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차 /강신애 낙엽, 낙엽 속에 파묻고 홀연 등불 켜고 빛바랜 얼굴 들추어 보았는데 미친 마음 미련한 황홀 따위 낙엽 속에 파묻고 으스러뜨렸는데 단단한 허공에서 뜯겨 쏟아져 내리는 노란 먼지 속, 뒹구는 이파리 몇 잎 주워 팔팔 끓여 마시면 우울증이 확 풀린다는데 세상에서 제일 쓸쓸한 차가 세상에서 제일 쓸쓸한 병의 즉효라니요 낙엽 때문에 앓고 낙엽 때문에 헤매다닌 몸 낙엽이 맑게 우려 일으켜주네요 -강신애 시집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시인동네 2014년) 한 마디로 낙엽이 병 주고 약주는 격인데요. 단풍철이 되면 낙엽으로 옷을 갈아입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난리가 나지요. 설악에서부터 땅 끝까지 방방곡곡 몸살을 앓지요.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니요. ‘미친 마음/미련한 황홀 따위/낙엽 속에 파묻고 으스러뜨렸는데’ 발길 멈추는 곳마다 꽃잎보다 고운 빛의 낙엽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요. 빛바랜 얼굴들이나 들추고 있었던 우울한 동공도 단풍빛으로 물드는데요. 왜 헤매인 여자가 아름답지 않겠어요. 낙엽 때문에 더 쓸쓸해 헤매다니던 여자. 쓸쓸한 병의 즉효라니 낙엽차 한잔 하실래요 당신? /김명은 시인
이브 /이건청 흙인 나를 밟아다오 아지랑이 언덕을 싸고 도는데 종다리 한 마리 솟구쳐 올라 푸르름 속에 소멸돼 버린다 흙인 나를 밟아다오 사과나무인 그대 뿌리를 내려다오 깊이 깊이 내려다오 내 가슴에 내려다오 깊이 깊이 내려다오 아지랑이 언덕을 싸고 도는데 종다리 한 마리 솟구쳐 올라 푸르름 속에 소멸돼 버린다 뿌리를 내려다오 내 가슴에 내려다오 깊이 깊이 내려다오 흙인 나를 밟아다오 에덴 동산은 기독교 정신의 궁극적 지향점이며 귀의처이다. 이브는 여성이고 어머니이기도 하다. 여성은 인간의 궁극적 모태인 점에서 대지의 흙이기도 할 것이다. 온갖 생명체가 발딛고 사는 근거지이기도 하고 생명체가 태어나는 발원지이면서 결국은 돌아가 묻힐 귀의처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샘솟는 분비물 속에서 생명의 힘을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어머니의 따스한 젖가슴과 자애로운 눈동자를 평생동안 잊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두고두고 어머니 품 안을 그리워하고 그 속에 안기고 싶어하는 본능은 그럼 면에서 파라다이스인 에덴 동산을 그리워하는 본성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박병두 시인·수원영화협회장
신호기 /박관서 그와 나는 두 가지만 이야기한다 붉은 등 푸른 등 벌써 삼십 년이 흘렀다 기차가 지나갔다 그와 나의 등허리를 밟고 바람도 지나갔다 푸른 등 붉은 등 미안하지만, 그와 나는 같은 꿈을 꾸는 것이다 -박관서 시집 『기차 아래 사랑법』(푸른사상, 2014) 시인은 철도원입니다. 그의 등을 밟고 무수한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시인에게 기차는 사랑이며 분노이며 미움이며 감동이며 행복이며 또한 불행일지도 모르겠네요. 붉은 등과 푸른 등 두 가지의 등만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무수히 떠도는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나날들이지요. 이렇게 기차 아래 철로에 등을 대고 사랑을 기다립니다. 삼십 년을 기차와 함께 지나온 시인은 여전히 두 가지 표식만을 가지고 꿈을 꿉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이 있다면 사랑이 있다면 두 가지 언어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서로에게 등을 기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런 하루를 꿈꿔봅니다. /조길성 시인
