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젖은 /유병근 텃밭은 조금 더 키가 자랐다 빗소리를 먹고 하늘천 따지 사이에 살이 올랐다 건너편 밭둑의 송아지울음을 먹은 살이 올랐다 그녀 머릿결을 빗방울이 빗질처럼 빗어 내렸다 이랑과 이랑 사이 조금 젖은 송아지 울음이 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된 그녀 어깨 너머로, 저녁밥 뜸 들이는 연기가 젖어 있었다 --유병근 시집 <어쩌면 한갓지다>에서 젖다와 마르다 사이에서 우리는 산다. 그 사이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 말라야 할 것은 물론 마를 필요가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마른 것은 머지않아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늘 젖어 있어야 살아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생명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수분이다. 그래서 젖어 있음이 살아있다는 증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온 세상은 젖어 있음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산도 숲도 나무도 풀잎도 젖어 있어야 산다. 사람도 젖어 있어야 살 수가 있다. 몸만이 아니다. 마음도 젖어 있어야 살 수가 있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마음,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은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것이다. /장종권 시인
봄꽃들 /이은봉 자유농원 들마루 위에 쪼그려 앉아 지는 봄, 꽃들 주욱 펼쳐 든다 이 책은 소리 내어 읽어도,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난해하다 모가지 뚝뚝 잘린 동백이여 검붉은 네 머리통 위로 산벚나무 찢어진 꽃잎들 주루룩 흘러내린다 움푹진 땅거죽마다 흥건히 고이는 새하얀 핏물들…… 세상 환하다 눈 지그시 뜨고 푸르르 날아오르는 나비들의 날갯짓까지 황망히 읽는다 너무 가까워 잘 보이지 않는다 자유농원 들마루에 쪼그려 앉아 펼쳐 든 책이여 산벚나무 지는 꽃잎이여 모가지 뚝뚝 잘린 동백 꽃잎이여 희고 붉은 네 머리통에, 그만 내 마음 묻는다 남은 젊음, 남은 봄, 빛들 가슴마다 아픈 파 뿌리로 자라고 있다.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 / 실천문학사 책을 펼치면 문자들로 가득합니다. 그 문자들은 무엇일까요? 읽을거리입니다.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처럼 읽을 때만이 의미를 갖게 되는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연도 책이 될 수 있다고 시인은 흥분하고 있습니다. 자연이라는 책을 펼치면 거기에 온갖 꽃들과 벌 나비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기호들입니다. 아마도 ‘지는 봄’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인이 읽은 자연이라는 책의
깃발 /박철 아침이면 창문 밖 바라보이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깃발이 나부낀다 여인들이 이불을 턴다 참 극성스럽게도 턴다 격렬하게 흔든다 어떨 땐 옘병, 어쩌구 하며 백기를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아자! 어쩌구 하면서 홍기를 흔든다 그렇게 지난 밤을 털어내고 참 매몰차게도 문을 닫고 돌아선다 -박철 시집 ‘작은 산’ / 실천문학사 이불을 터는 일은 습관이다. 살비듬, 머리카락, 땀 등등 열심히 살아낸 어제를 정리하는 의식이다. 이불을 털지 않는 사람도 아침을 맞는 나름의 경건함이 있을 것이다. 이불을 터는 기분은 날마다 다르다. 삶이 늘 즐겁지 않듯이, 늘 우울한 것도 아니듯이, 오늘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깃발이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다가도, 하늘이라도 당겨오듯 큰 들숨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도 하는 것이다. 매몰차게도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인 것이다. 당신의 베란다에 나부끼는 깃발의 기분이 궁금하다./이미산 시인
