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선 길 건너 신축 공사장 굴착기 소리 뿌리처럼 뻗어와 20층 공중을 흔들어댄다. 바닥을 끌어내려 더 깊은 허공 만드는 소음과 분진 유목遊牧의 경로를 털어내듯 지하가 깨어나고 있다. 팰수록 명징해지는 구렁 위가 벼랑이고 아래도 벼랑인 세상을 딛고 서서 어쩌자고, 어쩌자고 나는 허공에 빨래를 널고 있는가. --채선 시집 ‘삐라’ / 한국문연 장소성에 있어 삶의 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 가지가 아닐까. 먹이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과 한곳에 터를 정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 대부분은 한곳에 정착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 사정으로 인해 떠돌이 삶은 계속되고 있다. 도시는 날마다 공사 중이다. 건물을 높이 올리기 위해 터를 깊게 파는 작업장 옆이라면 소음은 물론 강한 진동에 머리가 다 어지럽다. “유목의 경로를 털어내듯” 더 깊게, 더 높이 건물을 짓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얼마나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리려는 걸까. “지하가 깨어나”고 있다. 수십억년 잠들었던 지하가 허공이 되는 현실. “위가 벼랑이고/ 아래도 벼랑인 세상”. 사는 일이 “허
/신영진 어느 때부터인가 편의성에 함몰된 시대가 넓어지는 차도만큼 인도는 좁아져 곁자리로 밀리고 화석 연료인 옛 주검들이 뱉어내는 유령 같은 독연(毒煙) 속에 가랑거리며 신음하는 우리 몸과 환경 이제는 이 오염 고리 끊고 사람 우선이던 워낭 딸랑이던 그 시절처럼 자연 친근한 동력 찾아 숨 맑은 삶의 터전 가꾸어가자 자동차는 우리를 편하고 빠르게 이동시켜주지만 그에 따른 폐해도 큰 편이다. 자동차에서 내뿜는 가스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자동차가 달릴 때 소등과 진동은 많은 불편을 안긴다. 전 세계 자동차 대수는 급격히 증가해 1950년대만 해도 5천만대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4억대를 넘어섰다. 이처럼 많은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고 있으니, 이 시의 시인은 우리가 ‘유령 같은 독연(毒煙)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러 도시에서 자전거 도로가 놓이고 있다. 자전거로는 자동차의 속도감을 느낄 수 없겠지만 자전거 바퀴를 굴릴 때마다 자연도 살리고 우리의 건강도 되살릴 수 있다. 최근 시인은 “신의 나라”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경기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허만하 나는 골목길을 택했다. 골목에는 녹슨 양철 처마와 불빛 꺼진 꾸부러진 창과, 팔짱 낀 발자국 소리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신의가 있다. 골목 끝에 간신히 그곳만이 환한 가게가 있다. 잠드는 일을 태만이라 믿는 반질반질한 사과 알들이 베개 맡 책갈피처럼 잠들지 않고 있는 심야의 가게. 지워진 어릴 적 기억 속 풍경의 한 단면이 망각의 깊이 밑바닥에서 정다운 오렌지 빛 삼투압을 띄고 조용히 수면 위에 떠오르는 별빛 얼어붙는 겨울 하늘 골목 끝. -- 허만하,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문예중앙 2013 우리 곁에서 자꾸만 사라지는 골목이 그립다. 꿈속에서도 복기되던 어린 날들의 골목이 사라지고 있는 도시가 퀭하다. 골목마다 끓어 넘치던 따뜻한 밥냄새, 양파조림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서 환하다. 어느 날 걸었던 북창동 좁은 골목길이 기억에 남아 있다. 좁은 길이 구부러지고 구부러져 막다른 골목에 조그맣게 달려있던 가게, 가게 옆 한그루 나무가 깃발처럼 서있던 모습이 오래된 편지에 붙어있는 우표 같이 반가웠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발자국 소리 정겨운, 고만고만하게 마주한 집과 어깨를 나란히 한 집에서 튀어나오는 하루와 마주치기도 하는 좁은 골목은…
/신기섭 눈물을 흘릴 때 내 얼굴은 할머니의 얼굴 같다 입술을 내밀 때 내 얼굴은 외증조할머니의 얼굴 같다 먼 옛날 할아버지가 집어던진 목침에 맞아 이마가 깨진 할머니의 얼굴이 어느 날 내 愛人의 얼굴에 가을, 붉은 단풍이 든다 -신기섭 시집 『분홍색 흐느낌』(문학동네, 2006)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다. 화자에겐 할머니가 그렇다. 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언어들 또는 표정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영향을 주었던 그들이 떠나는 시절이다. 세월이 간다는 건 붉은 단풍이 들 듯 그렇게 붉게 내 마음을 물들이고 서서히 말라가버리는 것일까. 하지만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당시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리라. 영향은 얼굴에도 나타나고 말투에도 나타나고 행동에도 나타난다. 당신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까 생각해본다. 시인의 시에서도.
/박미경 떨어져 나리며 춤추는 몸짓이 가을이라 높은 하늘 가운데 바람을 따라 가로지르다 땅으로 흐르면 낯익은 언저리쯤 가라앉아 썩어 가는 것과 회귀에 대한 이야기로 끊이지 않는 숨이 차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굵은 몸뚱아리를 타고 올라 숲에서 익어가는 향기의 가지 끝이 되겠노라 그리하여 하늘을 날아 바람으로 돌고 있을 날개 아름다운 그녀를 유혹의 손끝으로 불러들여 깊고 깊은 정을 통하리라 천년이고 만년이고 변함없을 마침내 사랑으로 바라보고 기대하며 손 바빴던 모든 시간이 이때를 위함이었다. 가을이 되면 일 년 농사한 것을 기쁘게 갈아 추수하여 곳간과 이웃의 빈 곳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하나둘 소멸해간다. 이 시의 시인은 추락하는 가을에서 날개를 본다. 나뭇잎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굵은 몸뚱아리를 타고 올라 숲에서 익어가는 향기의 가지 끝이 되겠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아 오른 낙엽은 세상 곳곳에 정을 흩뿌릴 것이다. 대구대 국문과 출신이다. 시인은 경기도주부기예경진대회에서 착한 눈으로 20년 시간 속 낙엽과 대화하며 한쪽으로 뒹굴어 모아졌다.