어머니는 오늘도 눈물로 낙타를 기른다 /구지혜 밤보다 더 어두운 낮이 내려온다 아득한 지평선 하늘도 구름도 사막이다 이따금, 낙타의 눈 밑 사행천이 젖을 때마다 사막이 몰래 환해진다 거기선 갈증으로 목을 축이며 서로의 사구가 된다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어머니 어머니, 그 긴 그림자 속으로 낙타 한 마리 걸어 들어가고 있다 -계간 리토피아 가을호에서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에 따라 천국처럼 행복할 수도 있고 지옥처럼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인생은 바라보기 나름이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세상일 수도 있고, 모래바람만 지독하게 부는 사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살다보면 힘든 일이 더 많다. 그 지난한 인생길을 포기하지 않고 헤쳐나감으로 해서 결과적인 기쁨을 얻고자 한다. 인생이 아무리 사막과 같다 해도 그 사막을 거침없이 걸어나가는 낙타와 그 낙타를 인도하는 절대적인 어머니가 그곳에 서 계시니 우리는 사막도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겠다. /장종권 시인
신작로 /박무웅 시작은 언제나 길이 없었다 무지개가 서린 하늘 산 너머 먼 바다 손으로 잡을 수 없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새벽노을보다 아름다웠다 꽃샘바람이 빗질한 자리에 홍매화 새순이 여문다 오월에 뿌리내린 아카시아가 가시를 가득 품고 있다 길을 걸어간다는 것 평생 자신의 몸을 들락거리는 나무들의 계절처럼 툭툭 불거져 나오는 새 길 먼 옛날 신작로 앞에서 느꼈던 그 두근거림 -박무웅 시집 〈지상의 붕새〉, 작가세계 ‘신작로’라는 단어는 향수鄕愁가 되었다. 지금은 시골까지 포장이 되었지만, 오래 전 신작로는 대처로 향하는 꿈의 시작이었다. ‘시작은 언제나 길이 없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사방이 길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꿈을 가진 삶은 어디로든 길을 낼 수 있고, 또한 내야만 한다. 삶은 움직임의 진행형이다. ‘손으로 잡을 수 없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새벽노을보다 아름다운’ 이유이다. 봄의 나무들이 온몸에서 ‘툭툭 불거져 나오는 새 길’을 내듯이 신작로 앞에 서면 느꼈던 두근거림, 그 젊음이 문득 그립다. /이미산 시인
중독 /김은경 블랙커피 두 잔 불 탄 꽃잎이 빚어낸 맑은 소주 반 병 멀미 진정 효과가 있는 750밀리그램 수면제 마땅히 백년 치의 우울을 치유할 당신 - 김은경 시집 『불량 젤리』(삶창, 2013) 블랙커피가 담긴 잔을 옆에 두고 시를 읽어요.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는 계절이 오면 스스로 우울해져요. 삶은 우리에게 기쁨도 주고 희망도 주지만 아픔도 주고 절망도 주지요. 어느 누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했다지만 사실 아프면 정말 힘들어요. 그럴 땐 술도 수면제도 다 필요 없어요. 무심한 듯 옆에 있는 당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당신, 슬며시 손 잡아주는 당신, 내가 울 때 함께 울어주는 당신, 당신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당신이 곁에 있어줄 거라 믿어요. 잊지 않겠습니다. /조길성 시인
