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척하지 마라 /유민지 물속에서는 살아 있지만 세상 속으로 오면 죽어 가는 것 아마도 제 세상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사람 사는 이치도 그리하여 고기 물 만난 듯 제 세상이 오면, 죽어 있던 오욕칠정도 희로애락도 숨을 구멍을 찾는 법, 잠시 누워 있다고 죽은 것 아니다. 죽음이란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저 생태가 동태가 되고 펄펄 꿇는 국솥에 들어가 비로소, 몸을 풀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동태의 마무리이다. 제 역할을 다하고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안식이다 영원한 삶이다. 사람도 제 앞에 놓인 운명에 순종하면 비로소 제 삶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위하여 죽은 척하는 일, 눈먼 자들이 판을 잡은 도심에서는 때로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유민지 시인은 가족을 위해 밥상을 준비하는 주부이기도 하다. 시인은 동탯국을 끓이다, 먼 바다에 살다 국솥으로 들어온 동태의 생을 떠올리며 사람의 인생을 생각한다. 다시 물속에 들어갔지만 활개를 펴지 못하는 동태, 동태는 죽은 척하고 있는 것일까? 국솥에 들어간 동태는 죽음이 아니라 안식을 맞이할 수 있을까? 펄펄 끓는 국솥에 들어간 동태를 바라보며 시인은 산다는 것이…
상강(霜降) /이상국 나이 들어 혼자 사는 남자처럼 생각이 아궁이 같은 저녁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단 말도 못했는데 어느새 가을이 기울어서 나는 자꾸 섶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뿔을 적시며>(2012년, 창비)에서 “아궁이 같다”라는 말은 낯설다. “굴뚝같다”라는 말이 기다려도 드러나지 않는 안타까움을 담았다면 이 말은 스스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대상 없는 사랑의 허전함을 오늘 우리도 아프게 겪고 있지 않은가. 그가 누구였든 가슴 속에 숨겨놓은 사람 하나가 상강 무렵이면 자꾸 떠오른다. 그래서 ‘제대로 사랑한단 말도 못했’다는 구절 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못내 서럽다./이민호 시인
저녁과의 연애 /강영은 저녁의 표정 속에 피 색깔이 다른 감정이 피었다 진다 보라 연보라 흰색으로 빛깔을 이동시키는 브룬스팰지어자스민처럼 그럴 때 저녁은 고독과 가장 닮은 표정을 짓는 것이어서 팔다리가 서먹해지고 이목구비가 피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여럿이 걸어가도 저녁은 하나의 눈동자에 닿는다 빛이 굴절될 때마다 점점 그윽해져가는 회랑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인이 되는 것이어서 미로 속을 헤매는 아이처럼 죽음과 다정해지고 골목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詩로 여는 세상’ 2013년 여름호 저녁은 ‘해질 무렵부터 밤이 오기까지의’를 이른다. 빛이 물러가고 어둠이 다가오는 사이의 시간이다. 경계의 시간은 낯설다.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 사이에 발생하는 심리적 갈등이 있다. 여기가 어딜까,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어디로 가야할까. 주변에 대한 낯설음과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 ‘팔다리가 서먹해’진다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다. 자신의 수족을 서먹하게 여기는 감정이란 얼마나 고독하고 불안한가. 시인은 꿈을 꾸듯 낯선 저녁과의 만남을 ‘연애’라고 표현함으로써 긍정적…
광교 호수공원에서의 하루 /강양옥 수원의 명물 원천호수 백조 배 타며 놀던 곳 모든 정서 밀어내고 문명 속에 앉아 있네. 오랜만에 나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네. 호수에 내리는 빗방울 옛 추억을 연주하고 아스라한 기억들은 호수 위에 떠 있는데 저린 마음 달래며 감탄 속에 걷는 올레길 차 한 잔의 여유 속에 문명이란 위대한 것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도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좋은 환경 자랑하며 새 이름 새 명소로 길이길이 보존하여 만인의 사랑받는 수원의 명소 2013생태교통에 참여한 시편을 만나본다. 수원갈비를 대표하는 본갈비와 삼부자갈비 근처에는 원천호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광교호수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새롭게 단장한 광교호수는 생태공원으로 우리를 반기고 있다. 주변에 꽃들도 피어 있고 달팽이도 있고 잠자리도 날아다니는 생태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추억을 떠올리고 마음의 짐들을 내려놓아도 좋을 것이다. /박병두 시인
트라이앵글, 뾰족한 소리를 내다 /서 희 이를테면, 해가 진다는 건 직선의 소리를 요구하는 일 삼각형 몸체를 가진 그녀의 균일한 몸은 언제나 날씬하다 만날 수 없는 선, 대각선을 잉태하지 못한 운명 속엔 홀수의 씨앗이 자란다 짝수를 채우지 못한 소리는 기우뚱 불안하다 똑바로 균형을 잡지 못한다 거꾸로 놓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져 소리를 만들지 못할 것 같다 선분들은 스테인레스 채 하나를 불러 뒤늦게 조우한다 대각선을 가진 꼭짓점들은 뾰족한 몸의 소리를 쏟아낸다 -- 계간 『시와미학』 2013 가을호 트라이앵글은 끝과 끝이 만날 수 없는 휘어져 서로 바라보는 선(線)이다. 하나인 듯 하나가 아닌 삼각형은 누군가의 울림으로만 서로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트라이앵글처럼 산다. 적당한 거리의 꼭짓점에 또 다른 나와 또 다른 타인을 두고 하나의 속성으로 살면서도 맞닿을 수 없는 차가운 삼각형을 그리고 산다. 마치 홀수의 씨앗처럼 짝수를 채우지 못할 때 스테인리스 채 하나를 불러 더러는 소리로 더러는 노래로 더러는 울음으로 만난다. 시인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트라이앵글로 흐르는 그리움에 누군가 소리를 울려주기를 노래하고 있다. 부정맥처럼 끊어질 둣 끊어질 듯 식