/신미균 시커먼 홍합들이 입을 꼭 다물고 잔뜩 모여 있을 땐 어떤 것이 썩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팔팔 끓는 물에 넣어 팔팔 끓인다. 다들 시원하게 속을 보여주는데 끝까지 입 다물고 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간신히 열어보면 구린내를 풍기며 썩어있다. --포엠포엠 2013·가을 Vol,59 맛있게 찌개를 끓였는데 어째 국물 맛이 좀 이상하다. 냄비 속에 상한 홍합이 있다는 심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사건의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서도 아주 쉽게 꺼내보는 추론이다. 끓여보면 쉽게 입을 벌리는 홍합들. 하지만 끓여도 끝내 입을 벌리지 않는 검은 홍합이 있다. 그 놈이 범인이다. ‘구린내를 풍기며 썩어있’는 것들은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입을 열어 다 까발리면 본인도 속 시원할 텐데 찔끔찔끔 냄새만 풍길 뿐 끝끝내 입 다물고 있다. 이런 자들이 곳곳을 어지럽히고 있는 냄비 속 나라의 현상이다. 썩은 것들을 발본색원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인데 작금 그것이 참으로 난망이다.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2013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보았을 때 그 출발은 아마도 상대적 개념에서였을 것이다. 음양의 원리가 그렇듯이 세상은 크게 보면 이원적 상대개념에서 그 사유의 근원을 찾을 수도 있겠다. 이 상대적 존재들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가 사회의 가장 긴요한 문제일 수 있다. 조각난 파편들을 부지런히 연결시키려는 따뜻한 마음이 진하다. 그렇다고 무리하거나 무모하지도 않다. 오히려 헐렁하거나 자연스러운 자세이다. 그것을 지상과 지하를 부지런히 연결하려는 민들레에게서 배운다. 파편과 파편을 연결시키려는 작업은 일종의 소통 추구로 봄직하다. 세상이
/네루다 길가에 서 있는 자두나무 가지로 만든 매운 칼 같은 냄새,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 생기의 방울들, 달콤한 性的 과일, 안뜰, 건초더미, 으슥한 집들 속에 숨어 있는 마음 설레는 방들, 지난날 속에 잠자고 있는 요들, 높은 데서, 숨겨진 창에서 바라본 야생 초록의 골짜기: 빗속에서 뒤집어엎은 램프처럼 탁탁 튀며 타오는 한창때.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 민음사 ‘젊음’이란 말 참 좋다. 설명하지 않아도 당장 나의 후각으로 몰려온다. 손으로 만져진다. 입으로 귀로 눈으로 쏟아지는 저마다의 생생한 풍경이 있다. 젊음은 활기차고 풍요로운 생의 현장이다. 기분 좋은 상상이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금 젊음 자체인 것이다. 간절하게 그립다면, 젊음에서 한 발짝 비껴난 것이다. 젊다면 젊어서 좋겠다. 비껴났다면 추억의 창고가 그득할 것이니 잘 숙성되어 쓸쓸하고 달콤한 젊음이겠다. 육체의 젊음을 통과했지만 마음이 젊음에 머물러있다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내 안의 젊음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일 것이다. /이미산 시인
추파(秋波) /김순천 녹차 우려낸 찻잔에 낮달 띄워 마시는 오후 마음의 사립문 열어놓은 사이로 살짜기 들어와 추억 매단 사유의 긴 바지랑대 위에 파란 하늘 걸어놓고 그림을 그린다 흰 구름 멀어지듯 덧없이 흐르던 시간이 떡갈나무 넓은 잎 팔레트에 일곱 빛깔 물감을 실어 나른다 마침내 우듬지에 단풍이 든다 한 떼의 기러기가 난다 아! 동그마니 열리는 그리움 가슴에 들물로 온다 * 추파 :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 국어사전에는 ‘추파(秋波)’라는 단어가 두 가지 뜻으로 나와 있다. 하나는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은근히 보내는 눈길’이다. 가을 물결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내는 눈길에 비유한단 말인가. 그만큼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시의 화자처럼 가을에 녹차 우려낸 찻잔에 낮달 띄워 마셔보자. 마음의 사립문이 살짝 열리고 사유의 지평)이 넓어지면, 가슴에 가을이 물들 것이다. /박병두 시인
/서석조 고작 눈물 한 방울 한숨 한결이야 개미행렬에 가로놓인 티끌 한 점의 방책 이런 날 번갯불 일며 한 줄금 비도 내리는. 그래 선뜻 비 맞으며 비 맞으며 남루해 매듭풀 한 잎 한 잎 잣던 꿈이 얼마인지 네게로 가는 길마다 화살표만 그려져. --<바람의 기미를 캐다>(동방, 2013)에서 시인은 자기존재의 증명을 어떻게 확인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인생은 개미의 행렬과 같습니다. 그때 우리 앞에 놓인 장애는 우리를 남루의 지경으로 곤두박질치게 하지만 해결책 역시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삶을 매듭지게 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으로부터 지향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이민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