비오는 날의 꽃집 /서경온 마네킹이 물방울 무늬의 비옷을 입고 있는 혜화동 로터리 분홍 립스틱을 칠한 그녀가 걸어간다. 어두운 대낮의 하얀 비안개 입김 속에 화려하게 피어나는 불 켜진 꽃집 노랑 우산을 든 그녀가 지나간다. 버스 창 밖 거센 빗줄기 사이로 점점 아름다워 지는 마네킹의 각선미 물 먹은 돌이 살아나듯이 거리에 던져진 한 다발의 미소처럼 비오는 날의 꽃집은 황홀하게 피어난다. 문화 가 - 00224<일간> 2002년 6월 15일 창간 온 누리에 어둠이 내릴 때, 별이 빛나듯, 비 내리는 지상에서 꽃들은 비로소 제 빛깔을 찾는다. 살아갈수록 자신의 삶이 비본질적인 것에 의해 잡식당하고 있다는 가벼운 피해의식, 의기소침해지는 그런 때, 우리들 마음에도 소리없는 비가 내린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빗줄기 속에, 생각의 우산을 들고, 일상의 버스정류장에 서있는 외로움이 때때로 어떤 위기감으로까지 다가설 때가 있다. 유리벽 안의 꽃들이 머금은 황홀한 미소를 바라보는 순간, 필자는 말해지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꽃들은 하나의 이데아로서 눈부시게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쳐가는 행인들보다도 더욱 활달한 듯싶은 마네킹의 걸음걸
산란기 /이태관 강의 하구에는 어둠으로 몸 불리는 물고기가 산다 달빛 아래 잔비늘 반짝이며 제 몸에 꽃나무 심어 위장할 줄도 아는, 낯선 새 날아와 부리 비비면 간지럼에 몸 뒤척여 웃음소리도 강물에 풀어놓으며 바다를 거슬러 오르는 우어처럼 한 번쯤 몸에 새겨진 물길을 바꾸어 보았다면 물살에 온몸 찢겨 본 일 있다면 바람의 끝닿는 곳을 알리 몸 부풀린 놈, 물이 범람하면 제 알을 풀어놓으며 바다로 간다 가끔은 우리 마음에도 물결이 일어 긴 한숨 끝에 아이를 잉태키도 하지 떠밀리는 고단한 삶 위로 붉은 해 솟기도 하지 하지만 지금은 건기의 시간 철새 빈 몸으로 떠나고 가슴에서 자라난 몇 개의 욕지거리와 비밀과 사랑과 시를 강물의 끝자락에 풀어놓는 밤 메마른 바닥을 핥는 물소리 가슴을 친다 -『사이에서 서성이다』 (문학의전당, 2010) 산란은 생명의 축제 시간이다. 잉태를 위해 오랜 인고의 시간이 마지막 절정으로 몸과 마음이 치닫는 시간이다. 생명과 생명의 연장선을 잇는 작업은 황홀하고 비늘 번뜩인다. 우리도 그 산란의 시간을 위해 오늘이란 슬프고 긴 낭간을 지나기도 한다. 때로는 숨죽인 듯 오랜 침묵으로 일관한다. 물고기의 산란은 휘황찬란하다. 달빛에 수면을…
立春 /이인원 새잎 돋아날 때가 되도록 악착스레 들러붙어 있는 쭈글쭈글한 은행알 두 쪽 꼭 늙은 물건 같다 추레한 겨울의 아랫도리를 샅샅이 까발려 내려는 듯 치욕적인 입춘 날 햇빛이 힘없는 사타구니를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아니다, 저 물건 속에 꼬깃꼬깃 담보 되어 있는 가장 확실한 회춘의 방식을 잠깐 이해하지 못했던 노골적으로 꼴통인 내 머릿속에 한참 쪼여주고 싶은 방사선 같은 저 햇빛! -이인원시집 〈궁금함의 정량/작가세계〉 쭈글쭈글한 은행알 두 쪽을 늙은이 거시기에 달린 물건으로 생각한 시인은 입춘의 햇살을 치욕으로까지 여긴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모든 다른 은행알들은 누군가 따서 식용으로 약용으로 가져가고 생식의 기회를 놓쳤음을 포착한다, 생식의 희망이 남은 건 오히려 쭈글쭈글한 은행알 두 쪽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입춘〉하고 한글로 써도 될 제목을 한자로 쓴 것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立春의 立은 설립이다. 선다는 뜻이다. 그것도 봄과 함께 꼿꼿이. /조길성 시인…
호랑가시나무 /이영식 바위에 칼을 갈고 있었다 아니, 칼날 숫돌 삼아 바위를 갈고 있었다 갈면 갈수록 무뎌지는 칼날 갈면 갈수록 날을 세우는 바위 바윗돌 갈아 거울을 빚어내려는 바람이 있었다 수수만년의 고독, 잎을 갈아 호랑이 발톱을 짓고 있는 가시나무 아래서였다 -이영식 시집 〈휴〉, 천년의 시작 호랑가시나무는 육각 꼴의 잎 결각 끝에 붙은 날카로운 가시가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랑이가 이 나뭇잎에 붙은 가시로 등을 긁는다 하여 ‘호랑이 등 긁기 나무’라고 부르다가 ‘호랑가시나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나무가 오랜 시간 ‘잎을 갈아 호랑이 발톱을 짓고 있는’ 이미지로 창조했다. 어디 식물뿐이랴. 바위를 조금씩 ‘칼로 갈아내’고 있는 듯한 바람. 그것은 바람의 오래된 삶이다. ‘바윗돌 갈아 거울을 빚어내’려는 수수만년의 고독! 나무, 바위, 바람, 사람 등등, 저마다의 고독한 생을 건너가는 중이다. 고독의 중심엔 염원 하나씩 자라고 있다. /이미산 시인