나는 화부 /신동옥 시커먼 불덩어리를 품에 안으면 나의 기차는 당신을 싣고 간다 당신은 모자를 까꾸로 뒤집어쓰겠지 모가지를 플랫폼에 늘어뜨리겠지 기차가 가네? 아파 당신이 태어나 내뱉은 처음 두 마디 당신의 웃음이 차창을 투과해 미루나무 너설에 감긴다 아파 뒷모습으로 달리는 기차가 있고 그림자도 펄럭펄럭 서산을 넘어요 나는 화부 -신동옥 시집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문학동네 029 화부 앞에는 항상 불덩어리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불덩어리의 생리와 그로 인한 기차 움직임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다. 본인이 화부임을 자처한다면 이는 분명 가슴이 뜨거운 남자이리라. ‘모자를 까꾸로 뒤집어써도, 모가지를 플랫폼에 늘어뜨려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차에 태우고 한없이 너그러운 남자,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태울 수 있는 남자, 아픈 사랑의 웃음으로 위안을 얻을 줄 아는 남자다. 불길을 유지해야 기차가 멈추지 않듯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듯 스스로를 화부라고 명명하는 자신감 넘치는 남자이다./성향숙 시인
내객 來客 /서영식 누런 쌀밥을 한 입 떠 넣고 삭은 깍두기를 씹는 밤 오득, 오드득 입 안에서 눈 밟는 소리 들려온다 산 입에 어찌 눈이 쌓였는지 누가 이 몸을 걸으려는지 눈 내리는 겨울 덕장 입 벌린 명태 속으로 걸어가는 싸락눈 같은 눈발이 눈발을 밟고 텅 빈 몸으로 드는 소리 같은 오득 오드득 눈발 성성한 입 속, 까마득한 거기가 덕장이다 --서영식 시집 『간절한 문장』(2009, 도서출판 애지) 눈(耳)이 혹사당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필두로 점점 우리는 두 눈을 제외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어릴 적 뛰어놀던 그 감각들, 소리들. 눈이 쌓이면 오드득 오드득 걷던 그 조용한 소리들과 차가운 느낌들. 눈(耳)은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고 쓸모가 없어진 감각들은 점점 퇴화되고 있다. 겨울, 입 안으로 들어온 깍두기가 눈 밟는 소리로 들린다는 화자. 눈발이 눈발을 밟고 명태 입 속으로 들어가는 파노라마. 언어들도 보는 것에 맞춰 적당히 적당히 사라지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보는 것을 제외한 모든 감각의 이미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의 힘을 믿는다. 따뜻한 문장들을 믿는다. 따뜻한 손님처럼 말이다. /유현아 시인
어디가신다요 /이외현 비 저리 내리는데 이른 새벽부터 어디 가신다요. 파도가 뒤집은 놀음판 화투장같은 비 들이치는데, 조반도 안 자시고 어딜 급히 가신다요. 술 마시면 개 되는 아랫방 주씨 밤새 고래 고래잡고, 지 마누라 패는 매 타작 소리, 정적을 찢는 신 새벽, 빗금으로 치는 회초리, 꽃잎 덩달아 하릴없이 지고, 퉁퉁 불은 개울물, 두리둥실 꽃배 타고 떠내려가는데, 근데, 아부지는 어딜 그리 말도 없이 간다요. 아부지 가신 길에 밥알 같은 꽃잎들 떨어져, 지게 지고 다시 오실 길을 환히 밝혀주는데. 집 나가신 울 아부지, 장맛비에 꽃잎 씻겨나가 길을 잃었나. 같이 갔던 꽃비만 되돌아와 팔랑팔랑 저리도 환하게 내리누나. -계간 리토피아 가을호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비하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좀 덜한 편이다. 태어나기 전 아버지의 뱃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또한 아버지의 손보다 어머니의 품에서 유년을 보냈기 때문이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머니라는 존재보다 그 의미가 가벼운 것도 아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쩌면 지난 시절 희생적인 어머니상에 대한 보상적 의
산숙 /백석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독거노인과 새터민,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등 우리 주위에는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시대 환경은 다르지만 백석은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들의 삶을 어루만졌다. 백석의 <산숙>에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숙소로 머무는 국수집이 공간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국수집은 나그네들에게 ‘따뜻한’ 곳이다. <산숙>의 화자는 고향이 아닌 타향에서 낯선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낯선 사람들, 즉 ‘목침’을 베고 누워 그 목침들에 ‘새까만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고충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따뜻해질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목침을 새까맣게 만드는 낯선 이들과 합일되는 것이다. /박병두 시인
휘파람 /이동주 사나이란 상처가 있어야지 손을 턴 휘파람 소리에 구름이 흘러간다 -이동주 시집/범우사 1987 가을아침 갑자기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이내 푸른 하늘이다. 흰 구름도 몇 점, 푸른 하늘을 떠간다. 이쯤해서 하늘이 낯설게 다가온다. 바쁜 일상, 언제 한 번 제대로 된 하늘을 맞닥뜨린 적 있었나. 그동안 하늘을 잊고 살았구나. 아마도 상처를 감추기에 급급한 나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일상의 삶 속에서 문득 손을 털고 휘익 휘파람을 불어제친다. 휘파람 소리에 하늘이 열리고 구름이 떠간다. 상처가 있어야 사나이지 푸른 하늘 아래 시인의 휘파람 소리 가득하다./조길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