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카메라 /정연홍 사람들마다 셔터 소리가 난다 렌즈가 보이는 곳마다 찰칵찰칵 사진기 터지는 소리 눈꺼풀 닫혔다 열리는 소리 빛이 조리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 조이고 풀어내는 동공의 깊이로 희미해졌다가 밝아지는 세상의 심도 5분의 1포로 찍히는 세상은 슬로우 모션 동영상 500분의 1초로 찍히는 세상은 돌발 영상 찰칵찰칵 지구를 돌리며 찍어대는 소리 세상을 만들어내는 소리 누구나 카메라 한 대씩 화경처럼 이마에 달고 서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정연홍시집 『세상을 박음질하다』/푸른사상 시인은 확대경이나 청진기를 들지 않고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듣는다. 촉수가 예민하다. 시인에 의하면 눈을 깜빡이는 것은 세상을 찍는 행위이다. 세상의 온갖 소리들은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소리이다. 세상은 각자가 찍은 이미지대로 흘러간다. 지구를 굴린다. 그 이미지로 너와 내가 소통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가 소통되고 더 나아가 내가 우주와 소통한다. ‘서로 다른 이미지’가 다툼이나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더불어 온갖 아름답고 훈훈한 풍경이 묘사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세상
웃는 얼굴 /강인한 변기가 살아 있다, 이 밤에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변기 저 혼자 클클클 웃는 소리, 부글부글 용암이 솟구치듯 이따금씩 내 머릿속을 헤집고 나와 불쑥 내지르는 주먹. 휩쓸어 끌어들이는 소용돌이 물살 속에 너도 들어오라고 클클클 기분 나쁘게 웃는 소리. - 강인한 시집 『강변북로』(시로여는세상, 2012) 가끔 화가 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불편한 장면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들,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 말이지요. 변기가 비웃듯이 기분 나쁘게 웃는 소리를 읽으면서 세상에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 조금 속이 나아질 것 같아요. 마치 볼 일을 다 보고 변기의 물을 내리는 것처럼요. 사는 것이 팍팍한 오늘입니다. 기죽어 사는 일이 일상이 돼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가끔 팽팽하게 살아봐요. 비웃는 웃음이 많아도 불쑥 한 번 주먹을 던져요. 시를 오래 쓴 아름다운 시인이 이야기하잖아요. 명쾌하게./유현아 시인…
싶을 때가 있다 /이초우 가끔 나는, 나를 잠시 보관할 길이 없을까 하고 한참 두리번거릴 때가 있다 내가 너무 무거워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 운명 같은 나를 버릴 수야 있겠냐만 꽤 귀찮아진 나를 며칠 간 보관했다가 돌아와 찾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무게나 부피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별로 크지는 않을 것 같아 지하철 역사 보관함 같은 곳에다 지친 내 영혼 하얀 보자기에 싸서 보관 좀 해 두고 싶을 때가 있다 -이초우 시집 ‘웜홀 여행법’ / 천년의 시작 버리기는 아깝고, 끌고 다니자니 무겁고 귀찮은 것들 잠시 넣어두는, 보관함은 얼마나 편리한 공간인가. 더구나 자신이 귀찮아질 때, 스스로 걸어가 스스로의 몸이나 영혼을 잠시 보관할 수 있다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열쇠를 꼭 잠그고. 몸 없는 영혼이 되어, 혹은 영혼 없는 몸이 되어 천지사방을 돌아다니는 기분은 어떨까? 시인의 기발한 발상에 잠시 행복하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넣었다 꺼냈다 하는 영혼이라, ……. 그때 삶은 비로소 행복해질까? /이미산 시인
코스모스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김사인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작과 비평 2006>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아들이다. 딸이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고향 쪽을 향해 흔들린다. 나이 들면 들수록 고향은 한해만큼씩 멀어져간다. 우리들의 고향도 흔들리며 멀어져간다. 이러다 영원히 고향에 가지 못할 것이다. 누가 누구를 만나 울며 여쭐 것인가. 자기 그림자에 무릎을 꿇고 울어야할 것이다. 아니 울지도 못하리라. 우리를 부둥켜 안아줄 아버지는 이미 계시지 않는다. 코스모스 흔들리는 쪽으로 가만히 흔들릴 뿐. /조길성 시인
순천만 갈대 /신현봉 순천만은 갈대 천지 해가 지면 게들의 세상 갈대잎 뜯어먹는 소리 얼마나 건강한지 그대도 이곳에 와서 한 번 드셔보시라 -신현봉 시집 <히말라야를 향하여>에서 인간도 자연의 하나이긴 하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인간은 자연을 주무르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다. 대부분의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욕망이 결국 자연을 망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자연에게는 가히 공포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지키려는 노력은 아무리 수고를 한다 해도 넘친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욕망이 제거된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건강한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순천만의 갈대밭도 그 중 하나이리라 /장종권 시인
