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진 감단지 속으로 함박눈이 내린다 어찔머리의 하얀 아이들 자박자박 눈길을 지나 곶감단지 속으로 들어간다 단지 속 화톳불을 다독이며 할머니 아이들을 기다린다 어찔머리의 버스가 길을 뭉개며 마을을 빠져 나간다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민음사 1990 차 멀미나 배 멀미만 있는 게 아니라 눈 멀미도 있는가 보다. 시인은 함박눈송이가 곶감단지 속으로 쉼 없이 나풀나풀 내리는 걸 바라보다가 어찔한 멀미를 느낀다. 하물며 하얀 아이들이 자박자박 눈길을 걸어 곶감단지 속으로 들어가고 발갛게 익은 곶감이 들어있어 밝은 단 지 속은 할머니가 화톳불을 다독이며 아이들을 기다리는 방으로까지 확대된다.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본 원경에 눈보라 속 비틀비틀 마을을 빠져나가는 버스조차 어찔머리를 느낀다. 그립고 아득하다.…
/유진택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 미세한 씨앗도 우주이다 각각의 삶을 분담한 정보들이 우주 속 인간처럼 씨앗 속에 가득 들어 있다 현미경을 통해야 훤히 볼 수 있는 미시의 세계, 그 속에도 길이 있고 생명이 있다 꿈틀대며 씨앗을 뚫고 나오는 줄기와 무작정 우주 밖으로 인공위성을 쏴 올리는 인간들. 무엇이 다르랴 그래, 딱 맞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 동그란 우주도 씨앗이다 -유진택 ‘날다람쥐가 찾는 달빛’ / 문학과 지성사 “둥글어지는 것.” 씨앗처럼 작은 것들의 보이지 않는 힘의 집합체, 우주의 질서는 둥글어지는 법을 익힐 때 가능하다. 수직의 관계는 상·하의 계열만을 남긴다. 계열 속에서 발생하는 힘의 논리는 힘센 자의 승리로써 끝난다. 누구나 발아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수평의 관계만이 더불어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남을 것이다. 존재를 유지시키는 생명의 근원적인 요소. 존재의 근본 바탕이 되는 ‘사랑’과 ‘이해’라는 씨앗을 저마다 모성과 같은 마음으로 대지에 뿌려야 할 일이다.…
속수무책 /조항록 도마 위에서 안간힘을 쓰는 광어를 어찌할까 이를테면 연민 때문인데 납작 엎드려 살아온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한쪽만 보고 살아 다른 한쪽을 외면한 것이 정말 죄는 아니지 않은가 저 살 속에 저며 있는 바다의 노래에 귀 기울이면 가시들의 일상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마지막 헤엄은 눈물 속을 헤매는 법이고 이제 속속들이 칼날이 닿으면 한 접시의 순결한 고백만 남을 것 모든 속수무책의 생애에 대해 오직 천사 같은 몸부림에 대해 -시와시 2013 가을 제16호/푸른사상 모든 약자(서민)들은 ‘도마 위의 광어’ 같은 존재다. 강자들, 권력자들, 혹은 갑들의 칼날에 베이지 않으려 안간힘 쓰면서도 처절하게 당하면서 산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못 배웠다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차별, 착취당하면서 속수무책 살아간다. 하소연 할 곳도 없고 기댈 언덕도 없이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마저 빼앗긴다. 밤낮 구별 없이 열심히 일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환경은 결코 좋아지지 않는다. 이런 불합리는 혁명이 아닌 한 시스템의 변화로밖엔 해소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정부(상부구조)의 마인드가 어떠하냐에 달려있다.…
우리들의 방주 /정원숙 수 세기 전에 불던 바람이 오늘도 보는 건 사시의 물고기가 인간의 눈동자를 훔칠 수도 있다는 것, 수 세기 전에 흐르던 강물이 오늘도 흐르는 건 인간의 배설물이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 기형을 낳고 기형을 기르고 있다는 것 긴 잠에 들기 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저질러온 불순한 기도를 낱낱이 적어 비둘기 발목에 묶어 우주 어딘가로 날려 보내는 것. 어느 날 비둘기 편에 날아든 편지에 지구는 이제 인간이 살 수 없는 천형지라는 사실이 적혀 있어 (중략) 누가 누구를 거느릴 수도, 누가 누구에게 명령할 수도, 불복종할 수도 없으므로 방주 밖은 침묵의 눈비가 천일 째 내리므로 우리들의 방주는 소금처럼 안전하지. 어쩌다 우릴 닮은 물상들이 방주의 문을 두드리면 살기 위해서든 죽기 위해서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존재가 되라고 말해주지 수세기 전에 있던 방주 한 척 우리들이 만든 티끌보다 가벼운 방주 한 척 가르랑가르랑 오늘도 떠 있는 건 지금도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가 흙이 아니라 물이라는 증거. 너희가 손에 쥔 많은 것들이 그 물이 일으키는 물거품에 다름이 아니란 반증 -2013년 유심 11월호 존재의 불안감에 떨수록 방주를 꿈꾼다. 시…
