놓는다 억새풀에 베인 자국처럼 강가에 피멍이 드러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오 년째 되는 날이다 - 시집 ‘안녕, 딜레마’ / 푸른사상 죽은 자를 기억하는 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만이 존재하는 忌日. 고인에 대한 그리움은 어디까지 전달되는 것일까. 살아남은 자는 그저 “돌멩이만 만지작거리”거나 “돌멩이를 힘껏 던져”보는 정도의 행위가 고작이다. 물은 하염없이 주름을 잡고 고요는 조용히 곁을 내줄 뿐&helli
떨어진 꽃 하나를 줍다 /조창환 떨어진 꽃 하나를 주워 들여다본다 밟히지 않은 꽃잎 몇 개는 나긋나긋하다 꽃잎 하나를 따서 가만히 비벼보면 병아리 심장 같은 것이 팔딱팔딱 숨쉬는 소리 따뜻하고, 손가락 끄트머리가 아득하다 안개 속의 섬처럼, 혹은 호수에 잠긴 절 그림자처럼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 시인의 감각은 예민하다. 생명의 부스럭거림이나 호흡이나 맥박소리를 다 듣는다. 떨어진 꽃잎이 끊임없이 생명의 용두질하는 소리를 다 듣는다. 우레 소리처럼 크게 듣는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상징이 아니다. 시인은 생명의 측근으로, 생명의 파수꾼으로,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가장 큰 사랑으로 그들 곁에 머무르고 있다. 떨어진 꽃잎은 몰락의 길 초입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꽃잎에게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다는 메시지이자 부활의 입김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끝났다고 하는 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잎 뾰족이 내밀면서 살아가리라는 희망마저 안겨준다. 늘 좋은 시로 감동을 던져주는 시인의 눈이 부럽다. /김왕노 시인
혼잣말 /정운희 목욕하는 내 옆자리의 여자 중얼중얼 날아오르네 중얼중얼 돌에 넘어지거나 중얼중얼 유리창을 통과하거나 쫓기거나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는 여자를 보네 발에 걸려 넘어진 촛불처럼, 잘못 건드린 농담인 듯 실을 뽑아내는 어둠 속 거미의 자세로 쉼 없이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네 곧 꺼지고 다시 부활하는 알 수 없는 세상의 고요한 외침을 보네 모두가 흘낏거리는 죽은 별들을 장황하게 쏟아내고 있네 고개를 끄덕이고 허공을 찌르기도 하면서 그녀의 몸 속 저장된 칩 속에는 꽃들이 충돌을 하거나 집 나간 고양이가 내걸리듯 오른쪽 귀가 먹은 금붕어의 한낮이 있고 사랑을 놓친 봄날이 피어나네 - 정운희 시집 『안녕, 딜레마』/푸른사상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삶을 영위한다. 눈빛 교환하며 대화하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에는 모두의 삶이 너무 바쁘다. 바빠서 외로움을 잊고 살 수도 있겠지만 마음 기저에는 사회적 동물의 유전인자가 있어 혼자인 모두는 외롭다. 핸드폰을 꺼내 SNS로, 인터넷 기사 검색으로 사회와의 소통을 모색한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혼잣말을 한다. 외롭기 때문에 자기 속의 자기를 꺼내 대화한다. ‘거미가 실을 뽑듯&rsqu
꽁치를 굽다 /이희숙 버튼을 꼭 누르자 팔등신 미인들이 찜질방에 누운 듯 수다를 떨고 있다 한 끼의 성찬을 위해 노릇노릇 익어간다 눈대중 그것만으로 간 맞춰 살기까지 등 돌리고 누운 적 한두 번이었던가 무언의 눈빛만으로 깊은 속내 알기까지 -‘김종삼시전집’(나남출판사, 2005)에서 요즘 평화로운 생활을 맛보기 힘든 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박하고 담백한 시 한 편을 내어 보았습니다. 인공조미료처럼 혀를 내두르게 하는 비유는 없습니다. 미혹하여 미지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낯설음도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게 하여 혼몽하게 만드는 교술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노릇노릇 구어 낸 꽁치 살점을 조심스레 덜어 내어 음미할 뿐입니다. 한 끼 밥을 먹더라도 요란하지 않게 마음 맞는 사람 앞에 앉혀 놓고 도란도란 속삭이고 싶습니다. 시인은 ‘등 돌리고 누운 적 한두 번’ 아니었기에 애증의 세월을 거친 사람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무언의 눈빛’으로 소통하는 경지에 올라있습니다. 시인처럼 ‘맞춰 살’면 될까요.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만큼 공감