/홍신선 컨테이너 간이함바집 뒤 공터에서 연소 막 끝난 헌 연탄재 치석 떼듯 떼어버리고 윗 것 밑으로 내려놓고 십구공탄 새 것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하나 생식기 맞춰 넣고 아궁이 불문 열어두면 머지않아 자웅이체가 서로 받아주고 스며들어 한통속으로 엉겨 붙듯 연탄 두 장 골격으로 활활 타오르리라 둥근 몸피 속속들이 푸른 불길 기어 나와 단세포 목숨처럼 탄구멍마다 솟구치리라 꿈틀대리라 왜 통합이고 통일인가 연탄불 신새벽녘 갈아보면 모처럼 너희도 안다 후끈후끈 단 무솥 안에서 더 요란스럽게 끓어 넘치는 뭇 사설의 뒷모습들. =================================================== ▲ 박병두 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지금은 연탄구이 음식점에서나 연탄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연탄을 들여놓곤 했다. 연탄불에 의지하던 시절에는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식구들이 서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곤 했다. 또 단칸방에 살던 가족들은 아랫목에 모여들어 단잠을 청하곤 했다. 연탄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다. 홍신선 시인의 ‘연탄불을 갈며&rsqu…
/세사르 바예흐 오늘은 정말 기분 좋게 행복하고 싶어진다, 행복하다는 것, 물음으로 가득 찬 세상을 무성하게 이파리로 거느리고 사는, 내 방의 창문을 있는 대로 활짝 열고, 미친 사람처럼, 성질대로, 마침내 나의 육체적 능력을 믿고, 거기에 기대고 어디 누가 나의 이 자연스런 자세에 대해서 시험을 해보고 싶으면 하라고 단지 소리쳐 청하고 싶은 마음, 청하며, 말하며, 왜 이리 내 영혼에 와 닿는 게 이렇게 많냐고 소리치고 싶은… -세사르 바예호 시집 '하얀 돌 위에 검은 돌' / 고려원 ========================================================== ‘정말 기분 좋게 행복하고 싶’은 일이 자주 있다면 좋겠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울고 싶을 때 맘껏 우는 아기처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몸이 시키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 행복은 스스로 되찾은 마음의 근원적 상태인지 모른다.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눈치를 보는 데 오래 길들여졌다. 스스로 두꺼워진 마음을 벗겨 볼 일이다. 발가벗은 아기의 마음으로 보는 세상, 소리치고 싶은,…
/설태수 파도치는 사연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섬이 차마 떠나지 못하는 걸까. 밤에도 몰래 떠나지 못하는 걸까. 끝없는 사연들을 다 듣느라고 저렇게 떠나지 않고 있다. 거친 파도엔 눈물 훔치면서도 도저히 떠날 기미가 없다. --설태수 시집 <말씀은 목마르다>에서 =================================== 사람은 제가 태어난 땅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다. 아무리 세상이 거칠고 삭막하다 해도 옮겨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세상은 기쁨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해마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낙원은 아니다. 낙원을 꿈꾸며 사는 존재이어야 비로 소 생명의 가치가 빛을 발하게 된다. 우리 사는 세상의 모든 소리와 빛깔과 향기들은 저마다 우리를 위해 독특한 가치를 선 물한다. 그 가치들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우리들의 생명 에너지다. 섬은 붙박이로 고독한 존재이나 거친 바다 속에서 그 바다와 이야기를 나누며 생명을 이어가는 우리들, 강력한 개인의 얼굴이다. 섬은 바다를 떠나면 섬이 아니다.…