호수공원 /김순덕 동터오는 새벽 하얀 안개 살며시 기지개 펴는 호수 사랑이 숨 쉬던 길 원천 호 잔물결 고요히 소리 내어 사르르 웃어주면 거울 같은 호수에서 그리움을 건진다. 목이 긴 왜가리가 학의 춤 즐기는 호수 고추잠자리 풀잎에 앉아 풀꽃열매 속삭이던 기억들 보리수 수양버들 아지랑이 잎새 뒤에 호수공원 옛 길 추억이 아름답다. 수원생태교통축제 시편을 만나본다. 시인과 이십년 되었으니 겹과 겹이 지나갔다. 광교호수는 샤갈에 눈 내리는 호텔사이 잔디에서 시를 노래하고 밤새도록 눈 덮인 소리 없는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시인의 넉넉한 뱃심과 열정이 문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생태공원으로 거듭난 광교호수공원이다.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날, 시인은 호수에서 고요함을 발견한다. 고요함은 생각의 자유를 선사해주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안내해준다. 목이 긴 왜가리와 풀잎에 앉은 고추잠자리, 보리수 수양버들은 자연과 만나게 해주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일깨워준다.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하는 시이다.…
참새 떴다, 그물 풀어라 /이향지 몸 하나로 황금들판에 꽂혀 이 바람도 들이켜 보고 저 바람도 뱉어보고 얻어 쓴 모자에 참새 똥 떨어져도 눈 꿈쩍 않고 절렁절렁 깡통 흔드는 맛도 괜찮을 거라. 火木화목으로도 몹쓸 등뼈 곧추세우고 앞바람이 하는 짓거리 뒷바람이 하는 짓거리 두 팔 벌려 구경하는 맛도 괜찮을 거라. 아버지가 드러눕고 아버지가 썩어가도 단벌옷 해 기다리는 맛도 괜찮을 거라 못 그러안아 놓치는 밤도 괜찮을 거라. 바람배 불러 설사하는 맛도 괜찮을 거라. 참새 떴다! 그물 풀어라! 참그린에 풀어놓은 내 그릇들아! 참! -이향지 시집 <구절리 바람소리/세계사 1995> 허수네 아비는 들판이 제 집이다. 옷도 모자도 몸뚱아리조차 얻어 썼다. 앞바람도 뒷바람도 넉넉히 받아주며 아버지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어김없이 들판을 지켜왔다. 火木화목으로도 쓰지 못할 등뼈 곧추세웠으니 부실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무엇을 얻을 것인가. 바람도 숭숭 뚫린 몸을 제멋대로 지나다닌다. 절렁절렁 깡통이나 흔들어대지만 참새들은 오히려 온몸 똥 세례다. 우리네 인생이 저와 같은 것이어서 아버지가 쓰러지고 곁에서 썩어가지만 들판은 황금빛으로 어김없이 빛날 것이다. 거기…
꽃처럼 붉은 울음 /허형만 한하운은 문둥이가 아니다 뻐꾸기 소리에 청보리 익어가는 가도가도 서러운 내 고향 전라도 황톳길이 붉은 울음이다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땅, 전라도 오월 해거름 피를 토하고 쓰러진 땅, 전라도 밤 새워 울어도 다 울지 못한 가도 가조 황톳길 전라도 황톳길이 오늘도 꽃처럼 붉은 울음이다 문드러진 더러운 사상, 추잡한 이념 모두 잘라낸 한하운이 마침내 시인으로 묻힌 땅, 전라도가 붉은 울음이다 --허형만 시집 <불타는 얼음>에서 ▲ 장종권 시인 먼 과거가 아니다. 전라도를 이야기하려면 꼭 눈치가 보이던 시절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전라도인들의 자격지심에서였을 수도 있다. 고향을 애써 드러내지 않아야만 편한 나라가 있었다. 그게 나라일까. 치솟는 울분도 붉은 울음일 터이다.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과 황톳길은 붉은 꽃이다. 천형에 운 한하운, 천형을 노래하는 전라도, 붉은 울음이다. 붉은 꽃이다. 고향을 잊으면 어머니도 잊는다. 모국도 잊는다. 그러니 고향은 어머니이고 모국이다. 붉은 가슴으로 붉은 울음 울어 붉은 꽃 피워내는 고향이다. 전라도길은 왠지 붉다. 황톳길이어서 붉다. 장에 갔다 돌아오시는 어머니 옥색치마에 버선코에