강 /조경숙 강가에서 사람을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낮아지지 않고서는 한 곳에 닿을 수 없는 길 아래로 흐르면 결국은 한 곳에서 만난다 기다린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 -조경숙 시집 <절벽의 귀>에서 인생이 아무리 짧다고 해도 한 인간에게는 평생이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산다는 것은 강물이 유유히 흘러 바다에 이르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는 동안 세상의 곳곳을 지나면서 그 변화하는 모습도 다양할 것이다. 멈출 수는 없다. 끝내는 바다에 이르러야 생명이 끝난다. 어쨌거나 강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인생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기다림도 마찬가지로 인생이다.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이루어질 일은 없다. 역류가 되어서도 이루어질 일이 없다. 낮은 자세로 평화로운 꿈을 꾸어야 기다림도 아름답다./장종권 시인
절망의 힘 /조동례 비에 젖는 참나리꽃 한 송이 쓰러지지 말라고 흔들리지 말라고 젖은 꽃 안아 지주대를 묶는데 꽃이 무겁다 빗속에서 바람 속에서 삶을 지탱하는 속박이여 흔들려야 할 때 흔들리지 않는 것 쓰러져야 할 때 쓰러지지 않는 것 모두가 절망이다 몸이 묶여도 마음 떠난 삶이라면 흔들려야 할 때 흔들리고 쓰러져야 할 때 쓰러져라 그리하여 절망은 절망하라 절망의 힘으로 자유로워라 - 조동례,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 삶창시선 2013 미래의 바람으로 미뤄두고 바라보는 희망은 미래가 현재가 될 즈음에도 희망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또 다른 희망을 꿈꾸느라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삶을 유보시키지 않고 거침없이 아낌없이 지금을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느긋하지가 않다. 쓰러지지 말라고 추스르고 흔들리지 말라고 끊임없이 다잡는다. 내일을 위해 흔들리지 않으려 버티고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다가 더 많은 고통과 아픔을 가져야 하는 허방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진정 자유롭기 위해 흔들리고 쓰러지지 못한다. 절망하지 못한다. 절망의 힘으로 절망을 넘어서야 자유로울 수 있다. 절망을 넘어선 희망이 이루어지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어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
호두 /이진희 무리 중 가장 힘센 수컷의 뿔 그 슬프고도 커다란 눈동자가 벽에 걸려 있을 때 사랑이 시작되기도 하는 법 눈보라, 눈보라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는 새벽 기어이 혼자서 오두막을 떠난 해묵은 눈 위의 무거운 발자국 나와 깍지 낀 손을 흔들며 거리를 공원을 어두운 골목을 거닌 적 있었지 불빛이 반사된 겨울밤의 까만 창문처럼 반짝이며 웃기도 했어 봄꽃이 거의 질 무렵에야 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단단하기만 해서 쉽게 부서졌다는 것을 -이진희 시집 『실비아 수수께끼』/삶창 사랑의 유통기한이 한 3년쯤 된다고 했나? 우연히 액자를 벽에 걸듯 처음 사랑이 찾아오고 그 사랑 호두같이 단단해 망치라는 불가항력이 타격해도 절대 깨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깍지 낀 손 놓지 않고 긴 골목을 걷듯 인생을 영원히 함께 걸을 것 같기도 한 그 마음, 그러나 처음의 단단한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문득 깨닫는다. 긴 추위의 고통이 꽃이 되듯 계절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마음도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단단해서 더 쉽게 부서진다는 것을. /성향숙 시인
늦봄 못골2 /송진권 여가 워디여 까치둥우리 머리 매만지며 고대 가겄던 냥반이 시난고난 살아나서는 정신도 온전치 못한 이가 뜰팡에 주저앉아 꽃구경 헌다고 속치마 바람으로 흙더버기 되어서는 무꽃에 나비 날아와 엉기는 시상천지 언제나 또 와보겄냐 고와라 고와라 쭈그려앉아 족두리 위에 앉아 팔랑대는 나비거치 나부대는디 파르르 꽃잎 지는 저 워디메서 저니들이 다 뭐라는겨 꽃잎 속에 섞여가지구 저니들이 다 뭐라는겨 가자구 가자구 신발 속에도 봄볕 낙낙하니 신발 신구 따라나스라구 큰애기 적 바구니 끼고 나물 뜯으러 가던 날거치 거기 가면 다들 볼 거인디 이쁘게 하구 가야햐 주름 깊은 얼굴에 분을 찍으며 아끼던 치마저고리 꺼내놓고 야야 이쟈 갈란다 신발 신고 구부정히 가다가 어드멘가서 제 살던 대를 돌아보드끼 - 송진권 시집 ‘자라는 돌’/ 창작과 비평 송진권 시인의 시집은 한 번 잡으면 단숨에 읽어내려간다. 쉽게 읽히면서 가슴 찡하게 와 닿는 울림이 있다. 우리가 잊고 지낸 시간을 되짚어줌으로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된 할머니 어머니 이웃들과의 시간여행을 함께 한다. 특히 맛깔진 충청도 사투리가 해학을 빛내며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못골 연작을 비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