/이상국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 한겨울에 뿌리를 얼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 바위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생이다 나는 지난겨울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 용산에 언 뿌리를 내리려다가 불에 타 죽는 걸 보았다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틈 -출처-이상국-뿔을 적시며-2012년 창비 =========================================================== 한겨울, 바위에 틈을 내기 위해서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얼린다. 그 얼린 뿌리로 조금씩 바위의 살 속으로 틈을 낸다. 얼마나 아플까? 자신의 뿌리를 얼리는 일이. 바위도 얼마나 아플까? 자신의 살을 조금씩 파고드는 언 나무의 뿌리가. 바위가 새삼 아름다운 건 이렇게 틈을 내주기 때문이다.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 사람들은 어떤가. 타인에게 틈을 내주기 싫어서 자신을 굳게 닫고 사는 것은 아닌지…. 더욱이 힘 있는 자들은 어떤가. 뿌리가 약한 자들에게는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고 오히려 메워버려 결국 나무를 말라 죽게 만…
/강형철 남대문 시장 쌓여진 택배 물건 사이 일회용 면도기로 영감님 면도를 하네 비누도 없이 이슬비 맞으며 잇몸 쪽에 힘을 주며 얼굴에 길을 만드네 오토바이 백미러가 환해지도록 리어카의 물건들 비 젖어 기다리네 영감님 꽃미남 될 때까지 가로수는 누가 볼까 팔을 벌리고 사람들은 우산 쓰고 찰박찰박 걸어가는데 불탄 남대문 오랜만에 크게 웃고 -- 시집 <환생>(2013, 실천문학)에서 ============================================================== ▲ 이민호 시인 우산도 없이 이슬비를 맞는 인생은 처량해 보입니다. 밤새 잡풀처럼 자란 턱수염은 어느새 거친 주름살을 비집고 희끗거립니다. 사금파리 같은, 오토바이 백미러에 비친 얼굴은 보지 않아도 조각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얼굴에 길을’ 만들었다는 구절에서 잠시 숙연합니다. 면도를 한다 해서 영감님 얼굴이 꽃미남이 될 리도 만무한데 더더욱 불탄 남대문이 웃을 리도 없는데 ‘젖는다’는 말 앞에 영감님의 지나온 길이 꾸불꾸불 눈에 선합니다. 신동엽의 시 ‘종로5가’에…
/최인수 비를 맞으면 그냥, 눈물이 난다는 아이 분별없이 좋았던 밤처럼 먼 곳의 그대가 비가 되어 내리는 눈물 같은 봄날. =================================================================== ‘편린(片鱗)’은 ‘한 조각의 비늘’이란 뜻으로, ‘사물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뜻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여러 편린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편린들 중 이따금씩 떠오르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한 편린 혹은 추억은 작지만 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시의 화자는 그리운 한 사람을 떠올린다. 비가 내리는 봄날에 ‘비를 맞으면 그냥 눈물이 난다는 아이’를 떠올리는 것이다. 심수봉의 노랫말처럼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기억 속에서도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편린 혹은 추억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시인의 길 찾기 여행의 사건과 추억을 더듬어 본다.…
/천선자 미움도 둥글려보면 모나지 않는다. 저기 좀 봐. 미움을 먹고 잘 자란 내 키가 담장을 넘고 있잖아. 둥근 세상 밖. 둥근 비행접시를 타고, 둥근 꿈속에서 본 둥근 별을 찾아서 둥글게 떠나. 둥근 달을 좀 봐, 둥근 토끼가 둥근 쪽문을 열어 둥근 머리를 내밀고 둥글게 반기네. 둥근 웃음이야. 수많은 둥근 별을 지나 둥근 우주정거장에 둥글게 착륙해. 둥근 세발자전거를 타던 둥근 귀를 가진 아이들이 둥근 무지개나무를 심어. 벌써 둥근 열매가 익어. 어른들의 둥근 마음을 찾아주려고 둥근 어린왕자를 데리고 둥근 지구로 돌아와. 둥근 놀이동산에서 둥근 회전목마를 타고, 둥근 컵을 타고 둥근 축구를 하다 둥근 농구를 해. 종일 둥글게 노는 아이들의 둥근 눈동자가 둥근 나무에 열리는 둥근 지구의 한 가운데, 둥근 자동차들이 둥근 얼굴의 사람들을 태우고, 둥근 광장을 돌아오잖아. 둥근 빌딩의 둥근 창문을 열고, 둥근 웃음을 지으며 둥글게 몸을 말아 가슴이 따스한 사람들 속의 나. --천선자 시집 <도시의 원숭이>에서 ============================================================== ▲ 장종권 시인 &lsq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