편지 /심창만 추신 뒤에 내리기 시작한 싸락눈은 차마 동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편지는 십이월의 갯벌처럼 무거워 그대가 오기도 전에 길을 젖게 합니다 우리가 멀리 젖은 새처럼 떠돌 때 하루는 더디고 일 년은 이렇게 잔인하게 빠릅니다 전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서 집을 이루고 하루가 갑니다 어제는 이웃의 무허가 루핑집이 불에 탔습니다 그 작고 허술한 집에 그렇게 많은 연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기침 소리도 나눈 적 없는 이웃에 차마 탈 수 없는 사연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무너지면서도 자꾸만 집을 지어 보이던 여윈 기둥들, 마지막 눈을 감으며 마당으로 내려오던 파리한 지붕, 전하지 못한 것들로 더디게 더디게 종일 제 몸을 태웠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궂습니다 빗방울도 없이 다 적십니다 기침과 연기로도 전할 수 없는 이 미세함이, 이 고요가 어제 소방 호스에서 나오던 물줄기보다 더 사납습니다 언제쯤 그대 쨍쨍하게 젖어서 편지보다 먼저 불쑥 들어설 수 있을지요 출처 - 심창만 시집,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2012년 푸른사상 이 작품은 추신을 덧붙인 편지를 보낸 뒤에 미처 전하지 못한 내용들로 이루어진, 편지 이후의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싸락눈&r…
/위선환 이슬방울은 왜 납작하지도 모나지도 뿔이 돋지도 않느냐고, 구태여 둥글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다 당신은 여러 해를 걸었고 여러 해를 걸은 발부리가 닳아서 둥글해진 것 말고는 그런 다음에도 당신은 여러 해를 더 걸었고 여러 해를 더 끌려온 발뒤꿈치가 닳아서 둥글해진 것 말고는 아직도 당신은 여러 해째를 더 걷는 중이고 발뒤꿈치는 더욱 닳아서 맑아진 것 말고는 이슬방울이 둥글한 다른 이유가 있느냐고 묻다 그래도 돌아보지 않는지, 눈 동그랗게 떴다 -- 위선환 시집 『두근거리다』(문학과지성사, 2010) 이슬방울이 맑고 둥근 이유를 우리들의 인생 발걸음에서 해답을 찾게 하는 시다. 누구나 인생은 여러 해를 걸었고 걸은 발부리가 닳아서 둥글해지는 것, 여러 해를 더 끌려온 발뒤꿈치가 닳아서 둥글해진 것, 아직도 여러 해째 더 걷는 발꿈치가 더욱 닳아서 마침내 맑아진 것에서 이슬방울이 둥글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유랑자일 수밖에 없는 인생은 긁히고 상처받고 닳고 닳아 모서리가 사라지고 마침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시작과 끝이 하나로 만나 원을 이루는 그 영원한 시간 안에 우리도 원처럼 공처럼 둥글게 살아가야 하는 이슬방울 같은 존재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김태실 산이었다 풀이었다 흙이었다 여물을 되씹는 소처럼 우직한 자연이었다 그 자리에 들어선 건물, 아스팔트 길을 누비는 자동차 대신 오늘 우리가 걷는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행궁 동에서 차 없이 한 달을 살기로 한다 정조임금의 아버지 능행차 가듯 한 발짝씩 걸으며 효를 새긴다 바람을 가르는 자전거 위에 ‘사람이 반갑습니다’ 웃음 싣고 달린다 바람의 미소가 꽃잎 위에 머물다 가고 바람의 미소가 풀잎 위에 머물다 가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지를 뻗는 든든한 산이다 손에 손 잡고 일어나 함께 하는 풀이다 어머니 가슴처럼 따스한 고향의 흙이다 생태교통이 꽃피운 수원의 미래 세계와 손잡고 우뚝 선다 빛나는 별이 된다 시인은 영화예술협회 회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세상 만물이 4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물, 불, 공기, 흙이 만물의 기본 요소이며, 만물은 이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도시에서는 이것들 말고도 꼭 필요한 4원소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산, 풀, 흙, 효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 시의 화자는 바로 그 네 가지를 말하고 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