쑥국 /김길나 푸드덕 찬바람을 털어내고 아침마다 한 쌍의 새가 날아와선 창문을 열라 보챈다 그래, 겨우내 움추린 내 몸 안에 봄이 오고 있음이야 나는 이 아침에 쑥국을 끓여 먹는다 버려진 둔덕에서도 밟힐수록 눈 밝힌 쑥이지, 아마. 쑥쑥 목구멍을 타고 국물로 흘러들어와 햇빛 한 아름 불러들이고 있음이야 아, 맛있다! 생기나게 하는 이 초봄의 쑥국 맛. 들녘에서 먼저 눈 비비고 깨어나 꽃샘추위로 고독을 달군 이 향긋한 내음이며 차가운 빗물이랑 해와 달과의 고적한 기억을 감춘, 혹은 그 견고한 사랑을 풀어내는 쑥국 맛 참 맛있다! -김길나 시집 ‘빠지지 않는 반지’ / 문학과 지성사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자연의 신비 앞에서 인간은 자유로운가. 어김없이 봄은 왔다. “밟힐수록” 더 단단해진 흙 속에서 내성을 키우며 싹을 틔우고, 보란듯이 “생기”있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쑥”. 양지 바른 곳, 좋은 곳만을 선택해 피어나는 꽃들과 다르게 “둔덕”에서 “꽃샘추위” 속에서 “고독”하게 견뎌냈을 “쑥&rdquo
공터 /최승호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1985) 말들이 넘쳐나고 있지요. 내 얘기만 합니다. 당신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할 말이 너무 많거든요. 그러다보니 당신과 나는 말의 거리만큼 멀어지고 있습니다. 나만 아프다고 나만 힘들다고 나만 괴롭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말을 늘어놓는 모두는 결국 나인 걸요. 공터는 아마 그런 역할을 하나 봅니다. 저 어렸을 적 공터도 그랬거든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고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을 멈추고 눈을 감고 공터의 중간 어디쯤에서 귀를 열어보고…
웅덩이 /이경호 비 그친 흙탕물이 하루가 지나 깨끗하게 떠올랐다 떠돌던 흙이 그 아래 곱게 가라앉았다 한세상 분탕질로 살았던 사람들 죽을 땐 저렇게 맑게 가라앉는다지 파란 하늘이 그 위에 스며들 만큼 깨끗해진다지 그 웅덩이 속 첨벙대는 사람 하나 곱게 떠오를 수 있을까 -시집 <비탈>(애지, 2014)에서 삶은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수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엄습하여 애가 탑니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을까 번민하다 한순간 못된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세상은 시궁창과 같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삶을 추구해도 쉽사리 불결한 지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때 악마처럼 속삭이는 소리는 포기의 목소리입니다. 정작 물러나 손 놓고 엎드려 쥐죽은 듯 고요해야 할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압니다. 자신들이 저질로 놓은 일들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이 진창에 밀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보다 겸손해지고 자숙하는 때 우리 모두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첨벙대며 불안에 떨기보다 차분히 세상을 응시한 채 보다 낮게 가라앉아야 합니다. 낮아지면…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민음사 1974년 9월 그렇게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한없이 메마른 가지는 물기라고는 흔적조차 없이 겨울을 지키며 숨죽여 있다가 언 눈물 녹여 마신 물기를 밖으로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보송보송한 솜털로 제 몸을 감추고 있던 목련이 드디어 입을 여는 구나 알아보자. 성급하게 커다란 이파리를 바람에 툭툭 제 무릎 아래로 내려놓고 있다. 연분홍 진달래 점점이 박히고 개나리 종알종알 지저귀는 봄, 그래 봄은 왔다. 팍팍하고 물기 없어 메마른 삶, 무거운 어깨 떨치고 가라고 환한 빛을 켜 칙칙한 발 앞을 비춰주는 봄이다. 연초록 싱그러운…
상자 X /강인환 택배 트럭이 도착한다. 닫혀 있는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모르는 기사는 경비실로 상자를 들고 간다. 상한 여름이 스티로폼 박스 안에서 슬슬 부패한 소문의 알을 슬기 시작하는 오후-. 기억 속으로 끝없이 기억 속으로 침몰하는 군함이 있다. 상자 X가 있다. 날 좀 꺼내다오, 그리고 제발 내 눈과 입에 가새표로 붙여 놓은 이 테이프를 떼어다오. -강인한 시집 ‘강변북로’ / 詩로 여는 세상 택배를 기다리는 마음은 즐겁다. 기쁘게 전달되기를 기다리며 먼 길 달려왔을 택배 상자. 그러나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경비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면? 더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부패해서 소용없게 된다면? 어쩌면 기억은 잊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티는지도 모른다. 소중한 기억들이 찾지 않는 택배상자처럼 기억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마치 단단한 군함처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한 그 기억들이. 어쩌면 절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발 좀 꺼내달라고, 우리가 가새표를 붙여 봉인해버린 기억들 다시 햇빛을 쬐이고 새롭게 기억하라고. /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